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4 ~ 25.
도외 역사문화유산 답사
제주 선정관의 발자취를 찾아서
병와甁窩 이형상, 응와凝窩 이원조
제주역사문화연구소
송장환
목차
1. 인물소개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응와 이원조(李源祚. 1792~1872)
2. 현지답사유적
1일차 10. 24(토)
대구 경상감영지
(大邱 慶尙監營址)
선화당 宣化堂
징청각 澄淸閣
달성공원 達城公園
관풍루 觀風樓
최제우 동상
이상화 시비
영천 청못, 청제비(菁堤碑)
호연정((浩然亭, 병와유고각)
임고서원(臨皐書院)
포은 정몽주 생가지
2일차 10. 25(일)
성주 한개마을
응와종택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만귀정, 이원조흥학창선비(철비)
회연서원(檜淵書院)
1. 인물소개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조선 후기의 문신. 숙종 때 제주목사.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다.
1703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제주의 누속(陋俗)을 일체 개혁하여 유속(儒俗)으로 바꾸게 하였다. 즉, 석전제(釋奠祭)를 행하였던 삼읍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이를 높은 선비로 선생을 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고,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의 삼성의 사당을 세우고 동성혼인 등의 음란한 풍속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제주도 남부에 있었던 한라호국신사(漢拏護國神祠)인 광정당(廣靜堂)에서 지방민들이 기도하던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금지시켰고, 이밖에도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철저히 단속하였다.
또한 미신적으로 흘렀던 불교를 배척하여 두 사찰을 불태우고 유교를 권장하였다. 그리고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 작업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처럼 목민관으로서 학문을 진흥시키고 문화재와 고적을 수리, 보존하였으며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하여 도민의 풍속을 교화시키고 생활개선을 주도하였다. 당시 백성들은 송덕비 4개를 세워 그의 청덕(淸德)을 칭송하였다. 현재 삼성혈(三姓穴) 구내에「사상이형상기념비(使相李衡祥紀念碑)」가 1911년 6월에 세운 것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 뒤 영광군수로 부임하였으나 사임하고,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양성에 정진하였다. 30여년간 초야에 있다가 1728년(영조 4)에 경상도소모사(慶尙道召募使)로 부임, 그 해 소론의 일파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으나 집권당인 노론의 모함을 받아 76세의 고령으로 투옥되었다. 그 뒤 억울함이 드러나 석방되면서 한성부윤에 임명되고 서반직(西班職)을 받아 국록(國祿)을 받았다. 1735년에 영천의 성남서원(城南書院)에 제향되었고, 그의 사후 63년만인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에 녹차(錄撰)되었다. 1829년(순조 29)에 제주유생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여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하였다. 저서로는「병와집(甁窩集)」이 있다.
그의 유고 중 중요한 것을 보물로 일괄 지정한 것이며, 그 가운데 제주도 관계저술인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와「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가 있다.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는 1704년(숙종 30) 저술한 제주도 지방지이다. 제주도 및 그 주변 도서의 자연․역사․산물․풍속․방어 등에 대한 기록으로 1만 3천 8백 5십자(字)에 달한다. 1년 3개월간의 목사직을 이임하고 영천(永川)의 호연정(浩然亭)에서 완성하였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저자가 숙종 28년(1702)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로 부임하던 해에 도내의 각 고을 순시를 비롯하여 일년간 거행한 여러 행사장면을 도회(圖繪)하여 성첩(成帖)한 것이다. 제주도 지도 1면과 행사장면 40면, 서문 2면 등 모두 43면으로 이루어진 탐라순력도는 제주목 소속의 화공으로 추측되는 김남길(金南吉)에게 명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행사가 있었던 다음 해에 제작된 것이다. 이 순력도는 18세기 초반,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에 대한 갖가지 시각정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주도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순력도(巡歷圖)라는 제명(題名)의 기록화로서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예일 뿐 아니라 당시 해외로 인식되던 제주도 지방의 관아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각별하게 여겨진다. (제주사인명사전, 김찬흡 편저, 제주문화원, 2002)
응와 이원조(李源祚. 1792~1872)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초명은 이영조(李永祚). 생부는 이형진(李亨鎭)이며, 양부는 이규진(李圭鎭)이다.
