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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누군가가 탐라순력도에 나오는 오름에 한번씩 가보았으면 한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과연 어떤 그림에 어떤 오름이 나오나 하는 궁금증에 탐라순력도를 다시 공부하며 쓴 글이다.
각각의 그림에 나오는 오름을 각 그림별로 정리 당시 불리던 이름 그대로 기재하였고 개별오름의 특성과 식생에 대해서는 내 블로그 구석구석에 사진과 답사 기록이 있어 다시 기재하는 것을 생략하였다. 현장에 갈 기회가 있으면 그곳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그림은 다빈치에서 가져왔고
내용은 디지털 향토문화대전과 탐라순력도의 종합적분석책자 에서 주로 인용하였다.
이글에서 개인적인 의견은 5%정도로, 조금 달리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보충하였다.
Ⅰ. 탐라순력도는 ?
조선 숙종때인 1702년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에 부임하여 제주도내 각 고을을 순력하면서 순력의 내용을 담은 그림이다.
순력은 관찰사 등이 관할지역을 순회하던 일을 일컫는 것으로 조선시대 각 지역의 순력은 대체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관찰사가 주관하여 시행하였다. 제주도의 경우 전라도 관찰사를 대신하여 제주목사가 수행하였다. 순력을 마친 후 모두 순력후 장계를 올려 결과보고에 가름하였다. 전해지는 개인문집에서의 제주도 순력기록은 1602년 관련기록을 남긴 김상헌의 남사록과 1695년의 순력을 기록을 남긴 이익태의 지영록이 있고 기록화로는 탐라순력도가 있다.
이형상은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간의 순력 28도와 이에 추가하여 평상시의 행사 모습을 담은 11도를 채색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부임초 작성한 제주도와 주변 도서의 지도인 한라장촉 1도를 합한 40도에 이형상 자신이 매 그림의 상단에 네 자로 제목을 달고 하단에 설명을 첨가한 후 서문 2장을 작성 후 귀향하며 그려진 호연금서 1도를 추가하여 .비단으로 장식하여 총 41도 43면의 탐라순력도라 명명한 화첩을 작성하였다.
탐라순력도는 조선시대 제주의 지리, 문화, 군사, 풍속, 의례 등 전반적인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글에서는 41도 그림에 대한 개별 내용을 파악한 후 행사설명과 위치식별용으로 오름이 그려진 25점의 그림 내의 오름을 정리하였다.
Ⅱ. 탐라순력도 내용설명
1. 한라장촉
(1) 내용
1702년 4월 15일 제작된 당시 제주도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과 제주도를 중심으로 주변지형 및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그린 그림으로 탐라순력도의 첫 번째 그림으로 편철하였다.
한라산주변을 장엄하게 바라본다는 의미로 한라장촉이라 제명하였다.
3읍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으며 심각성읍 관아의 위치와 9개 진(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의 소재지를 적색으로 표시하여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그 외에 목장·산악·도로·마을명·하천뿐만 아니라 80여 개의 포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포구의 분포를 짐작할 수 있다.
제주의 둘레는 480리, 큰길의 둘레 378리, 동서 170리, 남북 73리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제주도를 중심으로 주변 도서를 24방위로 표시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이 한 장의 그림으로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주도, 한반도 남해안, 유구 및 일본지역, 중국동해안 지역의 지명과 안남국, 섬라국 등을 표기하였고 당시 실재했다고 전해지던 여인국까지 나타나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69개소
감산, 고근산, 고산, 군산, 궁산, 당산, 도내산, 두산, 록산, 발산, 성산, 식산, 영산, 영주산, 와호산, 좌보산, 청산, 파군산.(18)
가문악, 갈악, 갑선악, 거문악, 곽악, 궤악, 당악, 대량수악, 두지악, 문악, 반의악, 방하악, 병악, 병화악, 봉개악, 삼의양악, 상악, 소흘악, 송악, 시련악, 아악, 안좌악, 염통악, 용목악, 우부악, 초악, 판포악, 파문악, 피문악, 항악, 흑악(30)
고내망, 고촌망, 귀산망, 남산망, 달산망, 도내망, 독자망, 망, 모슬망, 서산망, 수망, 수산망, 수산망, 예조망, 왕가망, 이두어시망, 입산망, 자포망, 저성망, 지미망,토산망(21)
(3) 각오름의 특성과 식생 : 동서남북 각 1개소 선정 현장설명
2. 승보시사
(1) 내용
1702년 6월 17일에 실시한 승보시의 광경이 그려져 있다. 승보시는 본래 성균관 유생들에게 치루어진 소과 초시에 해당하는 시험인데, 개성과 제주에서는 자체적으로 시행되었다.
제주의 경우는 1639년(인조 17)부터 실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익태의 지영록에 의하면 ‘1694년 8월에 제주선비 10여명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시행했고 5~6명에게 상과 상물을 주었다. 그 후 2년마다 승보시를 실시하여 2명을 선발하겠다고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상시적으로는 1696년부터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1702년에는 윤6월 17일부터 연 3일간 시취(試取)하여 응시인 12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시(詩)·부(賦) 각 1인씩 2명을 시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주 문인들에 대한 기록은 충암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 이형상의 남환박물 모두에서 긍정적이지 않다.
김상헌은 순력때 정의현청에서 고강을 실시하였으나 응시한 교생 10여명 모두를 불합격시키며 더불어 말을 할자가 매우 적었다라고 기록하였고 대정현 점검때 대정향교 소속 유생들이 ‘향교에 훈도가 없다 후생과 동몽들이 강학이 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성묘도 황폐해 진다는 호소를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100년이 지난 후 이형상은 ‘제주향교는 위로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이친다. 대정현 향교는 대성이하 20위 현판은 깍이고 훼손되어 자획도 불분명하고 신위의 위치도 구분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후 이형상은 향교를 격식에 맞게 수리하였고 삼읍 향교와 각 면의 훈장을 뽑아 교육 환경을 조성 후 제주향교에 277명, 정의향교에 161명, 대정향교에 42명의 유생을 선발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5년 동안 과거 합격자 3명이 배출되었고 1716년에는 3명이 동시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3. 공마봉진
(1) 내용
1702년 6월 7일에 실시한 진상에 필요한 말을 각 목장에서 징발하여 제주목사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공마봉진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정현감 최동제를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진상하는 말은 10종 253필이고 내역은 다음과 같다. 어승마 20필, 연례마 8필, 차비마 80필, 탄일마 20필, 동지마 20필, 정조마 20필, 세공마 200필, 흉구마 32필, 노태마 33필 등이다.
추가로 흑우 20수가 포함되어있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공마는 1년에 4~500필을 진상해야 한다고 되어있다 공마봉진에 223필의 말들은 연중 공마물량의 절반정도로 추정된다.
그리고 흑우에 대해서는 목장 세곳에 620두가 있는데 매년 20두를 봉진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제주도는 공마로 인한 폐단이 매우 심했음을 알 수 있는데, 공마의 물량이 많아서라기보다는 관리들이 착복하기 때문이다. 특히 진상되는 말과 관련한 폐단은 1628년부터 1635 년 동안 기록된 이건의 제주풍토기에 의하면 ‘매번 신임 관리가 오고 갈 때마다 우선 체임 진상마를 김만일에게 거둬 삼 년 동안 잘 먹여 기르고 재를 익히게 하였다가 직책이 바뀔 때에 임하여 바치게 한다. 김만일의 말이 많다하더라도 혹 진상에 합당한 말이 없다면 관가가 다른 집 사내아이 종을 가두어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이와 같이 해도 얻지 못하면 채찍으로 때리는 일이 생기고, 그 처를 가두고 자식을 장형에 처하기에 이르니 말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4. 감귤봉진
(1)내용
각 종류의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될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이다.
망경루 앞뜰에서 귤을 상자에 넣어 봉하는 과정 등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제주목사가 연의각에서 주관하고 포장할 감귤을 목사 앞에서 점검한 후 바구니에 담아 여성들이 포장장소로 옮긴다. 포장장소는 천막이 퍼져있고 천막밖에서는 볏집을 마련하고 상자를 제작한 후 상자안에 볏집을 깔고 포장하는 여성들에게 전달된다. 포장을 담당하는 여성들은 옆에 감귤이 가득 담긴 바구니에서 감귤을 포장하여 상자에 넣는 순서로 이루어 졌다.
당시 봉진한 수량은 다음과 같다. 당금귤(唐金橘) 678개, 감자(柑子) 25,842개, 금귤(金橘) 900개, 유감(乳柑) 2,644개, 동정귤(洞庭橘) 2,804개, 산귤(山橘) 828개, 청귤(靑橘) 876개, 유자(柚子) 1,460개, 당유자(唐柚子) 4,010개, 치자(梔子) 112근, 진피(陳皮) 48근, 청피(靑皮) 30근 등이다.
귤의 진상은 9월부터 시작하여 매 10일 간격으로 1운(運)에서 20운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천신을 2차하고 진상을 21번 보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위 원칙이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5. 귤림풍악
(1) 내용
망경루 후원 귤림에서의 풍악도이다. 당시 제주읍성 안에는 동과원·서과원·남과원·북과원·중과원의 5개소와 별과원 등 6개소의 과원이 있었는데, 이 과원은 북과원으로 추정된다. 과원에서 풍악을 즐기는 모습이 상세히 보이며, 과원 둘레에 대나무가 방풍림으로 심어져 있다.
이 그림은 감귤이 나무에 달린 상태에서 풍악을 즐김을 표현하였지만 주 내용은 감귤을 다 따고 난 후 감귤총수확량 점검에 더 의미를 둔 그림인듯 하다. 그림에 의하면 1702년 제주 3읍의 결실 총수는 당금귤 1,050개, 감자 48,947개, 금귤 10,831개, 유감 4,785개, 동정귤 3,364개, 산귤 185,455개, 청귤 70,438개, 유자 22,041개, 당유자 9,533개, 등자귤 4,369개이다
이수동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나라의 둔전을 파하고 다섯 개의 과원을 설치하였다. 백성들이 몹시 편하게 여겼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1526년부터 감귤생산이 국가의 관리하에 들어 간 듯하다.
