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음악편지

가야금 명인 황병기

하늘타리. 2010. 1. 20. 13:48

 

우리시대의 巨匠-가야금 명인 황병기
 
 
천년 세월의 그윽함과 현대의 감성을 한데 아우른
우리시대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법학도에서 음악가로 변신하여
국악과 서양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투명하고 둥근 음의 원형을 찾아헤메는 구도자...
가야금 가을
“어떤 식으로 하건 좋다. 국악기를 전자화해도 상관이야 없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감동적인 작품이 나오는가에 있다.” 바로 그 정신으로 가야금 명인 황병기(66)는 언제나 최전방에서 살아 왔다.
그러나 가열찬 전위 정신이 결코 겉돌거나 휘날리지 않는 것은 정통에 깊이 착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악 지상주의자도 아니다. “국악을 곧 애국심으로 직결시키는 도식이 싫어요.” 때론 가장 전통적인 것에서, 때론 가장 아방가르드적인 것에서 그는 국악의 존재 방식을 탐색해 왔다.
“논어를 보세요. 사달이이의(辭達而已矣ㆍ말이란 일체의 상대에게 통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잖습니까.” 일체의 세련이나 수식 따위는 필요 없다는 그 말은 곧 그의 음악적 본질이기도 하다.
 
자기류의 산조에 도달한 음악세계
그는 한번도 관광차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다. 모두 연주 여행이다. 물 건너가면 반드시 현지 음식으로 끼니를 채운다. 냄새 나는 프랑스 치즈도 마다 않는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태도다.
“가장 자연스러운 나의 모습이죠.” 그는 풍류 가야금(정악)과 산조 가야금(속악)은 물론 합성섬유 현의 17~25현금(琴)까지 두루 통달한 최초의 국악인이다. 가야금의 음역 3옥타브 안에서 전통에서 전위까지, 넓은 행보를 보여 온 그의 음악 세계는 깊어져 마침내 자기류의 산조에 도달했다.
6ㆍ25때 월북해 인민 배우가 된 전설적 명인 정남희의 가야금 연주가 그 실타래였다. 1990년 평양에서 열렸던 범민족 통일음악회에 남측 대표로 참석했을 때 북한에 있던 정남희제 녹음 테이프를 찾았다. 일제 치하에서 정남희가 녹음해 둔 SP판에도 없고 스승 김윤덕이 알려주지 않은 가락이 바로 거기 있었다.
밤의 소리
“내가 50년 세월을 공들여야 했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다 들어있더군요.” 한국 가야금 산조에서는 가장 방대한 8악장 70분짜리의 ‘정남희제 황병기류 산조’가 1998년 그렇게 빛을 보았다. 반세기 가야금 인생의 숙원이 풀리던 때였다.
전통주의자로서 황병기의 정수가 확연히 드러난 작품이 ‘숲’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의 창조력은 베끼기(copy)를 허용하지 않는다. 백성이 즐기던 산조(散調)는 가운데에, 선비의 풍류인 가곡(歌曲)은 앞뒤에 배치한 3악장 구조의 작품이다. 분명 전통적인 것에 뿌리를 뒀지만 사람들은 별개의 음악, 그것도 현대음악으로 볼 정도였다.
 그와는 반대로 혁명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미궁’이다. 현을 뜯지 않고 첼로의 활을 써서 켜서 소리 내는 방식에서부터 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소프라노(현대무용가 홍신자의 구음(口音))까지 다룬다.
1975년 초연 당시 일부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 나가게 만들었던 문제작이다. 요즘이라면 그런 작품을 두고 “엽기적”이라 해서 호사가들의 입맛을 당겼겠지만 당시 국내의 권위주의적 분위기는 그 같은 작품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재공연 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5월 당시 구음의 주인공 홍씨를 비롯, 김일륜(가야금) 미사루 소가(조명 퍼포먼스) 등 그를 좇는 젊은 예인들이 ‘미궁’을 공연하는 등 그의 음악이 다시 조명 받기도 했다.
무한대로 치닫는 음악적 분량
그의 음악에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서로 긴장적 조화를 이루며 살아 있다. 그래서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성과 전통성이 앞서거나 뒤서며 공존한다. 그는 재즈를 듣는다. “1960년대 말 접하게 된 ‘재즈의 성자’ 존 콜트레인을 숭배하죠.
