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포구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지혜가 배어 있는 곳입니다.
포구는 바로 섬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바다로 빙 둘러싸인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은 ‘땅밭’과 더불어 ‘바다밭’을 중요시하였습니다.
그 ‘바다밭’으로 드나드는 길목이 바로 포구였습니다.
사람들은 포구를 중심으로 적당한 곳에 ‘등대’도 만들고, 어부나 잠녀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개당’도 마련하였습니다.
‘소금밭’도 만들어 소금을 얻는 지혜도 발휘하였답니다.
또한 이 포구를 떠났다가 영영 불귀의 객이 되거나 표류하는 생사의 갈림길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반골기질을 지닌 학자나 선비들이 이 포구를 통해 귀양을 오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삶의 체취와 아픈 역사를 간직한 제주포구가 세월이 흐르고, 갑작스런 개발붐이 일면서 그 흔적이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몇 개의 포구를 제외하고는 그 옛날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사진 속에서나 찾아보아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상 서재철)
제주도 민속자연사박물관을 다녀 왔습니다.
오늘까지 전시하는 사진작가 서재철씨의 ‘기억 속의 제주포구’전을 보기 위함이었지요.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제주도 전 지역의 해안을 돌며 촬영한 제주포구 사진이 묶어져 있는 도록은 꽤 오래전 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전시공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궁금했습니다.
도민속자연사박물관 관계자의 말처럼
“이번 전시는 선조들이 바다와 함께 살아온 흔적과 지혜를 남겨줄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던 제주 포구의 옛 모습을 통하여
개발로 사라져 버린 옛 제주선조들의 자취를 느껴보기 위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진옆에 붙여져 있던 내용 그대로의 설명을 붙여 그림 올립니다.
애월포구 애월포
애월 포구는 지난 1971년 수산청 고시 제44호에 의해 1종항으로 지정됐다.
1종항으로 고시되면서 옛 포구 자리는 매립되어 애월포는 그 자취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애월은 예로부터 북쪽 바다에서 쳐들어오는 외적을 막기위한 전략 요충지였다.
"朝天鎭과 함께 海潮로 壕를 삼아 방어를 했다."는 옛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
애월진성은 바로 제주 섬을 지키는 방어진지이자, 해상활동의 요충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수원 포구 돈지개
한림읍 수원리의 옛 지명은 '조물개' 또는 잠수포 (潛水浦)라 부르는데,
포구는 하동의 평수와 대수동과 용운동에 있다. 포구는 그대로 바닷물과 가깝다.
'평수'로 가려면 경사 30도 가량의 돈지(豚池)동산을 내려가야 한다.
돈지동산에서 포구를 바라보면 포구와 바닷물이 평평하게 보임직도 하다.
왼편에 대수(大水)라는 또 다른 포구가 있는데
인근의 해안용천수 '큰물'의 이름을 빌려 '대수'라 부르고 있다.
'조물캐'주변은 풍광이 뛰어나다.
고내 포구 고내성창
고내리 바다를 일컬어 흔히 '요강터'라고 한다.
신엄리와 경계 지역인 강척코지에서 '개구미'에 이르는 바다 바닥이 마치 요강처럼 움푹 패여 있기 때문이다.
고내오름을 배경으로 동.서 구릉지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마을에서는 한라산을 볼 수 없는 도내에서는 몇 안되는 마을 중 하나이다.
포구는 '가막여'와 '자지린여'등의 여러 줄기가 기본 뼈대를 이루고 있고,
그 반대편 '남당알'이 단단하게 떠받치고 있다.
포구 주위에는 해안 용천수로 '우주물'과 '시니물,먼물' 등이 있다.
하도 포구
돛부리코지 큰성창, 해변물, 빌레개, 한창개, 원개, 흰모살개, 먹돌개, 용목
하도리에는 8개의 포구가 있다.
해안길이가 길어서인지 배 댈만한 곳이면 크고 작은 포구가 축조됐다.
포구는 세화리와 면수동 경계 지경인 '돛부리코지 큰성창','해변물', 서문동,신동의'한개창', 굴동의 '원개', 동동의 '흰모살개,먹돌개' 창흥동의 '용목'이 있다.
이들 포구 중 크게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곳은 서문동과 신동 중간에 있는 '한창개'다.
하도리 관내 포구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별방진 길목이다.
별방진은 명월진과 더불어 규모가 상당했고,
조선 중종 5년 (1510) 우도 지경으로 왜구가 자주 침범하자 김녕리방호소가 이곳으로 옮기며 특별방어진지인 별방진을 쌓은 것이다.
