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도 표류, 표착의 자취를 따라서(김승규선생자료)

하늘타리. 2016. 6. 11. 23:13


2016년 6월 11일(토)
제주도 표류 표착의 자취를 따라서


(사)제주역사문화연구소
  안내 : 김  승  규




濟州의 漂流와 漂着

  제주에서의 표류와 표착은 아주 먼 옛날 탐라국 이전부터 있었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는 섬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외부와의 교류는 모두 바다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탐라국의 벽낭국 3공주 이야기나, 한수리의 외눈박이와 어부 이야기, 영등할망이야기나 궤네깃도 이야기와 제주인의 영원한 유토피아인 이어도 이야기 등 제주의 전설이나 설화 등에서도 많이 볼 수 있듯이 바다와 생활하면서 표류와 표착은 제주인의 삶의 애환이 서려있다.
  최근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이 소장하고 있던 금서룡수집문고(今西龍 蒐集文庫) <일제강점기때 일본의 대표적 역사학자였던 금서룡(今西龍)이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2년간 재직했던 경력도 있고 보면 그가 조선에 체류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유물, 유적 관련 자료들을 수집했던 것으로 보임> 중에 탐라와 관련된 책이 있는데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와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이다. 해외문견록의 경우 송정규 목사(1656~1710) (숙종 30년(1704) 10월 49세 때 제주목사로 와서 2년간 재직한 후 숙종 32년(1706) 9월에 이임함.)가 지은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주인의 표류와 표환, 그리고 외지인의 표도, 표착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제주의 표류기

  표류인은 제주 사람이 항해 중에 바람을 잘못 만나 중국이나 일본 유구 등지로 떠밀려 갔다가 고향에 다시 돌아온 사람을 말한다. 중국 연안에 표류하면서 대개는 중국에 갔던 우리나라 사신편에 되돌아오고, 일본에 표류하면 대부분 일본 상선편이나 사신편에 되돌아 온다. 유구에 표류하면 대부분 일본 상선편을 이용하여 되돌아 오지만 간혹 중국을 경유하는 적도 있다.
  표도인(漂到人)은 반대로 외국 사람들이 제주로 떠밀려 온 경우이다. 중국의 경우는 대부분 우리나라 사신 편에 육로로 송환되고, 일본인은 대마도를 경유하여 송환되거나 배를 직접 수리하여 되돌아가기도 하였다. 유구의 경우는 소원에 따라 일본이나 중국을 경유하여 보냈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서양인의 경우는 국내에 억류하였다.

  ― 중국에 표류했던 사람들

연   대
중 국 표 류
기    록
세종 25년(1443)
강권두(姜權豆), 조괴실(趙怪實), 김초송 등

세종 29년(1447)
정월에 2명 생환하고 12월에 김원(金元) 등 13명 생환

성종 2년(1471)
김배회(金杯廻) 등 7명
표류기 지음
성종 14년(1483)
정의현감 이섬(李暹) 등 47명

성종 19년(1488)
최부(崔溥) 등 영파부(寧波府)에 표류, 1488년 성종 19년6월 북경을 경유하여 귀국
표류기 지음
중종  2년(1507)
이복대(李福大) 등 7명

중종  6년(1511)
고치강(高致江) 등 17명

중종  7년(1512)
김일산(金一山) 등 9명

중종 14년(1519)
17명 생환

중종 22년(1527)
이근(李根) 등

중종 29년(1534)
김기손(金紀孫), 만주(萬珠) 등 12명
표류기 지음
중종 37년(1542)
이개질(李介叱) 등 21명

명종  2년(1547)
김만현(金萬賢) 등 64명

명종  9년(1554)
7명 생환

선조  9년(1576)
양준(梁俊) 등 22명

영조 46년(1770)
부차길(夫次吉) 등 22명

영조 48년(1772)
진상물 수송선 표류 귀환

정조  2년(1779)
고수만(高守萬) 등 41명

정조 18년(1794)
송경천(宋擎天) 등

정조 21년(1797)
이방익(李邦翼) 등
남유록에 있음
헌종  4년(1838)
고한록(高漢祿) 등


― 유구에 표류했던 사람들

연    대
유  구  표  류
기  록
세조  3년(1457)
한금광(韓金光), 김신(金新), 석을이(石乙伊) 등

세조  4년(1458)
복산(卜山) 등 3명

세조  7년(1461)
양성(梁成), 고석수(高石壽) 등

성종 10년(1479)
김비의(金非衣), 강무(姜茂), 이정(李正) 등 유구국 윤이도(閏伊島)에 표류
유구풍토기 지음
명종 원년(1546)
박손(朴孫), 등 유구국 표류, 중국을 거쳐 귀환

영조 17년(1741)
21명 유구에 표류, 중국을 거쳐 생환

영조 46년(1770)
장한철(張漢哲) 등
표해록 지음


―일본에 표류했던 제주인

연   대
중 국 표 류
기    록
세종 25년(1443)
김목(金目), 김막(金莫) 형제

단종 원년(1453)
이(李), 김(金) 등 7명

세조 13년(1467)
김석이(金石伊) 등 2명

성종 15년(1484)
존자암승 사식(尊者庵僧 斯湜) 등 9명

성종 17년(1486)
미지태수가 표류인을 채송하여 오고, 도서 지급요청

연산군7년(1501)
정회이(棖廻伊), 등 여도(旅島)에 표류, 도주(島主) 평순치(平順治) 밑에서 1년 반을 묵다가 돌아옴
일본풍토기 씀
중종 31년(1536)
김공(金公) 등 14명, 제주표류인 11명 송환

