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전주 남고산성 한바퀴 돌고 전주천변을 걷다

하늘타리. 2013. 9. 17. 22:26

 예부터 전주의 남쪽을 방비하는 중요한 요새로 알려져 있는 남고산성,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하여 견훤성라고도 불리우는 산성의 성벽을 타고 만경대를 향하여 올라갑니다.

 

 

 

만경대에 거의 다가갔을때 오른쪽으로 정몽주 우국시, 만경대 암각서 표지가 있습니다. 

 

바위로 다가가면

 

바위위에 암각된 만경대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로 각자되어 있는 글이 보입니다.

 

 

각자한 이의 이름 

 

그 앞 안내판 입니다.

이 시를 읊는 정몽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한양으로 돌아가면 빠른시간내에 어떤 조치를 해야겠구나하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그 수가 이성계에게 읽혀 방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 시를 300년이 지난 영조때 옮겨새기는 김익수라는 장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때 그 시기가 정몽주의 우국시가 떠오를만큼 어수선한 시기는 아니었을텐데요...
 

바위앞에서 오목대방향을 보았는데 소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습니다.

 

이 바위면에는 이서구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서구시벽을 지나오면 만경대정상입니다.


만경대 정상에서 전주시를 봅니다.

 

 

 

 

천경대 쪽을 봅니다.

 

북쪽으로 넘어오니 천년전주마실길 표지가 북장대를 가르킵니다.

 

남고사앞에서 남고사를 건너뛰라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길로 내려서니 저 아래로 남고진사적비각이 보입니다.

 

남고산성의 내력을 적은 남고진 사적비는 조선후기 3대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의 글씨입니다....만...
주변에서 공사를 하니 어수선해서 않내려갑니다.

  

남고사앞으로 갑니다.

 

남고사 안내문을 읽고 

 

사천왕문에 들어섰습니다.
내부에 사천왕상은 봉안되어 있지 않고 사천왕도만 모셔져 있습니다.
천왕문을 통해 대웅전을 바라봅니다. 

 

남고사는 신라 문무왕 8년(668) 열반종조 보덕화상의 수제자인 명덕화상이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창건초기에는 남고 연국사라고 불리워 삼국유사 기록에는 연국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

<동문선>에 수록된 이달충의 [전주관풍루기]에 고을 남쪽에 남고사라는 절이 있다 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그 이전부터 남고사라 불리웠을 것입니다.

 

남고사는 전주 사고중 하나로 전주부의 수호 사찰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완산팔경의 하나로 남고모종南固暮鐘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만 종각도 종도 보이질 않습니다.

 

대웅전

 통나무를 깎아만든 꽃살문의 화려함이 눈길을 끕니다.

 

부처님을 뵙습니다.

석가모니불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계십니다.
후불탱으로는 삼불회도가 걸려 있습니다.

 

 남고사에서 나오며 공사중인 서문지를 봅니다

 

숲길로 들어섭니다.
싸리문이 있는 소로가 나오길레 따라가 보았더니 그냥 묘지와 밭입니다.

 

그 곳에서 고덕산 정상을 봅니다. 

 

남고산성길이건, 시나브로길이건, 마실길이건...
다니는 사람이 드문가 봅니다.

 

잡초가 길을 덮었습니다.

 

 

헤치고 나아가 억경대입니다.

 

 

 

억경대에서 전주 시가지를 바라봅니다. 

 

대승사쪽으로 바로갈까

 

북장대쪽으로 갈까  

 

성벽을 따라 남고사로 다시 내려갈까?

 

그래 성벽을 따라 조금만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자.

 

 

 

 

 

내려갔다 올라와서 북장대로 갑니다. 

 

 

 

북장대에 와서 안내도를 보는데.... 

 

남장대가 그려져 있습니다. 

남고사 아래...만경대 동쪽...
그럴만한 자리가 없었는데...


다시 빠꾸 남장대를 찾으러 갑니다.


아까 그 싸리문 밖인가? 

 

이 무덤이 있는 자리인가? 

 

아니면 이 소나무 숲길지나

 

벤치가 있는지리인가? 

 

그림에는 그려놓고 그 부분에는 표식이 없습니다.

 

뱅뱅돌다 혼자 씩씩거리며 다시 만경대로 갑니다.

 

석벽을 타고 다시 서암문지로 왔습니다. 

