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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70주년, 서로 다른 의견과 자기검열

하늘타리. 2018. 1. 28. 12:05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길


마리나호텔 사거리 못미쳐서 아치가 하나 서 있네요.


"4.3 70주년, 2018, 제주방문의 해"


공항으로 갈때도 봤을겄이고 여기저기서 현수막으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텐데 그 때는 의식을 않하다가 오늘은 의식되는 이유가 무얼까요?
아마도 이번 육지 나갈 때 비행기를 기다리며 스마트 폰으로 읽어본 뉴스 중 하나가 생각나서 일겁니다.


신구범 전지사가 16일인가 17일인가에 한 기자회견내용인데 그는 "여태까지 제주4.3의 성격, 진상에 대한 확인을 하지 않았다. 진상보고서 조차 진실확인은 그 후대의 역할로 미뤘다. 제주 4.3 진실을 묻어둔채 70주년 행사를 한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했습니다.
이 분이 관선도지사시절인 1994년에 처음으로 4.3 합동위령제를 해야한다고 정부에 건의 했다는 것이 상기되어 4.3유족회 측 입장을 대변하는구나하고 읽었는데 그게 아니었죠.
"최근 일각에서 제주4.3을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으로 미화하고 있다”고 하며 "좌우익을 막론하고 진실은 인정하고, 진실이라는 바탕위에서 4.3특별법과 더불어 화해와 상생이 이뤄져야 한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CNN과 한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남로당의 폭동이다라고 한 내용을 다시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역신문을 읽는 분들은 다 읽으셨을테니 각자의 위치에 따라 생각이 다르실겁니다만 이제는 그만..

말그대로 화합과 상생을 이야기할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한 사람의 아픔은 정말 오래갑니다.
게다가 오랜시간동안 그 아픔을 표현하지 못하고 억눌리며 살아야 했다면 그 아픔의 표출은 보다 격렬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무조건 화합과 상생을 할 수는 없으니
해원의 시간이 필요한것입니다.

그 해원을 위해 1990년대 이후 끊임없는 노력을 해온것으로 압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각계의 노력에 의해서 2000년 1월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8월 28일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4·3사건 진상조사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희생자 및 유가족에 대한 심사를 마무리한 결과 희생자로 14,032명과 희생자에 대한 유족 31,255명이 결정됐습니다.
이 결정에 따라 이제는 그날의 서러움과 아픔을 거리낌없이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와 조사결과에 양측 모두 만족하지 않는다는 것이 또 다른 갈등의 소지를 만듭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에 대한 해석도 제각각입니다.
노무현대통령의 사과를 원전 그대로 옮기면 "지난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서 이듬해인 48년 4월3일에 발생한 남로당과 제주도당의 무장봉기,그리고 54년까지 계속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저는 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고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것을 가지고 한쪽에서는 전적으로 국가권력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라고 하고
한 쪽에서는 4월 3일 발생한 것은 남로당과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라 선언했고 사과의 내용은 진압 그자체가 아닌 진압간 봉기세력이 아닌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사과한 것이다라고 설왕설래합니다.


희생자결정에도 서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1년 1월에 희생자로 14,032명이 결정되었고 그 후 계속 추가 되었습니다만 한쪽에서는 이 희생자 명단에 폭동주동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그들을 제외시켜야 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이 희생자 명단에 4·3사건진상조사위원회에서 폭동 주동자라 하여 인정받지 못했던 김달삼, 이덕구 등 32명을 포함해야 한다(박경훈 작년 일본발언)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 상반되는 주장만을 외치고 있어야 하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문득 지난달 답사회 정기답사때 남원 파출소자리 앞에서 4.3때 희생된 경찰에 관한 표지석을 읽어주던 회장에게 내년이면 4.3 70주년인데 왜 그런 해설을 하느냐고 얼굴 붉히며 발언하던 신입회원이 생각납니다.



