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평택시 무봉산 만기사(舞鳳山 萬奇寺)

하늘타리. 2014. 3. 3. 07:40

 

   만기사는 고려 태조25년(942년) 현 위치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동천리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확실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만기사에 고려시대의 鐵佛이 남아있고,

신라 말 고려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석탑을 비롯한 석등, 석불 등의 석재가 산재하고 있어

최소한 고려시대에는 창건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 이후의 기록도 자세하지 않다.

조선 헌종9년(1843년) 작성된 <진위현읍지(振威縣邑誌)> ‘불우조(佛宇條)’에는 만기사에 대하여,

   “무봉산(舞鳳山) 아래에 있다. 절 북쪽에는 돌구멍에서 맑은 샘물이 나오는데 맛이 아주 달고 차다.

옛날 세조대왕이 이 절에 수레를 멈추어 놓고 우물에 나아가 물을 마셔보고 하교하기를

‘이 우물은 감천(甘泉)이니 감로천(甘露泉)이라고 하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 어정(御井)이라고 한다.”

라는 기록이 있다.

 

한편 <기내사원지(畿內寺院誌)>에서는 이 기록을 근거로 하여 세조 때 중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조선시대의 만기사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여지도서(「輿地圖書)>와 <가람고(伽藍攷)>에서는 절이 위치한 산인 무봉산(舞鳳山)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을 뿐

절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이밖에 보국사 창건문에 만기사가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볼 때 만기사는 커다란 사찰은 아니었으나

조선시대에도 계속해서 법맥을 전해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만기사는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 19세기 말 원래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하나

옮겨온 이유는 알 수 없다.

옛 절터에는 일부 유지(遺址)가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1980년대부터 수풀로 뒤덮여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만기사(萬奇寺)가 현재의 사격(寺格)을 갖추게 된 것은

1972년에 들어와 김혜송(金慧松) 주지가 대웅전을 비롯하여 삼성각과 요사를 중건하여 면모를 일신하게 되면서부터이다.

1974년에 들어와서는 서요사를 중건하였다.

1979년에 동요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이듬해인 1980년에 동요사를 확장하여 중건하였으며,

1981년에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1994년에는 기존의 대웅전을 대신하여 새로이 대웅전을 조영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삼성각, 감로당, 심우당, 공양간, 종루 등이 있다.

지정문화재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보물 제567호)가 유일하다.

대부분의 건물이 최근에 새로 신축한 것들이어 고색창연한 맛은 찾아보기 힘들고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조여래좌상만이 절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중앙에 불단을 마련하고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좌우에 문수·보현보살 모셨다.

현재의 대웅전은 1994년에 기존의 대웅전이 있던 터전에 새로이 조영한 것이다.

 

   정면 어간에는 ‘大雄殿’이라 쓴 검은 바탕에 금색으로 글씨를 새긴 커다란 현판을 걸었다.

현판의 글씨는 1994년 4월 8일에 김현중(金顯中)이 썼다.

정면 기둥에는 다음과 같이 한글로 쓴 주련을 걸었다.

   둥글고 가득 찬 지혜의 해

   온갖 것 두루두루 비치며

   캄캄한 번뇌 없애버리고

   모든 중생들 안락케 하는

   여래의 한량없는 그 모습

  어쩌다 이 세상 오시나니

 

측면 동측에는 신중탱을 모셨으며, 반대편 서측에는 감로탱을 걸었다.

 

평택 만기사 철조여래좌상(平澤 萬奇寺 鐵造如來坐像)  
   보물 567호. 소재지 평택시 진위면 동천리 548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조계종 사찰인 만기사의 대웅전안에 모셔진 고려 초기의 불상이다.

 광배(光背)와 대좌는 사라지고, 양손과 오른팔도 따로 떨어졌다.

현재의 불상은 양손과 오른팔을 접합하고 금(金)으로 개금(改金)하여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되었다.

   불상에는 나발(螺髮)의 머리에 둥글고 큰 육계가 얹혀져 있다.

갸름한 얼굴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으며, 반쯤 뜬 눈과 가름한 코, 근엄하게 다물고 있는 입, 뚜렷한 삼도(三道) 등 이목구비가,

나말 여초의 강건한 호족(豪族)의 기상에서 점차 귀족화되어 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느끼게 한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을 하고 있으며,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왼쪽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어깨 위에서 4단을 이루며 한번 겹쳐졌고,

왼팔로 흘러내리는 옷주름은 밀집되게 표현하였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가 142.5cm, 어깨의 폭이 58cm, 무릎 폭이 92cm이다.

 

   철불(鐵佛)은 시기적으로 나말 여초 시기인 9세기 중엽 이후 호족세력이 대두하고 선종(禪宗)이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만들어진 불상이다.

만기사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나말 여초의 철불 중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여래좌상 보다 제작 연대가 늦고 규모도 작다.

규모면에서는 훨씬 크지만(288cm) 시기적으로는 비슷한 경기도 광주의 춘궁리 철불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이 강하고 단단한 근골, 강한 눈매, 강건한 기상에, 9세기 선종과 함께 유행한 비로자나불의 형식을 갖췄는데 비하여,

춘궁리 철불과 만기사 철조여래좌상은 10세기에 나타난 항마촐지인의 수인(手印)에 석가여래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고,

기상이 많이 부드러워진 점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수인은 이 철불의 조성 시기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라는 시대적 배경과 관련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평택문화원)

 

삼성각(三聖閣)

   대웅전 동쪽의 한 단 높게 마련된 대지 위에

팔각형 평면의 삼성각이 있다.

칠성(七星)과 산신(山神), 그리고 독성(獨聖)을 모신 전각이다.

삼성각으로서는 드물게 팔각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자연목의 형태를 살린 기둥과 변화 있게 꾸민 창호의 모습 등이 독특한 풍격을 자아내는 전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