대곡 ‘Africa’나 ‘Selflessness’ 같은 곡은 요즘 들어도 흐뭇해요.” 마음에 드는 음악은 ‘흐뭇하다’, 그렇지 못 한 음악은 ‘서운하다’라고 표현하는 독특한 등급 표시법이다. 재즈에 대한 깊이 있는 언급에서 그의 방대한 음악적 분량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에게 재즈란 단순한 여흥용 음악이 아니라 난해한 이론과 고도의 즉흥성으로 무장된 탄탄한 음조직인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정월 초하루 차례를 지내고 난 뒤에는 스트라빈스키의 충격적 현대 음악 ‘봄의 제전’을 꼭 듣는다는 진술은 그의 예술적 진보성을 유감 없이 드러낸다.
가야금 작품집 4 春雪
‘바람이 대나무 밭에서 불면 대나무가 울지만, 바람이 지나지 않으면 대나무는 소리를 남기지 않는다’. 대학시절 접해 지금도 애송하는 ‘채근담’ 중의 한 구절이다. 그의 가야금 연주에서는 음이 끊긴 자리, 여운이 주는 잔향감이 오래도록 남는다.
그는 놀랍게도 초등학교 3학년까지 낙제생이었다. 게다가 골칫거리 개구쟁이였던 소년 황병기가 마음을 고쳐먹게 된 것은 그의 외당숙(김소열) 덕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틈 만나면 장난치던 그는 급기야 방과후 남아 놀다 당시는 귀하던 유리창을 깨뜨리고 말았다.
집에 온 그는 친히 지내던 아저씨에게 털어 놓고 이야기했다. 아저씨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나와 어제 한 일을 다 말씀 드려라. 그러면 선생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칭찬 받고 영웅처럼 될 것”이라며 격려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옳다 믿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보고 피하지 않았다. 낙제생은 한 학기 만에 우등생이 됐다. 그리고 서울대 법대생이 됐다.
그러나 전국국악경연대회 등에 기악부 1등을 차지하던 이 학생을 서울대 음대 학장 현제명 교수가 눈 여겨 봤다. 마침 대학 졸업 당시 생긴 국악과 강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이었다. 1주일에 1시간만이라도 맡아달라던 권유가 아직도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파헬벨의 캐논 가야금 3중주
대학시절 국립국악원에서 만나 1952년 결혼한 5살 연상의 부인과는 아직도 “자기”라 부른다. 소설가 한말숙씨가 그 주인공이다. 부인은 요즘 컴퓨터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5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작품 ‘아름다운 영가(靈歌)’에 대해 계약금(1,380달러)의 계약금을 보내더니 최근 인터뷰까지 요청한 이탈리아 출판사 등 국내외 출판사들과의 통신 때문이다. 1983년 폴란드에서 ‘영혼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던 작품이다.
둘의 인연은 대학시절 가야금에 매료된 한씨가 국립국악원을 찾아 온 것으로 시작됐다.제삼자에게 서로를 칭할 때는 거리낌 없이 이름을 불러 처음 듣는 이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이들은 젊은 부부다. 서로의 생활에 절대 간여하는 법이 없다. 1층은 부인이, 자신은 2층에 사는 생활이 결혼 이래 쭉 이어져 오고 있다. “밥 먹을 때는 내가 내려가죠.” 봄이면 깎지만 찬바람이 돌기 시작하는 늦가을부터는 기르는 수염 역시 자연스럽게, 자신답게 사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엄청난 恨의 분출 표현
“다음 학기부터는 일을 줄여야겠어요.” 두 가지 커다란 일감이 밀려있는 현재 상태를 고려해 보면 필연적 선택이다. 애제자 이재숙이 주관하는 ‘아시아 금(琴) 교류회’와 10월 열릴 하윤정의 ‘거문고 독주회’로부터 곡을 의뢰 받았기 때문이다.
가야금 작품집 1 숲 2
거기에다 신용보증기금, 이화여대 음악연구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들어 오는 특강 요청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백남준 등 함께 작업했던 거장들의 세계를 조명하는 TV 등의 기획 프로그램에서 들어오는 인터뷰도 물리칠 수 없는 입장이다.
“올림픽 금메달 수상식장이나 이산가족 재회 현장이나 한국인들은 가장 기쁜 순간이면 언제나 울지요. 내면에서는 연습과 고통으로 비롯된 엄청난 한이 분출되고 있는 거죠.” 전통적 가치로 끌어 안은 전위, 슬픔의 옷을 입고 나오는 기쁨, 그를 통해 도달하는 생명력, 바로 이것들이 그가 표현해내고자 하는 우리의 음악이다.
글 : 장병욱 (한국일보 주간한국부 차장 )
 
