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한강 1300리를 걷다. 9차-1. 김포 고촌에서 애기봉

하늘타리. 2013. 11. 25. 17:50

 한강 1300리를 걷다의 마지막구간을 걸었습니다.
전구간 완보자들이 느끼는 감흥에야 비할 수 있겠습니까만

내 나름 추억의 장소를 다시 밟아 볼 수 있어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출발점을 함께 나섰고...
서울에서 나고 자란 어릴 때와 학창시절의 추억이 어려 있는 여주, 남양주, 양평 등의 구간을 함께 걸었고...
1980년과 1986년의 기억이 있는 김포반도를 걸어 강화로 넘어가려 합니다.

 

23일의 새벽, 양재역 12번 출구로 나가 오늘의 모임장소로 갑니다.

 

 

 

눈이 마주치는 몇몇 분과 인사를 한 후 버스에 탑승
지나치는 한강변 다리를 봅니다.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있는 김포대교를 지나고

굴포천과 대보천이 만나 한강으로 들어가는 신곡수문옆을 지나

78번 지방도, 일명 한강제방도로변 주유소에서 차에서 내립니다.

 

지금까지 온 방향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걸어가야 할 방향

 일단은 우측에 철조망을 끼고 78번 지방도를 따라가야 할 겁니다

78번 도로는 아주 예전에...48번국도 확장전,

김포 강화간 도로 부분 부분 병목현상으로 인해 길이 막힐 때

강화대교 까지 순탄하게 갈 수 있는 숨겨진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팔자가 숨겨진 팔자인지

48번 도로 확장 후에는 전호 IC부근에서 빠져 나온 차량 몇 대가

홍도평 초소 앞에서 좌회전 하여 김포시청 가는 길에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철조망이 보기 싫어 꼭 필요하지 않으면 이용하질 않는 것이지요.

 

팔자라고 하면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기 바로 전에 지나온 굴포천처럼 기구한 팔자가 있을까요.

굴포천은 인천시 철마산에서 발원하여, 부천시를 지나 부평평야를 이루고,

계양을 거쳐 김포 전호리 평야를 지나 신곡리 경계에서 한강으로 들어갑니다.
이 노선을 따라 운하를 파겠다는 권력자가 역사적으로 계속 있어 왔습니다만

항상 그 권력자의 끝이 아름답지 않았지요.

 

800년 전 고려 후기 고종 때 무신정권의 실권자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가

전호리에서 부터 계양면 상하리까지 운하를 팠습니다.
그래서 계양면에서 전호리까지의 하천의 이름이 굴포천입니다.
원래 있던 하천이 아니라 굴포작업으로 만들어진 하천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던 중 무신정권이 몰락하면서 최이가 권세를 잃자 후속 공사가 중지되었습니다.
그로부터 한참 후 조선 중종 때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이곳에 운하를 파다가

그 역시 죄에 몰려서 죽는 바람에 중단되었습니다.


근래에 와서 1988년 노태우의 선거 공약을 시작으로 굴포천 치수대책이 수립 되고

이 사업을 ’경인운하 건설 사업‘으로 변경하여

현대건설 등 8개 업체가 민간 투자 사업체로 지정되고 정부의 사업비 일부 투자로 운하 건설이 추진되었으나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환경 단체의 반대와 감사원의 경제성 과장 등의 지적으로 사업 재검토가 결정 되면서

2004년에 공사가 중단되었었지요.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경인운하 재추진 계획을 발표하고 다시 사업을 착수 하게 됩니다.
경인운하는 ‘경인 아라 뱃길’로 이름을 바꾸고

이 수로를 국가 하천 ‘아라천’으로 지정하였고

민자 사업에서 공공사업으로 전환하여 사업시행자를 한국수자원공사로 변경하고 재착공 한 다음

드디어 2011년 10월에 모든 공사의 완공과 더불어 인천과 김포의 여객 터미널을 개장하고 시범 운행을 하였으며

2012년 5월에 정식 운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경인 아라뱃길의 시발점인 아라해상갑문과 아라 김포여객터미널이

김포 전호리와 서울 개화동 경계부근에 설치되어 있습니다만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건지 어떤지는 안개 속에 가리어져 있습니다.