월정 포구
솔락개,지픈개.테우낭거리,몰물개,베롱개
월정 포구(솔락개,지픈개,테우낭거리,몰물개,베롱개)는 제주 제일의 멸치잡이 어장이다.
멸치잡이가 번성했던 만큼, 포구도 많았다.
월정리는 바람이 많은 지역이며, 대부분 모래땅이다.
얼마전 발견된 용천굴이나 당처못굴이 바로 월정리 지경이다.
화산에 의한 사질 암토와 모래땅으로 이뤄져
과거에는 농사지을 땅으로 적합치 않았기 때문에 바다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외도포구 서착개
외도동에는 1동에 '서착개'와 2동에 '너븐여개'가 있다.
월대와 연대에 각각 포구가 하나씩 잇는 셈이다.
이중 '서착개'는 외도다리를 기준으로 서쪽 도근천 어귀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배 모양의 작은 포구로 고려.조선시대 관헌들이 조공(租貢)을 실어 나른 포구라 하여 조공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신엄 포구 남돌이
도내 포구들 대부분이 마을과 인접해 있으나,
신엄리 '남돌이'는 마을에서 포구까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해안절벽이 높아 드나듦이 여의치 않는 곳이다.
옛 이름이 엄장리(嚴蔣理)다. 해안가에 웅장한 기암괴석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는 '남돌이'말고도 '새개, 부룡수, 모살개'등의 포구가 있다.
이들 포구중 포구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곳은 '남돌이'뿐이다.
'검은빌레'와 '부룡수'암반이 감싸 안은 듯한 지형에 만들어 진 것이 바로 '남돌이'다.
그래서 '남돌이'를 안캐(內浦), '새 개'를 (中浦), '부룡수'를 밖캐(外浦)라 한다.
한수 포구 안캐, 개성창
한수 포구인 '안캐'와 '개성창'은 빌레거리 한 켠에 들어서 있다.
'안캐'는 마을 설촌 당시부터 이용해 왔던 것이고 '개성창'은 근래에 들어 확장 축조한 것이다.
이 포구 주변으로는 여나 코지 같은 지형물이 낮게 형성되고
수심이 비교적 낮은 빌레지형이 많아 작은 어선들을 정박시켜 놓는다.
협재 포구 큰개, 작은개
협재 포구는 '큰개'와 '작은개'로 이뤄졌다.
포구 주변에는 동에서 서로, '큰고자여'와 '작은고자여'가 길다랗게 감싸 파도와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다.
'큰개, 작은개' 이전에 안쪽 깊숙이 '펄낭'이라는 포구가 있었는데 1930년대에 매립됐다.
'작은개' 인근에도 '재길이성창'이 터잡고 있으나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재길이'하르방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금릉 포구 돈지
금릉리 '돈지'포구는 비교적 큰 포구다.
'돈지'는 '장사코지'와 '올래코지'를 끼고 축조돼 있는데
이중 동편의 '장사(長蛇)코지'의 '장사'는 말 그대로 긴 뱀을 뜻한다.
뱀처럼 길게 뻗어나가 포구를 넉넉하게 떠받치고 있다.
'밖캐'(外浦)의 동,서 선착장 95m와 '넙빌레' 인근의 방파제 50m는 일제 때 만들어진 것이고,
그 후 중캐(中浦)선착장은 1946년도에 만들어졌다.
'돈지'는 '큰개창'과 '작은개창'으로 나눠졌고
'넙빌레'방파제 끝에는 철제 등대불이 있었다.
하귀2리 포구 뒷개
하귀2리 미수동은 물이 많은 동네다.
용천수가 곳곳에서 솟아나고, 물맛이 좋아 마을 이름조차 '미수(味水)다.
이 마을의 포구는 '뒷개'로 마을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포구는 '안캐,중캐,밖캐'로 축조돼 있는데,
지난 1959년 사라호 태풍때 밖캐의 선착장 일부가 허물어진 것을 제외하고 원형 그대로 보전된 포구다.
포구 입구 바위에는 철제로 만든 등대가 서 있었으나
지금은 윗 원통은 사라지고 다리만 남아있다.
용담1동 포구 용수개맛
영주십경 중 하나인 용연야범(龍淵夜帆)으로 널리 알려진 용연에는 예부터 포구로 사용해온 '용수개맛'이 있다.
이 포구는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서인지 그 흔한 방파제도 없고
해안 용천수인 '용수'와 '머구낭물'사이에 5평 남짓한 소규모 피항 시설이 포구의 전부다.
종달 포구 두문이개, 중퉁굴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창흥동 해안도로를 따라 종달로 가다보면
마을로 들어서기 전 오른쪽 해안가에 동물의 형상을 한 바위가 서있다.
