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동 답사
행정동 삼양동을 구성하고 있는 삼양 1,2,3동과 도련 1,2동 중
가장먼저
도련동을 갑니다.
도련동이라고 불리우는 유래를 알아보면
마을지를 포함한 다수의 자료에는
예부터 마을에서 사면으로 모든길이 이어져 있다하여 도련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을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는 다른 마을처럼 바다에서 한라산방향으로 이어지는 길만이 큰길이었고
지금의 자동차검사소 주변 동서를 횡단하는 길은 일주도로공사간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굳이 길을 하나 더 찾는다면 회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지역의 이름은 주변 도로여건과 관계없이
오래전 지도에서부터 道連坪촌(도련드르마을)으로 나옵니다.
방점이 평(드르)에 찍혀야 할 것 같습니다
근대 들어와서 마을유래등을 최초로 집대성한 진성기가 쓴 '남국의 지명유래'에 의하면
"약 400년 전에는 '회천동'에 부속되었다가 따로 갈리게(分里)되었는데
이 때에 마을과 마을 사이에 [돌라졌다]는 데서 [도련드르]라 불리우게 되었다.
후에 한자표기에 의해서 [도련리]라 호칭하였다"고 쓰여있지요.
도련 1동의 본향당을 갑니다.
송당신의 13번째 아들이 그 부인과 함께 좌정해 있다고 합니다
송당신의 아들이 9명이라는 본풀이가 있고, 11명이라는 본풀이가 있고, 18명이라는 본풀이가 있지요.
18명이라고 보아도 이름과 좌정한 곳이 또 다르기도 합니다만
...
송당 본향에서 갈라져 나온 신당으로 보입니다.
1991년 봄에 재일교포 고희수가
지금의 운동장부지를 당밧으로 희사하여 당을 정비하면서 세운 본향당 비 앞면에는
‘도련1동 본향당’이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吾鄕堂基 開鄕七百 局成蟹形 鄕泰民寧 恭惟明靈 今此更修 特垂恩光 永願後榮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당은 마을의 본향당입니다.
생산, 물고, 호적, 장적 등을 관장하는 신이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포제단역할을 합니다.
요사이는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몇년전 며칠동안 이 마을 경로당에 찾아가서 만나 이야기 한 삼춘들의 말에 의하면
정초에 마을 이사제가 이 당에서 거행되고 과세문안이 끝나면
마을 신앙민들은 각자 생기에 맞는 날을 택일하여 신당에 다녔다고 합니다.
당이 올라앉은 작은 동산의 형태가 깅이를 닮아 당이름을 깅이당이라고 했다는 분이 있었는데
만약 그 말이 통용된다면 이당은 개당이 아니고 게당이라고 불리었다는 이야기이겠지요.
당시 그리 공감이 가지 않아서 깅이당, 게당이라는 이름에 대해 추적 조사를 않했는데
이제 조금 아쉬워 지네요
비석뒷면 局成蟹形이 이 당이 앉은 모르의 모습을 뜻하는 것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特垂恩光 永願後榮 특별히 은혜로운 광명으로 후손이 영화롭기를 바래봅니다.
천연기념물 제523호
제주 도련동 귤나무류가 식재되어 있는 곳입니다.
당유자·병귤·산귤·진귤 등 네 종류의 귤나무 여섯 그루이며,
귤밭 주변에 당유자나무 두 그루, 병귤나무 두 그루, 산귤나무 한 그루, 진귤나무 한 그루의 재래종 귤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감귤류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재배되었다고 하며,
제주풍토기에는 감귤류 종류가 15종류 이상이 있었다고 합니다만
현재는 재래종 귤나무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일본에서 개량한 귤의 여러 종들이 도입되어 재배되고 있습니다.