1809년(순조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재임 중 극에 달한 사족의 사치와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쇄신책 강구를 간하였다. 1841년(헌종 7) 강릉부사 재임 중 구재룡(具載龍)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43년(헌종 9) 6월 사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1841년 3월 노인(路引: 관아에서 병졸이나 보통 장사하는 사람 또는 외국인에게 내주던 여행권) 발급과 관련하여 공적인 일로 출륙(出陸)하는 자는 각 청 상급자가 확인하고, 행상인과 사적인 일로 출륙하는 자는 소지(所志) 말단에 날인을 받도록 하였다. 7월에 큰 태풍이 불어 기근자가 많이 생겨 호남 지방의 창미(倉米) 2천 5백석을 요청하여 기민에게 나누어 주었고, 1,170석을 방출하여 환모곡(還耗穀)에 충당하였다. 1842년(헌종 6) 우도와 가파도에 방목했던 우마(牛馬)를 부근 목장으로 옮기고, 그 땅을 개간한 경작자에게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1842년 대정현성 동문 밖에 동계정온적려유허비(桐溪鄭溫謫廬遺墟碑)를 세웠고, 1843년에는 송죽사(松竹祠)를 건립하고 정온(鄭蘊)[1569~1641]을 봉향하게 하였다. 송죽사 현판은 당시 대정현에 유배 중이던 추사가 썼다. 동계정온적려유허비의 비문 끝에 “여어선생외예 모선생공이 하감사(余於先生外裔 慕先生公耳 何敢私)”라는 내용으로 보아 이원조는 정온의 외손인 듯하다.
1843년 영혜사 동쪽 귤림서원(橘林書院) 곁에 향현사(鄕賢祠)를 창건하고 고득종(高得宗)[1388~1460]의 위패를 모셨으며,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중수하였다. 목민관으로서 유생들에게 열흘에 한 번씩 시험을 실시하거나 또는 망경루(望京樓)에서 유생 69명에게 시취(試取)를 실시하여 각 학당(學堂)에 머무르도록 하고,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백성에게 권선징악을 가르쳤다.
저서와 작품은 「효자박계곤행적기(孝子朴繼崑行蹟記)」, 「한라산 유산가(漢拏山遊山歌)」, 「연희각기(延曦閣記)」,「정온적려유허비문(鄭蘊謫廬遺墟碑文)」, 「홍화각중수기(弘化閣重修記)」, 「송죽사상량문(松竹祠上樑文)」,「삼천서당중수기(三泉書堂重修記)」등이 있다.
이 밖에 제주도에 관한 내용을 편술한 탐라지(耽羅誌),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 탐라관보록(耽羅關報錄),탐라계록(耽羅棨錄) 등이 있다. 이원진이 지은 탐라지(耽羅誌)를 ‘구탐라지’라 통칭하고, 이원조가 지은 것을 ‘신탐라지’라 한다.
2. 현지답사
1일차 10. 24(토)
대구 경상감영지
(大邱 慶尙監營址)
경상감영(慶尙監營)은 조선의 지방 행정의 8도제하에 경상도(慶尙道)를 관할하던 감영(監營)이다. 현대의 도청(道廳)과 같은 역할을 했다.
조선 초기에는 경주(慶州)에 위치해 있던 것이 상주(尙州), 팔거현, 달성군, 안동부 등지를 옮겨다니다 선조 34년(1601년), 최종적으로 대구로 이전되어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후 고종(高宗) 33년(1896년) 갑오개혁으로 지방 행정을 13도제로 개편한 뒤에도 경상북도(慶尙北道)의 중심지였다. 1910년 경상북도 청사로 개칭하였다.
경상감영 부지는 1966년에 경상북도 청사가 산격동으로 이전한 후, 1970년에 중앙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1999년 경상감영공원으로 명칭이 개칭되었다.
