태백산에서 발원한 물은 봉화군 금봉리 계곡을 지나 유곡리 닭실마을을 궁(弓)자형으로 감싸고 흐른다.
일찍이 조선중기 문신으로 예조판서까지 지냈으나
기묘사화(1519)때 파직되어 내려온 권 벌 (權 橃1478-1548)을 도와
아들 권동보(權東輔:1517-1591)가 청암정을 조영하는데 기여했고
이어 자기 자신만의 수신 처로서 석천정사(石泉亭舍)를 지었다.
석천정사는 부친 권벌이 초기 터전을 삼은 곳에 맏아들 권동보가 정사를 신축하고 별서로 삼은 셈이다.
청암(靑巖) 권동보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1536년 향시와 15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벼슬길에 올라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분이다.
아버지 권벌이 1547년 윤원형등의 소윤일당을 비난한 양재역 벽사사건(良才驛壁書事件:丁米士禍)에 연루되어
삭주(朔州)로 귀양가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두문불출하여 살았다.
동보는 1564년 선친 등의 묘소를 수호할 추원재(追遠齋)와
1588년 사림과 안동부사의 도움을 받아 부친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건립했다.
그는 암천세고(巖泉世稿), 청암난고(靑巖亂稿), 청암일고(靑巖逸稿)란 책을 남겼다.
암천세고(巖泉世稿)에서 권동보의 묘갈명을 지은 미수 허목(米壽 許穆 :1595-1682)은
권동보의 만년에 대해“
시내위에 집을 지어 석천정사(石泉精舍)라 이름 하였고,
산속에 거연헌(居然軒)을 두었는데 모두가 천석(泉石)이 있는 곳이었으며,
음악을 좋아하여 평소에도 사죽(絲竹)이 그치지 않았으며 늘 읊조리면서 스스로를 즐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석천정사(石泉精舍)란 현판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 송일중(松齋 宋一中: 1632-1717)의 글씨이며,
추녀 끝에 있는 수명루(水明樓: 물맑은 행실과 덕행을 후대에 퍼트림)와
계산함휘(溪山含輝: 시내와 산이 빛을 머금음)는
철종때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송벽 이정신(李正臣: 1792-1858)의 글씨이다.
계곡입구 “하늘위에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의 청하동천(靑霞洞天)은
동보선생의 4대손 권두응(權斗應 1656-1732)이 새겼다.
(해리티지채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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