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하늘타리. 2010. 3. 31. 12:46

모던아트의 대장정 <모네에서 피카소까지>展

(필라델피아미술관전)

 

⊙ 전시일정 : 2009년 12월 16일(수)~2010년 3월 28일(일), 100일간
⊙ 장소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 작품구성 : 마네(2점), 모네(4점), 르누아르(7점), 드가(2점), 세잔(3점), 반 고흐(2점),
    마티스(7점), 피카소(3점), 모딜리아니, 고갱, 루소 등 총 96점

드가_ 발레교실
 모네는 루앙 대성당을 그리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두 번째 부인 오슈데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밤새 악몽만 꾼 적도 있소. 대성당이 나에게 무너져 내리는데, 아 그게 푸른색, 분홍색, 혹은 노란색으로 보이지 뭐요.”
 
  화가의 고통은 그래도 아름다웠다. 대성당이 무너져 내려도 그게 푸른색·분홍색·노란색의 찬란한 색 잔치로 보였다니, 그 경험이야말로 고통과 환희의 二重奏(이중주)라고 할 만하다.
 
르누아르_ 르그랑양의 초상

모딜리아니_ 푸른 눈(잔 에비테른 초상)

  印象主義(인상주의) 회화는 흔히 ‘빛의 그림’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밝고 화사하다. 그러나 그 밝은 빛을 그리기 위해 당시 화가들은 세상의 몰이해와 비난에 맞서 싸워야 했다. 화면으로부터 뻗어나오는 빛 못지않게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 인한 부담이 컸기에 모네도 그처럼 특이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런 환희와 고통의 이중주는 그러나 인상주의 화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인상주의 이래 이른바 ‘모던 아트’의 개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번번이 몰이해와 비판에 직면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뛰어난 작품을 남긴 뒤 살아서 그 영광을 본 이들도 있지만 죽어서야 비로소 환희의 찬가를 들을 수 있었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
 
피카소_ 여인과 아이들

리히덴슈타인_ 금붕어가 있는 정물

  사실 모던 아트 이전에는 뛰어난 미술가가 死後(사후)에 혹은 뒤늦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나 티치아노·루벤스·벨라스케스 같은 古典(고전)의 대가들은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그에 합당한 영예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모던 아트의 주도자들은 빈번히 사후 혹은 늘그막의 영광을 위해 길고 어두운 無名(무명)과 배척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그런 점에서 모던 아트의 선구자들은 이전의 선배들에 비해 당대 대중의 취향이나 감성으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근대가 선사한, 보다 진전된 개인의 자유가 미술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관심사와 내면을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패트론의 주문이나 요구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內的(내적) 필요와 욕구에 의해 작품을 제작하게 되니 그만큼 더 주체적이고 세련된 조형과 미학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반고흐_ 데이지

모네_ 앙티브의 아침

 
  인상파 대가들의 걸작 두루 망라
 
  이처럼 미술가들이 취미, 판단과 창의의 영역에서 커다란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은 모네에서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이들 전위 미술가들의 작품에 이전 선배들의 것과는 다른 특질이 주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미술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개성적이고 실험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특질은 당대 대중의 혐오를 이끌어낸 요소이자 오늘날 우리의 열광과 찬미를 이끌어내는 요소다.
 
  그러므로 모던 아트 선구자들의 작품에서 오늘의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단순히 물리적인 조형 효과로부터만 오는 게 아니라, 이들 작가의 개성과 실험정신, 창조성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동조와 공감으로부터도 오는 것이다. 그것을 감지하고 있기에 우리는 모던 아트를 바라볼 때마다 어느덧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슬론_ 뉴욕 6번가 30번로

  <모네에서 피카소까지>展(전·2009년 12월 16일~2010년 3월 28일)은 이 도전과 창조의 대장정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전시다. 근대의 大家(대가)들이 획득한 빛나는 성취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생생히 목격하게 하는 전시다.
 
  이 시기의 주요 작가들이 두루 망라되어 있고, 그들의 걸작들이 충실히 내걸려 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이 시기 서양 미술의 다양한 스타일과 사조에 대한 것 못지않게 서양 정신의 도전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시대의 인상과 표정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그만큼 차지고 알찬 전시라 하겠다.
 
샤갈_ 한밤중

  전시의 여정은 쿠르베와 코로의 작품으로부터 시작된다. 코로의 풍경을 보노라면 그 사실적인 표현에도 불구하고 고전과 神話(신화)의 시대가 떠오른다. 그의 그림에는 신화의 아우라가 어려 있다. 이렇듯 고전적 시선과 근대적 시선의 분기점을 보여주는 코로의 풍경은,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면 금세 님프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그런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의 땅으로 다가온다. 그런 까닭에 코로의 붓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을 따라 나 있다고 말한다.
 
  쿠르베의 풍경은 그 이정표를 따라 내려와 보다 냉정한 필치로 그린 현실의 이미지다. 쿠르베를 필두로 이제 유럽의 예술가들은 전통이나 관습뿐 아니라 낭만적인 향수나 추억마저 포기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부댕의 해변 풍경은 쿠르베의 전통을 이어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을 표현한 그림이다. 하지만 바라보는 시선에는 서로 차이가 있다. 부댕의 시선은 뒤이어 생겨나는 인상주의의 시선과 이어지는 것으로, 더 이상 전원에 사는 거주자가 아니라 外地(외지)에서 온 행락객의 눈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립시츠_ 머리를 딴 여인

 
  환영받지 못한 ‘풍요의 빛’
 
  물론 이 행락객은 도시로부터 온 도시인이다. 런던과 파리, 베를린이 19세기 중 인구 100만명이 넘는 메트로폴리스가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급속한 도시화와 이를 뒷받침해 준 산업화는 근대 유럽 문명을 동시대의 다른 문명과 크게 차이 나게 만든 고유한 특징이다.
 