1602년 남사록의 기록에 의하면 ’감귤의 결실이 잘되지 않았을 때는 매년 7~8월에 목사 군관이 촌가를 순시하며 귤유가 있는 곳에서 붓으로 하나하나 점을 찍어 장부에 기록 하고 가을이 되어 귤이 익는 날에 장부와 대조하여 수납한다. 바람과 비에 손상을 입었든가 까마귀나 참새가 쪼아 먹은 것이 있으면 집주인에게 그 나머지를 내놓아 보이라고 하고 그 렇게 못할 때는 장부에 적힌 대로 바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민가에서는 귤유 보기를 독약과 같이 보고 재배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귤나무가 있는 자는 또한 귤나무를 잘라버려서 관가에서 문책하는 걱정을 없애려는 자가 많았다.‘라는 기록을 보면 제주민들이 귤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려움과 억압적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잘 알 수 있다.
과원의 수는 이형상 목사에 이르러서는 총 42곳에 이르게 된다. ’이 과원들을 수직군 880명에 밤낮으로 맡아 지키게 하였기에, 백성들은 그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라고 하였다‘. 한 과원에 20명 정도가 배속되는데 이들은 과원을 밤낮으로 번갈아 지키고, 또한 방호소나 진성 등에서 맡은 원래의 업무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형상은 이렇듯 백성들의 고생을 이야기하면서도, 백성들의 어려움과는 별개로 과원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운치를 남환박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가을과 겨울 낙엽 지는 시절에 홀로 과 원만이 봄빛으로 단장하여 녹음이 하늘을 가린다. 노란 열매가 햇살을 튕겨내며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 어떤 것은 고니의 알 같고 어떤 것은 달걀 같다. 간간이 매화가 있고 치자까지 섞여 있기도 하다. 그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읊조리다 보면, 겨울 추위의 절기를 느낄 수 없다. 각처의 과원이 대체로 이와 같지만, 특히 제주목의 북과원과 정의현의 성산과원, 대정현의 고둔과원이야말로 가장 빼어난 절경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6. 교래대렵
(1) 내용
1702년 10월 11일 시행한 진상을 위하여 교래에서 사냥을 하는 그림이다.
당일 사냥에 참여한 관원은 삼읍의 수령과 감목관이며, 사냥에 동원된 인원은 말을 타고 사냥하는 마군 200명, 걸어서 짐승을 일정한 장소로 모는 보졸 400여 명, 포수 120명이다. 사냥을 통해 얻은 물건은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궝 22수이다.
특히 포수가 120명 참가하였는데 주로 활을 사용 한 사냥 장면을 위주로 묘사하였고 소록산과 대록산 사이에서 총을 사용하여 사냥하는 모습의 1명과 총을 들고 사슴을 쫓는 1명의 포수가 등장한다.
이 그림은 탐라순력도가 만들어 지는 계기가 되는 그림이지만 이 교래대렵의 사냥하는 장면은 장소와 인원수만 다르고 포수가 2명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익태의 ‘지영록’에 묘사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 그림은 순력이전의 행사를 그린 것이지만 탐라순력도 제작의 계기가 된 그림이다.
이형상이 순력간 대정에서 오시복과 함께하는 기간 중 교래에서의 진상을 위한 사냥에 대해 큰 인상을 느꼈음을 이야기했고 오시복은 이에 화답해 그때의 행사장면과 순력장면등을 그림으로 남겨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순력이 끝난후 원치않게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된 이형상이 화공을 불러 작업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7개소
대록산, 소록산 (2)
다라비악, 흑악 (2)
구두리, 여운영아리 (2)
판매동산 (1)
(3) 각오름의 특성과 식생 : 2~3개소 선정 현장설명
7. 산장구마
(1) 내용
1702년 10월 15일에 산장에서 말을 몰아 일정한 장소에 모으고 마필수를 확인하는 그림으로 조천지경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이다.
제주판관·감목관·정의현감이 참여한 가운데 결책군 2,602명, 구마군 3,720명, 목자와 보인 214명 등이 동원되고 있다. 성판악 남쪽에서 벌어진 구마는 남북 약 40리, 동서 약 60~70리의 넓이를 차지하고 있으며 목책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녹산장·상장·침장으로 생각된다. 각 구역마다 말을 취합하는 데 필요한 원장과 사장이 설치되어 있다. 원장은 우마를 취합하기 위하여 만든 원형 목책이고, 사장은 취합한 우마를 1두 또는 1필씩 통과할 수 있게 만든 좁은 목책 통과로이다. 원장은 다시 미원장과 두원장으로 구분되며, 그 중간을 연결하는 것으로 사장이 있다. 우마를 먼저 미원장에 몰아 놓고 사장을 통해서 점검한 후에 두원장에 취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이다.
산마감목관 김진혁이 표기되어 있는데 산마감목관은 김만일이 국가에 말을 바친 공로를 인정받아 역대로 그의 후손들이 역임해 온 자리였다. 당시 이형상은 해당 직임의 세습을 폐지하였다.
점검한 말의 수는 2375필이라고 하며 그림속에는 말의 무리속에 사슴도 포함되어있다
그림 한구석에 다른지역으로의 거리가 적혀 있는데 서귀포와는 30리 의귀는 5리, 효생장은 25리 떨어져 있다고 표시하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6개소
대구록산, 소록산 (2)
성판악, 토적악, 고편악, 신산악, 반도지전지악, 함라악, 추다악, 불탄대악, 사손장직악, 물좌질악, 여운영이리악, 장올리악, 건을근악, 마을좌질악, 병오리악, 거문악, 궤악, 구두리악, 대천악, 갓극라지악, 산구음부리악, 지악, 황악(23)
팽목동산(1)
(3) 각오름의 특성과 식생 : 2~3개소 선정 현장설명
8. 성산관일
(1) 내용
순력을 시작하기 전인 1702년 7월 13일의 탐승기록이다.
우도를 지난 해상에서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으로 성산 일출봉에서 해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다.
제명과 그림모두 공무적 성격보다 사적인 관람임을 밝히고 있다.
일출봉 입구에 진해당의 옛터가 표시되어 있고, 그 위로 일출봉의 정상에 있는 성산망까지 오르는 각교가 표시되어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식산악 (1)
성산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9. 우도점마
(1) 내용
1702년 7월 13일에 이형상목사를 대신하여 정의현감이 방문하여 우도 목장 내에 있는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그림에 제주목사를 상징하는 깃발이 없다.
마필은 262필이며, 이들 말을 관리하는 목자와 보인은 23명이다. 우도의 모습이 동두(東頭)라 표기된 곳을 머리로 하여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당시 우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민가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이원조 제주목사가 장계를 올려 우도 목장의 개간을 허락받은 1843년경부터이다.
조선조 각종 기록에서 우도에 대한 묘사는 임제의 ‘남명소승’을 참고한다.
임제는 배를 타고 우도를 직접 관광했고 우도가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 혹은 비슷하다.’라는 내용을 가장 먼저 기록하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성산 (1)
지미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0. 화북성조
(1) 내용
1702년 10월 29일 화북진에 소속된 성정군의 군사 훈련 모습을 그렸다.
당시 화북진의 조방장은 이희지이며, 성정군의 규모는 172명이다. 군대의 점검과 아울러 군기의 수효도 일일이 확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화북성과 화북포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별도포구의 경우 군선 1척이 정박한 모습으로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화북진성의 자세한 지형과 성의 위치, 그리고 성내의 건물 배치 뿐만 아니라 민가의 위치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11. 조천조점
(1) 내용
1702년 10월 29일 조천진 성정군의 군사 훈련과 인근 제2소 목장의 둔마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목사일행이 조천진으로 입성하는 모습이 웅장하게 묘사되었으며 조천진의 위치와 연북정을 비롯한 진내의 건물 배치 상황, 민가의 위치, 해안에 흩어져 있는 여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조천진은 서산봉수와 조천연대·왜포연대·함덕연대를 관할하였다. 조천진의 조방장은 김삼중이며, 휘하의 성정군은 423명이다. 군기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또한 제2소 목장의 둔마 505필과 목자 87명을 점검하였다.
그림의 위쪽으로는 일자장에 있는 말들을 이소장에 결장소에 설치된 사장으로 목동들이 몰고 들어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는 점마를 진행하는 장면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12. 김녕관굴
(1) 내용
1702년 10월 30일에 조천에서 별방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김녕굴을 관람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 김녕굴 입구가 두 개 그려져 있다. 첫 번째 입구에서 군졸들이 횃불을 들고 벽을 비추고 있으며, 순력 중에 타는 가마는 굴 밖에 놓아두고 8인이 메는 가마에 이형상 목사가 앉아 굴을 관람하고 있다. 그림 위쪽에 있는 두 번째 동굴의 경우 군졸 몇 명이 점검하고 있는 장면이다. 굴의 높이 30척, 넓이 20척, 길이 5리로 기록되어있다. 오늘날의 사굴과 만장굴을 합하여 김녕굴이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입산봉수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1개소
입산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3. 별방조점
(1) 내용
1702년 10월 30일 별방성에서의 군사 훈련과 성정군·군기·우마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별방진·황자장·지미봉수·하도의탄리의 민가, 연대의 위치가 상세하다. 별방진은 만조시에 바닷물이 흘러들어 오도록 되어 있으며, 동창과 객사 건물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별방진의 조방장은 김여강이고, 성정군은 423명으로 화북성의 성정군 수효와 같다. 황자장의 우마수는 흑우 247수, 말 946필이며, 목자와 보인은 모두 187명이다. 별방진 내에 위치해 있던 동창에 보관되어 있는 곡식은 2,860여 석으로 부기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별방성은 주 동쪽 75리에 있으며, 돌로 성벽을 쌓았는데 둘레가 2천 3백 90척이고 높이가 7척이라고 하였다. 동쪽과 북쪽에 문이 있다. 1510년 6월, 이전의 후임으로 목사에 부임한 장림이 축성하였다. 그는 이 지역이 우도를 통해 왜선이 가까이 접근할 수 있 는 곳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김녕방호소를 혁파하고 별방진을 축성하게 되었다.