2017년 4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538호 대구 경상감영지로 지정되었다.
경상도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유형문화재 제1호)과 처소로 사용한 징청각 (유형문화재 제2호) 그리고 관찰사의 치적이 담긴 선정비(29기) 등 대구의 역사와 관련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선화당 宣化堂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안에 있는 조선 후기의 관아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 조선시대 경상도관찰사의 감영에 설치된 정청(政廳)이다.
1670년(현종 11)·1730년(영조 6)·1806년(순조 6) 등 세 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07년에 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다시 지은 것이다. 1969년까지 경상북도 도청사로 사용되어오다가 도청이 옮겨간 다음 1970년 중앙공원(현재 경상감영공원) 조성 때 수리되었다.
징청각 澄淸閣
조선후기 경상 감영에서 관찰사의 관사로 사용된 건물로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징청각은 선화당과 같이 세차례나 화재를 입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1807년(순조 7) 경상도관찰사 윤광안(尹光顔)이 중건하여 1970년 중앙공원 조성시 원형을 찾아 옛 모습대로 보수하였다. 이 건물은 84평에 이르는 대규모의 집이며 2고주(高柱) 7량가(樑架)로 겹처마집이다.
달성공원 達城公園
대구중심지에서 서쪽의 낮은 구릉지에 축성된 토성 내에 있다.
달성은 대구의 옛 이름인 달구벌 또는 달구화에서 유래되었으며, 삼국시대 말기에 축성되었다. 성벽 아래 토층에서 무문토기와 회흑색와질토기가 발굴되어 기원전부터 이곳에 취락을 이룬 토착인이 있었고, 이들이 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토성은 1963년 10월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0.66㎢, 성벽길이 1.3km, 높이 5~12m이고, 동쪽에 성문이 있다.
공원은 1965년 2월 2일 조성되어 1969년 8월에 개장되었다.
1970년 5월 공원 내에 포유류 31종, 조류 63종이 있는 동물원(면적 9,173㎡)을 조성하여 자연학습장으로도 이용된다.
또한 관풍루·종합문화관·어린이헌장비·이상화시비 등이 있으며, 연못·잔디광장·조경수·테니스장 등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시민의 휴식공간은 물론 대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유적지가 되고 있다
관풍루 觀風樓
옛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세웠다.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정남쪽에 布政門(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觀風樓(관풍루)를 만들었다.
그 후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나 건물이 노후되어 1970년 해체하였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
觀風樓(관풍루)의 원래 이름은 '閉門樓(폐문루)'로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10시에 문을 닫는 풍악을 울렸다고 한다.
이름을 바꾼 것은 감사가 이 건물 위에서 세속을 살핀다고 하여 붙인 것이다.
최제우 동상
달성공원의 관풍루 인근에 있다.
동학 교조 최제우는 대구에서 죽었다. 거주지인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잡혀 경상감영으로 끌려와 있던 중 44세인 1864년 3월 10일 대구에서 처형당한 것이다.
처형된 장소는 관덕정 약전골목 입구의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병원(지금은 폐원 상태) 뒤로 추정된다.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지만, 그보다도 앞서 최제우가 처형된 곳이다.
1907년 사면되고 나서 순도 100주년을 기념해 경상북도지사가 동상을 세웠으며 현재 이 동상을 관리하는 곳은 달성공원과 천도교 남대구교구다.
이상화 시비
1948년 3월 14일, 김소운, 이윤수, 구상 등 시인들이 중심이 되어 달성공원에 건립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시비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화시인은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40년대에 문인들 거의가 친일문학을 일삼았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은 그의 민족정기와 문학정신이 높게 평가되고 있다.
영천 청못, 청제비(菁堤碑)
경북 영천시 금호읍에 삼국시대 신라가 조성한 청못이 있으며 신라가 이 못을 조성후 제방을 쌓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청제비와 숙종때 세운 청제중립비가 비각 안에 있다
청제비(보물 517호)에 따르면 제방을 신라 법흥왕 (536년) 이전에 쌓았다고 하며 통일신라 원성왕때(798)에 연인원 1만명 이상을 동원하여 크게 수리하였다고 한다.
