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천을 갑니다.
아! 보다 정확히 말해야지....
창천리와 감산리 구간의 창고천을 갑니다.
창고천에 대해서는 설명하기가 참 힘들어요.
상창리에서는 마을이 창고천 상류에 있다하여 마을이름을 상창이라 한다하는데...
창천리 분들은 진소에 있는 창고샘이 창고천의 기원이라 하지요.
지질학적 설명에 의하면 1100도로 탐라각 휴게소 앞의 습지, 삼형제오름 북쪽 습지
그리고 한대오름 동쪽 습지 이 세곳이 창고천의 발원지라 합니다.
그런데 왜 마을마다 이야기가 다른가 하면
예전에는 위 세곳 습지에서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확인 할 수가 없었고
또 이 물줄기가 중간에서 돌오름에 막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가
빈네오름부근에서 내려오는 물과 만나 광평에서 또 다시 나타납니다.
그 후 골른오름옆으로 상창리를 지나다가 또 없어지고 그러다 창천리지경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그렇게 군산 옆을 흐르다가 황개천에서 바다로 들어가지요.
군산과 다래오름옆을 흐르는 창고천을 따라가다 보면
수직절리와 수중화산활동의 결과물인 대규모 수성퇴적층이 확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안덕계곡에 이어져 있는 군산부근에서는 그 비경이 압권입니다.
창고천은 역사·문화유적과 많은 전설이 깃든 공간입니다.
안덕계곡 상류에는 원시적인 형태의 도수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류 곳곳에는 바위그늘 집 자리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군산과 반석내와 같은 자연지형 전설을 비롯해 대수로 개발에 얽힌 막산이 전설 등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특히 안덕계곡은 풍부한 생태자원과 함께
계곡의 물을 이용하기 위해 제주 선인들이 대역사를 펼쳤던 현장이라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고
지금은 그 흔적도 희미하지만 이 일대 6만여 평의 계단식 능선은 제주에서 논농사가 이뤄졌던 곳이랍니다.
오늘은 다래오름과 군산을 연해 흐르는 창고천을 따라 걸어갈 겁니다.
산책로도 있고 생태공원도 있습니다만
산책로는 기슭위로 이어져 있고 냇가로는 짧게 연결만 되어 있기 때문에
창고천 물줄기와 함께 가려면 험한 길 헤쳐가고 물위를 걸어 가야할 겁니다.
창고천을 걷고 난후 안덕계곡에서 올라와 감산리 사무소앞 임징하 적려유허비까지 가겠습니다.
출발합니다.
일주도로변에서 진소로 가기위해 산책로로 들어섭니다.
데크가 끝난 곳에서 조금 더 내려와서 암벽을 따라 서쪽으로 갑니다.
하천으로 내려와서 만나는 바위벽
하류방향으로도 보고..
하천으로 내려가서
조금만 더가면
돌계단이 보이지요.
해방전후 마을의 가장 큰 쉼터였습니다.
진소큰엉
바닥은 2006년도인가에 정비한 것입니다.
오른쪽 구석에 타다 남은 촛농 등 개인적 비념의 흔적이 보입니다.
동굴속 깊은 곳에서는 물이 흘러 나옵니다.
해방전후 만들었다는 시멘트도수로를 따라 가면 진소가 나옵니다.
도수관을 지나서 뒤돌아보고
진소를 보기 전에 진소오른쪽을 봅니다.
절벽아래 두 곳의 엉
왼쪽은 샘이고 오른 쪽은 당입니다.
창고샘.
안으로 들어가면 물통이 세곳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창천리분들이 창고천의 발원지라 하는 곳입니다.
일뤠당.
제단은 있는데 비념의 흔적이 없네요.
아까 큰엉에 있던 촛불 자욱이 이곳으로 오려던 분이 물을 건너지 못해 그곳에서 비념하고 가신 것 같습니다.
진소폭포.
그러고 보니까 바로옆 큰길에서 여기까지는 데크가 있는데...
큰길로 나가봅니다.
진소안내판 .
다시 돌아 내려와서 온 길을 빠꾸해서 내려갑니다.
이 오른쪽 벽에 임관주의 시가 있는데
깜박하고 스쳐갔습니다..
몇 년 전 사진을 올립니다.
유배지에서 방면되면서 본인이 직접 새긴 시라 합니다.
내용을 보면
귀양살이 풀려 그동안 갇혀있던 집을 나서서
계곡 밑 흐르는 시냇물을 먼저 찾았네.