중종 35년(1540)
강연공(姜衍恭) 등 19명

선조 20년(1587)
대마도주 제주 표류인 송환

현종  6년(1665)
김원상(金元祥) 등

숙종 40년(1714)
정창선(鄭敞選) 나가사키에 표류, 생환

정조 22년(1798)
조필혁(趙必赫), 이원갑(李元甲) 등

순조 15년(1815)
정의현감 이종덕(李種德) 등

광무  4년(1900)
허희일(許希一) 등 93명 복정현(福井縣)에 표류 생환


― 제주에 표도했던 유구인과 안남인

연   대
중 국 표 류
기    록
광해군3년(1611)
안남국 왕자 표도, 배에는 황견사(黃繭絲) 150석, 명주마노(明珠瑪瑙) 11000개가 있었다.

순조  9년(1809)
유구국의 순견관(巡見官) 옹세황(翁世煌) 등이 우도(牛島)에 표도


― 제주에 표도했던 중국인

연   대
중 국 표 류
기    록
세조 14년(1468)
쇄경(鎖慶) 등 43명
제주목
명종즉위년(1545)
명(明)의 상선(商船) 선원 326명
대정현
선조 15년(1582)
진원경(陳原敬) 황생가(黃生歌) 서양인 마리이(馬里伊)
차귀포
인조  3년(1625)
고맹(高孟) 등 32명
제주목
인조  7년(1629)
황여성(黃汝誠) 등 10명
정의현
인조 12년(1634)
이여과(李汝果) 등 10명
제주목
효종  3년(1652)
묘진실(苗珍實) 등 28명
정의현
현종  8년(1667)
임인관(林寅觀) 등 95명
대정현
현종 11년(1670)
심삼(沈三) 등 65명
제주목
숙종 13년(1687)
고여상(顧如商) 등 66명
정의현
숙종 14년(1688)
주한원 등 28명, 유봉 등 15명, 양자원 등 75명
제주,정의,대정
숙종 16년(1690)
정승원(程勝遠) 등 45명
정의현
숙종 18년(1692)
설자천(薛子千) 등
정의현
숙종 20년(1694)
정건순(鄭乾順) 등
제주목
숙종 39년(1713)
청인(淸人) 표도, 노자를 주어 보냄
제주목
경종 원년(1721)
청인(淸人) 18명
대정현
영조  3년(1727)
청인(淸人) 표도, 육도로 송환
제주목
영조  9년(1733)
청인(淸人) 16명
제주목
영조 14년(1738)
오서신(吳書紳) 등
대정현
영조 15년(1739)
청인(淸人) 157명
제주목
정조 22년(1798)
남선(南船) 1척
명월포
순조  6년(1806)
소주인(蘇州人) 22명
제주목
순조  6년(1820)
청인(淸人) 50명
제주목


1) 최부의 표해록

성곽이 잘 남아있는 소주성과 그 아래 성 안으로 연결된 운하. 최부는 이 운하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최부(崔溥)는 조선 성종 때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 부역이나 병역 기피자, 도망간 노비를 잡아오는 임무를 띤 관리)으로 제주에 근무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배를 타고 고향인 나주 동강면 인동리 성지마을로 가던 길에 거친 풍랑을 만났다. 최부가 승선한 배는 추자도를 지나 흑산도에 못미쳐 풍랑으로 바닷길을 잃어버렸다. 당시 서른넷이었던 그는 보름여 동안 망망대해를 헤매다가 중국 영파해안에 표착했고, 이후 북경을 거쳐 6개월 만에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거쳐 한양으로 귀국했다. 그는 바다와 대륙에서의 여러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사나운 바다에서 겪었던 죽음이 다가오는 순간을 이렇게 써놓았다. “한 채의 이불을 찢어 여러 번 둘러 동여매고 횡목(橫木)에 그것을 묶어서 죽은 후에도 시신이 배와 함께 오래도록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최부를 비롯 일행 43명은 절강성 임해현우두외양에 표착한다. 이후 영파와 항주~소주~양주~덕주~북경 등 주요 도시를 거쳐 6개월 만에 귀국, 성종의 명으로 여정을 자세히 기록한다. 오늘날 3대 견문록의 하나로 꼽히는 최부표해록의 탄생 배경이 최부에게는 동방견문록을 남긴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 마르코폴로에 비견해서 조선의 마르코폴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최부는 중국 내륙을 대부분 경항대운하로 이동했다. 경항대운하는 항주 전당강에서 시작해 북경까지 이어진다. 최부는 장장 약 1800㎞의 고대 대운하 전구간을 따라 이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최부가 15세기 후반에 물길을 따라 이동했던 대운하는 오늘날에도 주요 물자를 운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표해록에는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바다의 정황, 중국 내 운하와 주변 풍광과 지역의 문물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송나라 때 고려 사신이 세웠다는 혜인고려사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실들도 엿볼 수 있다.