  회화에서 도시화와 산업화의 흔적은 행락지로 그려진 전원뿐 아니라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도시의 거리와 굴뚝에서 연기가 솟는 공장 풍경 등을 통해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피사로의 풍경화에 공장의 이미지가 곧잘 등장한다. 인상주의의 환하고 밝은 빛은 이처럼 도시화와 산업화를 통한 富(부)의 축적이 밑바탕이 된 것이었다.
 
피사로_ 퐁네프의 오후 햇살

  하지만 이 ‘풍요의 빛’은 당시 부르주아지에게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가치와 태도로 유럽 문명의 새 주역으로 떠오른 부르주아지와, 역시 합리적이고 유물론적인 시선과 조형으로 유럽 미술의 새 주역으로 떠오른 인상주의는 서로 찰떡궁합으로 잘 어울렸을 것 같다.
 
  하지만 인상주의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몰이해는 꽤 오래갔다. 이는 부르주아지가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후 취향 측면에서 급속히 보수화된 탓도 있지만,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의 토대 위에서 빛을 표현한 인상주의가 오히려 서양미술의 오랜 사실주의 전통을 깨고 궁극적으로 추상으로 나아가는 조형 해방의 길을 트고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 전례 없는 혁명의 예감에 주도 세력으로 안착한 부르주아지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만큼 인상주의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로뎅_ 영원한 봄

  서두에 썼듯 모네는 대성당이 무너지는 모습마저 색채로 인식했다. 인상주의의 큰 공로 가운데 하나는 이처럼 빛의 표현을 통해 마침내 색채를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말년에 그려진 모네의 水蓮(수련) 連作(연작)을 보노라면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색채가 완연한 抽象(추상)의 세계를 띠고 있다.
 
  이 경지에 이르면 회화의 질서는 자연의 질서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르네상스 이래 오랜 사실주의의 조형 질서를 발전시켜 온 서양 미술은 그때까지 한 번도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인상주의 이후 이제 회화의 질서는 더 이상 자연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유례없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기만의 길을 걷게 된다.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고갱과 세잔의 그림에는 바로 그 새 질서의 구축에 대한 전환기적 열망이 또렷이 담겨 있다. 고갱은 열대의 원색에 기초해 肉眼(육안)이 아니라 心眼(심안)으로 본 세계의 색채를 구사했고, 세잔은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한 뒤 공간의 구조마저 의도적으로 어그러뜨렸다.
 
마티스_ 노란옷의 오달리스크

 
  필라델피아와 미국 모던 아트
 
  이들의 이런 시도 위에서 마티스는 고삐 풀린 색채가 그림의 형식과 주제를 통괄하는 野獸派(야수파)의 길을 열었고, 피카소는 대상과 공간을 극단적으로 분해한 뒤 내키는 대로 再(재)조립하는 立體派(입체파)의 길을 열었다. 잭슨 폴록이 말한 것처럼 “회화는 회화 나름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제 모던 아트의 대장정은 마침내 그 대단원에 이르러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조형의 새 질서를 세계 곳곳의 화단에 구축해 놓고 있다. 모더니스트들의 모험은 그만큼 가치있는 투쟁의 상징으로 오늘의 우리 관객에게도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이렇듯 유장했던 유럽 모던 아트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들과 함께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주목해 보게 되는 작품이 미국 모더니스트들의 그림들이다.
 
마네_ 카르멘으로 분장한 에밀 앙브르의 초상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의 미술은 유럽이라는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일종의 지방 미술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사조와 흐름에 민감한 예술가들과 애호가층이 있었고, 이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유럽의 진취적인 흐름이 아메리카 대륙에 지속적으로 유입됐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미술이 국제적인 미술로 성장하는 데 있어 중요한 동력원이 되는데, 필라델피아는 그 엔진의 하나로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뉴욕이나 워싱턴·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 등이 미국의 대표 도시로 각인되어 있지만, 필라델피아야말로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미국의 오늘을 창조한 핵심 도시의 하나다.
 
마티스_ 좌대 위의 누드

  19세기 초 필라델피아는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 이전 독립혁명 당시에는 독립군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20세기 초 미국 미술의 진보 그룹을 대표하는 8인회 멤버를 비롯한 여러 출중한 화가가 이곳에서 나왔다.
 
  필라델피아는 그렇게 미국의 정신과 문화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어떻게 유럽 대가들의 걸작들을 이처럼 잘 갖추고 있는지 그 해답을 이 같은 역사로부터 들을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 그러니까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의 일러스트레이터였던 존 슬론의 도시 풍경에서부터 뛰어난 여성 인상주의 화가로 꼽히는 매리 카사트의 여성 인물화, 팝 아트의 간판스타 리히텐슈타인의 網點(망점) 회화 등은 그 미국적 소화의 과정을 통해 유럽 모던 아트의 대장정을 새로운 여운과 울림으로 증폭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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