조선후기 숙종 때 지역사람들이 이곳에서 땅에 묻힌 청제비를 발견하고 다시 세웠다는 기록이 중립비에 표기되어 있다.
현재의 제방은 길이 243.5m로 흙으로 쌓았으며 이 지역에서 용수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 역사상 초기의 수리시설로서는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제, 상주 공검지 등이 거론되지만, 벽제를 제외하고는 사실 그것을 뒷받침할만한 명백한 증거는 없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제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이다.
그런 만큼 청못과 청제비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각별하다.
호연정((浩然亭, 병와유고각)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 금호강 변에 조선 후기의 학자 이형상이 강학을 위해 건립한 정자.
이형상(李衡祥)[1653~1733]의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다. 현 인천광역시에서 태어나 1677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진사(進士)가 된 후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거쳐 성주·금산·청주·양주·제주·경주 등 많은 고을의 수령으로 외직을 다녔다. 1700년 붕당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영천으로 이주해 온 뒤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병와집』 등 수많은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 있다.
호연정은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영천시 성내동에 해당된다. 영천시의 관문격인 서문 오거리에서 포항 방면으로 400m 정도 가면 우측 도로변에 병와 유고각 안내판이 있고 좁은 골목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금호강 쪽으로 내려가면 금호강 변에 정자가 시원스럽게 서있다.
호연정은 병와 이형상이 영천에 정착한지 11년째 되던 해인 1710년경 건립되었다. 영천에 정착한 후로도 제주와 경주에 외직을 지내고 있는 사이 정자를 짓기 시작해 완전히 벼슬을 버리고 난 1710년경에 정자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상량문에 초옥삼간(草屋三間)이라는 기록이 있어 건립 당시에는 초가집 3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근대 일제 강점기에 중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추정하기로 중건되면서 정자 남쪽 강변에 담장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형상은 정자를 완성하고 수많은 저술 활동을 하면서 후학에 힘썼다.
호연정은 방형의 토석 담 정면 우측에 난 사주문을 들어서면 ‘一’자형의 정자가 강변 언덕에 남동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다음 전면에 반 칸의 퇴를 둔 전형적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대청 뒤와 건물의 측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해 동선의 편의를 도모했다. 전면의 퇴 가장자리에는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어 운치를 더했다. 창호는 청방간과 청퇴 간에 사분합 들문을 달아 공간 확장을 꾀했고 대청 배면에는 판벽에 쌍여닫이 판문을 두어 주 진입부로 삼았다. 이로 해서 호연정의 진입구성은 후면 진입이다. 방의 전면에는 머름 위에 쌍여닫이 세살창을 달았다.
구조는 퇴칸에만 원주를 세우고 누하 공간과 누상 공간으로 만들었으며 나머지는 방주를 세웠다. 퇴칸의 기둥 상부는 연화문을 초각한 앙서로 초익공 양식을 취했고 주 간에는 창방과 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웠다. 대들보 위에 중보를 얹고 화문을 초각한 단지형의 대공을 받쳐 오량 가의 가구를 완성했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에 서까래는 선자연으로 처리해 격식을 갖추었다. 지붕 위는 한식기와와 일식기와가 혼용되어 있다.
호연정 정면 어칸 상부에 ‘호연정(浩然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내부 청퇴간 상부에 ‘시집재(是集齋)’, 좌측방 상부에 ‘역락료(亦樂寮)’, 우측방 상부에 ‘이양루(二養樓)’의 현판이 걸려 있다. 또 청방 간 상부에 ‘호연정상량문(浩然亭上樑文)’과 ‘호연정중건기(浩然亭重建記)’가 걸려 있다.