나뭇가지에 울긋불긋한 천이 걸려 있어 금방 개당임을 알 수 있다.
종달리 개당인 '돈짓당'이다.
일년 중 길일을 택해 잠녀, 어부, 선주들이 모여 '요왕맞이굿'을 해 조업의 무사를 비는 곳이다.
섬의 끝 지점 종달리에도 동동의 '두문이개'와 '중동의 중퉁굴' 두 개의 포구가 있다.
해안도로변에 위치한 '두문이개'는 문이 두 개인 포구로
멀리는 성산, 뒤로는 지미봉이 서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표선 포구 당캐
표선리 '당캐'는 인근에 당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당캐'라고 부른다.
신당은 '당캐할망' 혹은 '세명주'라고 부르는데, 이 당캐할망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막내아들이 뜨거운 죽에 빠져 죽자
"너는 애가 마르고 목이 마를 테니 물을 건너가 우도를 차지하여라."고 해서 막내아들은 우도의 당신(堂神)이 되고,
나머지 여섯 아들은 한라산의 오백장군을 차지하게 됐다.
한라산 백록담에서 솟아났다는 이 할망은
아들들을 보내고 난 다음 혈을 밟아 표선마을 바닷가로 내려와 좌정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도두2동 포구 흘캐
예로부터 물맞이 장소로 널리 알려졌던 포구다.
행정 구역으로는 도두2동 신사수 마을에 자리잡은 '흘캐'는 흔히 '흑포(黑浦)라 불린다.
포구바닥에 검은 모래가 쌓여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포구 주변에는 곳곳에서 용천수가 솟아나와 주민들의 식수원이 되기도 하고,
여름철이면 더위를 식히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옛 모습은 간데없고 휘황찬란한 상가들이 들어섰다.
신예 포구 공천포
남원읍 신예리는 물이 맑기로 유명하다.
얼마나 물이 말고 깨끗했길레 해안 용천수를 조공물로 바쳤을까.
'공천포'라는 지명도 인근 해안용천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다. '
앞빌레' 지경의 '영등물'은 한때 '공천(貢川)'으로 통해 주로 '예촌가름'의 토호 세력에게 바쳐졌다.
공천포 축조 시기는 1870년 윤씨(윤씨 입도 9대손)가족이 신예2리 85번지에 거주하면서 촌락이 형성됐고
포구는 이 때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보목 포구
소래개,구두미개,큰개머리,배개
섶섬과 제제기오름을 비롯 '따래기동산,상디동산, 허벅이동산,돗보댕이동산'등
크고 작은 산마루 숲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보목리는
네 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됐는데 각 동네마다 포구가 있다.
보목리 포구 중 가장 큰 곳은 '배개'다.
'배드린개'라고도 하는데 배를 묶는 포구란 듯이다.
'배개'는 안캐,중캐,밖캐로 축조되어 있고,
옛 등대불이 안캐와 중캐 사이에 있다.
보목동은 근래까지도 테우 어로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테우만드는 놀이'와 '자리돔축제'가 열린다.
대평 포구 당캐
대평리 '당캐'는 자연적으로 이뤄진 여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포구다.
지금은 바로 옆에 새로 축조한 포구를 이용하기 때문에 흔적만 남았고,
1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바위에 세위졌던 등대불이 옛 포구였음을 말해준다.
지금은 그 등대불마저 사라져 버렸다.
'당캐'인근 '막은굴'에서 '박수덕, 이도시'에 이르는 길을 '몰질'(말길)이라고 한다.
중문 포구 성천포
'성천포'는 천제연 하류 베릿내오름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포구다.
이 포구는 안캐와 밖캐로 축조되었는데,
밖캐를 일제강점기에 만든 것이라 하여 '왜놈축항'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포구는 '베릿내'라는 하천 하류에 터 잡고 있다는 점인데,
제주 선민들은 내(川)가 넘치게 되면 포구의 배들이 휩쓸리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하천의 하류는 피했다.
포구 일대 용천수로는 '테우리물'과 '베릿내물'이 있는데
이중 '베릿내물'은 용천수량이 많아 '큰물'로 통하기도 한다.
송산 포구 수전포
수전포는 서귀포의 옛포구로 인근 '새섬'이 자연 포구의 대들보이다.
옛 이름 '수전포(水戰浦)'는 수전소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수전포'이다.
지형이 '새섬'을 가운데 두고 동모와 서모, 두 갈래로 들어오는 물이 마치 물싸움을 연상케 하여 수전포라 불렀다고 한다.
위미3리 포구 텟개
'텟개'의 본래 지명은 '테우개'다.
이를 줄여 곧잘 '텟개'라고 부르는데 한때는 테우들로 북적거렸다고 해서 '텟개'다.