  최부의 표류는 제주를 중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고, 중국의 다양한 문물을 국내에 소개하는 등 영향을 미쳤다. 최부는 중국을 여행하면서 수차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고 가뭄이 들자 수차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가뭄 극복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운하를 만들면서 쌓은 제방과 수문 및 운하를 운행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해안방비와 정치제도, 도시, 민속 등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표해록의 가치를 높였다.
  최부는 특히 강소성 소주와 절강성 항주에 큰 애착을 보였다. 소주와 항주는 물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호수와 강이 많다. 빼어난 경치로 ‘하늘에는 천국, 지상에는 소주와 항주’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15세기 후반 최부가 머물렀던 도시 항주와 소주에는 경항대운하를 따라 이동했던 여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소주성과 대운하 및 명나라 시대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명대거리, 항주의 대운하와 혜인고려사 등등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2005년 12월에는 최부표해록과 관련 중한민간우호비가 임해시 도저성에 세워졌다. 나주시 최부기념사업회와 임해현의 관계자들이 합심하여 세운 것이다.
  망망대해의 풍파속에서 난파 직전의 43명의 동승자들에게 했던 최부의 말을 들어보자. “배 안에서는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함께 탔더라도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야 하거늘 하물며 우리는 모두 한 나라 사람으로 정이 육친과 같음에랴. 살면 함께 살고 죽을면 함께 죽자.”(표해록 윤정월 10일 아침) 그의 마음은 그렇게 철석 같았었다. 미암 유희춘의 제자로 큰 이름을 날린 허균의 형인 허성은 최부에 대해, “웅대한 문장과 곧은 절개로 큰 명성을 날렸다.”라는 찬사를 올렸다.
  성종의 권력의지를 대표했던 사림파의 문인으로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이다. 아버지는 진사 택(澤)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김굉필(金宏弼), 신종호(申從濩)등과 교류하였다. 최부는 무오사화에 더불어 일어났던 갑자사화 때 보복 순위 앞자리에 쓰여서 연산군 10년(1504) 10월 24일 斬刑(참수형)에 처해진다. 최부의 나이 51세 때였다. 그 머리는 다음날 백관 앞에 효시되었다. 죽음의 바다에서도 살아나왔던 그는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 복수심의 칼날에 목이 달아났다.




2) 장한철의 표해록

이집에 살고 계시던 장한철의 후손 장응집 할아버지는 2012년 당시 사실 장한철이 조금 살기는 했지만 생가는 아니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서 태어난 장한철(張漢喆)은 1770년 12월 25일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류큐제도(오키나와)에 표착을 한다. 「표해록(漂海錄)」은 장한철이 류큐제도에 표착한 뒤 일본으로 가는 상선을 만나 구조된 뒤 우여곡절 끝에 한양에 가서 과거에 응시하고 낙방한 뒤 귀향하여 쓴 책이다. 당시의 해로(海路)와 해류(海流), 계절풍 등에 관한 해양 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가 높고 제주도의 삼성신화와 관련한 이야기,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의 전설, 유구 태자에 관한 전설 등 당시 제주도의 전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어 설화집으로서의 가치도가 높다,
  경인년 10월에 장한철은 향시(鄕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자 마을 어른들이 모두 서울에 가서 과거보기를 권하고, 또 삼읍(제주, 정의, 대정)의 관가에선 노자를 도와 주면서까지 예조에서 보는 회시(會試)에 응하도록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김서일과 같이 29명의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강진의 남당포(지금의 남포마을)로 항해 하다가 표류한다.
  장한철은 표류 순간에도 사실을 세세히 기록해 호산도에 표착했을 때 『표해일록(漂海日錄)』을 등초해 두었다. 『표해일록』은『표해록』의 모본으로 1770년 12월부터 1771년 1월1일까지 제주를 출발하여 호산도에 표착하기까지의 사연과 표착하여 왜구를 만나기까지의 생활에 대하 것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청산도로 귀환한 후 『표해일록』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아니라 물에 젖고 뭉개져 많은 부분을 판독할 수 없는 상황에서 『표해록』의 소량의 기록과 기억을 더듬어 절반이 넘는 량을 보충하여 『표해록』을 재구성하였다.
  장한철『표해록』의 체제는 크게는 3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체제 중심으로 나누면 과거에 응시할 것을 결심한 도입 부분과, 출범으로부터 표류하여 귀환하기까지의 표류 부분, 『표해록』을 적어 간직하게 된 이유를 밝힌 종결부분 등이다.
  『표해록』의 내용은 ①노령근해에서의 조난, ②유구열도 호산도에 표착, ③왜구의 내습, ④안남 상선 상에서 봉변, ⑤청산도 근해에서의 조난 등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파상으로 닥쳐오는 갖가지 재난을 상세한 필치로 묘파해낸 작자의 문장력과 아울러 주도한 기록은 진실로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표적적인 작품으로 문학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표해록은 역사적 문헌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녔는데 특히 해양지리서로서의 가치는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직접 경과한 경로를 더듬으면 海路와 水流 풍향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장한철이 최부의 경험이 풍부하게 기록된 『표해록』을 탐독하여 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장한철의 표류담은 후에 <부남성장생표대양>과 <표만리십인전한>으로 각각 소설화되어, 본래의 <표해록>에 비해 훨씬 흥미있는 이야기로 꾸며진다. 소설화된 글은 그 양이 축소되었는데 표류자의 내적 고민이 담긴 대목 즉 소설적 흥미가 덜한 부분이 삭제되고, 그 대신 이야기 중심의 사건들만 채택되었다.
  ◉ 장한철의 표해록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
― 당시 식자층의 대외관 : 남자로 태어나 제주 안에서만 머물러 사는 것은 가마솥안 물고기와 다르지 않다는 말을 언급.
― 뱃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비판 : 고래를 만나 당황하고 겁에 질려 관세음보살을 독경하는 뱃사람들에게는 비판적이나, 설문대할망에게 비는 모습에는 비교적 관대하게 반응함, 설문대할망 신화를 일부 수록함.
― 베트남 상선에 오른 후 제주인임을 속인 이유 : 1609년 유구국(혹은 안남국) 왕이 일본에 잡혀가자 두 왕자가 보물을 가득 싣고 왕을 구하러 가는 길에 제주에 표류하였는데 제주 판관 문희현과 제주목사 이기빈에 의해 갈취, 도륙 당한 일이 있어 그 후 제주인들이 유구나 안남배들을 만나면 제주인임을 스스로 감췄다고 한다. 문희현과 이기빈은 그 일이 탄로나 북청 등으로 유배되었다.
― 장한철의 연애담 : 강진에서 만난 젊은 과부와의 연애담을 1인칭으로 기술
― 제주인들의 언어적응 탁월성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장한철의 생가터는 애월읍 한담동에 있다. 기념관 복원계획에 의해 현재는 폐가상태의 가옥이 하나 남아 있다. 한담에는 표해록 기념비와 아름다운 해안산책로가 있다.