 
'황병기 가야금의 세계'
한국에서 귀와 정신을 다 즐겁게 하는 음악이라면 단연 황병기의 가야금 음악이다. 향기, 색깔, 분위기, 영상, 느낌 등등 추상적 악상들이 명징하게, 단순명쾌하게, 우아하게 그림같이 나타나는 모습은, 젊은 시절 민속악과 정악을 다 배워 아•속(雅俗)의 경계를 공식적으로 뛰어넘은 해방 후 첫 세대라는 그의 위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20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홍등가의 기생음악처럼만 여겨지던 가야금을 그는 거의 혼자 힘으로 공자 시대 금의 지위까지 끌어올렸다.1936년 서울에서 태어난 황병기는 피난시절인 1952년 부산에서 처음 가야금을 익히기 시작했다. 국립국악원이 부산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이듬해이고, 서울대학교에 처음으로 국악과가 설치된 1959년보다 한참 앞선 때다. 첫 창작곡 <숲>을 1962년에 써서, '창작국악'이라는 새 장르를 모색하는 움직임에 불을 지폈다. 유럽이나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에까지 도입된 '작곡'이니 개인 '작곡가'니 하는 개념이 전통음악 분야에선 아직 생소하던 때다. 음악은 스승에게서 제자에게로 악보 없이 전승되었고, 그러는 가운데 조금씩, 유기적으로, 그러니까 핵심 가락을 유지한 채 그때그때 잔가락을 임의로 덜고 더해 가며 변해가게 마련이었다. 그런 만큼 황병기의 작품은 혁명과도 같았다.
황병기의 초기작품들은 전통 악무(樂舞) 하면 곧 퀴퀴하고 졸박함을 연상케 하던 시절에 나왔다. 한국에서 전통음악은 무지와 미신과 가난에 찌든 분위기를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일제 강점과 전쟁의 상처를 내던지려는 한국인들에게 외면당했다. 반면 서구 클래식음악은 근대성과 산업화와 과학기술을 연상케 했고, 이것들이야말로 한국이 추구해야 할 바라고 식자층은 생각하고 있었다. 전통예술의 멸실을 막기 위해 인간문화재라는 제도가 생긴 것은 그 반작용이었다. 몇 년 뒤, 잃어버린 민중예술을 되살리고 이렇게 되살린 문화를 참 주인인 민중에게 '돌려주자'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인간문화재든 민중운동이든 목적은 하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보존하고 미디어와 전시와 연주를 통해 확산시킴으로써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해 한국인들이 식민지 체험을 딛고 다시 한 번 역사와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찬란한 과거 문화를 재확인하여 민족의 상처를 씻어내는 한편, 민족문화의 정수(精髓)에 다가감으로써 소외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역사를 통한 현재의 구원을 추구했다. 이렇게 '민족음악'은 닻을 올렸다.
황병기는 이 운동의 일원이기도 하고 개척점에 서 있기도 하다(그는 문화재위원이면서 국제현대 음악협회 회원이다). 황병기 작품 다수는 한국이 아시아의 강국으로서 대(大) 아시아 문화의 일원으로 비단길같은 교역로를 통해 서역과 교류하던 통일신라(668∼935)의 영화로운 과거를 상기시킨다. 예컨대 <하림성>은 기록상 최초의 가야금 연주가인 우륵이 551년 신라 진흥왕을 위해 연주한 곳의 지명을 땄다. <침향무>는 인도 향료의 이름을 땄고, 신라풍 범패의 음계가 나오며, 지금은 사라진 중국 및 서역계 악기 공후의 소리를 염두에 두고 썼다. 그러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사라져가는 예술의 수호자로서뿐 아니라, 자기 나름의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며 자기 음악에 힘을 더할 길을 찾아나서는 역동적 예술가로서도 황병기는 곡을 썼다. 가야금을 위한 신곡을 쓰는 것은 물론, 자기 작품의 예술적 해석과 자기의 음악철학을 드러내어주는 글들도 써냈다. 존 케이지같은 작곡가의 작품을 연구 해석한 글을 펴내기도 했다. 1985년에는 초빙교수로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글과 작품과 연주를 통해 학계와 일반대중에 던진 그의 메시지는 (그가 서울법대를 나왔다는 사실과 굳이 연관시키지 않더라도) 전통음악이 퀴퀴하고 졸박함, 망가진 산하, 촌티나는 해학, 전쟁의 상흔 따위 이미지를 불식하고 근대적 지성과 전지구적 음악경제학의 세계로 진입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황병기같은 작곡가 또는 음악가들은 끊임없이 문화의 이면에서 영감을 구하면서 전통음악과 연주 실제의 유기적 고리를 이룬 가운데 탄생하였지만, 21세기와 바깥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을 쓴다. 