임제의 ‘남명소승’에서 별방진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임제는 우선 기후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곳 땅의 기운은 항상 따듯하기 때문에 눈이 내리면 바로 녹는다.”라고 했고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아침에 별방성을 나서는데 여수가 나를 호위하도록 기병 열 명을 동원하였다. 내가 사양하여 그만두도록 했으나 여수가 말하기를 “이곳은 왜국과 단지 물 하나를 사이에 둘 뿐이니, 대비를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해서 부득이하게 기병을 앞세우고 떠났다. 전면에 포구가 있었는데 마침 썰물 때여서 십 리의 모래사장이 펼쳐져 한없이 드넓었다. 좌우익으로 나눠 종횡으로 달리게 하니 그들의 말 모는 솜씨가 매우 능숙하였다. …… 그들은 모두 고라말을 타고 갓을 썼으며 붉은 가죽옷을 입고 전후로 내닫는 것이 실로 원숭이처럼 날렵했다. 처음에는 놀라고 의아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 여자들이었다. 목관이 일부러 관기를 보내 그런 기예를 벌인 것이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4개소
대랑수악, 둔지악, 첩악 (3)
지미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4. 별방시사
(1) 내용
1702년 11월 초1일 별방성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별방조점의 그림과 비슷한 형태이지만, 별천자둔마를 점검하기 위한 원장과 사장을 별방진성 안에 마련해 놓았다. 두포연대와 지미봉수의 위치와 우도의 일부가 나타나 있다. 활 쏘는 일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208인이며, 교사장은 10명이다. 당시 활 쏘는 방식에는 몇 보의 거리에 서서 또는 말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형태와 유엽전을 가지고 쏘는 형태 등이 있었다.
별방진성 내에는 별천자둔마(別天子屯馬)를 점검하기 위한 원장과 사장을 옮겨놓고 말을 점검하고 있다. 또한 동창 아래에 있는 군기고 마당에서 활과 화살을 늘어놓고 점검하는 모습도 보인다. 성 북쪽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부분을 조수로 표시했으며, 그 앞에는 별방포가 있다. 성의 누각에서 동쪽을 향하여 과녁을 설치해놓았는데, 사원들은 누각에 올라 활을 쏘고 있다. 좌우에는 사원들이 깃발과 무기를 들고 서 있다. 화살이 명중했음을 알리기 위한 북이 마련되어 있고, 붉은 옷을 입고 곳곳에 서 있는 자들은 활쏘기를 가르치는 교사장으로 보인다. 이날은 각 면의 교사장 10명과 사원 208인이 참여하였고, 목사 이형상은 누각의 가장 오른편에 앉아서 활 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말타기와 무예는 본래 이 고장의 장기이지만, 집이 가난한 데다가 부역이 무거워 무예를 닦을 겨를이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그리하여 세 읍에 명하여 제주에서 50인, 정의에서 7인, 대정에서 5인의 교사장을 차출하여 공사천을 막론하고 모두 활쏘기를 가르치도록 했다. 그 결과 제주에서 1,270여 인, 정의에서 350여 인 대정에서 160여 인의 사원을 뽑았고 그들 중에서도 만점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자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곧, 제주도 전체에 68인의 교사장, 1700여 인의 무사가 있었는데, 그중 별방진에서 이뤄진 시사에서는 교사장 10인, 사원 208인이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4개소
대랑수악, 둔지악, 첩악 (3)
지미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5. 수산성조
(1) 내용
1702년 11월 2일 정의현 수산진성에서의 성정군 군사훈련을 그린 그림이다. 수산진성·수산봉수·협재연대·구수산고성의 위치가 상세하다. 수산진성내에는 건물 배치 상황뿐만 아니라 샘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다. 정의현감 박상하가 참석하였으며, 조방장 유효갑을 비롯해 성정군 80명 및 군기에 대한 점검을 실시하였다. 수산진 관할의 봉수로는 지미·성산·수산 봉수가 있고, 연대에는 협재·오조포· 종달 연대가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수산소 서남쪽에 있는 수산평에서 고려 충렬왕 시절에 원나라에서 온 탑라적 등이 너른 들판에 소·말·낙타·나 귀·양 등을 방목하였다고 하였다. 용·사·화자 목장이 수산소에 속하는데, 원나라는 수산소와 그 일대를 남송과 일본의 정벌을 위한 병참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조선에 들어서는 제주 목사로 부임했던 안무사 한승순의 건의에 따라 1439년 (세종 21)에 9개의 진성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7년에는 이경록목사가 성산 일출봉을 천혜의 요새로 판단하고 진성을 그 부근으로 옮기면서 폐성되었다가, 2년 후인 1599년(선조 32)에 성윤문 목사가 본래의 성을 다시 활용하기에 이른다.
수산진성을 쌓을 때의 전설이 있다. 쌓아놓은 돌담이 자주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자, 갓난아기를 제물로 바쳐 성곽에 묻자 무너지지 않고 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10살 무렵의 어린 소녀를 바쳤다는 설도 있다. 이후 성 내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계속 들려오자 그 넋을 달래주기 위해 세운 신당이 ‘진안할망당’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3개소
성산(1)
식산악 (1)
수산망(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6. 정의조점
(1) 내용
1702년 11월 2일 정의현성에서의 군사 훈련과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정의현성·달산봉수의 위치와 읍외촌·궁산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정의현성의 3문(동문·서문·남문), 객관·관아·창고·문묘 등의 건물 명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정의는 본래 제주 동도였는데 태종 16년(1416)에 제주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따라 정의현, 대정현으로 나누어 각 각 현감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의현을 지금보다 동쪽 27리 부근에 두었 다. 그러나 이 지역은 우도에서 너무 가까워 새벽과 밤에 군사들의 고각소리가 들려오고, 큰바람이 불어 여러 차례 흉년이 들었으며 왜적이 쳐들어오는 사태도 번번이 일어나 백성들이 살기 어려웠다. 이로 인하여 세종 5년(1423)에 안 무사 정간의 건의에 따라 현을 진사성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의현은 읍내 1리, 동면 10리, 서면 12리의 크기였고, 민호는 1,436호이며, 전답은 140결이었다고 한다. 제주 목사가 순력할 때는, 현과 진성을 중심으로 조점을 비롯한 시사, 강사를 진행하여 무기와 군사시설, 및 군사력을 점검하였다. 성장 2인, 치총 4인, 성정군 664명과 제반 군기는 물론 목자·보인 모두 190명, 마필 1,178필, 흑우 229수, 창고의 곡식 4,250여 석을 점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방위를 식별하기 상당히 애매하다. 이것은 정의현성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을 바라본 시선과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 시선을 조합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영주산악 (1)
달산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7. 정의양로
(1) 내용
1702년 11월 3일 정의현성에서 치루어진 노인잔치를 그린 그림이다. 정의현성 내의 건물 배치 상황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목사가 순력할 때 각 현에서 양로연을 벌이는 것은 관례화되어 있었다. 노인잔치는 객관앞에서 이루어졌는데, 춤추는 모습 등이 보인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노인은 80세 이상이 17인, 90세 이상이 5인이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오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라고하며 ‘질병이 적어서 일찍 죽는 사람이 많지 않고, 나이가 80~90세에 이르는 자가 많다. 이 지방 사람에게 물으니 모두 말 하기를, “옛날에는 120여 세의 사람도 많았는데, 을병(乙丙: 1695~1696)의 대기근에 전 염병으로 거의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인잔치에 온 사람은 102세가 1인, 101세 기 2인, 90세 이상이 29인, 80세 이상이 211인이었는데, 근력이 장건하여 쓰러질 듯한 기세가 거의 없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영주산악 (1)
달산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8. 정의강사
(1) 내용
1702년 11월 4일 동지일에 정의현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시취하는 그림이다. 조선 시대에 각 군영의 군사를 지휘하는 장관은 매월 두 차례, 겨울철에는 매월 한 차례 경서와 병서 강독, 활 쏘기 등을 가르치고 시험하였다. 도훈장인 유학 고세웅, 각면 훈장 5명, 각면 교사장 7명,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 166명 등이 참석한 가운데 87명의 사원이 재주를 겨루웠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사원은 350여 명이었다. 정의현성이 직접적으로 관할하는 봉수와 연대가 나타나 있다. 봉수는 남산봉수·독자봉수·달산봉수·토산봉수등 이고, 연대는 말등포연대·천미연대·소마로연대·벌포연대 등이다.
정의강사는 이전의 그림인 정의양로와 같은 구도로 그려졌으나 객시를 정의강사에서는 정면으로 그려 3칸이 명확히 식별되나 정의강사에서는 측면을 보아 그려 3칸이 4칸처럼 보인다.
이형상은 객사에 앉아서 활을 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며 객사에서 병고 너머에 있는 과녁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여러 개 표시되어 있어 한창 강사가 진행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사원은 87명으로 이들은 관아 쪽에서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대기하고 있고, 차례로 객사에 올라가 활을 쏘았다. 대문 밖에는 붉은 옷과 검은 관을 쓰고 늘어서 있는 강유들이 있는데, 이들은 차례로 10명 단위로 들어가 목사 앞에서 배운 것을 점검받았다.
이형상은 제주 목사로 재임하면서 향교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미비한 부분을 점검하고 보완하였으며, 유생을 길러내어 문과 합격자가 나오는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706년에는 어사 이해조에 의해 직부전시 하는 문과합격자 3인(정창원, 오정빈, 고세태)이 모두 이형상이 뽑은 강유 내에서 배출 되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영주산 (1)
달산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19. 정방탐승
(1) 내용
1702년 11월 5일에 배를 타고 정방폭포를 탐승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폭포 위에 있는 소나무를 강조해서 그린 인상이 짙으며, 그 아래 정방연에서 배를 타고 놀이를 즐기고 있다. 정방폭포는 길이 80여 척, 넓이 5척임을 알 수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정방연은 정의현에서 서쪽 68리에 있으며 폭포의 위에는 큰 소나무들이 있고 밑으로 바다가 있어 폭포가 바다에 직접 떨어져 가히 제일명구이다’라고 하였다.
정방폭포는 매우 뛰어난 경관으로 인해 여러 문인의 작품이 남아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20. 천연사후
(1) 내용
1702년 11월 6일에 천지연폭포에서 활을 쏘는 광경을 그린 그림으로 폭포의 반대편에 과녁을 설치하여 화살을 쏘고 있는 모습이다.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 메고 그 줄을 이용해 좌우로 이동하고 있는 추인의 모습이 이채롭다. 이와 같은 추인은 주로 기병들의 화살을 쏘는 표적으로 이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과녁을 향해 쏜 화살을 상대편에서 추인에게 꽂으면, 이쪽에서 줄을 당겨 추인에게 꽂힌 화살을 건네받는 것이다. 천지연폭포의 길이 50여 척, 넓이 10여 척으로 정방폭포에 비해 폭포의 길이는 짧으나 넓이는 그 배에 해당한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천지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서귀에서 서북쪽에 있다 뾰족한 봉우리가 서로 끌어안아 활처럼 굽어졌고, 좌우를 둘러 마치 화살을 묶어 놓 고 그 가운데에 꽂은 것 같다. 돌아보면 왼쪽 어깨 쪽으로 폭포가 떨어지는데, 길이는 정방 다음이다.’
