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문화유산답사회 286차 정기답사
2017년 11월 12일(일)
제주 마을 탐구
외도동
안내자
송장환
목 차
개요 1
외도1동
1. 외도동 지석묘 2
2. 거창신씨입도조 愼明麗 묘 4
3. 외도1동 포제단 5
4. 무오법정사항일인사 김상언 묘 5
5. 우렝이 본향당 터 6
6. 수정사 터 6
7. 절물 9
8. 납세미물 9
9. 고망물 9
10. 선사유물 산포지(주거유적, 우물유적 발굴지 등) 10
외도2동
1. 조부연대 12
2. 연대원과 멜캐 13
3. 소금빌레(돌염전) 14
4. 연대 포구 14
5. 연대지(마이못) 14
6. 가막샘/가막물 14
7. 조공포 유지 15
8. 월대 16
9. 월대의 비석들 17
내도동
1. 두리빌레당 20
2. 알작지 20
3. 방사탑 21
4. ᄃᆞ리코지(암맥군) 22
도평동
1. 명진학숙 터 23
2. 外都都坪洞 本鄕 23
3. 고봉기물(곱은기물) 24
4. 검은소, ᄀᆞ래소, 냉게소 24
5. 흥룡사(옛 용장굴사), 서관음사 터 25
개요
- 현황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행정동.
외도1동, 외도2동, 내도동, 도평동의 4개 법정동을 관할.
전형적인 도농통합의 특성을 나타냄.
- 연혁
①「탐라순력도」(1702) 「한라장촉」: 현 외도지경에 "수정(水淨)마을, 평대(坪代)마을"이 나타남
② 1702년 탐라지도(耽羅地圖), 1770년 「제주삼읍총지도(濟州三邑總地圖)」: 외도그내(外都近川), 내도그내(內都近川), 수정마을(水淨村), 도평대(都坪代)가 나타남
③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三郡戶口家間總冊)」: 내도리, 외도리, 도평리로 구분
④ 1914년 제주면에 편입,
⑤ 1931년 제주읍에 편입,
⑥ 1955년 제주시에 편입,
⑦ 1962년 동(洞)의 통폐합에 따라 행정구역상 외도동을 구성(법정 3개동 : 외도1.2동, 내도동)
⑧ 1978. 8. 1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법정4개동(외도1.2동, 도평동, 내도동)으로 구분
- 외도1동
탐라순력도에 수정마을로 기록되고 있는 외도1동은 우령이(우렝이 牛嶺), 절물(옛 수정마을), 수정동, 계명리등 4개의 자연마을을 합친 곳으로 제주 주호시대의 생활터 유적과 유물산포지 2개소와 고인돌 9개소가 있으며 1300년대 원나라에 의해 '수정사'라는 큰 절이 세워졌다가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인구유입이 계속되고 있으며 및 상가가 형성되고 있으며, 외도동 전체 인구의 약 75%가 거주하고 있다.
- 외도2동
외도2동은 도근천 하구 서부해안에 자리잡은 월대마을과 연대마을을 말한다. 옛날 시인과 묵객들이 즐겨찾아 달뜨기를 기다렸다가 시문을 돋구었던 월대천이 있고 조선시대 왜적이 침입시 연기를 피워 알렸던 연대마을에는 연대와 외도팔경의 하나인 마이못이 있다. 서쪽으로 조부천을 경계로 애월읍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도근천을 경계로 내도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내도동
바닷가 마을로 조약돌(알작지)이 해안변을 메우고 있으며 서쪽으로 도근천을 경계로 외도2동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원장천을 경계로 이호해수욕장이 있는 이호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측으로는 도평동 신산 마을이 있다.
- 도평동
동쪽으로 원장천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어시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으로는 이호동, 남쪽으로는 노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양쪽내 중간에 지역이 평평한 지역이라 하여 뱅디라고 불리어지고 있으며 사라, 신산, 도평, 창오랭이 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1962년 행정 구역상 노형동에 통합되었다가 1978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외도동으로 편입되었다.(출처 : 외도동 홈페이지, 향토문화대전)
외도1동
1. 외도동 지석묘
1-1 외도동 지석묘 5호(기념물 2-15호)
상석의 크기는 길이 315cm 폭 265cm 두께는 60cm이며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이다. 장축은 북동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상석의 동쪽 옆면은 평평한데 이는 채석할 때 깨어낸 자국으로 추정된다. 상석의 윗면은 울퉁불퉁한 골이 나 있다. 남서쪽은 높이 치켜지고 북동쪽은 거의 지표면과 닿아 있다. 들려 있는 아래에는 지석을 확인할 수 없다. 북동쪽 아래에는 넓적한 지석이 고여 있는 상태이다. 바닥이 암반이어서 시신을 어디에 묻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강정효는 기자 시절 newsis 기사에 외도동 5호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86개의 주술적 성격의 성혈(cup mark)이 새롭게 관심을 끌고 있다라고 보도하였으나 현장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
1-2. 외도동 지석묘 9호(비지정)
원래 위치에서 상석만 옮겨진 상태로서 상석의 원위치는 확인 불가능하다. 상석은 밭 귀퉁이에 시멘트로 메워져 세워진 상태이다. 크기는 주변의 고인돌에 비해 조금 작은 편이나 두께가 고르고 매끈하다.
1-3 외도동 소재 지석묘 위치
①제주도 지정 기념물 2-11호 외도동 지석묘1호 : 제주시 외도1동 20-1
②제주도 지정 기념물 2-12호 외도동 지석묘2호 : 제주시 외도1동 20-3
③제주도 지정 기념물 2-13호 외도동 지석묘3호 : 제주시 외도1동 23
④제주도 지정 기념물 2-14호 외도동 지석묘4호 : 제주시 외도1동 28
⑤제주도 지정 기념물 2-15호 외도동 지석묘5호 : 제주시 외도1동 27
⑥문화재 미지정 외도동 지석묘 6호 ; 제주시 외도1동 29번지
⑦문화재 미지정 외도동 지석묘 7호, 8호 : 위치 모름
⑧문화재 미지정 외도동 지석묘 9호 : 제주시 외도1동 124-3번지
고인돌은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청동기시대의 여러 무덤 형식 중의 하나다. 육지부의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 조각이나 부장품이 출토돼 무덤으로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집단적인 묘역에 대형 고인돌을 묘 표석으로 세워 위용을 과시하기도 한다. 집단의 결속과 단결을 다지기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고인돌은 유럽과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한반도에 분포돼 있다. 전 세계의 10만여기 가운데 40%에 이르는 4만여 기가 한반도에 있고,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지방에 2만4천여 기가 집중돼 있다. 한반도의 고인돌이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전래됐다는 북방설과 동남아 지역에서 왔다는 남방설도 있지만 한반도 자생설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한반도에 분포돼 있는 데다 중국 지역의 고인돌은 그 형식이 단순한 반면 한반도의 고인돌은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동검(銅劍)도 요동지방을 포함해 한반도 지역에서 독특한 형태인 비파형 동검들이 고인돌의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는 점도 한반도 자생설을 뒷받침한다.
제주도에는 80여기의 고인돌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이 발견된 제주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제주에서는 주변의 발굴물들을 통해 기원후 3세기까지 고인돌이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제주의 고인돌은 국내의 고인돌과는 다른 특유의 형식으로 조성돼 있다. 크고 작은 돌을 고임돌로 쓰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되 고임돌 자체가 무덤방이 되도록 한 것을 '위석식'(圍石式) 고인돌이라고 한다. 같은 위석식이기는 하지만 전남지방에서는 깬 돌이나 자연석을 고임돌로 쓴 반면, 제주의 고인돌은 판석을 고임돌로 쓴다. 제주만의 고유한 형식이어서 '제주식 고인돌'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다.