푸른 바위는 세 줄기 물 굽에 둘러 있고
짧은 폭포 옆으로 늦은 단풍이 들었네.
앞으로 한발자욱 떼다가
아쉬움에 다시 돌아보고
암벽 옆을 따라 내려갑니다.
빌레통입니다.
오른쪽 풀숲을 뚫고 올라갑니다.
닥밧 일뤠당을 가려고 하는 거지요.
위에서 당으로 오는 길은 흔적이라도 있겠지만 물길 옆에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이 큰 바위 뒤가 감산리 도그샘이 일뤠당에서 가지갈라 모시는 닥밧일뤠중저가 계시는 곳입니다.
예전에는 꽤 큰당으로 제단만 해도 여러곳 있습니다만
신목은 썩어 부러졌고
그 옆 한쪽으로 제수와 물색이 있습니다.
지나쳐서 뒤돌아보며 편히계세요하고 인사합니다.
멀리서 다시 한번 뒤돌아보고
맥문아재비와도 인사하고
잡목 숲을 뚫고
다시 빌레통으로 내려왔습니다.
여기를 어떻게 지나가야 할까요?
가장 쉬운 방법
Walk on water
조기 포장한곳으로 올라서면 빌레통습지 생태공원입니다.
병꽃나무꽃입니다.
우리나라 전국 산야의 산록과 계곡에서 자라는 인동과의 낙엽활엽 작은 키 나무입니다.
4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5월까지 화려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고
그 꽃말도 멋있습니다. 전설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이 꽃이 이곳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이곳 자생종도 아니고....
그냥 예뻐서 심어놨나봐요.
이왕 생태공원을 만들었으면 생태와 연관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쁘면 모든 것이 용서되나 봅니다.
입구를 나서며 뒤돌아보고
안내판을 보고
마을 농로로 올라서서 전체적으로 조감해 봅니다.
농로에 서서 산방산을 보고
군산을 보고
다시 산반산을 보며 걷다가
농로 옆에 조성중인 조그만 습지를 보고
배고픈 다리를 철거하고 새로 놓은 다리위에서 양재소를 봅니다.
아까 지났던 빌레물통과 이곳 양재소사이에 가메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중장비가 바닥을 파헤치고 있어서 농로길로 우회한건데
다리를 놓으려 하는지 하천을 준설하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흙탕물을 계속 만들어냅니다.
그 흙탕물이 계속 따라오네요.
그렇지 않아도 창천리의 하수구는 다 이곳으로 연결되는데 점점 황폐화되어 가는 겁니다.
양재소 안내판
간판주변 노란꽃
이름을 모르니 한번 더 꾹
양재소로 내려가는 중간, 생이물
창천리와 감산리의 경계지점입니다.
양재소로 내려가서 물 길옆 숲을 뚫고 갑니다.
빙돌아서 반대쪽으로 왔습니다.
사진을 찍을때는 분명히 분홍색이었는데..
그래서 신기해서 찍었는데 우째 하얀색으로 변했을까?
물줄기와 함께 내려갑니다.
멋진 계곡풍광에 마냥 감탄하며 내려갑니다.
우측 기슭 대나무 숲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감산리 요드렛당입니다.
정의 토산에서 시집온 이들이 모시던 당이라서 토산 요드레한집이 좌정해 계십니다.
이당의 설화에서는 좁은 제주도에서도 지역적 배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설화에 의하면
옛날 안덕면 감산리 어떤 사람이 토산리 여자를 며느리로 데려왔습니다.
토산은 제주도에서 뱀신(蛇神)을 위하는 본댁(本宅)으로
마을 여자가 시집을 가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어느 곳이든 따라간다고 합니다.
토산 며느리가 감산으로 시집와서 살게 되자 집안 식구들이 병에 걸리고 여위기 시작했습니다.
감산리 사람이 이상하다고 여겨 점쟁이를 불러다 까닭을 물으니
바로 토산뱀을 잘 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뱀신(蛇神)을 위하는 굿을 해야겠어."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했습니다.
부친이 아주 고집이 센 양반이라 뱀귀신이 나오도록 굿을 하라고 한창 굿을 하는 무당에게 요구했지요.
"귀신이 나오게끔 굿을 하라."
무당들이 굿을 계속하자 뱀이 마당으로 기어나왔습니다.