 

앞으로 가야하는데... 지나온 길, 그것도 걷지도 않고 버스로 훅 지나온 길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무어라 부르는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우리가 내린 곳 부근을 영사정입구라고 했습니다.
영사정이라 하면 강 건너편 고양에 있는 영사정이 유명하지만

이곳은 남원 윤씨 묘역으로 16세기에서 부터 19세기까지의 석물 즉 묘표, 문인석, 망주석, 석양 등의 석물이

시대별로 어떻게 양식이 변화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고

김노, 한호, 송시열, 윤덕준 , 윤봉오 등 당대 명필의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묘역 입구의 정려각에는 11명의 정려중 6명의 정려문이 남아있습니다.

 

바쁘니 이곳도 패쓰할 것이고...


자 출발합니다.

 

출발하자마자 공사판을 만납니다.

 

희귀조류 탐조구역 중 이곳은 겨울의 진객 재두루미 도래구역이라고 탐조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오겠지요

 

 
길가 어느 집에서 김장을 하고 있습니다.

 참 우리 집 김장도 이번 주 한다고 하던데...
먹을 입은 없어도 한해의 통과의례니까 해야 한답니다.

 

옛 석골나루 인근 야산에서 해가 뜹니다.

 

해는 아까 떴는데 지금 보이는 것이지요.

 이 지독한 내 중심주의...
내가 보기 전에 뜬 해는 떠 있어도 떠있는게 아니라는 이야기...

 

흔적도 거의 없는 옛 나루터를 지나갑니다.

 

 

철조망 옆을 따라 길을 걷습니다.

 

 

 

 

 

왼쪽도 오른쪽도 모두 철조망

 그사이로 도로가 지나갑니다.
우리가 걸어서 지나갑니다.

 

갈림길 왼쪽으로 가면 78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는 계속 철조망이 쳐져 있는 제방도로, 일명 금포로를 걸어가는 길입니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도로변에 철조망을 쳐 놨으니 철조망을 보아 줍니다. 

 

그리고 철조망 안도 보아줍니다. 

 

그 안에서 여유를 즐기는 물오리 떼들

 

물오리들이야 이안에서 낮이나 밤이나 여유롭겠지만  

 

해가 질 무렵 이 철조망 안으로 진입해서 어두운 밤을 보내는 초병들에게는 참으로 긴장된 장소일겁니다. 

 

어느 지역 경계초소가 덜 긴장되겠습니까만

이곳 향산리 강안은 1978년도에 충남광천지역으로 침투한 공비가 복귀한 지역이라

긴장의 강도가 더욱 심할 겁니다.

 

 

지방도가 끝났나?

 

길을 반을 잘라 철조망을 치고 도로를 구분해 놨습니다.

 

아마도 철조망 안에서 작업하는 차량을 위한 통로인 듯 합니다만

공용도로를 이렇게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맑은 날이면 강 건너 심학산이 보여야 하는데

물안개만 자욱하여 철조망만 돋보입니다.

 

 

 

 여기에 다리가 있었나?

 

다리가 아니고

김포한강로에서 김포한강신도시로 들어가는 인터체인지를 만들면서 회전공간을 두다보니

강변으로 삐져나와 교각을 설치한 것이지요.

철조망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교각이라도 반갑게 느껴집니다.

 

잠시의 휴식후 다시 출발

 

 

 

여기는 홍도평초소앞 신향산 삼거리길.

김포시청으로 가려는 분은 여기서 좌회전하세요.

 

일산으로 넘어가는 일산대교를 보고 갑니다.

 

 

 

일산대교 아래를 지나고

고개를 둘레둘레 돌려가며 계속 걷습니다. 

 

 

 

계양천을 만납니다.

 

 

낚시하는 사람들 훼방놓으며 천변을 따라 올라갑니다.

 

 

감암포 표식이 서있는 감암교 옛 다리를 건넙니다. 

 

 

감암포는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이 한강을 나들던 대표적 포구로,

해방 전에는 고양시의 이산포와 송포를 오가던 나루였습니다.

조선 시대 중봉 조헌이 왜침의 조짐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당파싸움에만 급급하여 그 대비를 소홀히 하자

벼슬을 내놓고 이곳 운양리 나루터 바위위에서 낚시를 하며 시름을 달래던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가 대감바위이고 대감의 감자를 써 감암포라 하더니

어느 날 갑자가 달다는 감자로 바뀌었습니다.


중봉 조헌은 임진년에 왜적의 침입을 당하자 의병을 일으켜 청주를 회복하고 금산에서 전사하였습니다. 