황병기는 거목에 돋아난 새순과도 같은 존재다. 그의 음악은 가야금만의 언어로 말하면서, 동시에 셰익스피어가 아니라 제임스 볼드윈, 페트라르카가 아니라 이탈로 칼비노,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파블로 네루다의 언어로 얘기한다. 황병기와 같은 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전통음악은 아픈 과거의 연상을 지워버린다. 모더니티가 더 이상 서양음악의 동의어가 아니고, 서양음악이 더 이상 과학기술의 동의어가 아니다. '전통' 진영이든 '바로크'나 '고전'이나 '포크', '동양'이나 '서양' 진영이든, 오늘을 사는 작곡가가 어떤 악기로든 곡을 쓰면 그것이 바로 모더니티이며, 정신과 귀를 동시에 즐겁게하는 황병기의 음악 속에 바로 이런 모더니티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길 - 황병기(가야금)/김정수(장구)
이 작품에 대해 작곡가는 “신라 고분에서 발견되는 페르시아 유리그릇의 신비로운 빛에서 작곡 동기를 얻었는데, 그 악곡명은 고대 동서 문물이 교역되던 통로의 이름이면서 신라적인 환상이 아득한 서역에까지 펼쳐지는 비단같이 아름다운 정신적인 길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한다.
제 1장은 미묘하게 변화해 가는 리듬을 타고 환희와 슬픔이 얼룩진 신비로운 선율로 되어 있다. 제 2장은 빠른 4박자의 리듬에 의한 선율이 차츰 높은 음역으로 고조되어 격정적인 화음과 리듬에 의하여 절정을 이루면서 끝난다. 제 3장은 화음으로 장식된 고요한 선율로 되었는데, 중간에 북소리와도 같은 저음부의 리듬이 출현하여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내고 있다. 끝으로 제4장은 새로운 주법으로 연주되는 특이한 고음의 분산 속에 음산한 저음이 네 번 울리고 이어서 저음군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다가 그치면 종소리를 연상시키는 화음이 네 번 울리고 제 1장의 주제 선율이 재현되면서 전곡이 끝난다.
미궁(迷宮)- 황병기(가야금.장구)/홍신자(보이스)
1975년 초연되어 전례없는 파문을 일으킨 후 아직도 국내 음악사상 최대 문제작으로 평가되는 곡이다. 가야금을 선율악기 이전에 무한한 소리요소가 담긴 사운드 박스로 접근하여 이를 언어와 음악적 요소를 극소화시킨 인간 육성과 결합시켜 고도의 음악적 완성도를 거두어 낸 황병기의 영원한 화제작이다.
찰현악기의 활 , 장구채 , 거문고 술대 등을 이용한 가야금의 파격적인 조음(造音)과 이에 호응하는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인성(人聲)이 신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20분에 육박하는 전곡을 극적인 분위기로 끊임없이 채색하여 나간다. 이 작품은 작곡자의 음악적 정신의 깊이와 탁월한 표현력이 일구어 낸 창의적 조형미와 구조적 미학의 쾌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발표된 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참신한 빛을 잃지 않고 있는 이 작품은 여러 측면에서 창작음악의 영원한 고전으로 이미 자리매김을 굳건히 한 작품이다.
침향무(沈香舞)- 황병기(가야금)/김정수(장구)
기존의 가야금산조와는 다른 새로운 음계를 선보인 <침향무>는 1장에서는 전통적인 장단과 선율로 동양화와 같은 깊이 있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펼쳐지고 2장에서는 분산화음으로 서역의 이국적인 정취를 불러일으킨 후 오른손의 스타카토를 반주로 왼손에 의한 서정적인 가락이 노래하듯이 흐른다. 3장에서는 이 곡의 제목에 나타나듯 침향이 서린 속에서 춤을 추는 듯한 분위기의 휘모리 가락이 왼손의 화음을 타고 환상적으로 전개된다. 정열적으로 진행되던 선율이 갑자기 멈춘 다음 이어지는 트레몰로는 이전까지는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연주법으로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점차 커지며 긴장감을 주다가 다시 피아니시모로 약해진다. 약해진 소리의 여음이 사라질 즈음에 이어지는 영롱한 분산화음은 이전까지의 혼돈을 일시에 잠재우는 천사의 날개짓을 연상시킨다. 혼돈과 해결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3장의 이 부분이야말로 침향무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침향무가 실린 음반은 79년도에 스테디셀러로 자리하며 국악애호가를 늘리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