3) 제주인 김대황 일행 베트남 호이안에 표류하다

김대황은 조선 후기 제주진무(濟州鎭撫)를 지낸 인물로 안남(베트남) 표류기를 집필했다. 표류는 감자기 떠나는 여행이다. 표류는 가장 흥미진진한 모험이다. 이들은 표류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예찬한 말들이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했을 때 이런 예찬 말들이 생각날까? 아마도 살아 돌아왔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김대황의 표류는 여행을 느끼게 해준다. 아니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을 느끼게 한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 같다.

  ━ 제주도에서 표류하다
  1687년 숙종 때 김대황(金大璜)은 사공 이덕인(李德仁)등 24명과 함께 임금에게 진상하기 위한 ‘말 3필’을 싣고 육지로 향했다. 배로 제주에서 해남 남창으로 가는 길이었다. 날이 저물자 바람이 동북풍으로 변하더니 비바람이 크게 불었다. 파도가 높이 솟고 바람이 거꾸로 불어 배가 점점 서쪽으로 표류했다. 장소는 추자도 근방이었다. 돛대가 기울어지고 키가 꺾어져서 배가 뒤집혀 가라앉을 위기였으나 이덕인이 초둔(짚풀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것)을 묶어 배의 짐들을 모두 바다에 집어넣었다.
  이덕인의 침착한 행동으로 배는 다행히 침몰하지 않았으나 배는 이미 조종할 수 없는 상태였고 바람부는 대로 표류했다. 사람들은 여러 날 밥을 먹지 못해서 굶주림에 쓰러졌고, 물도 떨어져 목도 축일 수 없었다. 이덕인이 짠물을 길어 불을 지펴 이슬방울을 취해 간신히 물을 마셧고, 생쌀을 씹어 넘기면서 목숨을 연명했다.
  김대황은 이덕인의 지혜로운 행동에 감탄했다. 하지만 이제 죽게 생겼으니, 그 재주를 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이덕인은 의지를 잃지 않고 견디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대황은 이덕인의 정신력에 또 한번 감탄했다. 모두가 힘들고 지쳐갔지만 손을 모아 하늘에게 기도했다.

━ 베트남 연안에 이르다
  한 달간 바다에서 떠돌다가, 멀리 구름 안개 속으로 육지가 보였다. 그곳을 유구국으로 알았다. 당시 유구국과 제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숨기기로 모의했다. (그 전에 제주에 표류해 온 유구국 왕자를 피살한 사실이 있었다.) 전라도 홍덕현에 사는 백성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김대황 일행의 배가 육지에 다다르자 25여척의 작은 배가 나는 듯이 달려와 사방을 에워싸니, 칼과 창이 빼곡하게 늘어섰다. 해적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안남국 사람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바지를 입지 않으며, 비단으로 된 긴 옷을 한 벌 입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특이한 모습에 모두들 놀라했다.
  해가 저물녘에 우리를 자기들 배에 나누어 싣고, 강물을 따라 10리쯤 들어갔다. 언덕가의 저택이 나타났다. 안남국 호이안(會安)의 명덕부(明德府)의 관아였다. 현재 ‘다낭’바로 남쪽에 있는 고도(古都)이다.
  김대황과 안남국 사람들은 문자(漢字)로 의사소통을 했다. 안남국의 관리는 김대황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김대황은 안남국 사람들도 유구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 사람을 싫어해서 제주도 사람은 모두 죽여 버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조선국 전라도 사람이며 풍랑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제발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관리는 더 말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밥을 주며 여관에 몰아넣었다.
  김대황 일행은 계속 고초를 겪다가 안남의 서울(후예)로 가게 된다. 국왕은 그들에게 쌀과 먹을 것을 주고는 회안부로 보내서 임시로 머물러 살게 했다. 그러면서 안남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도록 했다. 이렇게 다섯달 정도를 안남국에서 보냈다.
  김대황 일행은 안남에 머물면서 안남의 여러 가지 신기한 것들을 봤다. 물소가 논밭을 가는 것을 신기해 했다. 그러는 동안에 3명이 병으로 죽고 만다. 함께 표류해온 사람들은 골육이 죽은 것 같이 슬퍼했다. 바람으로 표류했기 때문에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묻어주었다.

