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이곳 저곳을 다니다 보면
도로변 한쪽에
비각안에 모셔둔 비석을 종종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 궁금해 다가가 보면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세워졌을 송덕비나
젊은 나이에 덧없이 숨져간 이들에 대한추모비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종종 효자비나 효열비와 같은 정려비를 보게 됩니다.
육지에서는 정려가 내려오면 향리의 영광이라해서 관청 또는 마을 유지들이 정려문을 세우고
그 정려를 보관하는 정려각을 세우는게 일반인데
이곳 제주에는 정려문이 없이 정려비만 서 있고
그것도 주로 후손들이 세운것이 많아
조정의 인증을 받지 않고 그냥 후손들이 추모비형식으로 세운 것 들이 많구나 하고 생각하고
별로 신빙성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주문화유산답사회에서 고영철 선생님 인솔로
제주 서부의 정려비 탐사를 한다고 하여
어디에 어떤게 있나를 알아보고 싶어
다른 일 다 제치고 참가하여 좋은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정려비라는 것이
이씨 조선시대에 보이지 않는 이데 올로기 강요수단으로
사회를 더욱 뻑뻑하게 만든 것이지
그것이 사람다운 생활에 어떤 보탬이 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생각하고
말그대로 세워진 형식이 육지와 제주도가 다르기 때문에
어디에 어떤게 어떤 형식으로 세워졌는가만 궁금했기 때문에
내용은 간략하게만 소개하겠습니다
오등동에 있는 이항춘처 박씨 열녀비와 충성스러운 몸종 고소락의 비
고소락은
위 사진의 주인공 열녀 박씨의 몸종으로
사내와 같이 거처하게 되면 그 주인을 가까이 모실수 없다하여
평생 시집을 가지않고 60세에 죽을 때까지 처녀의 몸으로
주인을 모셨으니 충(忠)을 갖췄다 하여.... 정려.
광령리 효자 진대석 마애
1600년대에 부근 가까이에 두개의 효자문이 있었는데 동네가 황폐해 지면서 효자문이 없어 졌답니다.
1924년 3월에 진옹 이응호가 그 부근을 지나다가
그 중 한명인 진대석의 행적을 듣고 효자문 없어진 것이 아쉬어 효자진대석이라고 바위에 刻을 헤두고 갔답니다.
그 바위가 있던 그곳도 도로가 확장하게 되자 현재 자리로 최근에 옮겨 놨답니다
신엄리 삼정문
오등동 열녀비의 주인공인 박씨부인과 그 노비. 그리고 뱍씨부인의 아버지 세사람이 정려를 받은 것을 기념해 세운 곳입니다.
열녀 박씨의 아버지 박계곤이라는 분도 하늘을 감동시킬만큼 효성이 뛰어 났다고 합니다.
육지부에서 정려된 편액을 보면 통상 충, 효, 열 순으로 순위가 있습니다만
제주도에서의 충은 임금에 대한 충이 아니라
그 주인에 대한 충일경우가 많기 때문에
효, 열, 충순으로 중요도가 메겨지네요.
아래사진에서 보면
박계관의 효에 대한 편액이 최상위
박씨 부인의 열에 대한 편액이 차상위
고소락의 충에 대한 편액이 제일 아래 걸리지요.
곽지리 김천덕 열녀비
본인도 노비이고 그 남편되는 사람도 사찰의 노비입니다.
20년 결혼생활 후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숨지자 주변에서 또다시 혼인을 시키려 하자 머리를 깍고 미친척하였고 60이 넘도록 수절하였답니다.
백호 임제가 이 이야길 듣고 김천덕전을 지어 알려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 왔습니다
최근까지 곽지리사무소 옆에 있었다 하여 그리로 찾아 갔으나
원래 있던 곽지해수욕장옆으로 옮겨져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곽지해수욕장 옆 정려비와 과물(석경수)
금성리 이필완 효자비 외
애월읍 금성리 마을 입구에는 6기의 정려비가 있습니다
(5기는 함께 1기는 따로)
비석거리에서 보이는 과오름
따로 서 있는 조사창처 좌씨 효열비
봉성리 강위보 처 오씨 열녀비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자 스스로 목을 메어 남편과 같은 무덤에 묻혀 있답니다.
귀덕리 김명집 효자비
부친이 병을 얻어 위독하자 왼손손가락을 잘라 약에 화합하여 드렸더니 그 부친이 오래 생존하였으므로...정려함
돌로된 정려문이 세워져 있으며 정문 상단부에 斜籠의 형태가 음각되어 있음
효자비에서 바라본 한라산
점심먹으러 한림항으로..
한림항에서 본 비양도 모습
한수리 정언집처 고씨 효열비
남편이 병들어 백방으로 약을써도 효험이 없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마시게 하니 살아나 20년을 더 살았으므로.....
유림이 추천하여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긴다
대림리 김홍조 효자비
부부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효자비
아버지의 병이 위급하여 회생할 가망이 없자 손가락을 끊고 피를 내어 끊어졌던 목숨을 되살리어...
그 부인은 한가정을 화목하게 한 공적으로 작설을 세움
옹포리 문처웅 효자비
없어졌음
.....
두모리 고윤문 효자비
어머니 성미가 조급하고 사나워도 때리면 맞고 피하지 않음...