가파도에 고인돌 90여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학계에서는 고인돌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가파도 고인돌의 규모로 볼 때 이런 정도의 대규모 고인돌 군락이 조성되려면 주변에 대규모의 집단이 거주한 취락지역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근 모슬포 지역 등에서 대규모 취락지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도 발견된 바 없고 고인돌도 대정읍 하모리에 하나밖에 없다. 가파도 고인돌에서는 덮개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어 고인돌이 아니라 파도에 밀려 올라온 바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위석식 고인돌 외에 잘 다듬어진 판석 3~4개로 ㄷ자나 ㅁ자 모양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편평한 덮개돌을 얹어 탁자 모양으로 만든 '탁자식'(卓子式),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깬 돌이나 자연석 4~8개 정도를 놓고 그 위에 덮개돌은 얹어 바둑판 모양으로 만든 '바둑판식'(棋盤式),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고임돌 없이 덮개돌은 얹은 '개석식'(蓋石式)이 있다.
제주시 외도동과 애월읍 광령리 일대의 고인돌들은 고대 탐라의 이 지역 마을터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이 지역의 지배계급에 해당할 것이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 나정욱 조사연구과장은 "고인돌에는 시신을 일시적으로 두었다가 얼마 동안 세월이 흐른 뒤 뼈를 다른 곳으로 옮겨 묻고 그 수장층 후손의 무덤으로 다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2. 거창신씨입도조 愼明麗 묘
거창 신씨(居昌 愼氏)는 귀화 씨족으로 거창이 단본(單本)이며 거창 신씨 시조는 송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고려 문종27년(1075) 때 귀화한 공헌공(恭憲公) 신수이다. 그의 아들 신안지(愼安之)는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중국에 보내는 공문서 관련 일을 맡아 처리했다고 전한다. 14세손인 신이애(愼以哀)의 아들 3형제는 중시조나 다름없는 공고한 가세를 형성해 3파를 형성하면서 가문은 발복하게 된다. 제1파는 조선 세종 때 예조 참판을 지낸 신기(愼幾)를 파조로 하는 참판공파, 제2파는 신기의 아우 신언(愼言)을 파조로 하는 서령공파(署令公派), 제3파는 단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신전(愼詮)을 파조로 하는 양간공파(襄簡公派)이다.
거창 신씨 제주 입도조는 제1파 참판공(參判公) 신기(愼幾)의 제2자인 신준갑(愼俊甲)의 6세손이며 시조의 20세손(*비석에는 公諱明麗系居昌愼氏始祖恭獻公諱修之十八代孫이라고 표기되어 있다)인 신명려이다. 신명려는 제주도에서 새 생활의 터전을 마련 후 세 자녀를 얻었다. 맏이 신경보(愼景寶)는 화북에 눌러 살고, 둘째 신경화(愼景曄)는 김녕에, 막내 신경한(愼景漢)은 신촌에 각각 근거를 잡아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입도조 신명려가 어떤 신분과 동기에서 제주도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시기는 인조6년(1628)으로 후손들은 보고 있다. 그의 입도는 그 전해인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나라 안이 전운으로 뒤덮이게 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가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지대를 택하여 당시 제주목 화북포로 입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유력하다.
제주에 낙향 입도 후 처음으로 등과한 사람은 무과에 급제한 신명려의 6세손인 신인해(愼仁海)이다. 신명려의 9세손인 신상흠(愼尙欽)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의현감과 예조좌랑,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문장에도 이름을 날렸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3. 외도1동 포제단
외도1동의 마을 포제는 이 마을이 논농사를 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기우제(祈雨祭)'라 하여 한 여름에 지낸다고 한다. 제일은 음력 7월의 혹정혹해일(或丁或亥日)을 택하게 되면, 8월 15일을 전후하여 제를 지낸다. 포제의 신위는 `포신지령'이다.
4. 무오법정사 항일인사 김상언 묘
고종10년(1873)∼1965년.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제주도 외도(外都)에서 태어났다.
1918년 10월 5일 서귀포 법정사(法井寺) 승려 김연일(金蓮日), 강창규(姜昌奎) 등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무오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0월 7일 새벽 거사에 참여 법정사를 출발한 34명의 선봉대 중 한 사람으로 거사 당일 각자에게 맡겨진 부서에 따라 대열에 앞장섰다.
김상언은 선봉대장이던 강창규와 함께 중문 경찰관주재소의 건물과 기구·문서 등을 파괴하고 불태웠다. 또한 강창규의 명령을 받아 전선과 전주를 잘라내었고 일본인을 때리는 데 앞장섰다.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 방화죄, 상해죄 그리고 전선과 전주 절단 행위 등의 죄로 징역 6년형을 선고 받았고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제주 법정사 항일 운동 참여에 대한 공훈으로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순동에 있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戊午法井寺抗日運動發祥址)에 건립된 의열사에 영정이 모셔져 독립운동의 뜻이 기려지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5. 우렝이 본향당 터
우렝이 마을은 소를 풀어놓던 쇠앗동산이어서 이를 한역화하여 牛嶺이라 했던 것이 우렝이로 변음되었다 한다(박용후, 1992). 설촌 전설은 옛날 천지천황 금상또 김씨하르방이 일정한 좌정처가 없어서 제주도 400리를 돌아다니다가 영주산에 올라 천지를 살펴보고 이곳을 좌정처로 정해 마을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렝이 금성주택 뒤 북동쪽에 있던 당을 우렝이 본향당, 하르방당, 돗당이라고 하였는데 1898년 방성칠의 난때 방성칠이 피신왔다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어린이 공원 조성시 훼철되었다.(출처 : 제주문화 11호 외도동 옛지명)
6. 수정사 터
위치 : 외도1동 276번지 일대
현재 어린이놀이터 중심 1만여㎡의 고려시대 사찰 터. 수정사는 고려시대 한라산 북쪽 지역을 대표하는 비보사찰이었다.(비보사찰裨補寺刹: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지세, 산수, 강등의 쇠처(衰處)나 역처(逆處)에 사찰을 세워 지기(地氣)를 보완한다는 도선의 주창에 의해 세워진 사찰) 한라산 남쪽 지역을 대표하는 법화사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사찰로서 조선시대에도 성쇠를 거듭했다. 조선 전기 태종 때까지만 130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대가람이었다. 태종 때의 배불 정책으로 노비를 30명으로 줄이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법화사보다는 지속적인 활동을 벌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옛 수정사 주춧돌
중종16년(1521) 충암 김정의 「수정사 중수권문」을 포함하여 조선시대의 수정사에 대한 기록은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602년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 1700년대의 「조선강역총도(朝鮮彊域摠圖)」, 1800년대 후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저본인 「동여도(東輿圖)」 등에 나타난다.
김상헌의 남사록에 순무어사로 제주도에 와서 이 일대를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수정사에 들렀다가 남긴 기록에는, "도근천에 사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 날이 어두웠으므로 숙박하기 위해 이르렀다. 그러나 초가집 수 칸으로 바람과 비를 가릴 수도 없었고, 기거하는 중들이 모두 부인을 거느려 자식을 두고 있어서, 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수정사지 다층석탑(돌문화공원 재현)
17세기에 이르면서 수정사는 초가 수 칸으로 명맥을 잇고 있었으나 숙종20년(1694)에 이익태 목사가 폐사된 수정사의 재목들을 가져다 연무정을 중수하였다라는 기록을 보면 숙종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수정사지가 발굴되기 이전, 이곳에는 외도초등학교의 서쪽 울타리를 따라 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 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 외도동의 택지 개발 계획이 본격화되면서 당시 수정사의 사역을 관통하는 4차선 도로 개설 계획이 세워졌다. 사업이 시행되기에 앞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문화재의 존재 여부에 따라 도로의 개설 및 우회도로 개설을 결정하기로 했다.