이곳 귤나무들의 수령은 약 100~200년으로 추정되고 있어
제주의 재래종 귤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증거로
생물학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적 가치도 매우 크다고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관리예산이 없는지 간판들이 다 하얗게 바래었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든지
미리 어디에 어떤 종의 귤나무가 심어져 있는가를 알고 와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눈으로 보아 이나무는 댕유지라고 이야기 하였더니
옆의 회원이 농반 진반으로 에이 탱자나무네요라고 합니다.
아랫부분을 보니 탱자나무 가지가 몇가닥 올라옵니다
100여년전에 댕유지에도 접목을 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사실 귤나무에는 탱자나무 유자나무 등이 잘붙고 잘자랍니다.
탱자나무를 바탕나무로 한것은 초기부터 잘자라고 맛도 좋습니다.
유자나무를 바탕나무로 한것은 처음에는 자라는게 더디지만 큰 나무가 된 후 나무 수명도 길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자나무는 다른 감귤류와는 달리 삽목도 가능하고 실생번식도 잘되기 때문에 접붙어 있을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리고 백여년이 지났어도 바탕나무가 그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에 깜짝놀랐습니다.
수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손질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곳까지 오는 길도 아무런 표지가 없습니다.
앞차를 먼저 보내고 찾아오는 길에 꽤 오래간만에 오다보니 긴가민가하였는데
다행히 찾아는 왔습니다만 초행길인 분들은 입구를 찾기가 힘들듯 합니다.
필요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했으면 그에 걸맞는 관리가 필요한 듯 싶습니다.
삼화지구 제3 근린공원입니다.
도련 2동 구역에 시도 기념물 2-8과 2-9로 지정된 도련 지석묘 1호와 2호가 있습니다.
삼화지구 개발과정에서 또다른 지석묘를 발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다른 사항이 와전되었는지 몰라도 새로이 관리되는 지석묘는 없습니다.
이 고인돌 두기는 예전부터 이자리에 있었습니다.
특히 2호의 경우 예전에는 철조망을 두른 밭 안에 있어 가까이 갈 수가 없었으나
지금은 주변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도련 지석묘 1호는
예전에는
"덮개돌의 거북등 모양은 일본 북구주(北九州)에 분포하는 고인돌의 특징으로
제주시 외도동에도 분포되어 있다."라는 설명이 있어
외도동 고인돌과 연계해서 설명해왔는데
새로이 정비하며 세운 안내판에는
"제주도 지석묘중 가장 이른시기에 축조된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더 중요하게 판단되었다는 이야기겠지만
이렇게 말이 자꾸 바뀌어 고고학이 신뢰를 받지 못합니다.
삼양동 선사유적지도 제주 유일의 마을유적이지만
한 때 조성되었다 사라져 버린 용담동 마을유적지의 전례가 있어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가 없음이 가슴아픕니다.
지금도 용담동 동산마을 일대 선사유적지와 지석묘 몇기는
탐라 시대 초기 소국의 실체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까지 지정되어 있으나
제대로 정비, 보존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련지석묘 2호
집자리와 무덤자리
길건너 삼양 2동으로 넘어가 제주도 기념물 2-10호인 삼양동 고인돌을 봅니다.
길건너 도련동에 있는 고인돌과는 양식에 많은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기의 차이라는 해석입니다.
도련동 고인돌이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했으니 그 보다 늦다는 것이겠지요.
일대에 보다 크고 웅대한 지석들이 몇개 더 있다면 몰라도
사실 이 바위 하나로 이 일대가 예전에 드른드르(거석동)이라고 불리었다는게 조금 의아합니다.
이일대는
2002년 12월에 삼화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되었습니다.
2003년에 정밀지표조사를 하였고 그결과 시굴조사가 필요하다하여
2006년, 2007년 가,나,다구역으로 구분 본격적인 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초등학교 2곳과 중학교 1곳이 신설되었습니다.
시굴조사 과정에서 집자리와 무덤자리가 발굴되었고 각종 유구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기념(?)하여 아파트 단지 구축 이후에 고인돌이 있어 개발을 하지 못한 구역에 선사유적을 재현하는 공원을 만들었습니다.
