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애월읍 납읍리 답사자료

하늘타리. 2020. 2. 11. 19:46

제주역사문화연구소 정기답사

2020216

안내/해설 : 송장환

 

 

 

납읍리 집중탐구

 

 

일반현황

 

납읍리

1300, 제주지역에 귀일·고내·애월·곽지·귀덕·명월·신촌·함덕·김녕·호촌·홍로·예래·산방·차귀등의 동서도현을 설치할 때 지금의 애월읍 지역에는 귀일·고내·애월·곽지현이 설치되었다.

고을이 확장되면서 곽지현지역 곽지봉(곽악,과오름) 남쪽으로 곽지남동(郭支南洞)이 설촌 되었고 이 지명을 약하여 郭南이라 하였으며 주변에 계속 주민이 입주하여 큰 마을의 형태를 이루기에 이르렀다.

곽남(郭南)이라는 마을명칭은 후세로 내려오면서 과납으로 호칭되었는데 마침 이곳 출신의 과거급제자가 10여명 출연하므로 과자를 과거의 뜻으로 결부시켜 과거에 합격하는 마을, 과납(科納)마을이 되었다.

숙종 원년(1675) 소두산(蘇斗山) 목사가 이지역을 순행하면서 자연지세가 읍과 같다고 하여 납읍이라 호칭하였다.

納邑이라는 뜻은 지세상 여러 마을이 모여 많은 인구가 거주할 수 있어서 읍치(기본행정)이 집행될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제주도청홈페이지에 의하면 납읍리에는 현재 558가구에 1,357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서상동, 서중동, 서하동, 동상동, 동중동, 동하동 등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현장답사

 

1. 과납서당

납읍리는 2000년도 이전시기에 과납이라는 지명이 대내적으로는 통칭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사라져가는 이름이 되었다.

한때 각종 사학의 중심지였다는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8년에 당시 북제주군에서 과납서당을 리사무소현판으로 인가받아 리에서 여름방학동안 훈장을 초빙하여 서당을 운영한다.

 

 

2. 난대림지대(금산공원)

     

- 난대림숲

천연기념물 제375

면적 ; 33,980

납읍 마을 설촌시 이 자리는 돌산이었다고 한다. 서기1670년경 주변에산재하여 거주하던 주민들이 지금의 마을 중앙지점으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숲으로 조성되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납읍리에서 위로 쳐다보면 한림읍에 있는 금악봉이 마을남쪽 노출된 암석넘어 화체(火體 : )로 보인다. 그래서 노출된 암석지대에 나무를 심어 흉하게 보이는 화체를 막지 않으면 화의 재해를 면키 어렵겠다고 하는 풍수사의 결론에 따라 조림을 시작하였다. 나무를 심는 한편 일체의 방목(放牧), 벌목(伐木) 등을 엄금하였고, 또한 포제단을 설치하여 산의 이름을 금산(禁山)이라 하게 되었다.

몇 십년 동안 철저히 보호한 결과 난대림을 비롯하여 많은 수목이 자라서 그 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비단 금금산(錦山)’이라고 글자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제주시의 서부 지구에서 평지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상록 수림으로 상록 교목 및 60여 종의 난대성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자연림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표본 지역으로서 원 식생 연구에 기초적인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숲을 구성하는 주요 수종인 후박나무·생달나무·종가시나무·동백나무 등이 상층목을 이루고, 하층에는 자금우마삭줄 등이 全面을 덮고 있으며, 송악이 상층목의 수관(樹冠)을 감아 올라가고 있다. 수종의 구성은 비교적 단순하나 전형적인 난대림을 이루고 있다. 학술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 제375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포제청


제주도무형문화재 제

금산공원 가운데에 포제단(脯祭壇)이 설치되어 있다.

포제는 이사제(里社祭)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을 지키는 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보통 음력 정월초에 날을 정하여 제를 지내는데,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의 입구에 금줄을 치고 며칠 전부터 제관들이 한 곳에 모여 지내며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한다.

제일 ; 春祭秋祭로 연 2회 춘제는 정월 초정일, 추제는 칠월 초정일에 치르다가 30여년 전 마을 회의의 결의로 추제는 폐지되었다. 정월 초정일 마을이 부정하여 제를 치르지 못하면 그 다음 중정일 또는 해일에 치른다.