1998년과 2000년 수정사지 발굴 조사에서 건물지 12동이 발견되고, 도로와 보도 · 탑지 · 석등지 · 담장지 등이 확인되어 수정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였으며 유물로는 9~10세기의 해무리굽 순청자가 발굴되어 수정사의 창건 연대를 짐작하케 하였다. 이외에도 만호(万戶) 명문기와 연판문 막새가 출토되는 등 최상급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특히 수정사지에서 발굴된 청석 다층 석탑의 면석에 음각된 인왕상은 고려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되어 고려시대 수정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에 도로 개설 사업이 강행되는 바람에 수정사지는 사라져 버렸고, 수정사라는 이름을 쓰는 작은 민가를 이용한 사찰경내에 옛 수정사지의 주춧돌로 여겨지는 10여 기의 석재만이 남아 있었다.
지금은 그 석재들은 항파두리 주차장 서쪽 공터로 옮겨놓았고 교래리 돌문화공원에 수정사지 다층석탑을 복제하여 전시하고 있다. 외도동 현지에는 수정사지 터였음을 알려주는 안내판만이 있을 뿐이다.
7. 절물
외도동 절디밧에 있는 샘물을 일컫는데 고려시대 수정사라는 절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샘물이다.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수정마을이라고 하였으나 마을 이름이 절물마을로 바뀌었고 현재의 수정마을은 이와 관련이 없다. 일제 강점시기 이 일대에 전분공장이 있었는데 1960년대 이후 수원지개발로 철거되었다.
8. 납세미물
현지 안내판에 수정사가 있었을 때에 수정사 스님들이 식수로 이용했던 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지 고로들은 납작한 샘이라 하여 납세미라 하였다고도 한다. 외도1동 포제단이 사장(射場)밭에 위치했던 1978년 이전까지는 마을포제에 이 물을 이용하였다. 2007년 12월 외도동과 주민자치위원회가 복원, 배수로와 울타리를 정비후 안내판을 세웠다.
9. 고망물(전분공장물)
1987년 한국자연보호협회와 경향신문사가 공동으로 "한국의 100대 명수"를 선정하였는데 제주도에서는 900개의 용천수 중 8곳의 용천수가 한국의 명수로 선정되었다. 제주도 8대명수로 선정된 곳은 제주시에서는 도두동의 오래물, 애월 하물, 아라2동 금산물, 외도동 수정사지내 고망물 등 4곳이고 서귀포시에는 산방굴사 약수, 서귀포 돈내코, 서귀포 서홍동 지장샘, 서귀포 중문동 천제연이 4대명수이다.
이 물은 예전에는 식수로 사용했으며 주민들은 제주어로 보통 ‘고망물’(구멍물) 또는 수정천(水精泉)이라고 부른다. 서남쪽 구석에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수정천 신축기념비(水精泉新築紀念碑)가 있다. (현재는 동남쪽으로 옮겨져 있다)
비석 정면 오른쪽에 ‘濟州島澱粉第二工場□□□’라고 쓰여진 것으로 보아 전분공장이 이 지역에 있었을 때 수리시설을 복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우측면에는 ‘外都里區民一同’이라고 하여 세운 주체는 마을 주민임을 알 수 있다. 『제주의 물 용천수』에 따르면 1일 용출량이 300㎥라고 되어 있다.
10. 선사유물 산포지(주거유적, 우물유적 발굴지 등)
2001년 외도동 125 일대에 신제주~외도동 간 도로 개설 공사로 인해 유적의 일부가 파괴되어 조사가 실시되었다. 시굴 조사가 2001년 7월 11일~10월 8일까지 진행된 후, 두 차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1차는 2001년 11월 15일~2002년 2월 22일까지 진행되었고, 2차는 2002년 7월 29일~9월 23일까지 진행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탐라 성립기 후기에 해당하는 대규모 취락 유적으로 밝혀졌다. 확인된 유적은 원형 수혈 주거지 2기, 수혈 유구(우물 포함) 48기, 소토 유구 3기, 구상유구 3기, 석축 유구 2기, 석렬 유구 2기, 매납 유구 1기와 그 외 다수의 주혈이 있다.
주거지 유적
주거지는 모두 2기가 확인되었다. 평면 형태는 모두 원형이며 내부 중앙부에는 기둥을 설치할 수 있는 양단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내부 중앙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구가 설치되어 있다. 이 구는 다시 벽체에 설치된 벽구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주거 형태는 아직까지 제주도는 물론이고 남한 지역에서도 알려진 예가 없다.
장축 방향은 2기 모두 N-65°-E이다. 1호 주거지가 직경 432㎝이고 양단에 주혈이 설치되어 있고, 2호 주거지는 직경 462㎝이며 양단에 초석이 설치되어 있다.
수혈 유구는 모두 48기가 확인되었다. 이 중에서 우물은 모두 13기가 확인되었다. 우물은 축조 방법을 기준으로 크게 토벽조, 목조, 석조로 나뉜다. 수혈 유구는 축조 형태에 따라 저장, 급수 및 집수, 폐기, 야외 노지, 제의와 관련된 유구로 추정된다. 이 외에 취락의 경계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 시설, 생활과 관련된 구상 유구·소토 유구·석렬 유구, 제의와 관련된 매납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
외도동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는 탐라 성립기 후기의 주거 양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 취락의 전체적인 배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시 외도동 유적에 대한 2차 발굴조사 결과, 기원후 2~3세기 이형(異型) ‘원형 주거지’ 1기와 깊이 1.8m의 우물 1기 등 다량의 유물과 유구가 추가로 출토됐다.
제주문화예술재단 부설 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2차 발굴조사에서 가장 주목된 유구는 Ⅱ-1지구에서 발견된 원형주거지(지름 4.1~4.3m). 이 주거지는 기둥 2개를 가운데 세운 형태의 송국리형 주거지에서 변형.발전된 형태로, 한반도에서 보고된 예가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주거지 가장자리에는 약 20㎝ 너비의 긴구덩이를 파고, 그 내부에 적갈색 경질 토기편을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주거지 중앙부에는 깊은 방형(方型)의 구덩이를 파고 돌을 돌려 쌓았으며, 가장자리와 중심 구덩이 사이에는 방사선 형태의 줄 구덩이 네 줄이 있다.
이 주거지에서 드러난 줄 구덩이에 대해선 조리시설이나 난방시설로 조사단은 해석하고 있다. 줄 구덩이의 토기편이 불기를 넣어 바닥을 데워 난방 기능을 했고, 조리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사단은 “삼양동 유적(기원후 1~2세기) 주민집단이 주거지 밖에서 조리했다면, 외도동 주민은 주거지 내부에서 조리와 식사를 함께 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며 “이는 삼양동보다 발전된 형태의 생활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이 원형주거지 인근에서 발굴된 우물(지름 1.2m) 1기는 당시 사람들의 우물축조기술과 생활상을 알려주는 자료로 해석된다. 우물은 대부분 현무암을 돌려 쌓았고, 우물 바닥에서 판자 등의 유물도 섞여 나왔다.
