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고산, 용수지역 답사를 따라갔습니다.
답사사진보다 잠깐 들른 용수성당사진이 더 많네요.
사진만 올리려다가..
고산이야기는 생략하고...용수리 이야기를 해볼까요?
용수리는 기와를 구어 개를 통해 내다파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옛이름은 지사개 또는 지삿개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뜻으로 瓦浦 , 음으로 地沙浦로 표기하였습니다.
지금은 한경면에 속해 있다보니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고 생각하시겠지만
19세기 중후반까지 고산리의 한마을로 대정현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제주시 구우면 소속이 되면서 용수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데
용수라는 이름을 만들게된 지금의 용못일대는 1953년에 용당리로 다시 분리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고산에서 용수가 나오고 용수에서 용당이 나온거지요.
(옆가지 - 한경면은 한림에서 갈라지면서 옛 대정현일대를 포함해서 탄생했고
한림리는 대림에서 나와서 대림보다 엄청커져 일대를 대표하는 읍소재지가 됐지요)
고산은 조선시대후기까지 대정현 돈포리에 속해 있었습니다.
18세기말에 고산1리 중심마을을 塘山리라 하여
제주목 구우면 소속이 되었지요.
20세기 초반에 와서야 옛 차귀진이 있던 지역과 자구내포구 일대, 한장밭일대를 합쳐 고산1리,
자구내의 안쪽 천내동, 바깥쪽 천외동일대를 고산2리라 하여 당시 북제주군으로 들어간 겁니다.
왜 고산이라 마을이름을 정했는가 하면
지금 우리가 수월봉이라 부르는 곳은 원이름이 높고메, 노꼬메 오름입니다.
1909년 일본아이들이 조선지지자료에 이 지역포구의 이름을 기록할 때
한문으로 높을 고에 메(뫼)산, 高山이라하여 고산포로 표기한 것이 그 시초입니다.
그러니까 녹고와 수월이의 전설은 그 무렵 만들어 졌다는게 정설입니다.
쭈욱 이어서 절부암과 중국고사와의 이야기,
왜 강사철묘비에 업무라 쓰여 있는지
그리고 고산 당목잇당의 진실과 세종실록에 있는 차귀섬이야기
거기서 연결되는 제주시내 광양당이야기 등 등을 쓰려고 했는데 무언가 해야할 일이 생겼습니다.
이하 생략하고...
클로드 최 / 사랑은 꿈만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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