祭神 ; 西神, 土神, 포신 세 신위를 모신다. 서신은 홍역신, 토신은 촌락 수호신, 포신은 객신으로 人物災害神(인물재해신)이다.

제관 ; 제관은 12제관(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례, 대축, 찬자, 알자, 봉로, 봉향, 전작, 사준, 봉작, 전사관)이 있다.

행제는 토신제포신제서신제 순으로 한다. (북제주군의 문화유적)

 

- 인상정, 송석대

금산공원 입구에서 보면 왼쪽에 인상정(仁庠亭)이라고 새긴 비석과 같은 돌이 반쯤 부서진 채 남아 있는 곳이 인상정이 있던 곳이다. 오른쪽에 있는 것을 송석대라 칭했다고 한다.

인상정(仁庠亭)을 새긴 사람은 현일락(玄日樂)이라는 이 고장 출신의 한학자이다. 인상정은 현일락의 호이다. 동치계유(同治癸酉 : 1873)에 세웠다. 그가 강학하던 교목정자 밑 바위에 새겨 편액을 대신한 마애명이다. 주위에 오언절구 한 수가 새겨져 있었으나 내용과 지은이를 알 수 없다.

오른쪽에는 송석대라는 마애명이 있었다고 마을 노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송석대 역시 강학하던 장소였다. 인상정보다 송석대의 제생(諸生)이 많았다고 전한다.

일제강점기말까지도 주위에 있는 마을인 하가리, 장전리, 어도리, 고성리 등지에서 이곳에 와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3. 납읍초등학교, 금산학교마을

 194691일 납읍리 사장밭에서 납읍국민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47514개 교실을 신축하였다. 194812174·3사건으로 교사가 전소되어 폐교되었다가 195061일 다시 문을 열었다.

1954415일 현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1993918일 급식소를 준공한 데 이어 1996년 납읍 국민학교에서 납읍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0314일 병설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납읍초등학교는 1990년 대 초반 학생 수가 90명으로 급감하여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학교 살리기 모금을 하여 효도마을 공동 주택, 다가구 주택 , 금산학교 마을을 설립하여 학교살리기 운동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현장>수차례 폐교 위기 넘긴 제주시 애월읍 납읍초교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에 있는 납읍초등학교는 전교생 131명이 다니는 활기찬 농촌 초등학교다.

마을에 학원 하나 없지만 토요일까지 이어지는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으로 영어·중국어는 물론 컴퓨터·바이올린·플루트·유도·축구·요리교실 등을 편성,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다. 각종 대회에서 따낸 상금은 악기 구입에 사용, 12악기가 기본이다 보니 각종 연주회와 합창대회의 상을 휩쓴다.

납읍초등학교는 2001년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가 주최한 1회 전국 가장 아름다운 학교대상을 받았고, 2009년부터 6년간 제주형 자율학교로 선정된 후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납읍초등학교는 학교 운영 특성보다도 마을주민과 학부모·지자체가 힘을 모아 수차례 폐교 위기를 넘긴 성공 사례로 더 유명하다.

1946년에 개교, 69년의 역사를 가진 납읍초등학교가 위기를 맞은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1968356명을 최고로 1990년 학생수가 98명으로 줄었다. 이듬해인 1991년 분교장 격하대상 학교(당시 100명 미만, 199360명 미만)로 통보받았다.

그러자 주민들은 마을에 학교만은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초등생 자녀가 있는 납읍리 출신들에게 귀향을 권유했다, 그해 6명의 어린이가 전입, 가까스로 분교 격하대상에서 유예됐으나 이듬해 졸업생이 빠져 나가자 63명으로 감소했다. 주민들은 학교살리기추진위를 구성, 마을의 빈집을 마을자금으로 수리해 무상임대했고, 그 결과 11세대 16명의 어린이가 전입, 학생수가 78명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1996년 초 신입생이 3명에 불과, 학생수가 53명으로 감소하고 분교장 격하대상인 60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 확실시되자 마을주민들은 빈집 무상임대사업만으로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판단에 따라 제2차 학교살리기추진위를 구성, 공동주택을 짓기로 했다.