우물유적과 그 옆에서 발굴된 대형토기
이에 앞서 외도유적 시굴 및 1차 발굴 결과 탐라 전기의 우물 12기, 수혈유구, 토기편, 갈돌 홈돌 등 석기류, 옥제품과 탄화곡물류가 출토됐다. 문화재단의 2차 발굴조사가 끝남에 따라 유적에 대한 복토작업 후 도로개설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출처 : 2002.10.20, 제주뉴스)
외도2동
1. 조부 연대
횃불과 연기로써 급한 군사 소식을 전하던 전통 시대의 통신 수단인 연대의 하나.『경국대전』에 의하면 봉(烽)은 불을 피워서 통보하는 것을 뜻하고, 수(燧)는 설나무에 불을 질러서 그 연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 하며,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을 들어 통보하는 제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봉수는 높은 산이나 해안 구릉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따라서 봉수제는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 우편과 전기 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근대 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군사용 통신이었다.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유래된 봉수제는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봉수제가 처음으로 법제화된 것은 1149년(고려 위종 3)때 부터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 1419년(세종 1)에 이르러 종래에 계승되어 온 고려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참고하여 거화거수(擧火炬數) 등 관계규정을 정하였다. 별일이 없을 때는 1개, 적이 해안에 나타나면 2개, 해안에 가까이 오면 3개, 우리 병선과 접전시에는 4개, 상륙시에는 5개를 올리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주의 봉수와 연대의 크기로 보아 3개까지만 운영되었던 듯하다. 1679년(숙종 5) 정의현감으로 부임한 김성구가 일기체 형식으로 쓴 남천록에 따르면 황당선(荒唐船·수상한 배)이 수평선에 나타나면 횃불을 2개(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군사들이 약속된 장소에 집결해 명령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또 배가 가까이 접근하면 3개를 올리고 적이 상륙하면 군사들이 성을 지킨다고 기록했다.)
봉수와 연대에는 별장 6인과 봉군 12∼36명이 배치되어 1번(조)에 별장 2인 봉군 4∼12명씩 3번으로 나누어 3교대로 24시간 수직하였다. 그러므로 봉군은 인근에서 충당하되 이들에게는 다른 군역을 부관하지 않았다.
제주도의 봉수에 관한 기록은 1439년(세종 21) 제주도안무사 한승순이 올린 장계에 의하면 제주에는 봉수가 22개소가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다. 제주목에 10개소, 정의현에 7개소, 대정에 5개소가 설치되었다. 그 후 봉수에 대한 정비를 통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봉수는 23개소로 제주목에 8개소, 정의현에 10개소, 대정현에 5개소가 설치되었다. 또한 봉수는 높은 산정에 위치하는 등 구체적으로 설치된 봉우리(오름)가 표기되어 있다. 또한 17세기에 기록된 『탐라지(耽羅誌)』에는 25개소로 제주목에만 2개소가 증설되었다. 그 후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탐라방영총람』에 비로소 봉수와 연대가 구분되었고, 봉수 24개소, 연대 37개소가 시설되었다. 그리고 정조 연간에 편찬된 『제주읍지』에 와서 정의현의 수산봉수와 종달연대가 설치됨에 따라 이 무렵에 도내 봉수 25개소, 연대 38개소가 정비되었다.
그 후 봉수와 연대는 명칭만 다를 뿐, 25봉수와 38연대가 유지되다가 1811년(순조 11)에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 의하면 모슬봉수와 8개의 연대가 폐쇄되어 제주에는 24봉수와 30연대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연대의 축조는 <경국대전> 병전(兵典) 봉수조(烽燧條)에 의하면 높이 30척, 밑면 1변 길이 20척 방형(方形)으로 축대하고 둘레 밖으로는 깊이 10척 너비 10척의 해자(垓子)를 파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제주의 경우에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고, 해자를 판 연대는 없다(*신흥리연대에는 해자가 있음). 구좌면 월정리 무주연대와 평대리 입두연대는 사구(砂丘)를 외벽으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봉수와 연대 주변 100보 내에서는 봉수로 오인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화가(火氣)를 사용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였다.
제주목에서 서쪽으로 23리(12.86㎞)에 위치한 조부연대는 동쪽으로 도원봉수(직선거리 4.3㎞), 서쪽으로 수산봉수(4.4㎞)와 서로 군사 소식을 주고받았다. 봉군은 별장 6명, 직군 12명이 군무했다.
조부연대는 사다리꼴 형태에 허튼층쌓기로 석축되어 있다. 연대의 상부에는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콘크리트 ‘망루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망루대라고 불렀으며 2010년에 연대를 복원하면서 망루는 철거되었다. 동쪽과 남쪽 벽면 중간 이하에는 원래의 돌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새로운 돌을 가져다 쌓았다.
2. 연대원과 멜케
제주시 외도2동 조간대는 외도천 하류에 자리잡은 ‘개맛’에서부터 ‘연대포구(너븐여개)’·‘망알’을 거쳐 북제주군 애월읍과 경계를 이루는 ‘벼락맞은 내’에 이르기까지 광활하다.
이 일대 어로문화유적으로는 ‘멜케’·‘독수’·‘망알’·‘연대원’·‘큰신통’·‘족은신통’ 등 모두 6개의 갯담이 있다.
이 가운데 ‘연대원’은 마을사람들이 담을 쌓아 인공적으로 만든 것으로 한 때 톳 양식장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멜케’ 등 나머지는 물웅덩이 지형을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멜케는 추가로 보수하여 최근까지 양식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3. 소금빌레(돌염전)
돌염전은 소금빌레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빌레는 넓적한 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안가에 넓게 깔려 있는 암반 위에 바닷물을 이용해 천일염을 제조하였다. 이러한 돌염전은 일반적인 제염방법과 달리 암반을 활용하여 해수를 직접 증발시키는 제염 형태를 취한다. 돌소금밭은 일정한 개인소유가 인정되었으며 매매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염과정을 보면 ①암반틈새막기 ②진흙으로 두렁쌓기(호갱이) ③해수를 호갱이로 운반 ④간물(함수) 만들기 ⑤간물농도 확인 ⑥간물을 혹에 보관 ⑦혹의 간물을 호갱이로 운반 ⑧간물 증발시키기⑨돌소금 채취 순으로 진행된다.
4. 연대 포구
1709년 탐라지도에 마리지포(馬里池浦), 영조시대 제주삼읍전도에 마리포(馬里浦)로 표기되었고 포구 안쪽에 연대가 표시되어 있다. 1899년 제주군읍지에 마지촌(마지촌)으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1900년대 마리못개로 불리운 것으로 추정되며 연대포구라는 이름은 근래에 붙여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포구 안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안쪽의 작은 구역은 콘크리트로 바뀌긴 했지만 원래부터 있었던 포구로 출입구가 정북향이다. 썰물에는 바닥을 드러낸다. 1990년대에는 수심이 낮아 인근의 월대포구에 정박하기도 했었으나 그 후 준설공사를 했다고 한다. 요즘도 작은 배들은 이곳에 매고 있다. 바깥쪽 포구 방파제의 아래 쪽에는 통수구가 있어 마이못에서 나오는 물이 통하도록 되어 있다.
5. 연대지(마이못)
연대 마을입구에 있는 못을 일컫는다. 국립지리원 발행지도에는 연대못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일주도로 남쪽비석에는 마음못(馬飮池), 마음못동산(馬飮池峴)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바닷물과 담수가 섞이는 기수역(汽水域, brackish water zone) 해안습지라고 한다. 강수량과 조석간만의 영향으로 염분농도가 불규칙하게 변하여 생물종다양성을 보이며 이런 생물들이 성장하는 성육장(nursery ground)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다. 숭어, 민물장어, 은어, 참게 등 다양한 기수역 생물이 서식했다고 한다. 외도8경의 하나는 이 연못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마이못은 깊고 넓어서 고기가 많은데
얻은 바 유연함이나 즐거움이 남아 있도다.
날이 따뜻해지자 물가의 이끼가 서서히 풀린 뒤
조수는 차지만 물가의 개구리밥은 달 밝음에 싹이 나는구나.
하물며 몰래 듬북 속에서 서로의 망상을 날려 버리고
유희에 연잎도 서서히 움직이더라.
오고가는 어부가 쳐놓은 그물을 올리니
이 가운데 참맛이 갖추어진 것이 아닌가!
이 연못 남쪽에 가막물, 가막수라고 하는 샘물이 있고 서쪽에는 작은 가막물이 있으며 북쪽은 바다로 이어진다.