4.3때 무장대에 의한 경찰과 우익인사의 희생은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적시되어 있습니다.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 무시하는 것인지
적시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입장에 따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그 전달 11월에 내가 외도동을 안내 했습니다.
외도초등학교 북쪽 건너편 옛 외도 파출소 현 지구대 문앞에 4,3때 희생된 경찰에 대한 표지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외도동 사무소 남쪽입구 길 건너편에 3기의 순직경찰 위령비가 있습니다.
나는 이 두곳을 안내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면 감당할 수 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검열을 하여 아예 자료에도 집어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토벌대에 의해 스님들이 희생된 두곳의 절집에 대해서는 자료에 포함시켰지요.
그리고 답사간 이 두 절집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 시간이 늦어서 않갑니다라고 하고 일부러 빼놓았는데 어느 회원이 그 절집에 가보려고 일부러 왔다고 해서 애프터로 들렀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날의 답사안내는 나만의 부끄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부끄러움 때문에 아마 이글을 쓰는 듯합니다


4.3의 진상규명 및 가해자 처벌 등과 같은 ‘과거’에 초점을 둔 노력 뿐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맞춘 희생자중심 배상/보상작업과 사회통합이 필요하다고 해서 특별법에 의해 2008년에  제주4.3 평화재단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재단은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을 목표로 4.3 사료관과 평화공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주4.3의 진실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나, 노력이 없는지 노력만큼 않되는지 그 역할이 너무 미약합니다.
꽤 많은 국비와 도비가 투입된 4.3 평화공원의 방문객수는 한해 16만 명 정도로, 제주도 한해 방문객 1,500만 명의 약 1퍼센트 정도밖에 안되어 금년 4.3 70주년을 맞이하여 제주방문의 해를 선포한 듯 합니다만  외연 확장에는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이곳 평화재단에 많은 영향력을 미치는 분을 생각해 보면 양조훈, 김종민, 박찬식, 박경훈, 김창후, 오승국, 최상돈 등  이런 분들이겠지요.
참 어려운 환경속에서 4.3의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해온 고마운 분들인데 문제는 새로운 피의 수혈이 참 어렵겠다는 겁니다.
이 분들과 종신직인듯 4.3위촉직 위원을 십몇년씩 하시는 분들의  의견에 100% 동의하는 이들 만의 그룹이 형성되어 조금이라도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은 그냥 기웃거리다 말 뿐입니다.


나도 이들이 주도하는 4.3 평화재단에서 교육을 받아습니다.
2010년에 제주4.3평화재단에서  몇달에 걸쳐 격주 토요일 오후에 실시한  4.3 역사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지요.
요사이는 한번만 듣거나 가보면 바로 깨우치고 다 배웠다 하는 돈오돈수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아쉽게도 나는 잘 깨우치지도 못하고 깨우치더라도 또 배워야 하는 돈오점수스타일이라서  배우고 또 배우고 그 자리에 세번이상 가봐야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혼자서 4.3관련지역 이곳저곳을 헤메이디가 배경과 실상을 알려주는 곳이 있다하여 반가운 마음에 뛰어들어갔습니다
 
성균관대 서중석, 양정심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로 부터  '한국현대사에서 4.3의 위치''냉전, 분단 그리고 4.3','4.3의 전개과정',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고 김종민, 박찬식, 김창후씨 등으로 부터 '초토화의 배경과 피해실태', '형무소 행불과 예비검속 희생', '4.3증언과 진상규명', '4.3위령의례의 변천과정' 등을 주제로 한 강좌를 듣고  동부와 서부지역 4.3 유적지 탐사를 다녀온 바 있습니다.
강좌를 빠지고 않고 다 들었다고 수료증을 주더군요.


2011년에 다시 4.3역사문화아카데미라하여 역사란 말을 집어넣고 다시 1기가 개설되었습니다.
외부인사로 성균관대 서중석교수, 박명림 연세대 교수에 추가하여 함한희, 김영범, 한홍구교수등이 외부 인사로 오셨지요.
한 2년간을 외부 강사 강의 때는 다 찾아가 들었습니다.
아카데미가 계속되기는 했습니다만 점차 외부강사가 줄면서 이부강사의 강의 내용도 일반적인 주제의 강의끝무렵에 4.3에 대해 잠시 언급하는 형태로 바뀌어 가더군요.

그 이후에는 발길이 멀어졌는데
2~3년 전부터는 매일 저녁 2시간씩 1주일하는 것으로 강좌형태가 바뀌었다고 하고 강사도 모두 좀전에 언급한 제주인사라고 라고 합니다.