정자 뒤로는 보물 제652호로 지정된 병와 이형상 수고본(手稿本)을 보관하는 유고각이 있다. 내부에는 병와 이형상이 저술한 책과 유품이 보관되어 있고 성남서원에 봉안 되어 있었던 「오성도」도 함께 있다. 정자는 중건 이후 관리가 잘되고 있다. 한편 정자 남쪽은 담장 아래로 금호강이 흐르고 있다.
호연정은 18세기 초에 건립되어 근대에 중건된 건물로 특히 지붕을 겹처마로 구성하고 일식기와가 있는 점, 청퇴 간 상부에 교살 유리창이 있는 점, 창방 부재의 단면이 매끄럽게 모죽인 점 등 근대에 흔히 나타나는 특징으로 시대적 변화에 따른 건축 기법이 잘 드러난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임고서원(臨皐書院)
임고서원(臨皐書院)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인물인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明宗) 8년(1553)에 노수(盧遂), 김응생(金應生), 정윤량(鄭允良), 정거(鄭?) 등의 사람들을 창솔하여 부래산(浮來山)에 창건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554년에 준공하였으며, 명종으로 부터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位田)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 현 위치에 이건(移建)하여 재사액(再賜額) 받았으며, 인조 21년(1643)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에는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추배하였으며 고종 8년(1871)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고종 16년(1879)에 존영각(尊影閣)을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였다.
1965년에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복향하고 1980년부터 1999년까지 1차 성역화사업을 마치고 2001년 지봉(芝峰) 황보인(皇甫仁)을 다시 배향하였으며, 묘우는 문충사(文忠祠), 내삼문은 유정문(由正門), 강당은 흥문당(興文堂),동협은 경의협(敬義夾), 서협은 명성협(明誠夾), 동재는 수성재(修省齋), 서재는 함육재(涵育齋), 문루는 영광루(永光樓)이며, 경내 심진각(尋眞閣)과 전사청(典祀廳) 포은 선생 신도비(神道碑), 단심가비(丹心歌碑), 백로가비(白鷺歌碑) 등이 있다.
포은 정몽주 생가지
포은 정몽주는 영천 임고에서 아버지 운관과 어머니 영천 이씨와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선생을 임신하고서 맑디 맑은 난꿈(夢蘭)을 꾸셨는데, 낳아서 보니 선생의 어깨에 검은 점 7개가 펼쳐져 있었다.
북두칠성은 '하늘의 기틀이 되니, 북두칠성이 한번 운행하면 사계절이 맞추어 오고, 오행이 차례대로 돌고, 추위와 더위가 알맞게 되며, 음양이 자유로워진다' 고 하였으니, 포은선생께서 어깨에 북두칠성을 지니고 오신 것은 나라의 운명(運命)과, 사람들의 인륜(人倫)과, 하늘의 바름(天彛)을 붙들어 세우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모습이 이러하시니, 동시대의 인물인 목은 이색은 "해동에 의인(義人)이 났다"고 하였고, 석탄 이존오(李存吾)도 "나는 비로소 학(學)과 행(行)의 스승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숙종대왕도 선생의 초상을 보면서, "순연하고 조화로운 기운은 비온 뒤의 달처럼 맑고 깨끗하고, 의관은 고고하며, 참다운 풍채는 참으로 빼어나다"하고 기리며 노래 하였다.(임고서원 자료)
영천시에서 밝힌 생가터 조성내역에 의하면 2010년 10월에 지역 촌로 들이 생가터추정지를 발견 (재)계림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하여 기와 조각 등이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것으로 각각 확인되어 문화재 전문기관 입회조사를 통해 집터 여부, 시기, 유구 등을 확인였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경북도에서 20여 억 원을 지원받아 포은 정몽주 생가를 2015년 복원하였다.
2일차 10. 25(일)
성주 한개마을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조(世宗朝)에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처음 입향(入鄕)하여 개척한 마을로 현재는 그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성산이씨 (星山李氏) 집성마을이다. 17세기부터 과거합격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 등의 이름난 큰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등의 인물을 배출하였다. 또한 마을의 전통한옥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토석(土石)담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런 마을의 동선을 유도하면서 아름다운 풍광 속에 잘 동화되어 있어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높은 마을이다.