길건너 양쪽에 재현된 선사유적은 집터와 옹관묘, 발굴체험장, 고인돌, 솟대 등이 있습니다.
집터와 옹관묘 자리는 지붕을 씌워 두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위치가 아니라 단지 재현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발굴체험장은 눈으로 봐서는 웬 발굴현장에 시멘트구조물이냐고 눈쌀을 찌푸리게 합니다.
발굴을 할 때 십자(十) 모양의 둑을 만들어 발굴을 진행하는 내용을 설명하고자 한 것 같은데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솟대를 재현하였다는 자리에는 솟대는 어딘가로 가고 없고 돌무지만 남아 있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습니다.
신증 제주목풍속조에
"2월 초하루에 귀덕, 김녕등지에서 나무대 12개를 세워 신을 맞이하여 제사를 지낸다"라는 글이 있어
제주도에 솟대가 있었다고 하여 재현을 하려 한 것 같은데
그 나무대 12개가 솟대인지도 불분명하고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조선시대가 아닌 선사시대에 제주에서 솟대를 세웠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주의 거욱대들이 육지부의 솟대역할을 한다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다시 길을 건너 도련 2동 구역으로 돌아와 차를 탑니다
도련 2동에는 이곳 말고도 반대쪽 회천 인근방향에도 고인돌 한기가 더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의 어느날 마을 청년들이 마을 소공원을 조성한다고 옮겨서 임의로 받침돌을 만들어 올려놓았습니다.
제자리를 떠난 고인돌은 그 가치가 없지요
결국 삼양동선사유적지로 2005년에 이전되어 고인돌의 견본역할을 합니다.
삼양1동 동카름성창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원당포(元堂浦)는 지금의 제주시 삼양동에 있었던 포구로,
원당포를 두고 옛 문헌은 소흘포(所訖浦)라고도 하였다."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최근 자료의 내용이 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동카름성창 = 원당포 = 소흘포 = 서흘포 = 설개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제주의 옛 것을 이야기할 때 모든 것에 인용되는 탐라순력도의 베이스지도인 한라장촉에는
동카름에 元堂浦가
서카름에 所訖浦가 각각 별도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제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데다
삼양 3수원지 보강공사로 더 위축되어 있는 동카름성창을 떠나
서카름 성창으로 왔습니다.
1924년에 세운 개수기념비가 있고 밖개가 그때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샛다리물이 들어오는 옛 빨래터 자리는 물놀이장으로 인기폭발입니다.
서쪽 방파제 끝부근에 삼각형 철재시설물의 기본틀이 남아 있습니다.
도대불이 있었던 자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철재시설물을 보아 석축이 아닌 철재로 만든 도대라며는
서재철의 사진에서 보는 하귀 미수동포구의 도대불과 유사한 형태가 아니었을까요?
철재시설물 건너 동쪽 방파제 끝부분에는 계류석으로 쓰이는 비석이 하나 있습니다.
10년쯤 전인가 제주문화원에서 탁본을 해왔다고 해서 그 사진을 찍었는데 알수 있는 글자는 몇개 없습니다.
오른쪽 하단에 念
왼쪽 하단에 十뿐입니다.
十자위에 무슨 글자가 보이는 듯한데 내눈에 그렇다는 이야기이고요.
무언가의 기념비인듯 합니다.
통설은 북촌등명대설치기념비처럼 도대불설치기념비라고 하는데...
사실 북촌 등명대에 있는 비석에서
"어즉위00등명대00 대정4년.."이라고만 식별되지
기념이라는 글귀는 식별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유추할뿐이지요.
기념등명대라면 대정4년 그러니까 1915년에
누가 즉위한 것을 기념하는 것일까요?
다시 이포구로 돌아와서 이것이 도대불설치기념비라면 철제 등간으로는 너무 약소하지요.
어쩌면 도대불과 관계없는 비석인데
다른데 있던 것을 가지고 와서 계류석으로 쓸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두동 같은 경우에는 반대로 포구에 있는 등명대관련 비석을 옮겨와서
동사무소 화단에 깔아 놓기도 하였습니다.
