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죽성마을

하늘타리. 2009. 12. 9. 22:32

 

“.......을해년(1875, 고종12) 봄에 나라의 특별한 恩典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윽고 한라산을 탐방할 계획을 정하고, 士人 李琦男에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중략)...

일행이 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의지하여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訪仙門ㆍ登瀛丘’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사람들의 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景) 중의 하나이다. ....(중략)....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꽤 즐비한 인가가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면암집에 실려 있는 유한라산기의 일부입니다.

 

죽성이라는 마을이름에 문득....

“내가 매일 방선문계곡입구와 한천다리를 건너 죽성마을을 지나 출근을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갑자기 죽성마을안에 있는 절새미를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죽성마을....

예전에는 오등동의 중심마을이었다 합니다.

고려시대 후기부터 상당히 큰 규모의 절이 있었다 하고

그 절 남동쪽에 마을주민이 공동식수로 사용하는 절물이 있고 그 옆 너른 터에 팽나무를 당신목으로 하는 절새미당이라 부르는 꽤 큰 당이 있었다 합니다.

큰 마을답게 마을 주위로 대나무가 운치 있게 둘러 쌓여 있어 죽성마을이라고 불리워졌다는 곳입니다.

(작년 봄에 갔을 때만 해도 절터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옛사찰에 쓰였을 듯한 빗살무늬 기와 조각이 한구석에 모여 있었습니다만....)

절이 폐사된 후 그 폐사지에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의 기마부대가 주둔하였다가

4.3때 토벌대가 주둔하게 되면서 그 마을과 인근의 모든 가옥은 불타 없어지고 주민들은 도남, 광양, 오등봉일대로 소개 되면서 마을이 사라지게 됩니다..

지금은 큰길가에 있는 최근에 지어진 팬션뒤로 기도원과 몇 군데의 농원 그리고 음택들이 산재해 있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절새미당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길 왼쪽 농장이 절왓 또는 불탄터라고 불리어 지던 옛절터이자 기마부대주둔지이자 토벌대 주둔지였던 곳입니다

농장 중앙으로 도수로가 있습니다.

기마부대 주둔당시 절새미에 집수로를 만들어 이 도수로를 통해 물을 대었던 흔적입니다.

(오늘은 많은 비가 온후 가랑비가 계속 내려 땅이 질퍽거려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기와조각 사진과 도수로 사진은 자료로 대신합니다)

 

 

 

그 서릿발 같던 이형상의 시대에도 남아있던 절새미당은 일제 때 절새미에 시멘트 집수조가 만들어 지면서 당터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팽나무가 죽어서 썩어가고 있고 그위로 덩쿨들이 엉키고 있습니다 

 

 집수조외부(집수로)가 엉망이듯 집수조내부도 엉망일겁니다

당은 그 뒤쪽 대나무 숲속 한 공터에 초라하게 자리 잡고 있다가 4.3때에 이르러서는 폐당직전까지 갑니다.

 

다행히 4.3토벌의 광풍이 어느 정도 사라진 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죽성마을 출신인들이 정월초 어느 날을 정해 신당을 다녀가기 시작한 후 단출하게 참으로 단출하게 시멘트블럭을 이용하여 제단과 울타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벽돌에 시멘트를 바른 후 거기다 설세미할머니라고 송곳 또는 못으로 쓴 글씨가 있고 구역을 나누어 왼쪽 작은 구역에는 산신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어느 당신을 모시는 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년에 절새미당옆 농장 도수로를 보고 나오는데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한분이 당에 가신다면 메를 싸서 올라오시기에 누구를 모시냐고 물었더니 상시당또를 뵈러 간다고 하던데...그런가? 해야겠죠..

이곳으로 들어오는 골목입구에는 흰돌산기도원이라는 개신교시설외에는 인가가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물어본들 잡귀 들린 사람으로 인식될 겁니다( 그런데 저는 천주교신자입니다...)

 

오도롱마을이라고도 하는 이호2동에 소왕상시당이 있습니다.

시왕맞이제에 의하면 상시당은 이승에서 죄 없고 공을 쌓은 사람이 영생하는 곳이죠.

그래서 상시당은 따로 모신다고 알고 있는데.....

참 그러고 보니 저승에서 영생하는 곳에 죽성도라는 곳도 있지요.