‘한개’라는 마을 이름은 예전에 이곳에 큰 개울 또는 나루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개’는 개울이나 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한개’라는 이름은 곧 ‘큰개울’ 또는 ‘큰 나루’를 의미하는 순 우리말에서 온 이름이다. 마을의 지형은 뒷산인 영취산(해발331.7m)줄기가 마을을 감싸듯 청룡등,백룡등으로 뻗어내리고, 마을 앞에는 백천(白川)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어서 영남 제일의 길지(吉地)를 이루고 있다.
한개마을에는 75채의 가옥이 있으며, 이 가운데 교리댁(校理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3호), 응와종택(凝窩宗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4호), 한주종택(寒洲宗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5호), 월곡댁(月谷宅, 지방민속문화재 제46호), 진사댁(進士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24호), 도동댁(道東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32호), 하회댁(河回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76호), 극와고택(極窩古宅, 지방민속문화재 제177호), 첨경재(瞻敬齋, 문화재자료 제461호), 삼봉서당(三峯書堂, 문화재자료 제463호) 등 모두 10점의 지방지정문화재가 있다.
집집마다 안채와 사랑채, 부속채 등이 대지의 특성에 따라 배치되어 내외공간의 구조가 다양하다. 가구법도 전래적 가구법으로 지붕, 대청, 안방, 부엌, 툇마루 등 거의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남아 있으며, 주생활을 이루었던 가제도구나 유교적 생활공간 등 중요한 모습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응와종택
이원조 관련유적인 응와종택은 성주 한개마을에 위치한 북비고택 (北扉古宅) 또는, 대감댁으로 불리우며 경북민속자료 제44호에 지정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원조(李源祚 ; 1792-1872)의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형진(亨鎭)의 아들로 성주(星州)에서 살았다. 그는 18세에 문과에 급제, 1811년에 주서(注書)가 되어 승정원(承政院)에 출사하고, 1817년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禮曹)·병조(兵曹)의 좌랑(佐郞)에 승진, 이듬해 지평(持平)에서 이조랑관(吏曹郞官)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26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서 경성현감(結城縣監)에 임명되고, 1832년 사서(司書)를 거쳐, 1836년(헌종 2) 정언(正言)으로 실록편수관(實錄編修官)을 겸했다. 1839년 장령(掌令)에 올라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고 이듬해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삼정폐소(三政弊所)를 설치하여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1841년 제주목사가 되어 삼천숙(三泉塾)을 세워 교학을 장려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1843년에 형조참의(刑曹參議), 우부승지(右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고 1850년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1856년(철종 7)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다. 1865년(고종 2) 한성판윤이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승진, 1869년 정헌대부(正憲大夫), 1871년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응와 이원조는 영남의 남인이 관계(官界)에 소외되었던 19세기에 한성판윤·공조판서 등 고관을 역임한 문신이며, 퇴계 이후 영남 주리학(主理學)의 계통선상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학자이다.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조선조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로서 전열은 11기, 후열은 8기로 되어있다.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 중 장자 문종을 제외한 17왕자 태실 18기와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이 태어났을 떄 조성한 태실 1기이다.
태실 앞에는 각각 왕자의 태실비가 세워져 있는데, 대부분 세종 20년(1438)에서부터 세종 24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에는 비석이 닳아 판독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으며, 판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은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 등의 태실비이다. 그러나 1977년 12월, 이곳을 보수, 정비하면서 금성대군, 화의군, 단종 등의 태실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토기, 태호, 분청인화문 대접, 분청상감 연화문 뚜껑 1식과, 명기가 있는 지석2점 등이 출토되어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경주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가까이엔 이곳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이었던 선석사가 있다.
화강앞으로 깎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항아리를 넣었다. 태호 속에는 태주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었다.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만귀정, 이원조흥학창선비(철비)
경북 성주군 포천구곡의 끝자락에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62호인 만귀정이 있다.