그 비석에는 념자가 분명히 식별됩니다만 그 윗 부분이 없습니다.
2010년에 찍은 도두동 등명대비석사진
철재시설물 잔재부근에
조개껍질로 1968년 몇월 몇일을 표시했는데
아마 주변을 보수한 날일겁니다만
1970년대 초반에야 이 마을에 전기를 설치했으니
그때도 도대불이 유용하게 쓰였을텐데
서재철의 1960년대 말 포구사진에 다른 곳 도대불은 몇곳 나타나는데
이곳 도대불은 나타나질 않습니다
일본 바닷가 마을에 있는
우리가 말하는 도대불(등명대) 그들의 표현으로는 구등대 또는 상야등
사진 몇장을 올립니다.
홋카이도에 있는 오타루등대
1827년에 만들어진 구등대입니다.
지금은 일대가 매립되어 주거지가 되었는데도 아직 보존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현 후쿠시마(福山)시의 도모노우라
(1800년 전후 건립)
참고사진 :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구등대(1657년 兵庫縣 明石港)
제주의 해안지역의 도대불이 1903년 부터 우리나라 전역에 세워진 등대,
특히 1906년 우도에 세워진 등대에 영향을 받아서 세워졌다고 하는데
1906년 우도에 세워진 등대는 엄밀히 말하면 등대가 아니고 등간입니다.
우도의 등간燈竿은 한국에서는 6번째로 만들어진 등대로 등간으로는 세번째입니다.
1906년 3월 일본 군인들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석유를 사용하는 버너방식의 호롱불이 달려있습니다.
즉 호롱에 석유를 넣어 불을 켠뒤 쇠기둥에 올려 달았습니다.
우도등간 (2006년 재현)
그래서 제주 해안마을 도대불은
일제 강점기에 경제적 목적으로 일본을 오고가던 이들이
일본 구등대(해상 상야등) 기능에 호감을 느껴 자기가 보고온 지역 등의 형태로 포구변에 세운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머리엉덕웃밭 설개 본향당입니다.
모셔진 신위는 '감낭하르방, 감낭할망'입니다.
전통문화연구소 신당조사서에는 '감낭'은 '강남'으로 멀리 중국에서 온 신이며,
어부들에게 고기잡이의 풍어를 가져다 주는 신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은 외방에서 온 신이라는 의식이 없이 '감낭하르방'은 船王神, '감낭할망'은 龍王神으로 하여
이 곳 부부당신이 '일만 잠수, 일만 어부를 차지한 신'으로 여깁니다.
본풀이에 의하면 보재기들의 토지관이면서 마을 차지한 신당한집입니다.
당은 예나 지금이나 협소하지만 다니는 이들은 예전보다 많아진듯 합니다.
당을 다니기 편하게 잣도 허물었고 지전, 물색들도 다양해 졌습니다.
원당봉으로 올라갑니다.
불탑사입니다.
불탑사 오층석탑입니다.
1993년 11월 19일 보물 제118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보물의 공식명칭은
제주 불탑사 오층석탑 (濟州 佛塔寺 五層石塔)으로
원당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원당사는 조선 중기에 폐지되었고,
1950년대 이후 절터에 새로이 지어진 불탑사가 대신 자리잡고 있다.
탑은 1단의 기단(基壇)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두고,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탑 주변에는 돌담이 둘려져 있다.
기단은 뒷면을 뺀 세 면에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는데,
무늬의 바닥선이 꽃무늬처럼 솟아나도록 조각하였다.
탑신의 1층 몸돌 남쪽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만들어 놓았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그리 크지 않지만, 네 귀퉁이에서 뚜렷하게 치켜 올려져 있다.
꼭대기에 올려진 머리장식은 아래의 돌과 그 재료가 달라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전체적인 탑의 모양이 조형성이 적고 무거워 보이는 점으로 보아
지방색이 강했던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비록 조형성은 적어 보기에는 약간 둔탁해 보여도
멀고먼 옛날 고려후기에 만들어진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유일의 현무암 석탑입니다.