━ 중국 선박을 타고 귀국하다
  김대황은 결국 참지 못하고 국왕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사정을 글로 써낸다. 글을 읽고 국왕은 중국의 상선을 타고 조국에 돌아가게 해준다. 김대황 일행은 중국 상선이 정박하는 호이안으로 갔다.
  당시 호이안에는 중국인 마을, 일본인 마을, 인도인 마을, 아랍인 마을, 그리고 유럽인 마을 등이 형성될 정도로 국제도시였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나라별로 자치가 이뤄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인 마을에는 베트남과 무역하던 ‘가도야 시치로베(角屋七郎 兵衛)’라는 일본인이 마을을 지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호이안에서 중국 상선의 선장 설자천을 만났다. 그들은 김대황 일행에게 수고비로 쌀 600포를 요구했다. 배가 가는 길에 해적으로 많은 곤경에 처한다. 선주 진건(陳建)이 온주부(溫州部) 관리에게 부탁해서 배의 호송을 부탁했다. 김대황은 배를 호송해준 장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시문을 지어 주었다. 김대황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제주도 서귀포에 도착한다. 1688년 12월 9일이었다.
━ 3년뒤 설자천 무역선이 제주에 오다
  1691년 9월 28일 복건성 상인 진곤, 설자천 등 33명이 탄 선박 한척이 서귀포 외항인 초도(새섬)에 정박한다. 이들이 탄 배는 표류선이 아니었다. 베트남에 표류했던 김대황 일행을 제주도로 데려다 준 중국 상인 설자천이 타고 있는 배였다.
  설자천 일행은 말했다. “세상은 다시없는 남다른 은혜를 허락했다. 이제 큰일을 겪은 지도 3년이 된다. 때때로 깊이 우러러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며 생각해보면, 각기 한편 도(道)로 보답을 해야 하는데 미진한 느낌이 든다.” 이들은 제주인을 데려다준 중국 상인에게 베푼 조선정부의 은혜를 갚겠다며 조선 국왕(숙종)과의 면담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들의 사연을 캐물었던 제주 목사는 곧이듣지 않는다. 배에 동승한 이들이 가지고 온 후추, 단목 따위를 해삼, 포어 등과 바꾸어 고용인들의 밑천을 만들고 싶다는 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국 상인들의 행색이 사사로이 통상하는 사람 같다며 속히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거듭 말한다. 그래도 그들은 의지를 꺾지 않으며 떼를 쓴다.
  제주목사는 이 일을 조정에 알린다. 결국 “그들 말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타일러서 거절하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설자천 일행은 조선정부에서 내린 쌀, 소금, 미역 따위를 받고 제주를 떠났다. 그때가 1692년 2월이었다.

━ 바다는 외부로 열린 공간이었다.
  박제가는 1778년 첫 번째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뒤 쓴 ‘북학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 “표류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중국의 바다 상인을 해마다 10여척씩 불러와 교역하게 하자. 이 때 선주를 후하게 대접하되, 빈객의 예로써 대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 않아도 저들이 스스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저들의 기술과 예능을 배우고 저들의 풍속을 질문함으로써 견문을 넓힐 수 있다. 그리하여 천하가 얼마나 큰 것이며, 우물 안 개구리인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부끄럽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박재가의 말을 곱씹어 본다면 애써 부르지 않았는데고 제주섬 어느 해변으로 밀려든 표류선이나 제주도에서 표류해 동남아 일대를 휘젓고 다니다 돌아온 표류선은 ‘우물안 개구리’에게 파문을 던지 존재였는지 모른다.



