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 에서 화북까지 이르는 연북로가 있습니다.
아!! 화북까지는 아직 안뚤렸군요.
지금은 연동에서 영송학교지나는 지점까지 약 5Km정도 됩니다.
2005년 2월경.. 개설되었는데...
왕복 6차선으로 차길은 뻥 뚫렸고 사람 다니는 길에도 탄석바닥재를 설치해 저녁에 심심할 때 달리기하면 딱 좋더라고요.
그런데 몇 번 다니다 보니 뭔가가 허전해요
뭐가 허전한가. 봤더니 제주도 많은 길이 도로 중앙분리대를 화단 삼아 나무를 심어놓았는데 여기는 그런 거는 커녕 인도에도 가로수가 없어요.
(요새 도로 가운데에서 나무 심는 공사가 한창이네요)
그래서 도로 양쪽이나 두리번거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어느 날 제주여고 4거리 부근에 탐라 종묘라는 곳이 생겼습니다. (그 전에도 있었는데 못보고 지나쳤는지도 모르죠...)
여러 가지 궁금증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늦은 시간에 공연한 오해를 받을것 같아 그냥 스쳐 지나쳤습니다.
그러다가 탐라 종묘문화재단이라고 쓴 커다란 팬널옆에 기우뚱 서있는 안내판을 읽게 되었습니다.
문경공 고조기묘라고......
제주인 출신으로 최초로 현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수상을 지냈다고....
예종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1129년에 시어사(詩禦使)를 지냈다고...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제압했다고....
돌아와서 관련 자료를 찾아 봤습니다.
묘청의 난 때 행적에 대해서는 1135년 묘청의 난 무렵에 고조기님은 공부원외랑으로 계셨다는 것 외에는 찾지못했고..
守司空上柱國을 거쳐 平章事를 지내셨으니까 꽤 높은 벼슬을 지내신 분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평장사 이전에 수사공 상주국을 하셨다니 수상직무대리를 재상이 되기 전에 하셨다는 말씀이 되어 헷갈립니다.
아마 사공 상주국은 加資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름대로 사전 지식을 갖추고 사진기 챙겨 들고 찾아왔습니다.
날씨 좋은 날 다 보내고 하필 가랑비내리는 날 왔네요.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된 이유를 찬찬히 읽어보니 탐라국관련이나 고조기님의 사적등으로 인해서가 아니고 고조기님의 묘가 고려시대 방묘로서 축조방식이 그 이후방식과 다르고 장군석 무인석 동자석등의 석물배치방식에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아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답니다.
입구에 사전지식을 얻으라는 의미에서 설치한 비석에서 부터 헷갈립니다.
일반적인 사료에서는 백제에 예속되어 있다가 (동성왕 20년 498년에 탐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자 그를 징벌하기 위해 동성왕이 무진주까지 출진하자 탐라에서 다시 시하의 예를 갖춰 공물을 바쳤다는 백제본기기록 참조)백제가 쇠락해지자 신라에 들어가 작위를 받아 그 통제하에 있다가 그 후 고려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
고씨 종친회 비석에는 고을나 14세손 후, 청, 계가 신라에 입조해서 성주, 왕자, 도내 직위를 받았다고 하네요 (그 당시 신라는 박혁거세가 막 나라를 세운 시기고 막상 성주시기는 고려초기에 고자견왕이 고말로를 입조시켜(938년) 성주와 왕자작위를 받아내려옴으로써 고자견왕은 5년만에 끝나고 고말로성주에서 시작한다고 알려져 있지요.)
양씨 종친회 자료가 새겨진 비석에는 378년에 탐라국주 양탕이 신라 내물왕에게 작록과 사성을 받아 성씨를 良에서 梁으로 바꾸었다 하고
부씨 종친회 자료가 새겨진 비석에는 신라 무열왕(650년 전후)때 양탕과 함께 신라에 입조 왕자의 작을 받고 번신이 되었다고 하니 그냥 햇갈릴 뿐입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 묘소와 석물입니다.
이은상이 지은 비문입니다.
"고려 睿宗(예종) 2년 서기11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남쪽지방으로 나가 고을을 다스릴 적에 청백으로 이름을 들내었고, 그로부터 계속하여 벼슬길에 있으면서 무릇 20여년 仁宗(인종) 8년 서기1130년에 이르러서는 侍御史(시어사)가 되었으나 권신 李資謙(이자겸)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工部員外郞(공부원외랑)에 좌천되었고, 얼마 뒤 옛 자리로 왔으나 역시 조정의 잘못을 들어 상소를 거듭하므로 公을 뽑아 禮部侍郞(예부시랑)으로 올렸지만 실상인즉 臺官(대관)의 직책을 뺏은 것이었다.
다시 10여년이 지나 毅宗(의종) 원년 서기1147년에는 守司空上柱國(수사공상주국), 다음 해에는 政堂文學參知政事(정당문학참지정사)을 거쳐 3년에는 中書侍郞平章事(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고, 잠깐 한 때 탄핵을 입어 강등되었으나 총신 金存中(김존중)의 힘으로 곧 다시 복귀되었으며,
5년에는 中軍兵馬判事兼西北面兵馬判事(중군병마판사겸서북면병마판사)에 임명되었더니 드디어 11년 서기1157년 2월 3일에 세상을 여의자 王은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관원을 보내어 호상케 하며, 諡號(시호)를 文敬公(문경공)이라 하였다."
山莊雨夜(산장에 밤비)
昨夜松堂雨 어제 밤 송당(숲속에 소나무로 지은 집)에 비 내려
溪聲一枕西 베개 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平明看庭樹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宿鳥未離栖 자던 새 둥지를 떠나지 않았네. 번역:누군가 모름
탐라사 왕위 즉위연표에 보면 938년에 1세 성주 고말로로 시작되어
92년 뒤인 1030년에 2세 성주 고유가 토산물을 고려에 받쳤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1088년에 3세 성주 고조기가 탄생되었다 하고 4세성주 고정익이 1157년에 시작 1214년까지 재위했다고 하는데...
이은상의 비문처럼 3세성주 고조기님이 1107년(19살)에 과거에 급제후 남쪽지방에 나가 다스린 고을이 탐라라면 최소한 50년을 탐라성주로 계셨다는 건데 어떻게 고려 조정에 가서 봉직을 할 수 있었다는 건지 알 수 가 없네요.
다음 사진처럼 유향좌수개념이 아닐까 하면 너무 불경스러운 건가요??
묘역내에 있는 또 다른 묘소입니다
묘표석 글자가 완전히 마모되어 읽을 수 가 없습니다
왕위전과 성주전이 있습니다. 들어갈 수 없을테니 한바퀴 돌고 가겠습니다.
문경공의 묘소를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합니다.
탐라의 역사는 신화와 역사의 절묘한 결합으로 엮은 대서사시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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