1997년 마을 공동목장 부지를 매각해 마련한 7400여만원에 33000여만원의 모금과 제주도·북제주군의 지원으로 6억여원의 기금을 마련, 19세대의 공동주택을 완공했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1998년 초 학생수는 98, 이듬해에는 113명으로 늘어났고, 납읍초등학교는 전국 최초로 학교살리기운동에 성공한 학교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2002년에도 12세대 규모의 두번째 공동주택이 지어졌고, 2012년엔 24세대의 공동주택을 완공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납읍초등학교 입구에는 공동주택 건립기금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김경호 납읍리 이장(53)마을에 유일한 초등학교가 없어지면 안된다는 확고한 공감대가 오랜 세월 학교살리기운동을 추진해 온 힘이라며 “55세대의 공동주택에 입주하려는 외지인들의 문의전화가 학기 초에는 하루에 30통이 넘고, 수년째 입주대기자가 있을 정도로 마을로 이주하는 귀농·귀촌인도 늘고 있어 요즘 폐교 걱정은 안한다고 말했다.

[출처] 20155월 지역신문기사

 

 

4. 탐라왕자후문공묘(耽羅王子后文公之墓)

비문

古之人觀德於世室而又有積善之墓 與室踓異世享則一也夫德善余於文公庶可以觀乎公耽羅王子之后其先降于南平羅朝大匡輔國三韓壁上功臣諱多省号三光世趾美麗朝思簡公諱承王命入耽羅敎民禮樂事見寒暄堂集至玄孫昌祐封王子五世襲位我國初諱忠世獻爵土

受都知管三世政鄕大夫寔有永遠矣今將樹碑而問於佘日吾先南渡以後得傳墓所者葛旨松洞其次兩世幼納邑而諱岐鳳鄕大夫配金海金氏諱御周鄕大夫配晋州姜氏四瑩同域一碑表阡難以題額云如之何曰亦吾未然從來天子製古墓之法碑可立於域中而表之則庶幾可乎子忠男參奉陞通政孫貫道顯道載道弘道繼道承道得道嗚乎公之墓歷世澆飯擬於世室雲仍蕃衍豈非德善之所資也哉墓納邑里大街南巳作 光武后丙子春謹竪 廟正李膺鎬撰 前敎員張聖欽書 後孫一同

이 비석 비문에서 특이한 내용은 비석 세운시기인 서기 1936년을 소화11년으로 표기하지 않고 光武后丙子年으로 표기한 것이다.

光武는 대한제국 고종(高宗)의 연호(年號)로서 고종34년인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사용하였다

 

1986년 묘 앞에 새로 세운 비석에는 이요 本貫南平이며 岐鳳이시니, 始祖 新羅 三重大匡輔國上柱國三韓壁上功臣大司馬大將軍兼太師太傳武成公 諱 多省三十三世孫이시고, 入島祖 高麗大提學 上柱國平章事加那君司簡公 諱 綽十五世孫이시며, 耽羅王子 諱 昌祐十一世孫이시고, 耽羅最後王子諱 忠世七世孫이시다. ‥‥ 中略 ‥‥ 配位와 함께 이곳 涯月邑 納邑里 一五六八번지의 一 大路上田 巳坐인데 瑩域內次子 御周 同配 晋州姜氏同坐祔窆인 바 묘비는 지나간 丙子年春謹竪하였으나 年久하였기로 ‥‥ 下略

 

 

5. 학생문명훈처효열고씨지려

높이 80cm, 44cm, 두께 18cm

비각 안에 있는 비석 전면에學生文明訓妻孝烈高氏之閭,

후면에  休哉夫孝烈眞箇出天之性而常人之所不得行者也惟高氏耽羅王子后諱宗彦女適于文明訓家素淸貧婦功斯勤養舅姑供旨常具臨喪祭盡力專致而且夫子病革禱天願代竟以斷指灌血于口則遂使將殞之命便成更生終得偕老而鄕黨己 孝烈焉 高宗甲申春面薦與鄕校儒狀一時倂報于營府則特賜褒善之完文已久矣於斯追慕 敍顚末以俟天鑑之日云今

우측면에는 上之七十八 ○○謹竪라고 새겨져 있다.