부친은 조그만 항아리를 가져다 놓고 무당에게 뱀을 항아리에 들어가게 굿을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무당이 부친의 요구를 받아들여 계속 굿을 하자 뱀이 항아리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굿을 그만 두라. 귀신을 잡아 버렸으니 굿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는 항아리 뚜껑을 닫고 깊이 땅을 파서 묻어 버렸다하네요.
이렇게 되자 토산리 친정집에서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토산에서는 점을 치고 굿을 하자 무당이 그 까닭을 말했습니다.
"너희 집 한 조상이 감산리에 가서 잡혀 있구나."
무당이 감산리에서 일어난 일을 알고 말했던 것이지요.
토산 친정집에서는 감산리 사돈댁을 찾아가서 조상을 묻은 항아리를 내어놓으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항아리에 든 뱀신을 모셔 갈테니 어서 주십시오."
감산리 사람이 땅을 파서 항아리를 건네주자 다시 뱀신을 토산으로 모셔갔습니다.
그 이후부터 감산리 서쪽에는 뱀신을 위하는 집이 없어졌다 하네요.
설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지역색이 그리강하다는 겁니다.
감산리에서는 토산마을 며느리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냉대한것이
토산뱀을 잘 위하지 않았다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고
토산며느리를 위해주라는 주변에 말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냉대하여 고립시켰고
이사실을 알게된 친정사람람들에 의해 토산리며느리가 결국 토산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 이후 감산과 토산은 한동안 통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설움이 깊으면 신력이 생깁니다.
그 서러운 며느리가 이곳에서 신이 되어 그 후 토산을 비롯한 외지에서 시집온 며느리들의 한을 풀어줍니다.
이제는 아무리 고집불통하르방일지라도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가니
예전에 당이었을 것 같은 궤가 있습니다.
신혈과 제단은 남아있습니다만 모신 흔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바위그늘집이라하여 선사시대 누군가가 살았을 수도 있겠지요.
감산리도그샘이 보입니다.
암벽지대 아래 샘에는 물이 넘쳐납니다.
도그샘은 울창한 상록수와 물이 풍부해 마을 주민들에게 각광을 받았던 곳이지만
계곡변 콘크리트 포장공사로 지난 96년에 암벽이 무너져 내려
그 이후로는 사람의 발길이 끊겼습니다.
이곳에는 한때 참꽃나무가 울창해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합니다만
지금은 볼 수가 없습니다.
도그샘이 일뤠당의 원자리랍니다.
이형상이 당을 파괴하자(이곳 전설에는 김녕의 뱀을 죽인 서린이 당파괴의 원흉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물통 옆에 있던 당을 동쪽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감추었습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갑니다.
일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만 걷기가 너무 힘듭니다.
기슭으로 다시 올라가면
내려오는 계단을 만들어놓은 곳을 만납니다.
감산리본향 도그샘이 일뤠당입니다.
감산리마을 설촌때 만들어진 당으로 도고샘과 같이 있었으나 훼철을 피해 이쪽으로 피난 왔습니다만
당궐이 몇 안남으니 시멘트블록몇개가 단을 대신합니다.
암벽 옆을 따라가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왔습니다.
남반내입니다.
다시 길로 나가서 안내판을 봅니다.
저는 이내용을 이해를 못합니다.
여기가 바닷가도 아닌데 바다에서 들어오는 내방객이 왜 여기서 입국허가를 받았을까요?
다시 남반내로 내려갑니다.
남반내를 지키는 오리와 인사 나누고
아래로 내려갑니다.
도수로의 형태가 나옵니다.
지금은 다 무너져 있는 도수로위 포장한 길이 대평포구로 이어지는 옛 공마로였다합니다.
참 어렵게 어렵게
우리가 통상 안덕계곡이라 부르는 지점의 동쪽끝부분 용바위앞으로 왔습니다.
큰 한숨 내쉬며 스스로의 고생을 위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관광지를 걷습니다.
안덕계곡을 나와서 감산리사무소로 갑니다.
안덕계곡 입구에 있던 임징하적려유허비가 옮겨진 곳입니다.
영조때 탕평책을 반대하고 소론의 제거를 주장하여 순안으로 유배되었다가
소론이 득세하자 다시 이곳 감산리로 위리 안치된 분이지요.
1년 뒤 이곳에서 다시 한양으로 포박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사했습니다.
정조때 복권되었고 그 5대손 임헌대가 제주목사로 와서 유허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마을에 도움을 주신 분들
1970년대에 회관을 지어주고 전기를 가설해 주신 재일교포들의 기념비를 보면서 창고천 답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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