 

운양리 나루터는 현재 전혀 출입을 할 수 가 없는 곳이고

언젠가 어느 날 출입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여도

요새 김포시에서 추진하는 무슨 공사로 인해 

한강으로 튀어나온 감암초소를 기준으로 왼쪽 하류 방면 연안 전체가 시설물로 들어차게 되면서

옛 포구의 정취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엉뚱한 자리에 서 있는 비석하나만 남은 것이지요.

 

김포한강 IC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다시 탑니다. 

운양리의 거의 절반을 밀어 새로이 조성하는 하늘빛마을 공사장을 차로 통과합니다.


주최 측에서 이런 저런 고려를 했겠지만

용화사도 그냥 지나치고 전류리 나루터도 그냥 지나칩니다.


신정일 선생과 나의 관점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니 서로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도 당연히 다르지요.
사실 그 다름 때문에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가끔씩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용화사는 신선생이 사는 전주일대의 고찰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 일대에서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 절집입니다.
누산리 평야가 시작되는 운양산에 자리 잡고 있는 전통사찰로

한강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로 일산 신도시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아름다운 곳이지요.


절의 창건연대는 대략 1405년(태종5)으로,

뱃사공인 정도명이 조공을 배에 가득 싣고 오다가 간조로 인하여 운양산 앞에 배를 대게 되었는데

그날 밤, 부처가 꿈에 나타나 대어놓은 배 밑쪽에 석불이 있으니 잘 모시라하여

이를 모시고 자신도 삭발수도하게 되었다는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석축위에 동서로 50m, 남북으로 30m에 이르는 대지 위에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용화전의 상단에 모셔져 있는 석불은 용화사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미륵석불로 조선 초기 불상양식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누산리를 지나 봉성포천을 넘어 봉성산을 지나면서 같이 지나쳐버린 전류리포구.

 

버스 창밖으로 표지판을 겨우 찍었습니다만...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는데 그렇게 그냥 스쳐갈곳은 아니었지요.

 

숭어와 풍천장어가 오르내리며 잡히는 이곳 전류리에서부터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한강의 끝자락이 시작됩니다.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전류리.
서쪽으로는 강화도를,

북쪽으로는 강 건너 북한 개풍군과 마주보고 있는 한강 하구의 작은 포구 마을입니다.
경기도 양평 양수리에서 만난 남한강과 북한강의 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구간에 남아있는 포구는

전류리포구가 유일합니다.
예전엔 조강포, 신리포, 마근포 등 전류리보다 더 하류에 자리 잡은 포구들이 있었지만

남북이 갈라지며 이 어장들은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분단 이후 전류리는 최전방의 어장이 됐습니다.


포구에서는 20척가량의 소형 어선이 선단을 이뤄 웅어, 숭어, 새우, 참게를 잡습니다.
전류리포구의 명물은 봄에 잡히는 웅어입니다.
4월 중순쯤부터 6월까지 잡히는 웅어는 자산어보에 ‘횟감 중에 최고’로 적혀있습니다.
웅어를 예로부터 ‘위어’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에는 전류리포구 인근에 ‘위어소’라는 웅어 전담 관청을 만들어 수라상에 올렸을 정도였다고 전해지지요.

이토록 귀한 웅어지만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거의 전량이 잡히자마자 현지에서 팔려나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웅어가 제철을 맞으면 전국 각지에서 미식가들이 몰려와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앉아 수라상을 차린다고 합니다.

 

전류(顚流)란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인다는 뜻입니다.
전류리에선 하루에 두 번 밀물과 썰물이 교차합니다.
바다의 짠물이 6시간 밀고 들어오면 곧이어 상류의 민물이 6시간 치내려오지요.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은 매일 40분씩 늦춰지는데 서해의 사리 때면 물발은 몹시 세차게 흐릅니다.
하루 두 번, 물이 뒤집혀 흐르는 전류리에서 한강은 상처난 몸을 뒤채고 있습니다.

 

금포로가 월하로로 이름이 바뀌는 지점에 차가 섭니다. 

 월곶면과 하성면을 연결하는 길이니 이름이 월하로입니다.

그 오른쪽으로 갈려 들어가는 길이 철조망을 계속 따라 걷는 길입니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랄 것도 없이 민간인이 다닐 일이 없습니다.