 

안내문

오호라, 효열이란 참으로 하늘이 내리신 성품이라 보통 사람으로서는 행하지 못하는 일이다. 고씨는 탐라왕자 후예인 고종언의 딸로서 문명훈에게 시집왔는데 본래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부지런히 일하고 청빈한 부덕으로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으며 장례와 제사도 극진히 하였도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천지신명께 빌며 대신 죽기를 원하였으나 마침내 사경을 헤매자 손가락을 잘라 입에 수혈하니 죽었던 목숨이 다시 살아나 늙도록 같이 살았다. 고종갑신년(1884) 봄에 면과 마을 유림들이 일시에 영부에 보고하니 특별히 착함을 포양하여 표창을 내렸다. 이에 추모하는 마음으로 이러한 사실을 간추려 전말을 적어 후일에 귀감으로 삼고자 함이다.

 

 

6. 성균관진사정헌김선생비(김용징비)

김용징(金龍徵)은 조선 후기 문신교육자서예가이다. 본관은 김해(金海)로 순조9(1809) 부친 김봉철(金鳳喆)과 모친 남양홍씨 사이의 32녀 중 장남으로 납읍리 1643번지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제주입도조 김만희의 17세손이다. 자는 운경(雲卿), 호는 정헌(靜軒)이다. 동생으로 김상징(金象徵)과 김기징(金驥徵)이 있다.

35세인 헌종9(1843) 계묘 식년 진사시 3등에 58위로 합격하여,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제주도에는 지방 백성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제주향교(濟州鄕校), 정의향교(旌義鄕校), 대정향교(大靜鄕校)가 있었는데, 그는 향교 3곳의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제주의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다.

철종5(1854)에는 제주목사(濟州牧使) 목인배(睦仁培)가 제주향교 내에 공자(孔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증자(曾子), 맹자(孟子)의 아버지를 제사 지내기 위하여 계성사(啓聖祠)를 창건하자 그는 제액(題額)을 써서 사당에 걸어두었다. 당대 제주 최고의 학자로 많은 문하생들을 배출시켰으며, 학식(學識)이 매우 풍부하고 글씨 또한 잘 써서 사림(士林)의 영수라는 칭송을 들었다.

최익현(崔益鉉)면암집(勉菴集)부록(附錄)의 연보(年譜)에는 김용징 관련 기록이 보인다. 유배당한 최익현은 고종10(1873) 12370리 뱃길을 거쳐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소안도(所安島)에 도착하였는데, 유배지에서 교유한 문사(文士)들로 안달삼(安達三), 김희정(金羲正), 강기석(姜基碩), 김용징(金龍徵), 김훈(金壎), 김치용(金致瑢), 김양수(金養洙)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로 보아, 그가 최익현과도 교유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종27(1890)에 납읍리에서 졸하였다.

 

비석은 1935년 문하생들이 건립한 것이다.

비문

嗚呼 生三事 一 臣爲君 子爲父 弟子爲尊師 固人之常道也 先生純祖壬辰赴全州 陞補入格 翌年覆試 戊戌初抄陞再抄陞 癸卯式進士第三等 榮歸本第養親之誠 無復榮進之義 每每智牧初涖 訪問南州高士 則以先生 先薦九次本校敎授兼三校敎授 啓聖祠額題位板 皆先生手書也 終日端坐如春風溫和 晧月揚輝 噫 學之者雖存 而知者鮮 知者雖存 而得之者鮮矣 先生之均四十有六年 先進高弟十存 一二三州章甫慕尊師之義 以罔不朽之名 修其言其行又有肖孫悠揚 可以知其傳之不失 復有何恨哉

門生 承士 邊之悅 掌令 金命岳 進士 金星昊 鄕解 金性燦 姜承齊 監察 文斗天 鄕解 梁達河 宋之玉 張仁壽 進士 金箕樞 敎授 梁之權 梁在權 鄕解 金致元 金國樞 金時行 兪晟煥 文京天 秦承浩 進士 姜承模 鄕解 姜賢模

三校 直員 金翊洙 姜鐵鎬 姜鶴瑞 本面掌議 邊旼燦 秦無八 高英貴 姜鉉權 洪淳奎 秦性琨 金時鐘 金炳玹 發起 宋斗禾 高瀅奎 金彦基 邊德九 金胤祚 謹撰 敎員 張聖欽 謹書 文斗昇 謹鐫