4. 김비의 오키나와 표류기
  조선 성종때 제주도를 출발해서 나주로 가다가 표류 약 2년간에 걸쳐서 류큐왕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조선인들이 있다. 그 주인공은 김비의이다. 일명 김비을개(金非乙介)라고도 한다. 1479년(成宗 10) 강무(姜茂), 이정(李正) 등과 함께 표류되었다가 유구에 들려 2년 만에 무사히 귀환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들른 섬의 풍속이 참으로 기이하여 성종은 홍문관에 명하여 그 전말을 아뢰도록 하였는데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고 기록되어있다.
1477년(成宗 8) 2월 1일 김비의, 강무, 이정, 현세수(玄世修), 김득산(金得山), 이청민(李淸敏), 양성돌(梁成突), 조귀봉(曹貴奉) 등은 진상할 제주산 밀감을 싣고 항해하던 중 추자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났다. 출항 11일째에 김득산이 병사하고 14일 만에 어떤 섬 해안에서 파선되어 김비의 등 세 명만 살고 나머지는 모두 익사하였다. 세 명은 나무판자에 의지하여 표류되어 유구에 도착하여 왕궁과 사찰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1개월 동안 객관에 머물면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기이한 섬의 풍물을 보고 1479년 6월 22일 제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김비의, 강무, 이정에게 2년간 부역을 면제해 주고 반년의 녹봉과 바다를 건널 양식과 저고리 및 철릭(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형태의 남성용 옷) 하나씩을 내려 주었다.
  이들이 표류한 거리는 참으로 먼 길이었다. 거리로는 수천 ㎞일뿐만 아니라 소요시간도 2년 4개월(1477년 2월 1일 ~ 1479년 6월 22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조들은 기록을 할 줄 아는 문화 민족이다. 표류를 하여 돌아온 선조들은 표류기를 작성하여 조정에 바치는데 이 것이 당시의 문화연구에 좋은 사료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에 얼추 주요 표류사례(살아서 돌아와서 기록이 남은 경우)를 보면 세종 25년(1443) 김목, 김막 형제, 세조 13년(1467) 김석이 등 2명, 성종 15년(1484) 승려일 행등 9명, 성종 19년(1488)에는 그 유명한 “최부”가 표류하여 중국의 저장성에 도착하여 선비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돌아와 남긴 “표해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외에도 수도 없는 표류(일본의 학자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약 700회정도)가 있었는데, 대개는 일본에 표류되는 경우이고 동지나해로 표류되는 경우에는 돌아오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기록이 없어서 그 내용을 알길이 없다. 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등의 사료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김비일행은 큐슈에 도착해서도 배로 3일만에 나가사키에 도착을 하고 육로로 지금의 후쿠오카에 도착을 해서 6개월을 지내가가 시카노시마(몽고가 일본을 침략할 때 맨처음 공략했던 하카다만의 작은 섬) 그리고 이키(작은 섬으로 대마도와 후쿠오카 중간에 있음) 대마도를 거쳐서 울산으로 돌아오는 기나긴 표류 여정이었다.

━ 김비의 일행 표류일지
  •김비의 일행의 표류기는 ‘성종실록’ 10년(1479) 6월 10일부터 6월 20일까지 실려있다. ‘성종실록’을 토대로 김비의 일행의 표류 일지를 정리해 본다.
◉ 1477년 2월 초하루=김비의 일행 등 8명 제주 출발, 현세수 김득산 이청민 양성돌 조귀봉 김비의 강무 이정은 감귤 실은 진상선에 오름.
◉ 1477년 2월 14일쯤=일본 오키나와 요나구니섬 표착, 김비의 강무 이정 등 3명만 생존. 6개월간 요나구니에서 생활.
◉ 1477년 8월=요나구시섬 주민 13명의 안내를 받으며 이리오모테로 이동. 5개월간 생활.
◉ 1478년 1월=이리오모테섬 사람 5명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하테루마로 이동. 한달간 생활.
◉ 1478년 2월=하테루마섬 사람 5명이 제주 표류인을 데리고 아라구스쿠섬으로 이동. 한달간 생활.
◉ 1478년 3월 구로섬으로 이동. 이때도 아라구스섬 사람 5명이 안내를 맡음. 한달간 생활.
◉ 1478년 4월=구로섬 사람 8명과 함께 한 배를 타고 타라마섬으로 이동. 한달간 생활.
◉ 1478년 5월=작은 배를 타고 이라부섬으로 이동. 타라마섬 사람 5명이 호송을 맡음. 한달간 생활.
◉ 1478년 6월=미야코섬으로 이동. 이라부섬 사람 5명이 작은 배를 타고 표류인들을 미야코섬까지 안내. 한달간 생활.
◉ 1478년 7월=미야코 사람 15명이 표류인들을 데리고 오키나와 본토로 이동. 3개월간 생활. (지금까지 김비의 표류기에 적힌 대로라면 제주 표류인들이 오카나와 본토를 떠난 달은 석달후인 10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종실록’에는 오키나와를 떠나 일본 본토로 이동한 날짜가 8월1일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표류인들이 오키나와의 여러 외딴 섬에서 머문 기간을 실제 체류 일정과 달리 기억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1478년 8월 초하루=100여명이 큰 배 한 척을 타고 일본 본토 사츠마번으로 제주 표유인들을 호송. 이후 6개월간 일본 본토에서 체류.
◉ 1479년 2월=쓰시마로 이동. 2개월간 생활.
◉ 1479년 4월=울산에 도착한 후 서울로 이동. 2개월간 생활.
◉ 1479년 6월 20일=제주로 귀향.
2. 제주도의 표착인