옛날부터 위미리에는 한라산에서 나무를 운반하던 길이 형성됐다고 한다.
잘라온 구상나무는 위미1리의 '밍금애'와 2리 '지꾸내'에서 테우를 만들었다.
'텟개'는 1989년까지도 위미2리에 속해
'밍금애'에서 만든 테우가 '텟개'에 터 잡았다.
'텟개'는 1830년쯤 축조된 포구로 주변에는 연대가 있었다.
화북 포구
도내에서 처음으로 관에 의해서 축조된 화북포구는 별도포(別刀浦)라 불리기도 했다.
한때는 제주의 관문으로 생활물품이나 관수(官需)물품이 드나들었는가 하면,
유배인들이 귀양살이를 위해 들어왔던 유배의 길목 포구였다.
조선 영조 11년 (1735년)김정 목사는 이 포구를 축조하기 위해 관록(官錄)3백석을 희사하여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등지의 장정들을 동원, 부역하게 했을 뿐 아니라
김정 목사가 직접 공사에 참여하였다가 과로로 인해 세상을 떳다.
법환 포구 막숙
법환 포구를 '막숙(幕宿)이라 부른다.
고려말 '목호의 난'최후 격전지였던 범섬과 마주하고 있다.
'배연줄이'로 범섬으로 도망간 목호 잔당을 격퇴키 위해 주변 큰 나무들을 잘라 뗏목을 만들어 범섬까지 연결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막숙'은 천연적인 양항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소장앞'과 '생이코지'가 주변을 감싸고 있어 병선을 안전하게 댈 수 있다.
포구는 안캐와 밖캐로 짜여졌다.
용천수로는 '동카름물'과 '서카름물'이 있다.
삼양1동 포구 동카름성창
원당오름 기슭 해안가에 자리한 삼양1동에는 두 개의 포구가 있다.
동쪽에 있다 하여 '동카름성창', 서쪽에 있다 하여 '서카름성창'으로 불렀는데
'카름'은 동네나 마을을 뜻하는 제주어이다.
타원형 형상의 이 포구는 제주 포구의 전형적인 모습인 안캐(內浦),중캐(中浦),밖케(外浦)로 나눠져 축조 됏을 뿐 아니라
주변의 자연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든 포구다.
주변에 있는 가막작지물과 우무스물은 수량이 풍부하여 이 일대에 삼양 3수원지가 개발되어
'동카름성창'은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서김녕 포구 큰한수해
서김녕리 '큰한수해'는 포구의 맨끝 '축항코지'까지 1km나 될 만큼 길다.
전형적인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만든 포구로, 예부터 천연적인 양항(良港)으로 꼽혔다.
주변에 해안 용천수가 풍부하여 육지를 드나드는 외래상인들이 장기간 머물렀을 정도였다.
'큰한수해'는 '조근한수해, 한개(서울뱃자리,종선뱃자리), 고분개'등으로 이루어지며,
이를 통틀어 '큰한수해'라 부른다.
1920년대부터 '조근한수해'가 매립되기 시작,
지금은 서남쪽에 커다란 축항 시설로 인해 '큰한수해'역시 매립되거나 거의 방치 상태에 있다.
조천 포구 새성창, 무근성창
제주섬의 첫 관포(官浦)인 조천 포구.
육지를 드나들 때마다 이 포구를 이용했다 하여 조천 마을을 일컬어 '조천진(朝天鎭)','조천관(朝天館)'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이 포구를 드나들었던 관리들이 북쪽에 있는 임금을 그린다는 뜻에서 세운 정자인 [연북정]을 가운데로 '무근성창'과 '새성창'이 형성됐다.
조천포구에는 어느 포구보다 크고 작은 바위들이 많다.
검은여, 오저여, 세콧을 중심으로 '새성창'이, 코쟁이머리, 작은돈지를 이용한 '무근성창'이 조천포구의 모습이다.
고산 포구 자구내
성산이 일출로 유명하다면, 차귀도는 낙조로 유명하다.
낚시터로 유명한 '자구내'는 수월봉과 당오름 사이에 있다.
'자구내'는 본래 "차귀에 있는 하천"이란 뜻이다.
'차귓내'가 뒷날 '자구내'로 변해 불리고 있다.
산북 최대 어장인 '차귀도'와 '와도'맞은편에 자리 잡은 '자구내'가 포구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다.
당시 일본군 '오노' 부대는 수월봉 해안 일대에 군사요새지를 만들기 위해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부역에 동원해 '자구내'일대에 선착장과 방파제를 축조했다.
방파제에 세워진 등대불도 당시에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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