孔子誕降 二四八六年 四月 謹竪

오호라 사람은 태어나 평생 3가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며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이다. 선생은 순조32(임진년, 1832) 전주에서 시행한 승보초시에 입격하고, 다음해 복시에도 입격하였다. 또한 헌종4(무술년, 1838) 제주 승보 초시에, 헌종7(신축년, 1841) 승보복시에 또 다시 입격하였다. 헌종9(계묘년, 1843) 진사 시험에 3등으로 영예롭게 합격하고 귀향하였다. 제주에서 양친이 차례로 돌아가자 치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그 때마다 제주목사가 부임후 맨 처음 문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선생은 향리에 은거하여 출사하지 않은 고매한 학자(南州高士)로서 먼저 천거받아 9차에 걸쳐 제주향교 교수 겸 정의·대정 3향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선생은 철종4(1854) (목인배 목사가 제주향교에 계성사를 창건할 때) 계성사 현판을 쓰고 직접 게시하였다. 선생이 하루종일 단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봄바람이 불 듯 온화하고 밝은 달빛 같다고 찬양하였다. 학문을 수학하다가 하품을 하는 자가 있더라도 학문을 하는 자는 새롭고 신선한 것을 깨닫는 자라고 하였다. 비록 알고 있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자가 학문을 터득하는 진정한 학자라고 하였다. 선생은 성균관에 입교하여 40세까지 6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 당시 성균관에서 높은 선진 학문을 연찬한 자가 10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선생의 문장과 글은 전국 123개 주에서 올라간 성균관 유생 가운데 으뜸으로서 스승을 존경하고 사모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선생이 남긴 그 불후의 시()와 부()의 명작이 없어지지 않도록 그 말씀과 행동을 하나하나까지 기록해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생이 몸소 실천한 품행은 후손들이 본받아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실되지 않고 계속 전해져야 함은 물론 어찌 유실된 후 복원하려면 이미 때는 늦어 후회만 할 따름이다. 선생의 문하생으로는 승사 변지열 장령 김명악 진사 김성호 향해 김성찬 강승제 감찰 문두천 향해 양달하 송지옥 장인수 진사 김기추 교수 양지권 양재권 향해 김치원 김국추 김시행 유성환 문경천 진승호 진사 강승모 향해 강현모 등이 있다. 제주의 3개 향교 직원(현재의 전교) 김익수(제주) 강철호(대정) 강학서(정의) 본면(애월면) 장의 변민찬 진무팔 고영귀 강현권 홍순규 진성곤 김시종 김병현이 발기하였고, 송두화 고형규 김언기 변덕구 김윤조가 삼가 비문을 지었으며, 교원 장성흠이 글을 쓰고, 문두승이 삼가 새기다.

(해석 김태국)

 

7. 납읍리 본향 바구사니우영 돗당

당신 : 송씨할망

 

참고 1): 소길리 당팟 일뤠할망당 - 송씨할망 장씨하르방

            장전리 능선이고지물 일뤠할망당 - 송씨할망 산신백관

참고 2)

. 본향당(마을수호신), 일뤠당(육아, 치병신, 7), 해신당(어업), 산신당(목축), 여드렛당(기타등등, 8)

. 웃당(윗쪽, 일레당), 알당(아랫쪽, 여드레당)

. 당신(堂神)' 호칭 : 존칭(~한집, ~or ), 여성(~할망), 남성(~하르방, ~영감), 조상신(~일월)

. 지전 : 저승의 돈. 창호지를 오려 구멍을 일정하게 뚫은 종이를 나무에 걸어 놓음

. 백소지권장 : 구멍 없이 걸어놓은 종이. 글을 모르는 사람의 사연을 신에게 얘기

. 물색 : 신에게 바치는 옷감.