이형상은 이 그림의 제목을 천연사후(天淵射帿)라 햐였으면서도 그림에는 ‘㫌義西歸泉池淵瀑(정의서귀천지연폭)이라하여 ‘천(泉)’으로 표기한 것이 특이하다.
그리고 순력 날자는 11월 6일로 서귀조점 다음날이지만 서귀조점보다 앞으로 편철되어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21. 서귀조점
(1) 내용
1702년 11월 5일에 서귀진의 군사 조련과 군기 및 말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서귀진의 위치와 주변 섬의 위치가 잘 나타나 있다. 서귀진 내의 건물로 병고와 창고, 그 외 객사 등이 보인다. 서귀진 북쪽에는 구서귀성이 보이는데, 성벽이 군데군데 무너져 있으며 해당 지역을 말을 기르는 곳으로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자들이 말을 모는 모습이 보인다. 화폭의 가운데 위치한 서귀진의 모습은 가운데 상단에 객사가 있고 왼편에는 병고가 있다. 바닷가 방향으로 창고가 있다. 성의 입구는 동서쪽으로 나 있으며 군사들이 성을 빙 둘러서 깃발을 들고 있다. 성 가운데 병사들이 이형상을 중심으로 도열 해 있는데, 깃발을 들고 있거나 악기와 북 등을 들고 있는 자, 활과 화살을 메고 있는 자 들이 그려져 있다. 병기고만 기와지붕이고, 나머지는 모두 띠로 지붕을 이었다. 그만큼 척박한 지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윤시동의 증보탐라지에 ‘이 진은 남쪽 바다 끝에 있다. 진 아래에 백성들이 사는데, 비렁뱅이 수호에 지나지 않는다. 형편이 잔약하고 세력이 외로워 모롱이와 같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면 장악하여 방어하기가 어려우므로 숙종 신미(1691)에 백성을 가려 뽑아 진 아래 주인이 없는 밭을 획급해 주고 들어와 살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을 땅에 묶어두어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게 한 것이다. 만약 척박하여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해버리면 다시 잡혀 와야만 했으니 백성들의 고역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책을 시행한 지 40년 만인 1733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10여 호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을 위해 조 8섬지기 분량에 대한 세금을 감면하는 혜택을 주었으며, 사람들은 성 동쪽에서부터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와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조점에는 정의현감과 더불어 대정현감이 함께 참석하였는데, 다음 순력 지역이 대정현 지역이기 때문에 제주목사를 배행하기 위해 참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서귀진 조방장은 원덕전이었으며, 육지부에서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성정군 68명과 군기를 점검하고, 목자와 보인 39명과 말 237필도 아울러 점검하였다. 서귀진 소속의 봉수는 자배봉수·호촌봉수·삼매양봉수이고, 연대는 금로포연대·우미연대·보목연대·연동연대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1개소
삼매양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22. 현폭사후
(1) 내용
1702년 11월 6일에 현재의 중문 천제연폭포에서 활 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대정지경’임을 표시하는 글자가 보이며, 천제연폭포를 상폭과 하폭으로 구분해 놓고 있다. 지금의 천지연을 그린 천연사후에서는 지명을 泉池淵이라 표기하였고 지금의 천제연을 그린 이그림에서는 지명을 天地淵이라 표기하였다. 참고로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천지연폭포는 천지연(天池淵), 천제연폭포는 소천지연(小天池淵)이라고 하였다.
활쏘기는 하폭(下瀑)에서 진행되었는데, 천지연폭포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포의 좌우에 줄을 동여매고 그 줄을 이용해 추인이 좌우로 이동하고 있다. 폭포의 길이 50여 척, 넓이 5척이라 기록하였다. 상폭 서쪽 암벽에는 임관주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고 한다. ‘천제연 열린 곳에 큰 폭포 흘러내려/ 총석(叢石)으로 옮겨오고 깊은 못에 쏟아지네/ 추인(芻人)은 화살을 지고 공중을 걸어가니/ 제일 기이하고 볼만한 것이 이 사후(射候)가 아닌가’라는 시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23. 고원방고
(1) 내용
1702년 11월 6일에 고둔과원의 옛터에 들러 왕자구지에서 귤나무 과원을 관람하고 음악을 듣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20번 그림인 천연사후와 22번 그림인 현폭사후가 같은 날에 행해졌다. 고둔과원은 대정현성에서 동쪽으로 55리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 용흥동 속칭 염돈마을 운랑천 부근의 염돈과원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과원그림 좌측에 ‘왕자구지’라 표시된 곳은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고득종의 별장터라고 하고 이익태의 지영록에는 탐라국때 왕자가 기거하던 곳이라 한다. 이 터에서 기녀들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가운데 풍악을 즐기고 있다. 과원의 방풍림으로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과원의 밖에는 참나무 밭과 매화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운랑천으로 추정되는 물과 그 물을 이용하여 부근에 논이 형성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과원에서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운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가을과 겨울 낙엽 지는 시절에 홀로 과 원만이 봄빛으로 단장하여 녹음이 하늘을 가린다. 노란 열매가 햇살을 튕겨내며 나무마다 영롱하고 잎마다 찬란하다. 어떤 것은 고니의 알 같고 어떤 것은 달걀 같다. 간간이 매화 가 있고 치자까지 섞여 있기도 하다. 그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읊조리다 보면, 겨울 추위 의 절기를 느낄 수 없다. 각처의 과원이 대체로 이와 같지만, 특히 제주목의 북과원과 정의현의 성산과원, 대정현의 고둔과원이야말로 가장 빼어난 절경이다.
제주의 과원은 1526년 이수동 목사가 다섯 곳의 방호소에 과원을 설치하여 감귤나무를 심어, 방호소에 있는 군사들에게 맡겨 이를 지키는 일까지 겸하 게 하였다. 그 후 점차로 더 설치하여, 이형상 목사에 이르러서는 총 42곳에 이르게 된다. 이 과원들을 수직군 880명에 밤낮으로 맡아 지키게 하였기에, 백성들은 그 괴로움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 이라고 하였다. 한 과원에 20명 정도가 배속되는데 이들은 과원을 밤낮으로 번갈아 지키고, 또한 방호소나 진성 등에서 맡은 원래의 업무를 보아야 했기 때문에 매우 고생스러웠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24. 산방배작
(1) 내용
1702년 11월 10일에 산방굴에서의 배작의 광경을 그린 그림이다.
송악산, 형제도, 군산, 감산, 용두 등이 그려져 있으며, 도로와 산방연대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사계리 포구가 흑로포로 표기되어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산방산은 대정현 동쪽 10리에 위치해 있으며, 산의 높이 200장(丈), 산의 둘레는 10리로 산 전체가 돌로 형성되어 있다. 남쪽 언덕에 큰 굴이 있는데 굴암이라 이르며, 물이 굴 위로부터 한 방울씩 떨어진다. 그 남쪽에 암문이란 굴이 있는데, 그 벽 사이가 1척이며, 깊이가 100척, 길이 50여 척에 이른다. 그 북쪽에 큰 굴이 있는데,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으나 피생문이라 한다.’라 하여 세 개의 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암문과 피생문에 대한 기록은 이익태의 지영록에도 보인다. 그러나 현재 암문과 피생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산방산의 형성과 관련한 전설로, 사냥꾼이 사슴을 잡고자 활을 쐈는데, 사슴에게 맞지 않고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맞추는 바람에 화가 난 상제가 한라산의 뾰족한 부분을 내던져 뽑힌 부분은 백록담, 던져진 부분은 현재의 산방산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그림은 가운데 산방산과 산방굴이 중심이 되어 있고 바다의 수평선이 멀리 보이도록 그렸다. 산방산은 특이한 모양의 바위 절벽에 나무가 빽빽하게 조화되어 자라고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마치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세이다. 먼바다에 송악산이 보이고 가까운 바다에는 형제도가 있다. 산방산 바로 오른편에는 산방연대와 용두가 보인다. 용바위가 물이 잠기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물결이 지게 표현하였다. 그 아래로는 해변을 따라 지어진 초가에 흑로포가 위치하고 있다. 포구에는 깃발을 세워둔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고, 말과 가마도 보인다. 산방산의 왼편으로는 군산과 이날 함께 배작하는 오시복이 유배생활을 하는 감산마을이 보인다.
대정현 지역에 도착한 이형상은 감산 지역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오시복을 만나 3일간 그와 함께 먹고 자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형상은 제주목사로 온 이후 오시복에게 여러 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와 함께 제주 목사로서 행정의 자문을 구해 왔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군산, 송악산 (2)
감산은 마을지명으로 표기된 것으로 유추된다.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25. 대정조점
(1) 내용
1702년 11월 10일에 대정현의 제반 사항과 대정현성 성정군의 군사 훈련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대정현은 본래 서도였는데, 1416년(태종16)에 비로소 현감을 두었다. 동쪽으로 정의까지 35리, 남쪽으로 큰 바다까지 10리, 서북쪽으로 제 주까지 27리 떨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형상은 대정에서 조점을 행하고 다음 날인 11일에 배전례와 양로연을 행하였으며 12일에는 강사를 행하면서 11월 12일까지 3일간 머물렀다.
객사, 군기고, 관청, 향청, 작청, 도청, 마방 등의 건물 위치와 말을 점검하기 위한 원장과 사장이 표시되어 있다. 당시 대정현의 편제는 읍내 1리, 동면 9리, 서면 2리로 모두 12리였고, 민호는 797호이며 전답은 149결이었다. 성장 2인, 치총 4인, 성정군 224인, 목자와 보인 123명, 말 849필, 흑우 228수, 창고의 곡식 1,950여 석을 일일이 점검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산방산, 파군산 (2)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26. 대정배전
(1) 내용
1702년 11월 11일 임금에게 전문을 올리는 의식을 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순력 도중에 대정현에서 배전을 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배전이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지방관이 그 소재지에서 임금에게 전(箋)을 올려 하례의 뜻을 표하는 의식을 말한다. 기사의 내용은 없다.