6. 가막샘/가막물
연대마을 서쪽 진입로 쪽에 있는 마리못 동남쪽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일컫는다. 마을에 수도가 설치되기 전 마을에서 음용수로 사용하였다. 샘이 흘러내리는 주위를 직사각형 돌담으로 둘러 막았다. 그리고 물길을 가로질러 내부 공간을 나누는 긴 돌담벽과 1m 정도 간격을 두고 이보다 짧으며 어긋나게 돌담벽을 설치하였는데 돌담벽으로 구분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밀물 때에는 가막샘까지 바닷물이 올라온다.
7. 조공포 유지(옛터)
1271년(원종 12)에 제주도에 들어와 항파두리 토성을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가 물자 운반용으로 사용했던 포구이다.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삼별초가 제주에 주둔해 있는 동안 주 보급항이 되었던 포구. 1271(원종12)년 김통정 장군이 귀일촌에 항파두성을 쌓으면서 이곳을 해상 보급기지로 삼았다. 당시 삼별초는 남해연안 일대에 수시로 공격을 가하여 수많은 물자를 이 포구를 통하여 반입하여 항파두리로 수송하였다.〉
무너진 조직을 복구하고 거점 시설을 조영하는 데 주력하여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삼별초가 식량 및 물자를 제주에서 획득하기 어렵자 제주에 입거한 지 1년이 지나서 본토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활동의 내용은 조운로 차단 및 약탈, 양민살해, 인원의 납치 등과 같은 약탈수준이었다.
삼별초는 원종13년(1272) 3월에 회령군(장흥 부근)에 침입하여 漕船 4척 약탈, 5월에 고부에 침입해 조선 13척 약탈하고 강진현에서 배 20척, 쌀 3천200석을 약탈하고 12인을 살해하고 24인을 납치했으며 8월에는 전라도 조공미(組貢米) 800석 약탈, 9월에는 고란도에 침입하여 전함 6척을 불사르고 다수의 사람들을 죽였다.
다음해인 원종 14년에는 정월에 합포에 2차에 걸쳐 침입하여 전함 다수를 불태우고 몽고군 10여명씩을 죽이고 3월에는 탐진에 들어가 고려의 수군 15명을 죽이고 몇명을 붙들어 가기도 하였다. 이 때 획득한 곡식과 물자들이 이 포구를 통하여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서 애월읍 광령 2리를 거쳐 항파두리성까지 이어지는 길이 남아 있는데 이 길을 통해서 물자를 운반하였을 것이다.
추정 조공포옛터
이 포구가 조공포라고 불리운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관아에서 조공을 실어 날랐다 하여 조공천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성종12년(1432)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都近川 在州四十里, 一名水精川, 一名朝貢川, 州人語澁 都近字卽朝貢字之誤 라하여 도근천은 원래 조공천인데 제주 사림들의 방언이 난삽하여 도근천으로 잘못 발음한다고 하고 있다. 이후 김상헌의 남사록, 이형상의 남환박물, 이원진의 탐라지 등 대부분의 책들이 이를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이전인 1363년 공민왕대에 발간된 이제현의 『익재난고 소악부』에서 이미 ‘都近川’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훨씬 전부터 ‘도근천’이라 불리고 있었다.
都近川頹制水坊 도고냇물 허둑이허난 방축이엔 다왔주마는
水精寺裏亦滄浪 수정사는 절도절이난 대천바당 물바당이라라.
上房此野藏仙子 웃방에는 오늘밤이도 새각시를 곱져놓아근
社主還爲黃帽郞 큰스님은 중도중이난 밤만오민 사공이라라.(양중해 譯)
김일우는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서는 이곳은 조공포유지가 아니고 근대에 수축된 곳으로 월대 소나무가 있는 곳을 조공포 터라고 소개하였다.
8. 월대
외도천변에 인접해 있는 평평한 대를 일컫는다. 도근천과 외도천이 합류하는 지점 가까이에 있으며 주위에는 오래된 폭낭과 소낭이 도근천 위로 휘늘어져 있어 경관이 좋은 곳이다. 지형이 반달과 같은 곳이며 옛날부터 밝은 달이 뜰 때 주위와 어우러져서 물위에 비치는 달빛이 장관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래 월대(月臺)라는 용어는 "궁궐의 정전과 같은 중요한 건물 앞에 놓이는 넓은 대."를 의미하던 것으로 월견대(月見臺) 즉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궁궐에서의 하례(賀禮)·가례(嘉禮)와 같은 큰 행사 때 사람들이 올라서서 행사에 참여하는 데 이용되며 제례(祭禮) 때에도 이용된다. 대개 방형의 넓은 단(壇)으로, 그 위에 지붕이나 다른 시설을 하지 않는다. 조선조중엽부터 지방관서에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조선 중엽 이후 민간에도 전파되었다.
이곳 외도천 월대는 조선시대에 많은 시인과 묵객(墨客)이 시문을 읊었고, 시회(詩會)를 열기도 했다고 전하나 일설에는 조공포가 있던 곳으로 포구가 하류로 옮겨간 이후 월대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월대 앞을 막아 만든 월대소는 물이 깊고 맑으며 민물이 들어오는 지점으로 뱀장어와 은어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한다. 월대와 월대앞 월대소의 모습은 시비에 새겨진 ‘월대송(月臺頌)’이라는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천년을 지났어도 물색은 천년만년/ 달빛 업은 은어 떼도 천명이라 부산하다/ 고망물 강을 거슬러 다리난간 넘나든다// 달빛이 한가롭다 옛 풍월 어디메인가!/ 팽나무 고송 숨골에 수심 여는 저 나그네/ 한잔 술 심은 둔덕에 월대 밤은 깊어만 가네.’
최근에는 물줄기가 점차 약해지더니 결국 하천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고 상류엔 물이 고여 녹조현상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월대천 원류(原流)인 속칭 ‘고망물’ 인근에 스포츠센터가 들어서면서 물길이 바뀌어진 것을 꼽는다.
9. 월대의 비석들
9-1 월대비
月字로 반달을 그린 月臺碑의 뒷면에는 가운데에 큰 글씨로 〈외도갑자신흥회(外都甲子新興會)〉라 새기고, 우측에 〈主催 金? 李重華 李亮皓 高性模 文世勳 崔濟斗〉, 좌측에는 〈主催 □□□ 朴孟浩 金信熙 金昶宇 李辰珩 朴昌植〉, 또 다른 면에는 □□□□年 乙丑 三月日 建設이라고 새겼다. 일제강점기에 乙丑년이면 大正十四 1925년이다.
月臺碑의 글씨는 연농 홍종시(硏農 洪鍾時)의 필적이다. 홍종시는 철종7년(1856) 제주성내에서 홍재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무2년(1898) 1월 김윤식이 제주에 유배되자 그에게 사사하기 시작하였으며 김윤식이 조직한 시회(詩會)인 「귤림(橘林)」의 동인이 되어 많은 지식을 익히고 김윤식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다. 융희1년(1907)에는 박영효가 제주에 유배되자 그와 교분을 맺어 개화사상에 대하여 깊은 감화를 받았다. 이 때부터 홍종시는 이 지방의 선각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며 자식들에게는 모두 신교육을 받게 하고 복잡한 의례절차와 생활양식을 혁신하는 데 앞장섰다.
9-2 1970년대 일주도로 도로공사를 하면서 외도 각지에서 모아온 비석
① 使相梁公憲洙善政碑
본관은 남원. 자는 경보(敬甫). 아버지는 부사정을 역임한 양종임(梁鍾任)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48년(헌종 14)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2월 14일 제주목사에 임명되어 3월 정기원(鄭岐源)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있을 때 『훈민편(訓民篇)』을 저술하여 제주도민을 계도하였고, 삼성사에 제전(祭田)을 특별히 내렸다.