당우형 또는 궤가 있는 경우 직접 옷을 지어 바침. 마블림제(신의 옷을 말리는 제) 때 꺼내어 말림

. (): 실타래. 삼승할망 비념이나 '기자의례'(아기 기원)할 때 걸어둠. 주로 '일뤠할망당'(산육, 치병신)

 

 

8. 사장물

 

크기 ; 380

공사는 1917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마을 주민이 300여 가호에 1,500명 인구를 지니게 되어 물이 부족하게 되자 사장터에 연못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풍수에 능한 한수태(韓水泰. 진도 출신)의 조언에 따라 터를 정하고 곡괭이와 삽으로 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2m 가량 파내려가자 암반층이 나와 더 이상 팔 수 없게 되자 작업을 중단했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물을 가두기 위해 못 주변에 5m 정도의 둑을 설치하기로 하고 3단으로 담을 쌓았다. 향사(鄕史)에 따르면 '마을 총회에서 집집마다 가로 세로의 크기가 한 자() 되는 돌을 개씩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다.'고 한다. 중벽을 쌓은 것은 장마철에 물이 넘치더라도 무너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게다가 마소를 동원하여 밑바닥 흙을 다짐으로써 물이 빠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공한 것이 1940년이라고 한다.(제민일보 2000418)

 

 

9. 방사성담

 

마을 형태를 살펴보고 마을 서북쪽이 비어 있어 허()하므로 성을 축성하는 것이 온 마을이 편안하여 무사태평하겠다고 하여 축성하기 되었다.

1937년도 마을에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재일본 청년회에서 성금을 보내오자 향의(鄕議) 끝에, 이 기금 일부를 사용하고 마을 주민들이 노력봉사를 부담하여, 사장밭(굴밭)에서 서쪽으로 문직이 동네를 지나 서중동 절빌레까지 1,800m를 높이 4~4.5m 겹담으로 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납읍에서 애월로 가는 길과 납읍에서 곽지로 가는 길까지는 성담을 따라서 좁은 길이 연결되어 있다.

이 성담은 어느 부분이 무너지면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보수하면서 1960년대말까지 그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과수원 담의 재료로 전용되어 높이도 많이 낮아졌고, 또 북쪽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서 허한 방향을 가려 주고 있기 때문에 무너져도 방치하고 있고 이제는 밭 임자가 허물어서 길을 내기도 한다.

 

 

10. 4.3유성 (마을방어성담)

납읍리는 4·3 당시 400여 가호가 사는 큰 마을이었다. 19484·3 사건이 발발하자 무장대들의 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주요 거리목하다 초소를 설치하고, 당번을 서는 등 경비를 담당하였다. 경찰관을 많이 배출한 마을이어서인지 주변의 다른 중산간마을과는 달리 194811월에 소개되지 않고 1214일 소개되었다. 이 때에도 주민들만 소개시키고 집을 불태우지는 않고 지붕만 걷어내었다. 소개 후에는 무장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학교, 향사, 포제청을 소각시켰다. 그 후에는 별 피해가 없어 옛집들이 원형대로 많이 남아 있었다.

납읍 주민들 중 90%는 애월리로 내려갔으며 소수가 곽지리로 갔다. 애월리로 소개한 사람들 중 일부는 19481228일 토벌대에 의해 호명되어 자운당으로 끌려가 학살됐으며, 1949116일에는 빌레못굴에 숨어 있다가 희생되기도 했다.

1950429일 소개령이 해제되자 마을 주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무장대가 집에 불을 지르지 못하도록 초가의 지붕을 모두 걷어내고 소개를 갔기 때문에 곧 바로 자기 집에 입주할 수가 없고, 더더욱 치안상태가 불안하여 부득이 마을 주민들은 1937년에 마을의 액운을 막기 위해 쌓았던 방사용 성담을 그대로 마을방어성담으로 이용하면서 사장터 1만여 평에 외곽성을 둘렀다. 그리고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을 세우고 축담을 쌓아 판자로 지붕을 덮은 후 가마니로 문을 만들어 지은 함바집에서 반별로 1개동씩 집단으로 주거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축성 책임으로는 동 고을은 유홍식, 서 고을은 강순중이 총책임자가 되어 4개월여에 걸쳐, 납읍 전체 둘레를 이중으로 높이 4m 내외의 성을 완성하고 25여 개의 초소를 설치, 사람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었다. 동 고을은 사장에서 시작하여 안가름, 묵은새빌레, 수대비거리, 댁거리뒤길, 계왓, 앞동산, 종남이, 고냉이동산, 누루기, 안선돌왓에서 금사까지, 서 고을은 금산에서 시작해서 소앳동산, 검은덕 , 잿빌레, 문직이, 성질, 사장에 이르기까지 온마을을 원형으로 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축성을 하고 큰 가시나무 등을 베어다가 바리케이트를 치는 등 철통같은 경비를 했지만 소개 귀향 2년 후 11월에 처음으로 많은 무장대들이 동하동 수대비 거리로 습격하여 민가에 불을 지르고 곡식, 씨앗, 포목, 이불 등 침구며 옷가지 등은 물론 외양간에 메어둔 소, 말까지 약탈해 갔는데, 이때 문인흡, 문두전, 강기천의 집이 전소되는 등 동하동 주민들의 큰 피해를 보았다.