자꾸 여기다 불필요한 MSG를 뿌릴필요가 없지요.
이것은 예전에 불탑사에서 만들어 세운 안내판입니다.
아마도 이 글은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의 『파한록(破閒錄』 「원당악(元堂岳)」조에,
'원당악은 원나라때 기황후가 원당(願堂)을 세워 복을 빌던 곳이다…
봉의 꼭대기에 구지(龜池)가 있고… 옆에는 하늘에 제사하는 기우단(祈雨壇)이 있다…
아래에는 사찰 옛터가 있는데, 석탑 하나가 우뚝이 홀로 있으니,
이는 원나라의 유물이다' 라고 쓴 글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인듯 합니다.
이글을 신문기사로 옮긴 김유정도 "기록의 출처를 밝히지 않아 근원을 알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당사의 기록이 "이원진에 탐라지에 있다. 조선숙종 때 훼철되었다 등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탐라지에는 제주목 산천조에 "'웬당오롬'은 제주 동쪽 20리에 있다.
산봉우리에는 못이 있는데 '거북못'이라고 한다.
못에는 마름, 거북, 자라가 있고,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元堂岳, 在州東二十里, 峯頭有池 名龜池,有빈藻龜_, 大旱不渴)."
라고한 원당악에 대한 글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 권38,제주목, 산천조에
"'웬당오롬'은 제주 동쪽 17리에 있다. 산봉우리에는 못이 있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못에는 마름, 거북, 자라가 있다.
(元堂岳, 在州東十七里,峯頭有池 大旱不渴, 池有빈藻龜-)."를 기초로 작성된 것이지요.
오창명은 '제주도 오름과 마을이름'에서
원당오름은 민간에서 웬당오름으로 불리운다는 점과 확실하지 않은 역사기록을 고려할 때
본디 이름은 원나라와 상관없는 웬당오름이고 이것을 음가자로 표기한 것이 원당악이며
그 후에 절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여기서도 웬당의 뜻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질 않네요.
이 자료는 1993년 보물로 확정되기전 제주도 기념물일 당시의 불탑사 탑에 대한 제주도 안내자료입니다.
참 많이도 변합니다.
그리고 절이 훼철되었다는 조선 숙종때는 이형상목사때라는 건데
이형상은 그의 남환박물에서 자기가 왔을때 제주에는 절이 거의 다 없어져 세곳 뿐이 없었고
특히 도성옆에 있는 만수사와 해륜사에는 중이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불경도 제대로 알지못하니
이는 불도의 액이라고 개탄을 합니다.
이형상이 유교적 관점에서 볼때 무위도식하며 당에 빌붙어 사는 무격들을 내치며 당을 정비할 때
일반민초들이 상당한 원망을 하였겠지요.
그렇다고 하여 절까지 다 그가 훼철하였다는 것은 조금 무리한 주장입니다.
그리고 탑의 원형도 알기 어렵습니다.
1914년 경 안봉려관이 이 일대에서 탑의 흔적을 찾아 절을 일으켰다고 합니다만
1929년에 이 터를 찾아 절을 세우고 탑을 세운 후 1930년에 대흥사 제주포교소 불탑사로 사찰계를 제출합니다.
그리고 4.3때 불탑사는 다시 문을 닫고 바람만 불면 모래가 쌓이던 물가름으로 소개됩니다.
그 무렵에 다시 한번 탑이 무너져 1956년경 다시 세웠다는 설이 있습니다.
답사자료집에 실린 1935년 사진은 탑의 정면이 원당봉을 등지고 있으나
1993년 보물로 확정될 시기의 사진에는 탑의 정면이 원당봉을 마주보고 있고 보개가 두개 올려져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고 지금의 모습을 보면 1999년 해체복원할 때
옥신의 가로 세로를 틀었는지 전반적으로 날렵해 졌고
보개 하나를 치웠고 하나를 남겨두었습니다.