전 제주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엄하게 다스려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다. 1865년(고종 2) 가을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고 조정에 쌀 1천 석을 요청하여 제주도민을 진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고종 3) 8월에 승지에 임명되어 이임하였다.
이임 후인 1866년 어영청의 천총(千摠)으로 있을 때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1873년(고종 10) 어영대장에 임명되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당시에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1884년(고종 21)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887년(고종 24) 독련사가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 산 59-3번지에 있다.
1867년(고종 4)에 세워진 사상양헌수영세불망비(使相梁憲洙永世不忘碑)가 제주시 삼도2동에 있다. 1870년(고종 7)에 세워진 목사 양공헌수 제폐비(牧使梁公憲洙除弊碑)가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에 있다(제주 목관아로 이설됨). 1911년 6월에 세워진 사상양헌수기념비(使相梁憲洙紀念碑)가 제주 삼성혈에 있다. 또한 건립 연대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양헌수 기념비가 두 개 있다. 사상 양공헌수청덕휼민비(使相梁公憲洙淸德恤民碑)가 제주시 일도2동에, 사상양공헌수선정비(使相梁公憲洙善政碑)가 제주시 외도동에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② 使相尹公久東恤民善政碑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치항(稚恒). 아버지는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 어머니는 이보만(李普萬)의 딸이다. 1801년(순조 1)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홍문관교리를 거쳐 1811년(순조 1) 순흥부사에 임명되었다. 1612년(순조 12) 순흥부사를 사임한 이후 세자시강원의 필선·문학·사서 등을 지냈으며, 1815년(순조 15) 5월에 허명(許溟)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여 1817년(순조 17) 10월에 형조참의에 임명되자 제주를 떠났다.
제주목사 재임 중 공피전(供彼錢) 1,800냥으로 공피창을 설치하여 이양선(異樣船)이 표류하여 왔을 때 민폐를 없애기 위해 그들에게 연료 및 식량 등을 제공하기 위한 금전을 비축하였다. 후일 이를 환모조(還耗粗)로 바꾸어 1,088석을 비축하여 재해에 대비하였다. 1817년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호남지방에서 곡식을 가져와 도민을 구제하였으며 환모조 2,500석을 미리 준비하여 두었고, 홍경래의 난을 듣고 의병을 일으키려던 대정현 사람 구제국(具濟國)[1766~1831]·양위경(梁渭慶)[1767 ~1852] 가문에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순조17년(1817) 11월에 세워진 「사상윤공구동휼민선정비(使相尹公久東恤民善政碑)」가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731번지[중산간도로 3336] 앞 도로에 있으며, 1818년(순조 18) 1월에 세워진 「목사윤공구동청덕선정비(牧使尹公久東淸德善政碑)」가제주시 화북동 비석거리에 있다. 월대에 위치한 「사상윤공구동휼민선정비(使相尹公久東恤民善政碑)」는 건립연대를 알 수 없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③ 使相金公政淸德恤民萬世不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 영조 때의 제주목사. 본관은 안동이며 경상도 영주(榮州) 태생으로 자는 사달(±達), 호는 노봉(蘆峯)이고 아버지는 휘봉(輝鳳)이며 어머니는 봉화김씨 성휘(聖徽)의 딸이다.
1708년(숙종 34) 문과에 급제 내섬시직장(內贍侍直長)이 되었고 그 뒤 사헌부 감찰,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暗), 함경도사, 병조정랑, 충청도 옥천군수, 강원도 강릉부사, 사간원 정언, 제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지방의 수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양역(良役)의 여러 가지 폐단을 개선하기에 힘쓰는 등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많이 남겼다. 경상북도 오천서원(梧川書院)과 제주의 상현사(象賢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노봉집」4권이 있다.
노봉 김정은 1734년(영조 10) 9월, 정도원(鄭道元) 목사의 후임으로 손명대(孫明大) 목사가 발령되었는데 제주로 향하다가 전라도 강진(康津)에 이르러 객사(客死)하자 조정에서 김정을 발령하니 이듬해 4월 제주에 도임하였다. 김정은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지어 문화 교육 진흥에 기여하였다. 삼읍구진(三邑九鎭)의 병기를 수리하였다. 특히 화북포의 축항공사를 진두지휘하며 스스로 돌을 지고 나르며 일을 수행하였다. 재임 2년 5개월의 소임을 마치고 1737년(영조 13) 9월 3일 화북포를 떠나기 직전에 졸도하여 객사(禾北館)에서 사망하였다.
재관중(在官中) 죽으니 읍인(邑人)이 삼천서당 앞에 흥학비(興學碑)를세워 매년 돌아간 날 제향(察享)하였다. 40여년이 지나서 1893년(고종 30) 10월에 흥학비가 옮겨졌다. 「노봉 김정흥학비(蘆峰金政興學碑)가 본시 삼천서당(三泉書堂)내에 세워졌던 것이나 서당이 헐리면서 오현단으로 옮겨졌다. 비신 높이 91cm, 상단너비 50cm, 하단너비 44cm, 두께 11cm이다. 화북동 금돈지 포구 해신사(海神祠)로 가기전 화북진성 앞에 「목사 김공정 공덕비(牧使金公政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1738년(영조 14) 화북동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출처 : 제주도청 홈페이지 역사인물)
이곳에 김정목사의 비석이 어떤 이유로 언제 세워졌는가의 기록은 없다. 1998년 발행된 ‘제주시 문화유적지도’에는 온전한 것으로 나와 있던 이 비석은 중간에서 두 동강이 난 것을 접합시켜 놓은 상태이다. 좌대는 귀부로 되어 있다. 최근에 월대안에서 다시 자리를 옮기면서 옆 비석과 달리 앞뒤가 뒤바뀐 채 세워져 있다.
④ 학생신민추사비
사재를 털어서 빈민을 구제하셨던 분을 추모하며 새운 비석으로 세메깃질과 통물질을 연하던 외도 비석거리에 있던 공덕비들이 도로공사 등으로 파헤쳐 방치되어 있자 그것들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분이기도 하다.
내도동
1. 두리빌레당
제주에 들어와 신당들을 철폐한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떠나려 하자 광양당신의 노여움으로 도저히 배를 띄울 수 없었다. 이때 항해의 최고 경험자였던 이 마을의 박동지와 김동지가 이 목사를 태우고 무사히 제주 바다를 건넜다. 이 목사가 대가로 무곡을 주자 제주로 향하던 중 무서운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게 되었다. 이들은 바다의 신 용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그러자 큰 뱀이 똬리를 틀어 배의 터진 구멍을 막고 무사히 내도동의 듬북개에 도착했다. 그 후부터 이 뱀을 모셔 부자가 되었으며 후에 내도동 당신으로 모시게 되었다(『제주시의 문화유적』, 1992).
이 여신은 섣달그믐까지만 두리빌레에 좌정한다. 동짓달 초하루부터는 “겨울바람과 파도소리가 무섭다.” 하여 길을 건너 밭 구석에 머문다. 그러다 추운 겨울이 가고 3월 초하루가 되면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듣고 싶구나.”하며 두리빌레로 내려와 좌정한다. 마을사람들은 겨울에 머무는 곳을 할망당 웃당, 봄여름가을에 머무는 두리빌레를 할망당 알당이라고 부른다.
두리빌레 용녀부인은 뱀이었으니 이 신석에 올라 또아리를 틀고 해바라기를 할 것이다. 따스한 햇볕에 잘 달궈진 따뜻한 바위 위에서 바다 바람과 바다 풍경, 그리고 몽돌이 들려주는 음악소리를 감상할 것이다.