만귀정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1)가 철종 2년(1851년) 만년에 귀향하여 독서와 자연을 벗 삼아서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이곳에 '고판서응와이선생흥학창선비((故判書凝窩李先生興學倡善碑)'라고 새겨진 철비가 있다.
이 철비는 응와 이원조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기리고자 선생이 죽은 뒤 후학들이 철로 만들어 세웠다.
자연석 위에 세워진 비는 비신과 이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수에는 앞면에는 두 마리 용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태극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에는 고판서응와이선생흥학창선비라고 새겨져 있다.
철비 비문 뒷면에 '旃蒙淵獻 十二月 日'(전몽연헌 십이월 일) 1875년 음력 12월에 세웠음을 알수 있는데 전몽 연헌(旃蒙 淵獻)이라고 고갑자 표기법으로 연도를 적어놓아서 특이한데 연헌중 전몽은 천간의 "을"을 의미하며 고갑자에서 지지(地支)의 열두째인 해(亥)를 이르는 말이다.
응와는 퇴계 학통의 정맥을 잇는 정재와 입재 학문의 요지를 얻었고 당시 학계 쟁점이었던 사단칠정론에 칠정리발설(七情理發說)을 주장, 또 하나의 논단을 제시하였다. 응와의 학맥은 대산(大山) 이상정 → 입재 정종로 → 응와 → 한주 이진상 → 면우(宇) 곽종석 → 심산(心山) 김창숙으로 이어졌다. 특히 한주는 응와의 장조카이자 제자로 응와의 성리설을 진일보시켜 심즉리(心卽理)설을 확립, 당시 학계를 경악하게 한 독창적인 학자였다.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은 1583년(선조 16)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1543~1620)이 제자를 기르기 위해 건립한 회연초당(檜淵草堂)에서 비롯되었다.
처음 한강은 그의 선영이 있는 창평산(蒼坪山) 한강(寒岡)에 정사(精舍)를 지어 10여 년 동안 자신의 학문적 성격을 찾고 이에 따른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후 자신의 학문적 성숙은 물론, 문인들의 결속 및 확대를 위한 본격적인 강학 활동을 위해 정사로부터 멀지 않은 위치에 초당을 건립하였다.
두어 칸 규모로 건립한 초당의 이름을 회연이라 한 것은 여러 설이 있는데, 초당의 배경이 된 봉비암(鳳飛巖)이 대가천변(大伽川邊)에 높이 솟아 있었는데, 그 아래에 회오리처럼 도는 깊은 소가 ‘회연(回淵)’이며 이것이 후에 ‘회연(檜淵)’으로 바뀌었다는 설과 회나무가 연못가에 있었기 때문에 ‘회연(檜淵)’이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이후 회연초당은 한강의 사후 2년 뒤인 1622년 지방 유림의 의견을 모아 서원으로 건립하기 시작하여 1627년 준공됐다.
1690년 사액을 받았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대부분 건물은 철거됐으나 유일하게 강당만은 보존되었다.
이후 강당을 활용하여 ‘회연서당(檜淵書堂)’으로 한동안 유지하였다. 이후 1974년 정부의 보조와 지방유림의 협력으로 복설했고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돼 현재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한강 정구
한강은 자를 도가(道可), 호를 한강(寒岡)이라 하였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정사중(鄭思中)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의 영남 유학의 두 거두인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에게서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1573년(선조 6)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의 추천으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여러 지방의 수령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80년(선조 13)에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부임하면서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 대사헌이 되었으나 임해군(臨海君)의 옥사가 일어나자 낙향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영창대군을 구하기 위해 상소하였고 그 후에는 벼슬을 단념하고 후학의 육성에 전념하였다. 한강은 경학(經學)을 비롯하여 산수(算數), 병진(兵陣), 의약(醫藥), 풍수(風水)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禮學)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로서 글씨도 뛰어났다.
<한강집(寒岡集)>,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심경발휘(心經發揮)> 등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목(文穆)’의 시호가 내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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