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어시장을 둘러보고 논골담길로 올라갑니다.
이렇게 한줄 짧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묵호라는 이름에서 읽키는 그 암울함.
묵호라는 이름부터가 조선조 후기 순조 때
이 마을에 큰 해일이 일어나 집이 떠내려 가고 생업의 수단인 배까지 파손되어
이 곳 사람들의 굶주림이 극심하게 되자
이를 구제하러온 이유옹 부사가
물도 검고 바다도 검고 물새도 검으니, 먹 墨(묵)자를 써서 묵호(墨湖)라고 하였답니다.
그뿐이 아니고 사람들이 못먹어서 얼굴이 다 거멓게 죽어있었을 겁니다.
1941년 태백산지에서 생산되는 석탄을 수출하기 위해 항만건설을 시작했으며,
1947년 8월에 개항장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러다가 인근 바다에서 오징어를 잡기 시작했고
오징어잡이 배타는 사람, 부두에서 하역하는 사람, 그를 따라온 가족들
그렇게 북적거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리고 묵호항에는 등대마을이 있습니다.
묵호등대를 중심으로 어민들이 오밀조밀 살아가는 산동네입니다.
묵호등대는 1963년 첫 불을 밝혔습니다.
산동네 주민이 바닷가 모래·자갈을 등짐으로 져 날랐고
품삯으로 밀가루 배급권을 받았습니다.
등대가 온 동네를 먹여 살렸습니다.
태백산지에서 나오는 석탄이 모두 묵호항에 모이던 시절,
석탄 가루로 먹빛이 된 바다에선 오징어도 많이 잡혔습니다.
석탄 산업이 저물고 묵호 바다에 고기가 줄면서 산동네엔 하나둘씩 빈집이 늘었습니다
소설가 심상대는 그의 소설 '묵호를 아는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전의 묵호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흥청거렸다.
산꼭대기가지 판잣집이 다닥다닥이어졌고
아랫도리를 드러낸 아이들은 오징어 다리를 물고 뛰어 다녔다.
그리고 밤이면 오징어배의 불빛으로 묵호앞바다는 유월의 꽃처럼 현란했다."고요
어시장의 시설만 조금 개선되었을 뿐
그 당시의 그 처연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묵호와 북평이 합쳐 동해시가 되었어도
묵호는 그 모습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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