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경주 양동마을 1.

하늘타리. 2014. 2. 24. 16:37


양동마을입니다.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 두 가문을 중심으로 500여 년을 이어 온 씨족마을입니다.
씨족마을의 구성 요소인 종택, 살림집, 정자, 서원, 서당 등 유형유산과 유교 예법에 따른 의례, 전통 놀이 등 무형유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2010년에는 한국 전통마을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양동마을의 경주 손씨는 양민공 손소(1433~84)가 처가가 있는 이곳에 정착하면서 일가가 형성되었고

여주 이씨는 찬성공 이번(1463~1500)이 손소의 사위가 되면서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양동마을 안에는 주산인 설창산에서 뻗어내린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여 채가 들어서 있습니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지고 형산강의 지류인 안락천이 지나갑니다.

 

양동마을의 가옥은 대부분 조선시대 영남 지방의 일반적 가옥 형태인 ‘ㅁ’자 모양입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와가(기와집)는 4채가 전해는데

큰 와가 아래 초가는 ‘가랍집’이라 부르는데 노비나 소작농이 살았다고 합니다.

양동마을의 초가 지붕은 둥근 반달 모양이 아닌 사다리꼴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1970년대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했다가 초가 지붕을 부활시킨 것이어서 옛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양동마을 150여 채 건물 중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은 무첨당, 관가정, 서백당, 수운정이라고 합니다.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처음 터를 정하고 살던 집으로

양동마을 가운데서도 서백당과 함께 풍수지리학적으로 가장 길지로 여겨지는 터에 지어져 있으며,

여강이씨 종가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은 손중돈이 분가하면서 마을 초입 고지대에 지은 와가로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는 정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누마루에 오르면 안강평야의 곡식이 익어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관가정은 사랑채, 안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대문 옆에 행랑채가 있지만 관가정은 대문이 사랑채와 이어집니다.

본래 대문과 담이 없었다고 합니다.

현재 대문 아래쪽 진입로의 두 그루 아름드리 은행나무까지를 마당으로 한 정자였다고 합니다.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은 경주 손씨의 종택입니다.

손소가 양동으로 이주한 1459년 지어졌습니다.

종택에 걸맞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가옥으로 사랑채 뒤편 정원의 경치가 빼어납니다.

키가 7m에 달하는 수령 500년가량의 향나무(경북 기념물 제8호)가 고택의 운치를 더해 줍니다.

손중돈과 이언적이 이곳에서 태어나 명혈(明穴) 중의 명혈로 꼽힙니다.

 

수운정(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은 손중돈의 증손자 손엽이 세운 정자로

양동마을의 여러 정자 중 조망하는 경치가 가장 뛰어납니다.

16세기 후반 건축됐으며 임진왜란 당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보존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머지 사항은 양동마을 홈페이지를 참고하세요.


그리고 양동마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쓰인 말처럼

집주인들의 눈초리가 그리 곱지는 않습니다.

 

이런저런 불편을 이유로 찾아온 이들에게 눈을 흘기고

여기도 들어오면 않된다. 저기도 들어오면 않된다...

 

하여간 다른 곳에는 없으니

 

안내소부터 들어가서 전시물을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