이 그림의 구도는 대정조점과 거의 동일하며 대정현성 내의 객사와 여러 관청의 모습이 좀 더 입체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병와전서 탐라록에 이형상이 목사로 있을 적에 올린 전문이 실려 있다. 숙종의 생일인 8월 15일에 보낸 팔월십오일탄일전문과 동지전문, 정조전문, 가례하문 총 4건이다. 이중 동지전문을 보내기 위해 배전을 행한 것으로 보인다.
동지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래에 있던 복뢰가 땅에서 움직여 이레 만에 양이 돌아오고 밝은 해가 막 중천하여 하늘이 만수의 모임 열어주시니, 동짓날 한밤의 상서로운 기운이고 수북의 환성(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역법에서 때를 알려주고 운물)하여 상서로움을 점쳐, 나라의 전택을 이미 29년 하정에 세웠으며 성군의 태평 성세가 다시 십일월 동지를 만났으니, 예로부터 이러한 경사를 칭송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지금 이런 기쁨을 내리신 것입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27. 대정양로
(1) 내용
1702년 11월 11일 대정현에서의 노인잔치 광경을 그렸다. 제주목사의 순력 시에 이와 같은 노인잔치는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다. 이날 양로연에 참가한 노인은 90세 이상이 1인, 80세 이상이 11인으로 총 12인이었다. 이형상은 객관 오른편에 앉아 있고 수행하는 자들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다. 노인들은 객사의 가운데 모여 있고 객사 오른편에는 여러 깃발과 무기를 든 자들이 있고 객사 정면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이 보인다.
이형상의 순력후 계문에서 노인을 노직으로 가자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주는 장수의 고을로 120여 세의 사람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이형상 재직 시에 생존해 있는 노인은 102세 1명, 101세 2명, 90세 이상 16명, 80세 이상은 94명이었다. 이형상은 이들의 이름을 책으로 만들어 조정에 올려 보내고, 임금이 은전(恩典)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산방산, 파군산 (2)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28. 대정강사
(1) 내용
1702년 11월 12일 대정현에서 강과 사를 하는 광경을 그렸다.
강은 경서와 병서 등을 강독하는 것이고 사는 활쏘기를 시험하는 것이다. 대정현성 내의 건물 위치와 아울러 주변의 송악산, 형제도, 산방산, 파군산, 모슬포, 가파도, 마라도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파군산 뒷편에 향교의 모습이 보인다. 저성망, 개파도, 마라도가 표기되어 있다. 부기의 내용을 보면, 도훈장 문영후와, 각면훈장 5인, 각면 교사장 5인, 강유 42인 등이 참석하였고 21명의 사원이 활을 쏜 것으로 추정된다.
인물중 문영후는 애월읍 어음리 출신이다. 풍수지리에 밝은 고홍진, 의술로 유명한 진국태, 풍채가 뛰어난 양유성과 함께 탐라사절로 불렸던 인물이다. 1664년(현종 5) 8월에 제주시재어사 윤심이 실시한 시험에서 문징후, 고홍진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고, 2년 후인 1666년(현종 7) 식년시에 병과 8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전라북도 남원의 오수찰방과 곡성현감을 역임하였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훈장으로 뽑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4개소
산방산, 송악산 (2)
파군산악 (1)
저성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29. 모슬점부
(1) 내용
1702년 11월 13일 모슬진에 군관을 보내 군대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군관 유성서를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였다. 대정현성에서 모슬진에 이르는 주변 지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무수연대와 모슬봉수의 위치와 모슬촌의 민가가 표기되어 있다. 점검 결과 모슬진의 조방장에 오세인, 방군·기병·보병이 24명이었다. 제주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장부상으로만 확인한 경우이므로 점부라 한 것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파군산 (1)
모슬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30. 차귀점부
(1) 내용
1702년 11월 13일에 실시한 차귀진에 군관을 보내 군대를 점검하는 그림이다. 이형상 제주목사가 직접 점검하지 않고 당시 군관으로 있는 홍우성을 대신 보내어 점검하도록 하였다. 차귀진 조방장 김국준, 방군·기병·보병이 20명이며 그 외 군기를 점검하였다. 이 그림에는 차귀진의 모습뿐만 아니라, 차귀진 소속의 당산봉수. 우두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모동의 참나무숲과 우자장목장이 보인다. 그림의 하단에는 사귀포, 당산악, 당산망이 있고, 당산악 아래 저생문이 그려져 있으며, 이 지명은 저승으로 가는 문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우두연대, 와포가 있다. 중앙에 그려진 차귀진성은 동문과 서문이 있고, 성문 앞에는 옹 성이 있고 성문은 1간의 누)가 있는 우진각 초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2개소
고산 (1)
당산악 (+ 당산망) (1)
(3) 각오름의 특성과 식생 : 현장설명
31. 명월조점
(1) 내용
1702년 11월 13일에 명월진 성정군의 훈련 모습과 말을 점검하는 과정을 그렸다. 명월진성 내의 천·별고·서별창 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주변의 지형을 상세히 표기하였다. 우둔촌과 수류천촌 민가의 위치, 만조봉수·마두연대·배령굴·월계과원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명월진의 해안변에 위치한 논 등도 상세히 그려져 있다. 명월진 내에 말을 점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원장과 사장을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방관겸중군 제주판관 이태현, 명월진 조방장 강세건, 성정군 412명, 목자·보인 185명, 말 1,064필, 창곡의 곡식 3,300여 석이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제주의 관방시설에는 ’사방을 둘러 칼 같은 돌들이 다발로 서 있어 갯가 주변에는 선박을 정박할 수 없다. 예전부터 왜선들이 침략해도 하나라도 얻은 이익이 없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예전에는 화북· 조천·어등·애월·명월 등 각 포구에 전함이 있었으나 암초가 많아 운용이 어려웠기 때문에 지금은 모두 훼파되었다. 다만 구진에 합쳐 육군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윤시동의 ’증보 탐라지‘에 ’명월진은 제주성 서쪽 60리에 있다. 예전에 현이 있었으나, 지금은 진이 되었다. 정덕 경오년 (중종 5, 1510)에 목사 장림이 나무성을 쌓고, 만력 임진년(선조 25, 1592) 에 목사 이경록이 돌 성으로 고쳐 쌓았다. 성 둘레는 3,050여 자, 높이는 11자이다. 동문과 서문, 남문 등 3개의 문이 있고, 그 위에 초루가 있다. 객사 3칸, 군기고 4칸, 사창, 영진창 등이 있다. 성안에 샘 하나가 있는데, 마른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매우 달다.‘라고 기록되어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1개소
만조망 (1)
(3) 각오름의 특성과 식생 : 현장설명
32. 명월시사
(1) 내용
1702년 11월 14일에 명월진성에서 활쏘기를 시험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명월조점 그림과 흡사하며, 교사장 17인, 활 쏘는 사원 141명이 참여하고 있다. 주위에 대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명월진성관련항목 보기은 본래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1510년(중종 5)에 장림(張林) 제주목사가 축조하였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이경억(李慶億) 제주목사가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50척, 높이가 9척, 3문(동문·서문·남문)이 있으며 문 위에는 누(樓)를 설치하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33. 애월조점
(1) 내용
1702년 11월 14일에 애월진의 군사와 말을 점검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애월진·애월리·고내망·애월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애월진 내에는 군기 등의 건물 다수와 말을 점검하기 위한 사장 및 원장이 설치되어 있다. 제주판관, 조방장 남해거, 성정군 245명, 목자와 보인이 181명, 말 1,040필이다. 애월진은 둘레가 549척이며, 성문은 남쪽과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 1개 봉수와 2개 연대를 관장하였는데, 고내봉수·애월연대·남두연대이다.
윤시동의 증보 탐라지에는 애월진에 대해 “제주성 서쪽 45리에 있다. 예전 에는 나무 성이 있었는데, 본래 삼별초가 관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이곳에 쌓은 것이다. 만력 신사년(선조 14, 1581)에 목사 김태정이 돌 성으로 고쳐 쌓았다. 남문과 서문 등 2개의 문이 있는데, 위에는 초루가 있다. 객사 4칸, 군기고 4칸이 있다. 성안에 우물과 샘이 없고, 성 밖 10보쯤에 하수천이 있는데, 바닷물과 통하여 물맛이 짜다. 성 동쪽 1리쯤에 궷물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달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따르면, ‘애월에 사는 사람들은 말머리 같은 나뭇가지에 비단으로 꾸며 약마희(躍馬戱)를 하면서 신을 즐겁게 한다. 다음 날에야 파하는데, 이를 ‘연등(燃燈)’이라고 한다. 이달에는 배에 오르는 것을 금지한다.‘라고 하고 있다. 60-70년대까지도 약마희가 행해졌다 하며, ’애월진성에서 점마할 때, 중산간의 말들이 애월의 하물에서 샘물을 마시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애월조점에서 애월 성 밖에 그려진 수많은 말들은 이 지역이 말 목장과 일정한 관계가 있고, 약마희와 같은 행사가 ‘말’의 방목과 일정 정도 관련된 내용임을 시사해 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1개소
고내망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34. 제주조점
(1) 내용
1702년 11월 15일에 제주읍성에서의 성정군의 조련과 제반 사항을 점검하는 그림이다. 가중군, 성장 4명, 치총 2명, 민호 7,319호, 전답 3,357결, 성정군 1,263명, 창고의 곡식 30,040여 석, 향교의 제기·제복·서책, 군기를 일일이 점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은 세 부분으로 분할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한라산 주변의 지형, 하단에는 왼쪽에는 제주목성이, 오른쪽에는 목사의 행렬이 그려져 있다.
한라산의 지형은 영실 기암을 표현한 듯한 절벽의 모습을 중심으로 좌우로 오름이 그려져 있다, 토적악, 대독거지(大獨去之), 소독거지(小獨去之), 삼의양악, 두리여(斗里礖), 어승악, 야래악, 장손악, 활천악 등이 그려져 있고, 상단 오른쪽 끝에는 고산이 작게 그려져 있다. 삼의양악 앞에는 이동식 과녁인 솔포가 그려져 있다.
제주읍성 안의 관아 건물의 위치가 상세하게 표기되어 있어 당시 읍성 내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관덕정·객관·옥·향교·서원의 위치, 그리고 서과원·중과원·남과원·북과원·별과원의 위치 등이 명시되어 있다. 제주읍성 밖 남쪽에는 모흥혈·연무정·사직단이 표시되어 있다.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그림에 모흥혈이라 표기된 삼성혈의 신화를 소개 하면서 이곳에서 신인이 솟아났다는 것을 부정하고 무당들의 굿판이 벌어지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묘(廟)를 세워 향사하도록 하였다. 이형상이 제주 목사 재직 당시에 시작된 향사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10개소
고산 (1)
삼의양악, 야래악, 어승악, 장손악, 토적악, 활천악 (6)
대독거지, 소독거지 大獨去之, 小獨去之(2)
두리여 斗里礖 (1)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현장설명
35. 제주사회
(1) 내용
1702년 11월 18일 실시한 제주목 전최장면을 그린 것이다.
