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아침에
모여서
가시리로 출발
가시리
강용희 선생 자료
청주한씨 입도조 한천과 삼절신
14세기 말 고려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이 개국되는 격변 정국의 소용돌이는 많은 이들에게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요구하였다. 이에 신왕조 개창을 반대했던 수많은 이들은 유배 등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이때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되는 인사들이 있는데,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충의사의 주인공 서재(恕齋)공 한천도 이 중 한 인물이다.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충의사(忠義祠)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서재공 한천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표선농협 가시지소에서 밑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입구가 나온다.
한천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 밑에서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정몽주 등과 함께 조선을 개국하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를 탄핵하다가 1392년 제주로 유배되는 인물이다. 그는 곧 유배가 풀렸지만 돌아가지 않고, 표선면 가시리에 정착하여 청주한씨 제주 입도조가 된다.
서재공 한천을 모시고 있는 충의사
청주한씨 제주 문중회에 따르면 서재공은 고려 멸망과 동시에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개성을 출발하여 정읍과 해남을 거쳐 성산포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돌아보다가 인가가 없는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집을 지어 살던 곳에 한씨 문중회에서 충의사(忠義祠)를 지어 입도 선조의 유업을 기념하고 있다. 이 주변의 지명을 보면 큰 뒷밭(충의사 있는 곳), 작은 뒷밭, 안위연, 동백남밭(원정착지), 외밭, 서당팟, 절구터, 사장(射場)터, 중이왓 등으로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충의사에는 ‘서재공 한천유허비’가 오래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입도 선조인 서재공의 묘소를 찾지 못하여 고민하던 중 1953년 이웃 성산읍 신산리 고재관 씨의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잃었던 묘를 찾았다고 〈표선면향토사〉에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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