1) 유구선(琉球船)을 불태운 유구세자 살해사건
  지금의 산지항을 축조하기 전에는 동쪽으로는 산지천에서 서쪽으로 병문천 입구까지 해안이 큰 자갈로 덮여 있어 겨울철 만조때 파도가 일면 자갈 구르는 소리가 온 성안에 울리곤 하였다. 산지천 하류도 하상이 자갈로 되어 가운데는 ‘돛다리’라는 사구(砂丘) 양 옆으로는 산짓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1611 광해 3년) 큰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산지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내린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이들 가운데 제일 높은 이가 관가에 불러 갔을 때 사또가 물었다.
“너희는 누구냐?”
젊은이는 “나는 유구국의 왕자입니다.”
 “어째서 여기 왔느냐?”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왕이신 제 아버지를 잡아 가버렸습니다.”
 “저는 너무 슬퍼서 보물을 갖고 일본에 들어가 왕을 풀어 달라고 하려 배를 타고 떠났다가 이곳으로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사또는 군사를 풀어 배 안을 뒤져보니 엄청난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조그만 포대기가 두 장 있었는데 만산장(漫山帳)이라고 했다. 거미줄을 모아서 짰다는 이 포대기는 마음대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해서 아무리 큰 물건이라도 마음대로 덮을 수가 있으며 또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마음대로 덮을 수가 있는데 비가와도 새지 않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또 주천석(酒泉石)이라는 네모난 돌이 있었다. 가운데 움푹 패인 곳에 물을 붙기만 하면 술로 변하는 것이었다. 앵무새 한쌍이 있었는데 왼쪽 발톱으로 비파를 켜는 것이었다. 거위 알만큼 큰 수정 두 개는 밤에 방 안에 두면 대낮처럼 밝았다. 이 밖에도 매우 신기하고 처음 보는 것들이 많았다. 사또가 왕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술이 샘솟는 돌을 달라, 그러면 너희들을 일본에 돌아가도록 보내 주겠다.”
  왕자가 간곡히 청했다. “제가 보물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부왕께서 힘없이 갇혀 계셔서 보물이 없으면 풀어 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치욕은 이웃 나라의 치욕과 같으니, 원컨대 나리는 이를 슬퍼하소서.”
  욕심이 난 사또는 이들을 전부 가두라고 명령했다. 그때 왕자의 신하 한명이 주천석과 만산장을 가지고 도망을 갔다. 군인 들이 벼랑까지 쫓아오자 바다로 뛰어들었으나 보물과 함께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군인들이 주위를 여러 날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사또는 배 안의 물건을 모두 약탈하고 왕자와 일행을 죽여 버렸다. 왕자는 죽음에 임해 혈서로 시를 지어 읊었다.
  요(堯) 임금 같은 말도 밝히지 못하고 걸(傑)같은 자에게 몸을 굽히니 형장에 임하여 어느 여가에 하늘에 호소하리, 삼랑(三良)이 묘혈(墓穴)에 임하였으니 누가 속(贖)바칠 것이며 이자(二子)가 배를 탔는데 어질지 못한 자에게 해를 입네, 뼈가 모래밭에 드러난들 감아줄 풀이나 있겠으며 혼이 고국에 돌아간들 조상할 친척이 없네. 죽서루(竹西樓) 아래 도도히 흐르는 물 한을 품고 분명히 만년을 오열하며 흐르리라.
 사또 이기빈(1563~1625)은 국경을 침범한 도적의 무리를 처단했다고 왕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까지 받았다가 발각되어 이기빈은 옥에 갇혔으나 많은 보물과 진주를 광해군에게 바쳐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반정이 일어난 뒤에도 이기빈은 여전히 북변의 중책을 맡기는 데 까지 이르렀으니 오늘날 위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사악인 것이 아닌가 한다.
  왕자가 남긴 시에 등장하는 죽서루(竹西樓)는 산지포구에 있는 정자였다. 이 곳에 정박했던 그 배의 규모가 굉장했는데 배 한 척에 10여개의 돛을 전례에 따라 세운 것을 보면 분명 왜구의 배는 아니었다고 실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기빈은 판관 문희현을 시켜 증거를 없애느라 이 배를 태워버리고 배에서 내린 사람 100여명을 다 죽여 버렸다.
  이 사건의 여파는 오래 갔다. 제주도 보재기(포작인) 들은 일본이나 유구국 지역에 표착할 경우 나주, 강진, 영광 출신이라고 것짓 말을 해야 살아 돌아 올 수 있다고 믿었다. 장한철이 표해록에도 <저녁에 임준(任遵 옛날:안남상선의 통역자) 이 글로 그 까닭을 말해 주는데 “옛날 탐라왕이 안남세자를 죽였으므로 안남사람들이 상공이 탐라인임을 알고 모두 칼로 배를 잘라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하는 것을 우리들이 만방으로 마음을 달래서 겨우 마음을 돌렸습니다.… 무릇 세상에 전하기를 옛날에 제주목사가 유구태자를 죽였다고 하는데 유구가 아니라 곧 안남세자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교훈은 늘 있다. 만약 이기빈이 욕심을 버리고 그들과 친선우호를 다졌다면 제주도가 해상왕국으로 발돋움할 비법을 전수받지는 않았을까? 이 사건이 있기 이미 125년 전에 제주 보재기들의 해양기술은 상당했었다. 조선 최고의 쾌속선을 부리고 있었음이 1486년 실록에 나타나는데, ‘두무악’이라 불렸다. 두무악(頭無岳)은 원래 한라산의 별칭이었으나 제주 출신 뱃사람, 또는 그 선박을 이르기도 했다.
  당시 경상도 관찰사가 왕에게 보고 하기를 “두무악은 모두 배를 잘 부려 물결에 달려가는 것이 나는 새와 같으니 그들을 어루만져 편히 살게 하면 급할 때에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빠른 만큼 배의 규모는 작았다. 그렇다면 제주 해민들은 조선해군에 투입 되었을까? 두무악은 일종의 해적일 수도 있고 물위에서 붙어살며 정처 없이 유동하고 옮기므로 급할 때에 쓰기가 어렵다는 결론이었다.

