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윤소종·박의중·이숭인 등이 있었다.
1362년(공민왕11) 진사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가 돼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우왕1) 성균사예·지제교 등을 역임했고 이해 권신 이인임·경복흥 등의 친원배명 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현 전라남도 나주)에 유배됐다.
1384년 성절사 정몽주가 명나라로 가게 되자 그의 추천으로 서장관이 돼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해
1385년 성균제주(成均祭主), 이듬해 남양부사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에 승진했다.
1390년(공양왕2) 조민수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해
과전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해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됐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됐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됐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예문춘추관사에 임명돼 사은 겸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태조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저서로는 ‘삼봉집’, ‘경제문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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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이었고
조선왕조의 국가 경영체계를 제시한 뛰어난 정치 사상가였지만
이성계를 앞세워 역성혁명을 한것은 자기들의 왕국 즉 사대부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였고
그것을 위해 정도전은 마카아벨리보다 더한 술수를 시행해 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정도전 졸기를 다시 옮겨 본다.
이 기록에서도 분명히 그의 공업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다음처럼 적시하였다.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
태조 7년 1398년 8월 26일(기사)
정도전의 자(字)는 종지(宗之), 호(號)는 삼봉(三峰)이며, 본관(本貫)은 안동(安東) 봉화(奉化)이니,
형부 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경자년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여 여막(廬幕)을 짓고 상제(喪制)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太常博士)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宗廟)에 제향(祭享)하니, 도전이 도(圖)를 상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禮儀正郞)·예문 응교(藝文應敎)로 옮겨서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훙(薨)하여, 을묘년에 북원(北元)의 사자(使者)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先王)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明)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元)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罪名)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宰相)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會津)으로 폄직(貶職)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賀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成均司成)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무진년에 대사성(大司成)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密直提學)과 지공거(知貢擧)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十學都提調)가 되어 상명(詳明)·태일(太一) 등 여러 산법(算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으로 옮겨서 《진맥도결(診脈圖訣)》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등과 더불어 사전(私田)를 혁파(革罷)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中興功臣)으로써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고,
윤이(尹彝)·이초(李初)의 무망(誣罔)한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賞與)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羅州)로 폄직(貶職)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推戴)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功勳)을 책정(策定)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門下侍郞贊成事兼判尙瑞司事)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計稟使)로써 경사(京師)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判三司事兼判三軍府事)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가 되어 《진도(陣圖)》·《수수도(蒐狩圖)》·《경국전(經國典)》·《경제문감(經濟文鑑)》을 제작하고,
또 악가(樂歌)를 지었으니,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籙)·문덕(文德)·납씨(納氏)·정동방(靖東方) 등의 곡(曲)이 있었다.
정총(鄭摠)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高麗國史)》를 수찬(修撰)하였다.
봉화백(奉化伯)으로 봉해지고,
관계(官階)는 특별히 숭록 대부(崇祿大夫)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初場) 강경(講經)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宣撫)하여 주군(州郡)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孔州城)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該博)하였으며,
항상 후생(後生)을 교훈하고 이단(異端)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文武)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整齊)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倭寇)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軍營)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시(詩)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開國)할 즈음에 왕왕 취중(醉中)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漢)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謀議)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功業)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撰述)한 《고려국사(高麗國史)》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加筆)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識見)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韓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烏川) 정몽주(鄭夢周)와 성산(星山) 이숭인(李崇仁)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趙浚)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外祖父) 우연(禹延)의 처부(妻父)인 김진(金戩)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樹伊)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外祖母)이었는데,
우현보(禹玄寶)의 자손이 김진(金戩)의 인척(姻戚)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告身)이 지체(遲滯)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거정(居正) 등을 사주(使嗾)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庶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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