그 하나도 원래의 탑의 것은 아닌듯 하다고 합니다.
원당봉 굼부리에 있는 문강사앞 연못 구지입니다.
신증에 까지 기재되어 있는 못인데
1960~70년 경에는 이 곳에서 논을 경영했다고 합니다.
1973년에 김용운거사가 못과 원당봉쪽 사지를 매입하여 천태종단에 시주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제주도 천태종에서 절을 건립하여 문강사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 후 연못을 몇차에 걸쳐 준설하고 몇번의 중흥불사를 통해 지금의 절집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연꽃입니다
연못앞에 세워져 있는 천태종 중창조인 상월원각 대조사의 법어를 떠올립니다.
실상은 무상이고 묘법은 무생이며 연화는 무염이다.
....일심상청정하면 처처에 연화개니라
원당봉 제단으로 갑니다.
불탑사앞에 있는 지금의 원당사가
1924년 하시율스님이 초가법당을 짓고 백양사 원당포교소로 개설할 때에 만든 산신불공을 드리는 제단입니다.
1955년 제단을 수리하고 축장할 때의 비석이 남아있습니다.
그후 원당사구역을 확정하고 절집 내부적으로는 중창불사를 크게 하였습니다만
이구역은 절집구역에서 벋어나서 마을에서 백중제나 기우제등을 올릴때 사용하였지요.
제단이 없이 기반석만 남아있어 그때 그때 제단을 설치하였었는데
2015년에 삼양동사무소에서 성혁토건이라는 곳과 계약하여 정비를 하면서
제단를 세우고 축장을 다시하였습니다.
당시 작업때의 사진인데
담을 너무 직선으로 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이곳 원당봉 굼부리일대는 산신기도의 영험이 뛰어난 곳이라하여
연못을 마주하고 있는 문강사에서도
천태종은 산신각을 설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산신각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가물개본향입니다.
삼양동사무소 있는 부근 당밧에 있다가
길건너 폭낭아래로 옮겨졌고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원래 당밧에 있던 폭낭과 함께 다시 옮겨 왔습니다.
그때 당입구에 큰 바위 두개도 당을 호위하는 장승이라는 신앙민들의 주장에 의해 세워졌지요.
가물개 본향당이면서 중산처이기도 합니다.
여러 신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지요.
본풀이를 보면 원래 가물개마을에는 당이 웃당, 알당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웃당이 없어지면서 웃당에 계시던 시월도병서가 요왕부인과 보제또가 있는 알당으로 합좌 하게 되었고
인근마을 감낭하르방부부신을 모시던 광산김씨 하르방을 모시면서 그가 모시던 감낭하르방 부부신을 가지갈라 모시게 되었을 겁니다.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옮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편히 좌정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언제 가더라도 바나나가 있고 알사탕이 있고 참으로 화려한 물색이 걸려 있었는데
조금 한산한 듯하고 낡은 듯한 물색이 눈에 걸립니다.
그래도 먼저 공원안에 축장을 하여 옮겨진 노형 광평당이 아무 인기척이 없는 것에 비하면 그 물색도 반갑습니다.
가물개는 삼양2동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삼양2동은 단물이 많이 흘러 나와 감물개,가물개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자어로 감수甘水동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바닷가에서 용출되는 시원한 민물을 단물, 돈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주 들었지만
그것을 감물이라고 부르는 곳은 없습니다.
감수동은 조금 달리해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수동이라고 불리우는 지역안에 가물개포구, 가물개마을, 물캐, 물카름, 지름개 등 여러 지명이 함께 어우려 집니다.
삼양동 고로들에게 물어보시면 단물나오는 물캐옆 물카름에 옛날에는 바람만 불면 모래가 쌓여서 살기가 힘들었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지금 해수욕장 중 한 부분을 지름개라 하여 멜을 잡던 기억을 이야기 하십니다.