2) 서양인 표착만인(漂着蠻人) 하멜
  효종 4년, 계사(癸巳 1653)년 7월에 서양 만인이 탄 배가 표류하다가 대정현 차귀진 대야포(大也浦)에서 좌초되었다. 총 64명의 선원 중 생존자는 모두 36명이었다. 이른바 우리에게 <하멜표류기>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하멜 일행의 표착이었다. 당시 제주목사는 이원진(李元鎭)이었고, 판관은 노정(盧錠), 대정현감은 권극중(權克中)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들 표착 만인들에 대한 정확한 진상 조사를 위해 박연(朴延)을 급히 제주로 내려 보냈다. 박연이란 인물 또한 이들과 동향인 네덜란드 태생으로 하멜 일행 보다 10여년 앞서 이곳에 표류했다가 조선에 머무르면서 당시는 훈련도감에 소속된 조선 관리의 신분이었다.
  그들이 구술한 바에 의하면 대만으로 가서 미록(麋鹿)을 구입할 예정이었으며, 자신들이 소지한 사탕, 후추, 목향 등을 일본에 가서 판매하려던 참이었는데 풍랑으로 표류했던 바, 일본 나가사키 송환시켜 줄 것으로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박연은 자신의 처지를 예로 들면서 한양으로 들어가 훈련도감에 소속해 새롭게 삶을 꾸려나가자고 설득했고, 결국 복속(服屬)의 의사를 표명하게 되었다. 다음 해 이들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가 도성 내외의 각 군영에 분산 배치되었다. 특히 평소 이들이 지니고 있던 무기 제작술이 재활용되기도 했는데, 여기에서 대포 및 조총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자세하게 소개해 놓고 있기도 하다. 끝으로 이들이 타고 왔던 범선의 규모는 돛의 장포 폭을 기준으로 해서 산정해 소개하고 있고, 특히 이들 일행가운데에는 10세미만의 소년들도 있었음을 언급했다. 곧, “이제 막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의 신세를 벗어나 있는 듯한데, 하늘을 극한 양쪽 모퉁이 나라에서 창해를 건넘이란 그 재능이 대단히 뛰어남에 우리네 처지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구나!”라고 감탄을 연발하고 있다.
  하멜보고서의 번역으로 표착지로 추정되는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해안 언덕 용머리부근에 1980년 10월 12일 한국관광공사와 네덜란드 양국은 우호 증진을 위해 각각 1만 달러씩을 출연하여 기념비와 난파선 스페르웨르호와 기념관을 세워 전시하고 있다.

3) 순치(順治) 이후 제주표착 상인에 대한 문답
  송정규가 순치 이후의 표착상인에 대한 문답의 기록을 통해 밝혀내고자 했던 사항은 아마도 당시 명청(明淸) 교체기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국 내부의 사정과 더불어 인접국가의 동태 파악을 통한 국제정세의 흐름을 간파하려는데 목표를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모두 6건의 사건 중에 마지막 ‘왜선의 표류사건’을 제외한 5건이 모두 중국 상인과 관련된 내용이다.
  효종 3년(1652) 2월 중국 소주 출신 묘진실(苗珍實) 등 2백여명이 정의현 천미포 해안(표선면 하천리)에 표착한 사건이다. 생존자가 겨우 28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는데 자신들은 명나라 남경의 상인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 우리 선원들 대부분은 중국의 산서(山西), 섬서(陝西), 산동(山東) 지역에 연고를 둔 사람들로서 그곳 토산품인 약재, 조랍(棗蠟), 전담(氈毯) 등의 물건을 소주의 시장에다 팔아 주능(紬綾)과 은자(銀子)로 바꾸어 다시 교지(交趾)로 가서 팔고는 호초(胡草), 소목(蘇木), 단향(檀香), 우피(牛皮), 당등(糖藤)류에 속한 물건을 구입하여 일본의 나가사키에 가서 인삼, 동철(銅鐵), 해삼, 황서(黃鼠), 적호(赤狐), 호피(嚎皮), 향환(香芄), 연초(煙草) 등의 물건과 바꿉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소주로 달아가 되팔곤 합니다. …
  결국 당시 이들이 벌인 무역루트로는 중국(蘇州), 베트남, 일본 등으로 세 나라에 걸쳐 해상무역이 펼쳐지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4) 한국에서의 첫 미사 올리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며 103위 순교성인들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 제주도 용수리 해안가이다.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 신부는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신도 11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갔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17일 금가항(金家港)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레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항을 떠났다.
  출항한지 3일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머물면서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김대건 신부는 경기도 용인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1846년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그해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김대건 신부의 선교 열정과 순교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9년 9월 19일 용수리 포구를 성지로 선포하고 여기에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고 ‘라파엘호’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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