그 이듬해 겨울 11월에 제 2차 습격이 있어 많은 재산을 약탈해 갔다. 그 후 사태가 완전히 안정되고 10여년이 지난 후부터 밭에 축성했던 돌들을 치우고 감귤원 등을 조성하여 문직이(門直伊) 동네를 중심으로 최초로 축성한 성과 서하동 애월에서 오는 입구(양상진집터 뒤쪽)부터 곽지에서 오는 입구까지를 제외하고는 현재는 그 형태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납읍향토지)

 

 

11. 공동정호(새못)

공동정호는 납읍리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1937년도 본리 김중선 도로감(옛날의 애월면 도로 총감독)께서 새못을 만들기 위하여 정사각형 1말짜리 말을 만들어 무우를 정사각형으로 잘라서 한조각 한조각을 붙여 쌓아 올려보고 공동정호를 만들려면 규격화된 돌이 몇 덩어리가 필요하다는 계산하에 마을 각호마다 일정하게 맞는 규격이 돌을 다듬어 갖고 오도록하여 큰못과 작은 연못 2개를 만들어 물이 밑으로 통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방아돌을 5등분하여 물을 길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였고 예술적 가치를 더 해주고 있으며 큰못에서 작은 연못으로 이어지게 만든 부분에 대하여는 옛 조상들의 지혜를 찾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며 1973년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사장물과 함께 마을 공동식수로 사용되었던 곳이다(납읍리 마을소개에서 옮김)

 

 

12. 납읍리 후박나무


- 보호수지정번호 : 13-3-2-8-3

- 지정일자 : 1982. 10. 22.

.수령 : 110

.수고 : 17미터

.나무둘레 : 3.9미터

 

- 후박나무 일반특성

.분류 : 목련목 > 녹나무과 > 후박나무속

.꽃색 : 녹색, 노란색

.학명 : Machilus thunbergii Siebold & Zucc.

.개화기 : 5, 6

.분포지역 : 중국, 대만, 일본;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제주도.

.형태 : 상록 활엽 교목.

.크기 : 높이 20m, 지름 1m.

.생육환경 : 울릉도, 남쪽 도서지방, 변산반도, 여수에서 오동도에 이르는곳, 울산 위쪽까지 자라며, 식재 북한계선은 포항이며 천리포 수목원에 식재되어 자라고 있다. 제주도와 남부 해안지역에서는 해발 500m이하의 지역에서 비교적 땅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13. 도치돌

도치돌은 가로5m 70높이7m 두께1m 55삼각형 모양인 큰 도끼 날 같은 거대한 암석이다.

납읍리와 어음리 경인 하천중간에 있어 천중부석이다. 도치돌을 받혀주는 돌과 날을 가는 심돌도 있고 주위를 에워싸는 암석과 궤와 여러가지 약초도 있다.

그리고 비가 많이 와서 냇물이 흐를 때 도치돌 위에 덤불(덩굴)이 씻어 내려가면 흉년이 든다고 하고 일년에 세번 이상 냇물이 흐르면 솥을 씻고 엎어버리라는 설이 있다.

유배 온 장수가 도치돌을 보면서 절치부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설과 옥황상제가 한 장수를 인간에 보내면서 천하를 평정하라 하였으나 뜻을 못이루자 장수의 칼을 냇가로 던져 버리자 도치돌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지금은 납읍리 청년회에서 소공원을 조성하여 관리해오고 있으며 오가는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납읍리 마을소개에서 옮김).


13. 백암진선생병식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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