4.3역사아카데미 강좌를 듣기 전과 들은 후 개인적으로 관련자료도 많이 찾아 읽고 따로 또 같이 4.3 유적지 중 상당히 많은 곳을 답사하고 안내하기도 하였습니다...만

최근에는 꽤 오랜시간 4.3관련지역에는 발길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몇년전 북바친밧에 있는 이덕구산전에서의 트러블때문인듯 합니다.
박경훈씨가 작년 4월 재일교포와의 대담때 "매년 4월이면 중산간 이덕구 산전을 찾아 추모의 술잔을 올리는 이들이 있는데도 우리는 항쟁지도부의 ‘사상’과 그들의 ‘정신’을 애써 무시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매년 4월이면 이곳을 데리고 가던 사람들이 이들이었습니다.
나도 그들과 함께 갔었지요.
그들과 함께 가기전인 2009년 사진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항쟁지도부의 사상과 정신을 상기하자고 합니다
그것이 4.3정신이라고 ..
하지만 나는 몇번을 가도 그말에 이해를 못합니다.
그곳은 역사의 또 다른 피해자인 어느 개인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의 신산한 삶에 소주한잔 따라주며 위로 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이덕구 개인에 대한 미화는 않된다는게 나의 입장입니다.
이덕구가 새로운 인민유격대 사령관이 된 후, 토벌대를 단번에 섬멸하고 제주도를 해방시키겠다며 1948년 9월 15일을 기점으로 경찰과 국군과 우익인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한동안 잠잠했던 제주도는 또다시 살육의 혼란속으로 빠져들어갑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니까 주변이 싸해지면서 나를 보는 눈빛에서 못마땅함이 읽혀지더군요.
그 후로는 4.3의 현장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하여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 결정된 희생자들은 피난민이지 폭도가 아니라고 판단되고 일부가 무장대에서 활동을 하였더라도 주도적인 입장에 있던 자가 아니라면 그 당시 선택할 다른 대안이 없었던 절박한 처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충분한 배보상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단지 그들앞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양 자기만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무리수를 두는 이들에게 그러지 말아주십사하는 것이지요.
4.3 유족회와 김달삼, 이덕구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4.3 유족들에게 당신들은 김달삼, 이덕구 부하들의 유족이다라고 하면 맞습니다라고 할까요?
4.3이 남로당의 지시가 아니라면 그들은 더더욱 용서 받지 못합니다.
해방직후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이 ‘4.3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에서 쓴것처럼“4.3 투쟁은 일부의 미숙하면서도 모험적인 분자들에 의하여 시기 아닌 시기에 하등의 세심 세밀한 준비도 없이 무장봉기로 저돌 맹진한 것이다”라고 볼때 지금 희생자라고 말하는 민중을 고통의 질곡속으로 빠트린 주역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익쪽이라고 하는 이들은 결정된 사실속에서 활동하길 바랄 뿐입니다.
양쪽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법은 정의를 표방하지만 그 자체가 꼭 완벽한 정의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물수변에 갈거자를 쓰듯 그 시대의 대세가 흘러가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 법이지요
그러니 법으로 규정되면 그 시기에는 그 법이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4.3특별법에서 사용하는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하며, '희생자'란 제주4·3사건으로 인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 된 자, 후유 장애가 남아 있는 자 또는 수형자로서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결정된 자를 말한다. "를 기억해 주십시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무장한 산사람에 의한 군,경,보수인사의 희생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를 보다 구체화하여 국가의 명에 순응하여 활동하다가 희생된 이들에게 명예를 돌려주는 노력에 집중하시고 공연히 제주4·3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의 쓰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길 바랍니다.

쓰면서도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한 것 같습니다.
선문답식으로 두리뭉실하게...


예전에 4.3유적지를 다니면서 포스팅한 글 중 몇개를 추려봅니다.


도툴굴과 목시물굴 2010.04.27 http://blog.daum.net/kwanam/17467291 
4.3학살 광풍을 막아선 의인을 아십니까? 문형순서장  2010.09.13 http://blog.daum.net/kwanam/17467443
4.3과 길 - 남원읍 의귀리 2010.11.09 http://blog.daum.net/kwanam/17467530 
4.3과 길 - 애월읍 지역 2010.11.23 http://blog.daum.net/kwanam/17467544 

4,3과 길.- 북촌가는 길. 2010.11.26 http://blog.daum.net/kwanam/17467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