 

석탄리 배수지를 지나 배수지 뒷편 물길 따라

후평철새도래지를 지나 김포평화누리길이라는 트레킹코스 3코스가 애기봉으로 이어질 것이고

우리는 아마도 철조망을 따라,

아니 한강을 따라 한 세 시간은 걸어 애기봉에 도착할 것입니다.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습니다.


후평리를 지납니다.

 

철조망을 따라...

철조망을 따르니 당연히 강안을 따라 갑니다.
뿌연 물안개 속에 철조망만 바라보고 가던 중 마근개 나루가 있던 지역을 지납니다.
이 부근 어딘가에 해상안전을 기원하던 당도 있었습니다만...

그 터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지나긴 지나지만 그 흔적을 기억하면 않되는 길을 지나는데

간간이 병사들이 나와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합니다.
도처철조망(到處鐵條網) 개유검문소(皆有檢問所)’라고 한 황동규의 시 ‘태평가’의 현실이 생생합니다.

 

후평리에서 가금리쪽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여기는 김포 DMZ 트레킹코스가 연결되는 곳이라 일반인들이 통행을 하는 곳입니다.


앞으로 보이는 산봉우리에 애기봉 전망대가 있습니다. 

 

뿌연 안개로 애기봉 전망대는 보이지 않지만 사진기를 꺼내 사진을 찍습니다.

 

고라니 한마리가 밭을 가로질러 뛰어갑니다. 

 

수로가 이어지는 길을 지납니다. 

 

 

 

 

 이제는 오른쪽으로 보이는 철조망쪽 논과 밭위로 물오리가 날아갑니다.

 

 

 

사진 중앙이 애기봉 전망대

 

사진 왼쪽이 애기봉 전망대

 

 

전망대에서 전방을 조망해야 하는데 전망대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평온한 마을길을 걷습니다. 

 

 

가금리 마을 입구에서 박신의 묘역을 만났습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입니다.
1385년인 우왕 1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조·형조의 정랑에 근무 중 정몽주와는 달리 이성계를 도왔습니다.
태조 즉위년인 1392년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이 되었습니다.

벼슬길을 순탄하게 달려 호조판서·병조판서·의정부찬성·이조판서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세종 즉위년인 1418년에 봉숭도감(封崇都監)의 제조가 되었고,

이어서 선공감제조가 되었으나

선공감 관리의 부정으로 통진현에 유배되었다가

 12년 만에 풀려난 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후에 하사받은 시호는 혜숙(惠肅)입니다.


강릉경포호에 있는 홍장암 바위와 연결된 홍장과의 사랑이야기가 많이 유명하지요.


홍장(紅粧)은 조선 초기의 강릉 기생입니다.
박신(朴信)이 강원도안렴사로 갔을 때 그녀를 사랑하여 아주 깊이 정이 들었는데,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갈 때 강릉부윤으로 있던 조운흘이 “홍장은 이미 죽었다.”고 하고,

그녀를 마치 신선처럼 꾸민 뒤 박신을 한송정(寒松亭)으로 유인하여 놀려주었다는 일화가

《동인시화》에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 효종 때의 신후담(愼後聃)이 홍장과 박신의 이와같은 애정고사를 소설화하여 〈홍장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홍장은 시조작가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시조는 딱 1수입니다.

그녀가 지은 시조는 박신과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한송정(寒松亭) 달 밝은 밤에 오락가락하는 갈매기를 바라보며,

가고 오지 않는 왕손(王孫)을 그리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신이 헛물켠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


이 작품은 《교주 해동가요 校注海東歌謠》 등에 전합니다.

 

박신이 유배중 심었다는 나무

 그러면 조선왕조 500년 더하기 100년 600살이 넘었네요.

 

마을 우물과 빨래터

 

4단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애기봉도 지척에 있어 관광객이 많이 오고 갑니다만

다 지나치는 이들일 뿐이라 마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지 빈집과 부서진 집이 지천입니다.

 

 

오른쪽 길이 관망대 출입통제소를 지나지 않고 애기봉으로 조금 질러 올라가는 길입니다.

 
나는 왼쪽으로 해서 마을 앞으로 갑니다.

애기봉출입관리소 앞에 있는

선조의 후궁이자 경창군의 어머니인 정빈 홍씨(貞嬪 洪氏)의 무덤을 보고자 해서이지요.