*도리코지 동쪽에 있던 어부와 잠수를 보호해 주는 생업 수호신, 새금상또 김씨하르방을 모시고 있던 내도동 본향 웃당은 훼철되었다. 어부와 잠녀들이 보름날에 와서 물에 들면 지장없게 해주십서 하고 기원하던 곳이다. 모시던 신을 하늘로 올린 것도 아니고 도로공사 중 쏟아진 흙더미에 당이 매몰되어 사라졌다.
2. 알작지
제주도 향토유형유산 제5호(2013년 11월 15일 지정)
알작지의 알은 아래, 작지는 자갈을 뜻한다. 알작지 해안은 반질반질한 자갈(몽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이 자갈로 이루어진 해안을 역빈(礫濱)이라고 한다. 역빈의 규모는 길이 400m 정도이고, 폭은 간만의 차에 의해 달라질 수 있지만 대체로 7~30m이며 평균적으로는 12m 정도이다.
역빈에서는 바닷물이 들고 날 때마다 '자르르 자르르'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난다. 자갈들의 색깔도 검은색, 회색, 누런색, 붉으스름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섞여 있고, 구멍이 숭숭 난 것과 구멍이 작은 것, 거의 없는 것 등 여러 가지이다. 이것은 이 자갈들이 여러 곳에서 모여왔음을 뜻한다.
이 자갈들은 한라산 계곡에서 부서진 바위 조각들이 오랜 세월 동안 무수천과 외도천을 따라 물에 의해 운반돼 오는 과정에서, 또는 파도에 의해 둥글게 다듬어진 것이며 이 자갈들이 조류에 의해 내도동 해안으로 이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큰 비가 올 때에는 하천을 따라 쓸려 내려온 토사가 해녀들이 물질하던 여(礖)까지 덮어 버릴 정도(한라일보 140728)지만 해안도로와 방파제로 인해 이 자갈들은 하천 하구에 새로운 사구층을 형성할 뿐 내도동 해안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어촌정주어항으로 지정되고 그에 따른 사업으로 방파제가 조성된 이후 외도천으로부터의 자갈 유입이 원천적으로 막혀 버린 것이다.
특히 마을 해안도로 호안공사로 인해 자갈유실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안 경사가 완만해야 밀려왔던 파도가 힘이 약해지면서 자갈을 끌고 내려가지 않을 텐데 수직으로 서 있는 방파제에 부딪친 파도는 물이 한꺼번에 내려가면서 자갈을 바다 속으로 쓸어가 버리고 있는 것이다. 한라일보(140919)에 따르면 수중 탐사 결과 파도에 쓸려나갔다가 다시 밀려 올라오지 못한 조약돌들이 바다 속에 고스란히 파묻혀 있다고 한다.
2015년 6월부터 시작된 용역 결과 몽돌은 수심 4m까지 넓게 분포했으나 7m 이후부터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평균 유속은 시간당 3.9㎝로 잔잔한 것으로 나타나 파도나 조류의 영향은 높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주민들이 그동안 꾸준히 제기해 왔던 인공구조물 설치로 몽돌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면서 제주시는 방파제의 유·무에 따른 시뮬레이션을 통해 몽돌의 유실 원인을 규명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방파제가 몽돌 유실의 원인으로 밝혀져도 14억원을 들인 이 구조물을 철거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한다. 너울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설치한 호안석축 역시 철거 가능성이 낮아 원형 복원에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제주新보(160917)에 따르면 제주시 관계자는 “오는 10월 2차 용역이 완료되면 알작지 해안의 유실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조사는 원형을 완벽히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유실 방지 대책을 수립해 해안 소실을 최소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2015년 6월부터 12월말까지 전문기관이 알작지 유실에 따른 해양조사 용역(내도동 어촌정주어항 유무에 따른 알작지 몽돌유실영향 분석)을 실시한 결과 내도동 어촌정주어항(내도항)의 평상시 물의 흐름 방향 및 유속증가량 등이 몽돌유실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하며, 또 여름철 홍수 때에 알작지 해변 부근 유속증가량은 평상시보다 상대적으로 작아 몽돌 이동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용역진은 이번 해양조사 및 해수유동실험결과 몽돌유실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내도어항을 지목하기 어렵고 어항시설 철거시 해빈류에 의한 몽돌이 알작지 해안으로 이동군집할 것이라는 예측을 데이터로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용역진은 알작지왓 몽돌해안 바닷속에 수중보 설치 등 인위적인 몽돌보존방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한라일보160801)
그런가 하면 2016년 6월 현재 알작지는 해안도로 공사로 파헤쳐져 몽돌은 한쪽에 쌓아 놓았다가 다시 정리되고 있다. 속에 묻혀 있던 자갈과 표면에 있던 자갈이 뒤섞여 흙이 묻어 있다.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대형 바위로 석축을 쌓고 해안도로를 확장하는 공사이다. 원래 석축보다 바다 쪽으로 50~100cm 가량 확장하여 쌓고 있으며, 전에 쌓았던 석축은 거의 수직인 데 비하여 새로 쌓는 석축은 약간 비스듬히 쌓고 있다. 공사가 끝나면 원형대로 복구할 것이라고 하는데 수중보나 비스듬한 석축이 자갈의 유실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출처 : 고영철의 역사교실)
3. 방사탑
제주시 유형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마을사람들이 부르던 명칭은 ‘거욱대’로 동네에 6기의 거욱대가 있었으나 한기만이 두리빌레당 앞길에 남아 있었다.
두리빌레당 앞 방사탑도 최근 도로확장공사관계로 해체하였다가 고냉이 바위 앞으로 장소를 이전 다시 쌓아올렸다.
4. ᄃᆞ리코지(암맥군)
제주시 내도동 456-2 서쪽 바닷가 바위군.
내도동 마을 동쪽 바닷가
암맥이란 화산 폭발로 인해 지표로 올라오던 용암이 물과 만나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온 화산분출물들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방사상, 평행 또는 안행의 배열을 보이는 암맥의 무리를 암맥군(岩脈群)이라 한다. 암맥들이 무리지어 있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암맥이란 마그마가 기존 암석 중의 틈을 따라 맥상으로 관입한 판 모양의 화성암체를 의미한다. 암맥은 과거 화성활동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흔한 증거가 된다.
피관입암의 층리면을 절단하는 판상의 평행한 두 면을 가진 화성암체를 암맥이라고 하는 것이다. 판상이라는 것은 암맥이 두께보다는 수평 연장이 훨씬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암맥의 두께는 수 cm에서 수십 m, 길이는 수백 m에서 수십 km에 이르기까지 그 크기가 다양하다. 맥암(dike rock)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침식저항상태에 따라 기존암석보다 두드러지고, 골을 형성하기도 한다. 또한 기존암석과 색·풍화점도·구조가 달라 구별이 쉽다.》
ᄃᆞ리코지 암맥군은 지하에 묻혀있던 암맥들이 바닷물의 차별침식 작용에 의해 현재의 모습처럼 독특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다. 돌의 색깔은 아주 까맣다. ᄃᆞ리코지 암맥군들은 바다를 교묘하게 가로막아 마치 제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규모가 50m 정도 되는데 제민일보(100117)에 따르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해줌으로써 이를 이용하여 자연포구를 활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출처 : 도로공사 이전 안내판)
도평동
1. 명진학숙 터
1927년 제주에서 3번째로 인가받은 교육기관이다. 도평동에서 태어나 제주향교 훈도를 역임한 조설대 12동지 중 1인인 김병구(金炳龜)가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신학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기에 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당시 전라도 광주까지 마을 유지들이 3번이나 올라가서 기어코 학교 인가를 받아왔다.
명진학숙에 이어 1947년에 세워진 도평초등학교는 설립 다음해 4.3으로 인해 전교사가 소거되어 1954년에야 다시 외도국민학교 도평분교로 재설립되었다. 1955년 도평국민학교로 다시 개교하여 1959년 해안분교장을 설립하기도 하였으나 1983년에 다시 외도국민학교도평분교로 축소되었다. 2011년에 다시 본교로 승격되어 제3기 제주형 자율학교로 지정되었다.