아내를 가져 어머니 마음에 맞지 않으면 몸소 뜻을 받드는 것만 못하다하여
평생을 독신으로 노모의 수발을 듬
용수리 절부암
曺娥의 抱屍와 같은 하늘이 낸 열녀
용수리에서 본 차귀도 일대
용수리 진명서처 고씨 효열비
남편이 병을 얻어 위독해 지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살아나게 하니....정문을 세움
정문과 비석은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 용수리에 거주하던 그 자손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당시 육지부에서도 일제의 지방행정관들은 이러한 충효,효열비 설립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으며 충효를 숭상하는 민족답게 일본천황에게도 충성하라고 권장하였다고 합니다
조수리 효부 김성열 행적비
문모씨와 결혼해 1남 1녀를 기르던 중 남편이 둘째, 셋째 부인을 얻어 아이들 세명을 더 낳고 타지로 나가 유랑하다 73세에 귀환하여 죽을 때까지
생과부노릇을 하며 궁핍한 가운데서도 시부모 종상(3년상)과 소제를 다 치루고 시부모와 친부모의 비석을 세웠다는 행적비
세멘트를 바른 것이 관리에 좋은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바닥에 새로 바른지 얼마 않되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후손이 주변에 살거나 번창한 듯 함.
무릉리 강인홍 효자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손에 자란 후 장가가서 그 부인과 함께 할아버지 봉양함에 정성을 다하였으므로 표창함.
조정이 아니라 지금의 유교인의 전국적 조직인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라고 할 수 있는 일제당시 大聖文學院에서 어떤 표창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표창일시가 공자탄생 2471년이니까 1918년 조선과 대한제국은 이미 없어 진지 오랩니다.
묘에서 바라다 본 녹남봉
무릉2리 문달민 문달복 충효비
문달민은 단지효자로 효자비
사촌인 문달복은 단지효자 에 추가하여 철종인산때 흙역사를 하였으므로 충효비
정려는 소화 13년 (1938년)에 세움
신평리 박성림처 오씨 열녀비
시집가는 날 남편이 말에서 떨어져 죽자 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시부모가 생존하시므로 정성껏 봉양하여 효도를 다하였음.
1941년 4월에 비석을 세움
오늘 정려비 답사중에 정문(旌門) 상단부에 그려진 홍문의 문양과 그 이유에 대해 몇몇 궁금해 하는 분이 계셔서 제가 아는 바대로 대답드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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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문(旌閭門: 육지부에서는 정문이라는 단어를 거의 안씁니다. 정려문이라 하는데 제주에서는 정문이 자연스럽게 쓰이고 또 그렇게 표기되어 있더군요)은 충신, 효자,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붉은색으로 단장을 하고 그 액자에 충(忠) 또는 효(孝), 열 (烈)과 함께 직함을 새긴 홍문을 말합니다.(육지부에는 정려를 받은 인물이 살던 마을입구나 집앞에 세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행위를 표창하기 위하여 정려문을 내리는 국가의 특전을 "작설지전"이라 하며, 나라에서 내린 정려문을 보관하고 기리기 위하여 세운 집을 정려각(旌閭閣)이라 합니다.
육지에서는 정려문이 있는 경우에는 거의 정려각이 서있는데 제주에서는 이러한 정려각이 만들어 진 곳이 많지 않습니다.
그대신 정려가 내려오면 정려문을 만들고 그 문의 이유를 알리는 정려비를 세우는 것 같습니다.
홍문(紅門:홍전문(紅箭門) 또는 홍살문(붉은 화살이 박힌 문이라는 뜻으로 紅箭門의 일반호칭)이라고도 합니다.)은 정려를 받은 곳에만 세운 것이 아니고 능.원,묘,궁궐,관아에도 세우고 서원에도 세웁니다. 능,원,묘(여기서 廟는 사당 또는 왕족의 무덤),궁궐,관아에는 신성한 곳이라는 표시로 세웠고 서원에는 고명한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기 때문입니다. 이중 정려를 받고 세우는 문을 정려문이라고 하지요(綽楔또는 棹楔이라고도 합니다) 이 홍문은 둥근기둥 두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斜籠이라고 한답니다) 그 중간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태극 문양위에 이지창 또는 삼지창이 세워져 있습니다.
육지부에서는 홍문을 나무로 만들어 세우지만
제주에서는 돌이 많은 특성탓인지, 아니면 목재를 이용한 대문을 만들지 않게 된 이유와 같은 건지는 잘 알 수 없지만 돌로 홍문의 형태를 만들어 세우고 윗부분에 홍문의 화살부분을 음각하여 묘사한후 비석의 글씨를 빨갛게 칠하는게 상례로 되어 있습니다.(육지부에서는 절대 비석의 글씨를 빨갛게 하지 않습니다)
이 홍문에 붉은 물감을 칠한 이유는 적색은 신성한 곳을 나타냄과 동시에 오방색중 벽사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 나타내어 잡귀나 부정한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육지부 모든 곳에서 동짓날에 팥죽을 쑤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이나 문 근처의 벽에 뿌리는 것 역시 빨간색으로 악귀를 쫓는다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거의 모든 정려비와 일부의 일반 묘비에 빨간색 글자를 쓰는 것 으로 생각됩니다)
삼지창도 잡귀를 막기위한 용도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삼지창의 의미에 대한 설명은 생략)
가운데 태극문양은 삼태극을 주로 사용하며 횡으로된 이태극, 종으로된 이태극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중 삼태극은 고조선시대부터 종종 사용한 문양으로 하늘(○), 땅(□) 그리고 사람(△)의 융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도 종묘와 모든 고궁, 조선 태조의 무덤이 있는 동구능을 비롯한 모든 왕릉에서 볼 수 있으며, 그리고 이태극은 음과 양의 조화와 합일을 나타낸 것으로 망자의 공간인 능과 묘에서는 삼태극과 함께 종종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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