다음장과 그림제목이 바뀌었다.
절제사 즉 제주목사, 중군 제주판관 이태현, 대정현감 최동제, 정의현감 박상하를 비롯해서 군관 15인, 주무 23인, 각 청의 관리들이 정렬해 있다. 노란색의 ‘수(帥)’라고 쓰인 깃발 깃대가 높이 솟아 있고, 왼쪽에는 조점할 때 사용하는 무늬 깃발이 보인다. 관덕정 동 북쪽으로 탐라포정사 정문이 있고 그 위에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매달려 있다.
절제사는 조선시대 지방의 군사요충지에 두었던 거진 가운데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에 설치하였던 정3품 지휘관직으로 전주, 경주, 의주, 광주(廣州) 그리고 제주도에만 두었으며, 제주도에는 목사가 겸직하게 되어 있어 이형상이 제주목사로 절제사를 겸직하였다. 제주목사는 제주라는 특수성으로 유일하게 병마 와 수군절제사를 겸하였으며, 양인 출신이 의무적으로 동원되었던 정병의 지휘 자인 여수와 대정을 제주도에서는 절제사가 직접 시험을 통해 뽑아서 왕 에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지방관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이나 파면시키는 제도인 전최(殿最) 도 제주절제사가 실시하여 중앙에 보고했다. 전(殿)은 최하 등급, 최(最)는 최고 등급의 점수 를 말한다.
당시 전최의 대상자는 문과로 제주판관, 정의현감 및 대정현감. 무과로는 중앙에서 발령받아 내려온 15명의 군관이 해당되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36. 제주전최
(1) 내용
1702년 11월 17일에 실시한 활쏘기모임을 그린 것이다.
제목이 앞장 그림과 바뀌었다.
참가한 이는 무과인원으로 마대 별장, 삼부 천총, 구진 조방장, 육사 파총, 성장 8명, 초관 30명, 교련관 13명, 각면의 교사장 22명, 사원 322명, 기패관 94명이며 문과인원으로 도훈장 유학 양유혁 각면의 훈장 8명, 강유 302명 등 문무과의 주요인원이 모두 참가했다.
제주 지방의 군대는 속오군과 마대로 구분되는데, 속오군은 3부 6사 30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림에 그려진 인원 중 문과인사들은 함께 참가한 후 별도의 강독시간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형상은 순력이 끝난 후 조정에 요청하기를 ‘다른 도(道)는 조련 후에 활쏘는 시험을 하여 적중한 부류들에게 수신이 순력할 때에 수송하여 온 회부 면포를 눈앞에서 상으로 줍니다. 본도는 그렇지 아니하여 그전부터 늘 당연히 조련 후에 명단을 뽑아 임금에게 아뢰면 병조의 회부로 본주에 있는 상목으로 복계에 따라 내려주었습니다. 그 상으로 주는 것이 1년 후에 있기도 하고, 혹은 4, 5개월 후에 있기도 합니다’라고 하며 ‘본주에 회록된 비변사 장포 10 동이 때마침 창고 중에 남아 있으나 땅의 안개에 오래 잠겨 거의 다 썩어버리고 또 한 쥐가 쏠아버린 게 많습니다. 햇수가 오래되어 썩어 이런 정도에 이르렀으므로 이것을 가져다가 본목에 사용케 하여 전혀 헛되이 버리게 하지 않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상신하였다
이에 추가하여 보고하기를 ‘군문장교는 50개월 임기가 차면 초계하여 벼슬자리를 옮기는 첩문을 작성하여 주는 것은 다른 도에는 각 진에 일반으로 통하여 행해지는 법입니다. 임기 가 찬 후 또 50개월에 이르면 차차 승직하는 것이 구례입니다. 본도의 모든 일은 모두 법을 받들지 못한 지가 오래되어 간혹 2백여 개월에 이르거나 거의 6, 70개월 밑으로 내려가지 않습니다. 처음에 벼슬자리를 옮겨온 자가 끝내 승급되어 임명되지 못합니다.’라고도 하였다.
그림에는 제주읍성의 관아 건물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관덕정 북쪽으로 우연당·영청·상아·망경루가 보이며, 이들 건물로 드나들기 위한 외대문·중대문·내대문·후문이 차례로 나타나 있으며, 애매헌·군관청·군기고 등도 표시되어 있다. 관덕정 동남쪽으로는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아 건물인 관청·목관, 목관으로 통하는 외대문·내대문·군관청 그리고 민가의 모습이 표시되어 있다.
중앙에 그려진 관덕정은 1448년(세종 30)에 제주목사 신숙청이 창건하였다.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 하여 ‘관덕(觀德)’이라 이름하였다. 관덕정이란 현판은 처음에는 안평대군이 썼다고 하나 현재의 현판은 이산해의 글씨이다. 현재 관덕정 내 두 개의 대들보에 가로 650㎝, 세로 50㎝의 작자와 연대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두보취과양주귤만헌(杜甫醉過楊州橘滿軒)」, 「상산사호(商山四皓)」, 「홍문연(鴻門宴)」,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 그것이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37. 제주양로
(1) 내용
1702년 11월 19일에 제주목에 거주하는 80세 이상의 노인을 모시고 동헌 앞에서 치루어진 경로잔치를 그린 광경이다. 동헌 뜰을 중심으로 망경루·마방·귤림당·애매헌·동헌의 모습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잔치에는 정의현감, 전대정현감 문영후, 전찰방 정희랑, 군관 15인 등이 참여하였고, 제주목에 거주하고 있는 노인은 80세 이상이 183인, 90세 이상 23인, 100세 이상 3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빨간색 옷을 입은 이들이 100세이상의 노인으로 보인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수향(壽鄕)이라 불릴 만큼 장수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제주에서는 수령에 의해 봄·가을에 나누어 양로연 잔치를 베풀어 왔으며 중앙에서 순무어사를 파견하여 양로연을 행하기도 하였다. 이형상은 1702년 10월 29일 부터 11월 9일까지 제주 삼읍을 순력하면서 양로연을 베풀었고, 그 행사를 담은 것이 앞에 「정의양로」, 「대정양로」 등이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38, 병담병주
(1) 내용
취병담(지금의 용연)에서의 뱃놀이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행사 일정과 참석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림 중앙에 절벽에 나무 덩굴의 모습을 그려놓고, 3척의 배가 풍 광을 즐기는 모습을 중심으로 그렸다. 차일이 처진 배에 붉은 갓을 쓴 사람이 이형상 으로 추정되며. 배 위에서 북을 치고 관악기를 부는 모습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다른 배에는 홍색 복장과 검은색 복장을 한 사람이 그려져 있는데, 제주목의 관원들로 추정된다.
왼쪽에는 제주목의 서문이 그려져 있고, 그 옆으로 병문천이 바다로 내려오는 모 습과 여단(厲壇)과 벌랑포가 그려져 있다. 여단은 여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나라에 역질이 돌 때에 여귀에게 지내던 제사단을 이른다. 봄철에는 청명에, 가을철에는 7월 보름에, 겨울철에는 10월 초하루에 지냈다.
취병담건너 대천외리의 민가가 그려져 있고, 용두와 용두 사이에 잠녀의 모습이 보인다. 동 한두기와 서한두기에 있는 ‘용머리’ 모양의 바위를 모두 ‘용두’라 표현하고 있다. 잠녀 5명은 테왁을 하나씩 갖고 있으며, 손에 빗창을 쥐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이형상은 ”여자의 노역이 매우 무겁다. 관아에는 잠녀안이 있는데 진상하는 미역과 전복은 모두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맡긴다. 여염집에서 물 긷고 곡식 베고 땔나무 모으고 전복을 채취하는 것 같이 힘써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은 여인이 담당한다.고 하였고 탐라장계초에 기‘각 도의 어호(漁戶)에는 다만 수역(水役)에만 응하고 약간의 진상에도 또 가격을 지급할 때 가 있는데, 본도는 모두 다른 역을 겸합니다. 섬 안 풍속은 남자는 전복을 캐지 않고 단지 잠녀에게 책임지웁니다. 여자가 관역에서 대답하는 경우는 유독 본주만이 그러할뿐더러, 더군다나 대정과 정의 두 관에서는 목자의 우두머리가 모두 여자로서 정원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즉 이로 미루어 보면 한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포작에다 선격 등의 허다한 힘든 역을 겸하여 행하며, 처는 잠녀로서 일년 내내 진상하는 미역과 전복을 마련하여 바쳐야 하니 그 고역됨이 목자보다 10배 나 됩니다. 갯가 백성이 죽음을 무릅쓰고 도피하려고 꾀하는데 형세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밤낮으로 생각하고 헤아려도 한결같이 좋은 대책이 없습니다. 그네들이 지탱하며 견뎌내느냐 여부는 비록 논할 틈이 없지만, 막중한 진상(進上)이 끝내는 반드시 봉진을 못하기에 이른 다음 끝나고 말 것입니다. 분수에 맞게 지켜야 할 도리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두렵고 답답함을 어찌하오리까. 청컨대, 본도에서 회록하는 상평청의 모전미 3백석을 얻어, 물건을 바꾸어서 바치는 밑천으로 삼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글을 참고한다면 병담에서의 유흥과 잠녀의 물질을 함께 그린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제주에서는 대소인민들이 모두 몸을 풀어헤치고 다니고 특히 여성들이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지 않고 있다고 항상 나무라면서 이 그림의 잠녀들은 몸에 달라붙은 하얀색 반바지를 제외하고 다른 옷을 입지 않았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8개소
도내산악, 문악, 삼의양악, 야래악, 장손악, 황악 (6)
고산, 발산 (2)
(3) 각오름의 특성 : 현장설명
39. 건포배은
(1) 내용
1702년 11월 20일에 실시하였다. 제주에 재직하는 문무관 300여명이 일부는 관덕정 앞에서, 다른 일부는 건입포에서 북쪽을 향해 즉 조정에 배례하는 모습과 제주의 각 마을에 있는 신당이 불타는 모습을 그렸다.