 

500년 되었다는 보호수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분위기가 좋아서 찍고 찍고 또 찍습니다.

 

 

 

아까 석골나루 부근 마을에서도 그렇더니

이곳에서도 김장을 집밖에서 담습니다.

풍습인지 동네 자랑하는 건지 조금 애매하네요.

 

 드디어 애기봉입구입니다.

 

 

우리는 평화누리길 세 번째 길을 거슬러...아니다.

세 번째 길에 준해 철조망 따라 이곳으로 왔고

 이제부터는 평화누리길 두 번째 길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판넬이 우리에게 의미 없는 것은

평화누리길에서의 조강리저수지는 마을을 우회해서 가지만

우리는 애기봉중대앞을 지나기로 협조가 되어있다 합니다.
그리고 문수산성이 아닌 용강리를 지나 보구곶리로 가겠지요.

 

애기봉 관망대 출입통제소가 보이는 곳에서 좌측 기슭에 있는 비석으로 갑니다.

 
선조와 후궁 정빈 홍씨(貞嬪 洪氏)간에 생산된 아들인 경창군(慶昌君)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경창군은 8세 때 봉군되었으며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여 선조가 특히 총애하였다고 합니다.
항상 근신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광해군 때에도 해를 입지 않았고

인조반정 후에는 종부시도제조·종친부유사당상 등을 지냈다고 하며

인조 2년에 일어난 1662년 이괄의 난 때 왕을 호종하였습니다.

 

그 뒤쪽으로 경창군의 어머니 정빈 남양 홍씨의 묘가 있습니다. 

 

인동현감을 지내고 훗날 이조참판에 추증된 홍여겸(洪汝謙)의 딸입니다. 

 

애기봉 관망대 출입통제소를 지나  

 

걸어, 아니 뛰어 올라갑니다.

 

전망대 주차장옆 김포지구 전적비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 오는 날에는 공사 중 

 

이 김포지구 전적비는 인천 상륙전의 성공한 기세를 몰아 서울을 수복한 후

김포지구에서 적 잔당을 소탕하고 북진한 해병부대의 무공을 기리기 위해

1989년 11월에 세운 비입니다.
비문내용을 옮겨봅니다.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예로부터 한강하구에서 수도 서울을 지키는 관문이자

대몽고항쟁, 신미, 병인양요 등 민족의 수난사와 더불어 고난을 함께 한 땅이다.

한국동란중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만회한 인천상륙작전과 수도 서울 탈환작전의 선봉군인 해병 제1연대는

그 예하 제3대대를 이곳에 배치하여 서울로의 반격을 시도하려던 잔적을 과감히 소탕하였고,

1·4후퇴의 와중인 51년 3월부터 휴전 시까지는 해병 독립 제5대대가 이곳에 배치되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중공군과 대치하면서 한강너머 개풍군 및 개성 등으로 침투,

월암리전투를 비롯한 50여회의 작전을 수행함으로써 민족의 젖줄인 한강을 사수하고 이 땅을 지켰다.

특히 이 지역은 휴전이후 해병 제1임시여단, 제5여단, 제2여단, 제2사단으로 오늘에 이르며,

피와 땀과 혼이 깃든 분단조국의 최전방을 40년 이상 지켜온 우리 해병들은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 지킬 것이다.

여기 이 전투에서 목숨 바쳐 나라와 겨레를 지킨 임들의 고귀한 충정과

용감무쌍한 정신은 자손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이 1950년 9월 말의 해병대에 의한 김포지구전투만큼이나 중요한 전투가

 6.25발발 바로 이틀 뒤에 있었습니다.
비록 진 전투라고 해서 폄하되고 있지만

그 전투로 인한 북괴군의 진출지연이 없었다면 한국군은 유엔군의 참전 이전에 더 많은 피해를 입어

어쩌면 회복할 수 없었을 겁니다.
6월 25일 북괴군의 전면 남침이 개시되자

개성지구에서 38선의 경계임무를 맡고 있던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 제2대대는

적에게 밀려 한강하구를 건너 김포반도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에 육군본부는 김포 비행장 부근에 위치한 육군정보학교인

남산학교 교장 계인주(桂仁珠) 대령을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김포지구에 있는 모든 병력을 통합하여 북괴군의 도하를 막도록 하는 한편

용산구 한남동에 있던 기갑연대의 일부를 증파하였습니다.