* 도평동의 4.3 피해
마을 규모에 비해 4·3으로 당한 피해가 엄청난 마을이다. 사망자만 144명, 실종자까지 포함해 180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1904년 삼군호구가간총책 기준으로 110호에 남자 200명, 여자가 202명이라는 기록과 비교하면 마을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사망 또는 실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外都 都坪洞 本鄕
외도 도평동 본향에는 ‘송씨할마님’·‘천신불도또 할마님’·‘바람알 세경또 한집’ 등 3신위를 모시는데, 이에 따라 제단에는 세 개의 궤가 있었다. 도평마을 사람들은 가운데 궤에는 송씨할마님, 왼쪽에는 천신불도또 할마님, 오른쪽에는 바람 세경또한집이 좌정한 것으로 관념한다.
3신위 중 송씨할마님은 도평마을 사람들의 생산, 물고, 호적, 장적을 관장하는 본향신이며, 천신불도또 할마님은 아이의 산육을 돌보는 신, 그리고 바람알세경또한집은 풍농을 도와주는 신이다. 단골은 도평 주민이나 가까운 신산마을에서도 외도 도평동
아파트 공사 전 도평동 본향당
본향을 다녔다고 한다.
본향당 당신은 마을 공동체의 신인만큼 마을 사람 전체의 생명과 건강, 사업 번창 등 모든 부분을 관장한다. 본래는 모든 자연마을마다 마을이 형성될 때 함께 세워졌을 것이나 지금은 많이 통합되거나 소멸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지역의 전체 신당 중 약 44%가 본향당으로 여전히 본향당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도평동의 옛 이름은 ‘벵듸’이며 신당이 위치한 지경을 속칭 ‘대통밧’이라 하였다. 또한, 신당의 주신(主神)은 송씨할마님이었기 때문에 ‘대통밧할망당’ 혹은 ‘벵듸 대통밧당’이라고도 한다.
* 남쪽에 아파트를 새로 지으면서 그 부분을 제외하고 성토작업을 하여 당이 주변보다 매우 낮은 곳이 되어 남서쪽으로 가파른 돌계단을 놓았다. 그 당시에는 북쪽이 트여 있었으나 최근 북쪽에도 아파트를 지으면서 시멘트 벽에 둘러싸여진 깊은 구덩이가 되었고 돌계단 위로 잡목 가지가 엉겨 있어 내려가기가 어렵다.
3. 고봉기물(곱은기물)
웃동네 동남쪽 도근내가에 있는 샘이다. 굴속 바위틈 움푹 팬 곳에서 물이 나오는데 옛부터 물맛이 좋고 일년내내 물이 솟아서 도평마을과 월산마을사람들이 식수로 이용했다.
4. 검은소, ᄀᆞ래소, 냉게소
검은소는 웃동네 남동쪽에 있는 소(沼)를 일컫는다. 소 주위가 높은 엉을 이루었고 물속이 깊어 검게 보이므로 검은소라고 한다. 옛날 어린이들이 물에 많이 빠져 죽어 밤마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ᄀᆞ래소는 웃동네 남쪽 냇가에 있는 소를 말한다. 예전에는 식수로 이용했던 곳으로 지금도 물이 솟아나지만 주변이 청결치 않다. ᄀᆞ래는 맷돌을 뜻하는 제주어로 소의 상태가 맷돌과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냉게소는 광령천에서 장군내가 갈라지는 지점(길마가지) 부근에 있으며 소 주변의 엉들이 장관을 이룬다. 현재는 물이 고여 있지 않아 소를 식별하기 어렵다.
5. 흥룡사(옛 용장굴사), 서관음사 터
해방 이후 불교계는 제주사회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의 대회준비위원장으로 의안결정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일선은, 4·3사건 발발의 원인이 되는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활동은 물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였다. 4·3사건이 발발하자 입산하여 무장대 활동에 적극 나서는 이세진, 제주승려대회 부의장이었던 원문상, 관음사 주지로 제주불교의 대표자인 오이화 등이 4·3으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 시기 제주도에 몇 개소의 사찰이 있었는가에 대한 정리된 자료는 없으나 『조선총독부 관보』 및 『매일신보』 기타 일제시대의 불교계 잡지와 1951년의 『제주교무원 자료』 등을 통하여 한국 전쟁 시기 제주도에 있던 사찰을 대략 90여개로 파악하고 있다.
제주불교사연구회연구원 한금순의 2004년 조사에 의해 피해가 확인된 사찰은 관음사. 대각사. 백화사. 불탑사. 서관음사. 용장사. 소림사. 석굴암. 원당사. 월정사. 정광사. 법화사. 용주사. 원만사. 월라사. 호촌봉 암자. 단산사. 두수사. 선광사. 봉주사. 고관사. 고운사. 광룡사. 귀이사. 극락사. 금붕사. 금천사. 묘음사. 백양사. 북촌포교소. 보광사. 본원사. 수덕사. 수산사. 외꼴절. 은수사로, 35개소이다.
실제적인 피해 사찰은 이보다 더 있을 수도 있으나 피해 사찰 중에서 현재 복원된 사찰은 16개소, 다른 장소로 이전하여 복원한 곳은 10개소이다. 7개소인 고운사, 귀이사, 백양사 북촌포교소, 서관음사, 소림사, 은수사, 호촌봉 암자는 폐사된 이후 복원되지 않고 있다.
조사된 인명 피해는 모두 14개 사찰의 16명의 스님이다. 사찰 소속 인명의 피해는 제외하였다. 피해 형태로는 총살 10명, 수장(水葬) 2명, 고문후유증 사망 1명, 일본으로 도피 1명, 행방불명 2명이다. 가해자는 모두 토벌대이다.
16명의 스님 중 도평동 소재 사찰에서 주재하시던 분은 세 분이다.
① 서관음사의 이세진 스님은 1910년 저지리에서 태어나 내장사에서 출가하였다.
1932년 경성 개운사 불교 전문강원의 망년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하였고, 1937년에는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 강사를 지냈다. 1939년 한림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하면서 제주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서 학인을 교육한 강사스님이다. 1942년 도평리에 서관음사를 창건하여 기와공장을 운영하며 강원설립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48년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하였다. 무장대 지휘부였던 이덕구 등 15인과 함께 관음사에서 기거한 적이 있다고 증언된다. 관음사는 이후 토벌대에 의해 소각되었다. 1949년 초, 토벌대의 포로로 잡혀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에 잡혀있었으나, 이일선 스님의 상좌였던 헌병장교 김우송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한다. 그러나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잡혀나가 수장 당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증언: 광순 스님(68세, 북제주군 하도리 명법사), 고계생(78세, 제주시 아라동), 양경월(78세, 제주시 외도동), 강순익(84세, 제주시 일도동), 김평수(81세, 남제주군 토산리)
② 서관음사의 고제선 스님은 1945년 대각사 서기를 역임하였고 이세진 스님의 상좌였다.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 서관음사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다. 서관음사 소각 후 행방불명되었다.
기록: 교적부(관음사 포교소, 1947)
③ 용장사의 백인수 스님은 1940년 백양사 김녕포교소 감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으로 선정되었다. '제주불교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다. 백인수 스님은 1949년 1월 6일 군인, 순경들이 도평국민학교로 소집을 시켜서 나갔는데 그 때 학교에 모인 60여명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연대마을 입구에서 총살당하였다.
증언 : 홍순여 (75세, 제주시 도평동)
(출처 : 한국전쟁 시기 제주도 불교계의 피해 현황과 분석 / 한금순, 2004년 세미나자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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