이 마을 이름 죽성이 그곳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또라는 말은 한라산신(하로산또와 그 자손) 또는 마을수호신(백주또, 일레또 등)을 칭할 때 쓰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이 당은 원래 당신보다 윗계열인 일반신중에 산 또는 절을 차지한 신이나 누군가를 위한 굿당이었는데 보수하면서 일월조상(혈연의 조상이 아니고 조상대부터 모셔온 마을특성에따른 수호신 ..천지일월같은 o씨할망 o씨하르방)을 더 중하게 모시게 된 게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넓은 구역에 설세미할머니라고 쓰면서 자리를 두 군데 만들었고 왼쪽에는 기왕에 계시던 산신자리를 만든 게 아닐까.......요?(그냥 내생각....)

 

 

절새미에서 나와서 산신이 계실만한 곳.. 산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한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이어지고

한쪽으로는 스산한 풍경이 이어집니다

 

길이 끝나는 무렵에 향대부 누구누구 묘라는 묘비가 보입니다.

향대부가 무었을 뜻하는가를 알기 위해 비석뒷면을 찬찬히 읽었습니다만 향대부가 어느 직책을 말하는가는 알지 못했고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묘재죽성동 남구명전병좌라는 글입니다.

그러니까 이묘소위치가 죽성동에 있는 남구명의 밭의 북쪽이라는 이야기인데...

남구명이라하면 조정철, 김춘택과 함께 조선조 제주 삼문학이라고 불리운 분입니다

그분의 밭이 이 묘지 바로 뒤에 있었다는 이야기 즉 그 분이 여기 사셨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고 보니 조정철의 부인 홍랑이 조정철의 정적이던 제주목사 김시구에게 맞아 죽은 후 가마니에 쌓여져 처음 묻힌 곳이 이 옆 한천가 십리밖이라고 하니 그 곳도 어쩌면 이마을 일수도 있겠습니다.(홍랑의 무덤은 조정철이 귀양에서 풀린 후 제주목사로 부임해 와서 옛 제주농고자리..지금의 홍랑로 부근..에 모셨는데 도시가 개발되면서 유수암리로 옮겼습니다.)

아마 제주역사중에 결혼한 자기 부인을 못잊어 제주로 돌아온 분은 조정철이 유일무이핳 겁니다.

승정대부라는 (증직이던 공명첩당상관이든) 김만일의 딸을 소실로 들였던 간옹 이익도 떠나고 난후 두번다시 연락조차 하지 않았고 이기온님이나 그 후손이 족보에 올라간 것은 그때로 치면 한참후 지금으로 거슬러가면 얼마않된 때의 일입니다..

 

생각이 옆으로 갔네요.

하여간 돌아가신 분의 유택은 찾는 사람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내려오다가 또 하나의 묘비를 봅니다.

제주보육원 원장 탁명숙장로

이화여전 출신이죠. 박은식이 결성한 대한노인단의 강우규의사와 함께 사이토총독에게 폭탄을 던질 것을 모의하였고 그 일이 실패로 끝나자 상해로 망명한..... 당대에는 김활란을 능가하는 활약을 보인 분이죠.

광복 후에는 제주도에서 보육 사업을 하셨고 여성으로는 드물게(지금도 어렵죠. 아직도 갑론을박중..) 장로에 취임하신 분입니다.

폭탄모의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지만 광복후 대한부인회인가 그런 끝발있는 조직의 제주지부장이셨는데 그 때 호사하시면서도 사실 수도 있었는데 가족있는 아이도 먹을게 없었던 그 척박한 환경속에서 제주도 보육사업을 시작하시고 나름의 성과를 거둔 분이라는 점에서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던 분인데...그분과 그분아드님의 가족묘지가 여기 있었네요.

 

큰 길로 나왔습니다.

넓은 묘정을 가진 묘지가 있네요.

동자석이 다른 곳보다 좀 크다 싶어서 가까이 갔더니 문인석처럼 보이네요.

비문을 보겠습니다

문인석은 아이겠죠....

용양위라 하면 무관이죠. 이조때 설치한 중앙군사조직인 5위중 좌위의 대장이라는 거지만

통상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또는 부호군)은 증직에 많이 쓰이죠.

 

돌아가신 분에 그게 무엇이 중요하겟습니까만...... 육지부에서는 헌작의 예가 달라지니 돌아가신분에게 과공하여 비례를 저지를까 저어됩니다 .(너무 고색창연한 말투를 썻나요?..저어하다는 말은 서울 옛말로 염려하며 걱정한다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구름에 가려진 한라산을 보면서 오늘의 헤매임을 마칩니다.  

 


  

Debussy
Arabesque No.1 in E major
Bertina Mitchell,  Ha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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