6월 27일 북괴군의 주력부대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강녕포(康寧浦)로 도하하였습니다.

이 도하하는 적을 맞아 김포지구전투사령부는 28일까지 용감하게 맞서 싸웁니다.


결국 28일 오후 김포지구사령부는 지휘소를 김포 비행장으로 옮기고

그 곳에서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였으나 지휘소를 옮기는 와중에서 사령관인 계인주 대령이 실종되고 말아

참모장인 최복수(崔福洙) 중령이 지휘를 맡게 되었고

날이 저물자 북괴군은 김포가도를 따라 비행장을 목표로 들이닥쳤고

비행장에 수용된 혼성 병력으로는 저항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최복수 중령은

지휘부와 집결병력을 경인가도의 소사(素砂)로 이동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해가 저무는 것과 동시에 김포 비행장마저 북괴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28일의 적의 진출을 더디게 한 전투가

북이 의도한 북한 2군단 병력이 참가하는 큰 포위망과 함께

그 안쪽에 북한 1군단 자체 포위망을 구축하여 2중 포위로 국군을 섬멸하려고 하는 기도를 실현시킬 수 없도록 한 것으로

참으로 값진 전투였습니다.

 
해병대의 전투를 기리는 비석이지만

그 이전 육군 김포지구전투사령부의 업적도 같이 생각해 봅니다.

 
김포지구 전적비에서 내려와 북녘 땅을 흘깃 보고

 

무슨 영화를 찍었다는 표석을 보고

 

애기봉전망대로 올라갑니다.

 

 

병자호란 당시 평양감사와 그를 사랑하여 따르던 기생(愛妓)의 슬픈 일화가 어린 곳이라 해서

애기봉이라 이름 붙은 155m의 산에 위치한 전망대입니다. 

 

한양으로 함께 피난을 오던 평양감사와 그를 따라 오던 기생 누구누구는

이곳에서 적군에게 붙잡혔는데 기생은 풀려났으나 평양감사는 북쪽으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풀려나 이곳에 남겨진 기생은 매일 산꼭대기에 올라 평양감사를 기다리다 병들어 죽었고

사랑하는 이가 끌려간 북녘 하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지요.
이 전설을 들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애기봉’이라 쓴 비석을 세워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여인의 심정과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아픔이 함께 서려 있는 이곳에는 전망대가 있어

북녘 땅을 조망할 수 있고 망배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오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도와 사진을 사진 찍습니다.

 

 

전망대에서 나와 전망대 밖 망원경이 설치된 곳에서 다시 한 번 전방을 찍습니다.

 

 

 

남과 북 사이를 무심하게 흐르는 한강을 찍습니다.
아닙니다. 강 건너편을 찍었습니다.
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연히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답답해서 강 건너편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뿌연 모습을 보니 더 답답해서 강을 찍은 것으로 하려 했지요.

 

이곳을 흐르는 강이 할아버지강, 바로 조강(祖江)입니다.
한반도 중부내륙의 모든 물길을 담아내는 할아버지강입니다.
김포반도 하성면 연화산과 파주 교하의 오두산 사이가 시작점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을 합쳐 도도히 흘러온 한강과,

한탄강물을 이끌고 온 임진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입니다.


서해 쪽으로 좀 더 흐르다가 북한 개성을 지나온 예성강까지 받아들이니, 그 품은 넓고도 넓습니다.


그 너른 가슴을 밴댕이 속을 가진 한국인이 품으려하니 품어지질 않아 항상 사단이 납니다.
 
지금 이 조강은 주인이 없습니다.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의 서부전선.

강 건너가 북한 황해북도 판문군(옛 개풍군)입니다.

남과 북 모두 저마다의 강변만을 차지하고 있고 강심은 중립구역입니다.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아무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60년 가까이 삼엄한 철책에 갇혀 사람들에게 까맣게 잊혀지고, 길은 끊겼습니다.
그리고 그 남북의 사람들은 점점 이질화되어 갑니다.

 

북녘 땅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다가...
회원들이 오질 않아 버스로 돌아왔는데 몇 분이 도착하여 차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아래 삼거리에 회원들의 다수가 도착했으니 차를 돌려 내려오라고 기사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버스에 타고 내려갑니다.

삼거리에서 기진맥진해 있는 회원들을 태우고 늦은 점심 먹으러 식당으로 갑니다.
오전기행..아니 점심 전 기행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