내륙쪽에서 당길수 있는 줄을 길게 메단 그물을 두대의 테우에다 나눠싣고
한배는 버렁쪽으로 한배는 원당포쪽으로 가다가 그물이 팽팽해지면
지금의 해수욕장 모래위에서 잡아당겼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물개지역은 옛 지도 지승 제주목조에 보면 가사포라고 나옵니다.
가사포는 제주 다른굿에 또 있지요.
모래가 검다하여 현사마을이라고 하는 이호동의 가물개가 가사포입니다.
삼양동 가물개도 모래가 검다하여 가물개였다가
가물개마을과 물카름 등을 합쳐 감수동이 된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삼양동이라는 마을이름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도 이론이 있습니다.
통상의 설명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이름을 바꾸기로 하였는데
설개, 가물개, 매촌 이 세마을이 합해졌다는데 삼을 따고
볕양자를 써서 삼양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매촌은 삼양동이 아닙니다.
당시도 지금도 지금의 도련동 구역입니다.
삼양리라는 이름을 짓는데 왜 그 당시에도 지금도 도련리를 구성하고 있던 매촌이 합쳐질까요?
약간의 무리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도련 2동 매촌마을은 삼양 1, 2동 보다 작지만
해안마을인 설개, 가물개가 발전하기 시작한 일제강점초기까지는 작은 마을이 아니었고
도리어 주변에서 무시할 수 없는 반촌이었습니다.
여러 서당이 있어 먼곳에서 학생이 찾아오기도 하였으며
매계 이한우(이한진)도 이곳 매촌마을에서 성년이후 평생을 거주하셨습니다.
매촌마을 동북쪽은 일제강점기에 진드르비행장 공사부지를 확보하기위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강제이주되었습니다.
그때 마을이 확 작아진 것이지요.
이들이 이주해 간곳이 지금의 회천지경 강전동(강젱이굴) 원지동(원지모르) 솔청동(솔쳉이왓) 일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동네들은 4.3때 또 소개되어 집들이 모두 불태워져 버립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매촌은 회천과, 도련평촌은 봉개주민과 더 가까운 사이로 지내왔다고 합니다.
설개마을 사람들은 원당봉 제단 축수비에서도 보아서 짐작하겠지만
신촌마을 사람들과 신앙생활을 함께 하고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래서 삼양이라는 이름을 만드는데 매촌이 포함되었다라는 이야기는
당시 매촌이 선망의 지역이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는 이야기일뿐입니다.
한 300년전 이름부터 살펴보면
1700년 전라도 제주목 중면 所訖里, 도련평리
1789년 전라도 제주목 중좌면 勘訖里, 도련리
1899년 발간된 제주군읍지에 삼양리, 도련리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1931년에는 제주읍 삼양리·도련리.
1955년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25개리가 40개 동으로 개편할때
삼양동이 1,2,3동으로 분동하고 도련동도 1,2동이 분동되었습니다.
1962년 제주시 40개동이 14개 행정동으로 통폐합되면서
삼양1,2,3, 도련1,2동이 삼양동회에 소속되었지요.
1962년에 법정동 몇개씩 묵어 행정동을 만들기 전에는 법정동마다 동사무소가 있었고
제주도내 동사무소에는 동장 1, 차석 1, 보조 1명 이렇게 3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5개동이 통합된 후 삼양동이라는 이름으로 사용한 동사무소는
가물개 둑둑거리 팽나무 남쪽길 모퉁이에 위치한 공회당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조가 개창한 1397년에는 전라도 제주군 북면 서흘현鋤屹縣이었다고 하니
서흘에서 소흘, 소흘에서 감흘, 감흘에서 삼양으로 이름이 변한 스토리와 의미는
필요하다면 다시 규정하는게 더 바람직 할 듯합니다.
강은봉가옥입니다.
근세형인 4칸집이라는데...