이형상은 순력후 중앙에 보고한 계문에 ‘무당 무리들이 현혹시켜 속이는 버릇은 본래 세상에 옛날부터 함께 있었던 고질의 폐해인데 말을 하자면 아무 도움이 안됩니다. 본도에 와보니 더욱 유별나서 이미 위아래 명분이 없고, 또 의리를 아는게 없기 때문에 집집마다 위패를 베풀어 놓으며 곳곳마다 사당을 세워 놓고 높이 받드는 풍습은 내륙에 비해 백배나 됩니다. 저들 이른바 남자 무당과 무녀들은 양양한 기상으로 무뢰배에게 당한이라 부르게 하여 서로 계를 맺어 그 수가 1천 명이 넘는데 여염집에서 강제로 음식을 청하여 먹기도 하고 혹은 신당에서 소를 잡기도 하였습니다. 촌백성이 남겨둔 면포 및 주단들을 처음에 귀수가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고 만약 내놓지 않으면 신차라 칭하여 당한을 보내어 두 손을 묶어서 빼앗고 심지어는 소와 말을 빼앗는데, 그 수가 거의 백이고 또 그 밭과 논을 빼앗기에 이르러 각각 자기들끼리 나눠먹고는 위전이라 칭하거나 혹은 사시전이라 칭하고 천백이나 되는 당에 보배를 쌓았습니다. 보통 배를 띄울 때만 신수있는 줄만 알고 관령이 있는 줄은 모르며, 진상선이 바람을 기다릴 때도 역시 반드시 신당에 하직을 하니 이런 풍습은 아주 괴이할 정도입니다.ⵈⵈ3읍 에 있는 신당 129곳 및 개인집에 있는 신에게 기도하는 물건과 길가 우거진 숲에 사는 무뢰배들의 신의, 신철을 아울러 몽땅 흔적 없이 태워버리고 심지어는 나무뿌리를 파내버리거나 불상을 부숴버리기까지 하여 지금은 한가지 물건도 남아 있는 것 없다고 3읍 수령이 연속하여 첩보하였습니다.
이번에 이윽고 혁파를 하였으니 이 폐단은 영원히 끊길 것입니다. 무안을 장부에 기록하고 또 제거해가면 대대로 서로 금하여 사람마다 각각 힘써서 무당 명칭을 영원히 없애기를 바라면서 일반 백성들이 또한 참된 정성으로 와서 애걸합니다.
부로 중에 조금 지식이 있는 자들이 계속해서 고하기를 “음사는 이미 혁파되었으니 의약에 힘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도의 심약은 늘 약이름도 모르는 사람으로 구차하게 충원하고 임명하여 파견하니, 바라건대, 이런 뜻을 조정에 계달하여 조금 의리를 아는 자를 계속 임명하여 파견하면 민심이 굳을 수 있고, 적폐를 없앨 수 있습니다.”라고 날마다 와서 호소합니다. 사기 중에 비록 간혹 음사를 철파했던 때가 있었으나 주문하거나 혹은 금령을 발표하여 모두 관가에서 강제로 제거했지만 이번에는 몇 천 년을 고질이 되었던 미혹한 풍습을 하루아침에 쓸어 없애 참으로 다행일 뿐이 아닙니다. 태워서 제거한 지 한 달이 넘는데 이익은 있는데 해는 없으니, 일찍이 전에 속은 것이 극히 분한 일이었다며 남녀노소가 모두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남녀무당 보기를 원수로 여기고 더불어 섞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심약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한 조항은 민중이 소원하는 것이고 또한 이치가 있는 것이기에 항상 임기교체 때는 각별히 골라서 보내줄 뜻을 해당 원으로 하여금 정식으로 시행하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주도의 무속 신앙과 풍속에 대한 자료는 이른 시기의 문헌 기록에서부터 누차 언급 되어 있다. 제주 지역의 무속과 풍속이 조선 시대 유교 이념을 가진 관료들에 의해 누차 ‘비난 혹은 제거의 대상’이 되었으며, 극력으로 배척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이형상은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제주의 신당을 불태우고 사찰을 훼손한 것에 대해 도민들이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고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된다. 실제 당시 도민들의 정서는 알수 없지만, 이형상 제주목사는 신당(神堂) 혁파 자체를 커다란 업적으로 여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불타 없어진 신당은 129곳, 훼손된 사찰은 5곳이다. 무격 285명으로 하여금 농업을 본업으로 삼도록 조치하였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없음
40. 비양방록
(1) 내용
1702년 10월 11일 생포한 사슴을 관아에서 기르다가 1703년 4월에 비양도에 옮겨 방사하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형상 본인이 관아에서 애완하며 기르던 사슴을 파직소식을 알게되어 신상을 정리하는 과정을 상징하는 장면이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된다.
제주 읍성 안에 관덕정에 앉아 있는 이형상의 모습이 보이고, 애월진과 명월진을 비롯하여 그 근방의 지명이 빼곡히 적혀 있다. 그너머넘어 멀리 비양도에 사슴한마리가 크게 그려져 이렇게 떼어놓게 되는 마음의 아픔이 함께 표현하고 있다.
이형상의 시 ‘放馴鹿于飛揚島’
當還耳割豈殘形 귀를 갈라 돌려보내는데 모습 어찌 그리 쇠잔한가
只恐砲丸害爾生 다만 탄알에 너의 생명이 해나 입을까 걱정이네
此去若逢仙侶問 이번에 떠나 만약 신선 만났을 때, 벗을 문안하거든
爲傳心跡喜雙淸 마음과 자취 쌍으로 맑아 기뻤다고 전해주게나
我還江閣汝還山 나는 강각(江閣)으로, 너는 산으로 돌아가면
物理人情各自安 사물의 이치와 인정 각자 절로 편안해지리라
從此參商俱落落 지금부터 삼(參)·상(商)처럼 모두 서로 떨어지게 되겠지만
八公山外海漫漫 여덟 명의 방사(方士)처럼 산 밖의 바다에서 여유롭겠지
(2) 표기된 오름지명 :
도내산, 봉산, 수산 (3)
곽악, 극락악, 금물덕악, 정수악, 흑악 (5)
고내망, 도내망, 도두망, 만조망, 수산망 (5)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2~3개소 선정 현장설명
41. 호연금서
(1) 내용
보길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호연한 마음으로 거문고를 타며 책을 읽는다는 뜻의 그림이다. 이형상은 1703년 3월 파직당하여 후임자가 도착한 6월 즈음에 제주를 떠나는데 그 장면으로 보인다.
별도포에는 백성들이 나와 떠나는 이형상 목사 일행을 배웅하고 있다. 4척의 배가 별도포 앞바다에 떠 있으며, 목사의 깃발이 실려 있는 배에는 2개의 돛을 펴고 붉은 갓을 쓰고 이형상 목사가 앉아 있다. 붉은색과 흰색으로 칠 한 깃발이 4척의 배에 그려져 있는데, 네 모퉁이를 표하던 군기인 각기로 추정된다. 이들도 역시 이형상 목사 일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형상의 기록에는 ‘계미년 (1703, 숙종 29)에 어떤 일로 교체되어 돌아왔는데, 돌아오는 행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백록담 위에 저절로 말라버린 단향목으로 만든 거문고 하나와 시를 써놓은 책 몇 권뿐이었다. 백성들이 4곳에 비를 세우고 모두 덕을 기록하여 칭송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제주산 고사목인 단향목으로 만든 거문고는 오시복이 선물한 것으로 현재도 전하고 있으며, 거문고 배면에 새긴 금명에는 ‘한라산의 저절로 말라버린 단향목으로 거문고를 만들었다. 산은 삼신산 중의 하나, 단목은 태백산보 다 다네. 나는 천고의 뜻으로 아침저녁 육현 가락과 함께 노니네.[檀琴, 以漢拏山自 枯檀香爲琴 山是三神一 檀爲太白餘 吾將千古意 晨夕六絃於]’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2) 표기된 오름지명 : 6개소
거문악, 삼의양악, 장손악, 활천악 (4)
사라망, 원단망 (2)
(3) 각오름의 식생과 특성 : 2~3개소 선정 현장설명
42. 서문
(1) 원문
黑子於南海中 去極最近 春秋二分星見於漢拏山 概所謂絶域也 北接全羅 東鄰日本 其丙女人 也 其午大小琉球也 其丁交趾也 安南也 其坤閩甌也 其外暹羅也 占城也 滿剌加也 自申而亥 爲吳楚越齊燕之境 九韓時高良夫三乙那分據謂之乇羅 秦皇漢武求神仙謂之瀛洲 以其地僻 且 多琪花異草燕齊之士謂之神山 有高厚等三人泊耽津 朝新羅謂之耽羅 韓文公謂之耽牟羅 高麗 三別抄之亂 合元兵討之 遂爲元所管 或設軍民捴 官府 或立東西阿幕 以牧馬牛羊 其後謂之 濟州 至我太宗朝 去星主王子之號, 後又建大靜旌義謂之三邑 沿革相仍 或存或亡 人心垂隔 乍順乍𨒫
粵自國初時 遣按撫使宣撫使巡問使 指揮使防 御使副使牧使謂之營門專制也 故鋪張者謂之 﨩主 濟險也 故厭避者 謂之宦謫 盖其地勢然也 上之二十九年壬午 余以不才猥膺節制之命 旣到營 按簿而點之 三邑人民 九千五百五十二戶 男女四萬三千五百十五口 田三千六百四十 結 六十四場內 國馬九千三百七十二匹 國牛七百三頭 四十二果園內 柑二百二十九株 橘二千 九百七十八株 柚三千七百七十八株 梔三百二十六株 此外私牛馬 私柑橘 在所當略 欲有所勸 獎也 分置 十七訓長 六十八敎射長 而儒生四百八十人 武士一千七百餘人 皆各勉勉有所成就 列聖培養之效 亦漸于海 吁其盛矣 每當春秋 節制使親審防御形止及軍民風俗 謂之巡歷 余亦 遵舊例 發行於十月晦日 閱一朔乃還 時半刺李泰顯 旌義縣監朴尙夏 大靜縣監崔東濟 監牧官 金振爀 皆以地方陪到 乃作而曰此固不可以無識且也 﨩民感君恩 至有巾浦之拜 又欲酬報 聖 澤互相約誓 闔境淫祠 竝與佛像 而燒燼今無 巫覡二字 是尤不可以無言也 卽於暇日使畫工金 南吉爲四十圖 粧纊爲一帖 謂之耽羅巡歷𠷰 時癸未竹醉日 題于濟營之臥仙閣 是謂之甁窩居 士之序
(2) 번역
남해 가운데 사마귀같이 작은 땅이 있어 북극까지 거리가 가장 가깝고, 춘분과 추분에는 한라산에 별(노인성)이 나타나니 대개 이른바 외딴 지역이다. 북으로는 전라도와 접하고 동으로는 일본과 인접하였다. 그 병향(丙向)에는 여인국, 오향(午向)은 대유구와 소유구이다. 정향(丁向)에는 교지국, 안남국이다. 곤향(坤向)에는 민구(閩甌: 복건・절강성)이다. 그 밖에 섬라, 점성, 만랄가[말라카]이다. 신향(申向)에서 해향(亥向)은 오(吳)・초(楚)・월(越)・제(齊)・ 연(燕)의 경계이다.