제주도 초가의 기본은 세 칸집으로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인데 전후좌우 퇴 돌려서 평면이 완결형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네 칸집 또한 구조는 세 칸으로 간잡이를 합니다만
이 집은 세칸 간잡이로 네칸을 지은게 아니고 세칸을 지었다가 후에 한칸을 내달았습니다.
그래서 상방, 고팡 등의 공간과 구들, 굴묵 등의 배치가 다소 왜곡되어 있는데
그래서 근세형이라는 건지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2005년 전면 해체보수할 때 그리 한 것인지
그 이전에 가옥구조가 그렇게 변천되어 온 것인지의 설명이 없다면
"제주의 주택은 외벽은 제주산 현무암을 쌓아 두르고, 지붕은 띠를 덮어서 굵은 동아줄로 바둑판처럼 얽어 놓은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두거리 이상의 집은 각채마다 부엌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부자간의 가족이 취사를 각각 따로 하고
생산·소비· 경제를 각자 영위하며 살게 되어 있는 점이 육지의 민가와 크게 다르다."라고
제주도청에서 배부한 제주의 초가라는 자료를 원론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삼양 3동 삭은여 성창입니다.
삼양 3동 바당은 삭은여성창, 검은여성창, 버렁성창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삭은여성창 둔덕에 나와 앉아 계신 삼촌과 꽤 오래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검은여일대를 중동이라고 하고 삭은여일대를 동동이라고도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세구역 모두를 버렁이라고 합쳐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삭은여성창은 꽤나 높았던 곳이고
아주 예전에는 배도 들어오고 물질갈 때 태우가 들어오기도 한 곳인데
지난 태풍(꽤 오래됐는데 언제인지 모른답니다)에 무너져서
그 이전에도 이미 배가 들락거리지 않았기 때문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합니다.
도가 꽤 넓었는데 너무 좁아져서 보기 않좋다 하시네요.
검은여에 있던 고인돌 혹시 기억에 나시냐고 했더니
옛날에 성창앞에 있어서 성가셨는데 어느날 부터 없어져
배 수리를 위해 정비소를 들락일때 편해졌다고 남자들이 이야기 했답니다.
장성따라 가다 버렁포구로 가다보면 중간쯤 바닷가에 원이 있는데 혹시 그 원이름 아시냐 했더니
그 원은 만든지 얼마안되었고 이름을 모른답니다.
그 얼마 않되었다는게 언제적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자꾸 이것저것 물으니 피곤하셨는지 알면서 뭐 자꾸 묻냐고 하십니다.
어르신 말하기 편하게 하려고 맞장구친거지 제가 뭘 알겠습니까
다시 찾아올 수 있다면,
다시 뵐 수 있도록 건강하세요.
검은여 성창 선박정비소의 흔적을 지나 장성을 따라 갑니다.
장성을 연해
장성앞을 걸어갑니다
바당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니 갯담이 있습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이것저것 많이 걸린다고 삭은여성창에서 만난 삼춘이 이야기하던 곳입니다.
버렁성창입니다.
포구는 화북동지경일겁니다
그 동쪽이 삼양3동 4반입니다.
그런데 갯담을 제외한 바다밭은 삼양3동 구역입니다.
죄기빌레가 지금은 일부가 화북지경으로 된 것처럼
포구쪽이 애초 삼양동이었다가 화북으로 행정조정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궂은 것들을 삼양동쪽 사람들이 치워왔겠지요.
잠녀들에게는 관행이 행정의 경계선보다 우선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삼양3동에는 잠녀들이 꽤 많아야겠습니다.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삼양 2동의 잠녀의 맥이 끊겨 그 구역까지도 삼양3동 어촌계에서 관할합니다.
그래서 혹시나하고 어느 삼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도련동에서 삼양으로 물질다니던 분들을 본적있으세요?
바로 대답이 돌아옵니다.
웃드르 남자양반들이 낚시하러온 것도 지청구하는데 여자들이 물질오다니 무슨 이야기이냐구요..
그냥 물어본겁니다. 그냥...
그렇게 하루가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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