구한 때 양, 고, 부 세 을나가 나누어 살면서 이 지역을 탁라라 했다. 진나라 시황제와 한 나라 무제는 신선을 찾아서 이곳을 영주라 했다. 그 땅이 궁벽한 땅이었기 때문에 또 진기한 꽃과 풀이 많아서 연나라와 제나라 사람들은 신산이라 했다. 고후 등 세 사람이 탐진에 정박하여 신라에 조공하면서 탐라라 했다. 한 문공[韓愈]은 이를 탐모라(耽牟羅)라 했다. 고려는 삼별초의 난에 원의 병사와 합쳐 이곳을 토벌했는데, 마침내 원나라 관할이 되었다. 혹은 군민총관부를 설치하고 혹은 동, 서 아막을 세워서 말, 소, 양을 방목했다. 그 뒤 제주 라 불렀다. 우리 태종 때에 이르러 성주, 왕자의 호칭을 없앴다. 뒤에 또 대정현과 정의현을 설치하여 제주목과 함께 삼읍이라 했다. 연혁은 계속 이어졌으나 어떤 때는 있다가 어떤 때는 없어지기도 했으며 인심이 어그러져 잠시 순종하다가도 갑자기 반역도 했다.
국초로부터 안무사, 선무사, 순문사, 지휘사, 방어사, 부사, 목사를 파견하고, 그 거처를 영문이라 했다. 전제하는 까닭에 포장을 좋아하는 사람은 도주라 하고, 험한 바다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싫어하고 피하려 했던 사람은 환적이라 했으니, 대개 그 지세가 그러하기 때문 이다.
지금 임금(숙종) 29년 임오(1702)에 내가 재주가 없는데도 외람되게도 절제사의 명을 받고, 곧 탐라영에 도착하여 장부를 점검해 보았더니, 세 고을의 인민은 9,552호, 남녀는 43,515명, 밭은 3,640목이었다. 64개 목장 안에 나라의 말이 9,372필, 나라의 소가 703 마리였다. 41개 과원 안에 감나무가 229그루, 귤나무가 2,978그루, 유자나무 3,778그루, 치자나무가 326그루였다. 이외에 개인의 마소와 감귤나무가 있으나, 소재가 생략하는 것은 권장하고자 하는 뜻이다. 17명의 훈장과 68명의 교사장을 나누어 배치하고, 유생은 480인이요, 무사는 1,700여 인이었다. 모두가 각기 부지런하여 성취하는 바가 있으니, 역대 임 금께서 길러준 효험 역시 바다에까지 미쳤으니, 아아 성대하도다.
매번 봄, 가을로 절제사가 직접 방어의 실태와 군민의 풍속을 살피는데, 이를 순력이라 했다. 나도 옛 관례에 따라 10월 그믐날 출발하여 한 달 만에 돌아왔다. 이때 반자 이태현, 정의현감 박상하, 대정현감 최동제, 감목관 김진혁이 모두 지방에 따라 배행하고자 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번 순력은 참으로 기록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민이 임금의 은혜에 감격하여 건들개에서 절을 올렸으니, 이 또한 임금의 은택에 보답 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로 맹세하여 온 고을의 음사와 아울러 불상을 모두 불태웠으니, 이 제 무격 두 글자가 없어졌다는 것을 더욱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어 한가한 날에 화공 김 남길로 하여금 40개 그림을 그리게 하고, 비단으로 장황하여 하나의 첩을 만들어서탐라 순력도라 했다.
계미년(1703) 죽취일(5월 13일)에 제주영 와선각에서 기록하고, 이를 병와거사의 서문이라 하노라.
Ⅲ. 종합분석
조선시대 각 지역의 순력은 대체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관찰사가 주관하여 시행하였다. 제주도의 경우 전라도 관찰사를 대신하여 제주목사가 수행하였다. 순력을 마친 후 모두 순력후 장계를 올려 결과보고에 가름하였다. 이에 추가하여 개인적으로 순력에 대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된 문헌은 세 편에 해당한다.
첫 번째가 김상헌의 남사록이고 두 번째가 이익태의 지영록이다. 그리고 세 번째가 이형상의 그림으로 기록된 탐라순력도이다.
김상헌의 남사록에서는 전체 6박 7일(1602년 10월 12일 ~ 10월 18일)의 일정으로 순력이 진행되었으며, 제주목 동문을 출발하여 별도(화북)→조천→김녕(폐현)→ 별방(1박)→성산(2박)→정의현청(3박)→서귀(4박)→동해(폐현)→대정현청(5박)→모슬→차 귀→명월(6박)→애월진을 거쳐 제주목 서문으로 들어와 순력을 마무리하였다.
이익태의 지영록에는 순력을 여러 번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1694년 9월 순력이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전체 10박 11일(1694년 9월 9일 ~ 9월 19일)의 일정으로 순력이 진행되었으며, 제주목 동문을 출발하였으나 ‘화북-별도’가 소개 되지 않았다. 이어 조천관(1박)→별방(2박)→수산→정의현청(3~4박)→서귀소(5박)→대정 현청(6박)→모슬→차귀(7박)→명월(8~9박)→애월진(10박)을 거쳐 제주목 서문으로 들어와 순력을 마무리하였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기록된 순력은 1702년 10월 29일에 화북성조로 시작하여 11월 19일에 제주양로로 마무리되었다(1702년 11월 13일 모슬첨부와 차귀점부는 예하 군관을 보내 점검하였다). 1702년 4월 15일에 그린 1번 한라장촉은 제주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도(全圖)에 해당하므로 순력의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1702년 6월 17일의 행사를 그린 2번 승보시사, 1702년 6월 7일 행사를 그린 3번 공마봉진, 행사 날짜와 그린 날짜가 기록 되지 않은 4번 감귤봉진( 5번 귤림풍악, 1702년 10월 11일 행사를 그린 6번, 교래대렵, 1702년 10월 15일 행사를 그린 7번 산장구마, 1702년 7월 13일 행사를 그린 8번 성산관일, 1702년 7월 13일 대정현감이 실시한 9번 우도점마의 경우는 순력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다. 순력이전 행사그림의 배열은 “1702년 4월 15일→6월 17일→6월 7일 →?→?→10월 11일→10월 15일→7월 13일”로 되어 있어 이형상의 의도된 편집으로 보인다.
그리고 탐라순력도의 후반부에 편철된 행사와 그린 날짜가 표기되지 않은 38번 병담범주의 경우 아무런 정보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1702년 12월 20일 행사를 그린 39번 건포배은의 경우 순력을 마무리한 후 음사로 대표되는 무당들의 당과 불상을 불태운 후 그 일을 그려놓은 것이다. 이로써 순력과 함께 임금의 뜻을 완성한 것으로 판단하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의례이다. 40번 비양방록은 1702년 10월 11일 교래대렵시 생포한 사슴을 1703년 4월 28일 비양도에 풀어주는 행사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것은 파직후 신상을 정리하는 것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려 있는 호연금서는 당초에 탐라순력도에 포함된 그림이 아니라 추후에 이형상이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탐라순력도는 “제주 전도 1점 + 제주의 대표적인 사회상과 생활 의례에 대한 그림 8점 + 순력 행위를 그린 그림 28점 + 순력 후 의미를 담은 그림 3점 + 마지막에 별도로 추가한 그림 1점”으로 구성된 기록화이며 비양방록 행사가 있었던 1703년 4월 28일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서 시작하여 1703년 5월 13일에 마무리되었다고 판단된다 .
이형상 제주목사는 사실 1703년 3월에 파직당하였으나, 그 해 4월 초까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4월 초 파직소식을 들은 후 와선각(귤림각으로 추정 됨)으로 물러 앉아 김남길을 불러 탐라순력도를 그리게 하였다.
‘곧 한가한 날에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0도를 그리게 하고 비단으로 장식하여 1첩을 만들고는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라 이름하였다.’라는 탐라순력도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유추해석한 것이다.
탐라순력도에 지명이 들어간 그림은 36점이다. 이중 오름의 지명이 표시된 그림은 25점이다.
1번 그림 한라장촉, 6번 그림 교래대렵, 7번 그림 산장구마, 8번 그림 성산관일, 9번 그림 우도점마, 12번 그림 김녕관굴, 13번 그림 별방조점, 14번 그림 별방시사, 15번 그림 수산성조, 16번 그림 정의조점, 17번 그림 정의양로, 18번 그림 정의강사, 21번 그림 서귀조점, 24번 그림 산방배작, 25번 그림 대정조점, 27번 그림 대정양로, 28번 그림 대정강사, 29번 그림 모슬점부, 30번 그림 차귀점부, 31번 그림 명월조점, 33번 그림 애월조점, 34번 그림 제주조점, 38번 그림 병담병주, 40번 그림 비양방로, 41번 그림 호연금서이다.
이중 정의와 대정지역 등 행사의 성격은 다르지만 지역이 동일한 곳을 그린 그림에서는 같은 오름이 중복된다.
각각의 그림에서의 대표적 오름을 선정하여 현장을 답사하는 계획을 하고자 한다.
부기 : 제주에서의 순력을 개인기록으로 남긴 인물중 1750년(영조 26)에 제주목사겸 방어사로 부임한 정언유는순력을 마친 후 제주의 역사와 풍물을 담아 지은 기행가사인 탐라별곡을 지어 남겼다.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세금과 진상품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생활상을 드러내고 이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제주라는 지역의 문화 정체성의 확립과 지역 내의 고유한 가치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시간이 난다면 분석후 게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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