 

별장들의 선정비를 둘러보다 문득 ...  

 

선정비가 여기 있다면 이곳이 주통로였다는 이야기인데...

그러면 암문이 아니었을텐데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별장 이신문을 비롯 관찰사 서상정, 판관 강준수 등 비석 6개가 있었고

 비석형태는 물론 바위에 새겨진 것도 있었다는 기억이 나는데 오늘은 3기 뿐이 않보입니다.
주변을 뒤질 것 아니니 이것도 패쓰! 

 

관성묘로 갑니다.

 성안마을을 지납니다.

 

누군가가 길청소를 열심히 하시길래 수고하십니다하고 지나갑니다.

 

 방문자지원센터입니다. 

 방문자지원센터 위치로는 참으로 애매하네요.

 

여기도 별장의 선정비

 

옆에 위치한 고목으로 보아 성내마을의 중심광장위치였던 듯 싶습니다.

 

별장 선정비를 가까이에서 찍어봅니다.

최영우 청덕선정비

 

성안마을 서낭당

'기도오시는 보살님께' 하며 준수사항을 붙여놨습니다.

 

지금도 꽤 많은 분이 찾아와 비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대나무숲앞을 지나갑니다

 

대나무숲에 둘러쌓여진 관상묘를 만납니다. 

 

 대소인원개하마

하마비가 있습니다.
하마비가 아니더라도 관성묘를 들어가려면 계단 때문에 당연히 하마해야 합니다.
잘나가던 어느시절에 권위의 상징으로 세웠던 것이지요.


관성묘로 올라갑니다. 

 

 

 

관성묘는 중국 촉나라의 장수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신당의 일종으로, 관왕묘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구를 물리친 것이 관우 장군신의 도움이라 여기던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 관성묘의 효시인 ‘남묘’가 서울에 처음 건립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당시 명나라 신종은 조선에서의 왜병을 격퇴시킨 공은 오로지 관운장의 음공에 의한 것이라 하여

내탕금 4천 냥을 보내 관왕묘를 짓게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 조정, 특히 왕가에서는 열성으로 신앙하였다고 합니다.

 

懲毖錄이나 壬辰錄 등에 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관우의 神助에 힘입어 승리하게 된 영험기와 이적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성묘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東廟), 도동의 남묘(南廟), 혜화동의 북묘(北廟),

서대문 밖 천연동의 서묘(西廟) 그리고 종로 보신각 뒤에 중묘(中廟)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묘만 남아 있습니다.

지방에는 안동, 성주, 전주, 남원, 진안 등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곳 전주관성묘는 1895년(고종 32)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 이신문이

각처 유지들의 헌금을 받아 건립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2~3년 전에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들보의 상량문에 1865년의 기록이 나왔다고 합니다.


미루어 짐작하기로는 서울의 관왕묘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고 이후에 훼손되었다가

1895년에 대대적인 중수, 보수를 한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들어가는 문 위에 關聖墓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현판은 벽하 조주승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 좌우에는 관운장이 타고 다녔다는 적토마와 마부의 상이 준비된 듯이 서 있었습니다.

 

 

 

 

문을 지나 다시 돌계단을 올라가면 중간 문이 나오고,

  

또다시 돌계단을 올라가면 관성묘의 본당이 나옵니다.

  

본당 건물의 형태는 맞배지붕형식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예를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본당 앞으로 맞배지붕의 건물을 세워 정(丁) 자 모양의 정자각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당에 모셔진 인물들을 보면, 협천대제(協天大帝)라 하여 ‘하늘을 돕는 대제’라는 뜻으로

 삼각수에 대춧빛 얼굴의 관운장 상이 황금색 용포를 입고 앉아 있고, 

 

앞쪽 좌우에는 부장들의 상을 모셨는데

오른편은 아들 관평장군과 조무장군이,

 

왼편으로 주창장군과 왕보장군의 상이 있습니다.

 

 

옥천사의 보정스님

 

 

 

불자를 위한 기도터

 

삼국지연의가 그려져 있는 동무와 서무

 

 

뜬금없는 포대화상

 

동무와 서무 그리고 기도터를 돌아보고 내려오면서 만난 북.
통나무속을 파내어 만든 통북입니다.

다른 북들은 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속을 파내고 북을 만드는 반면 이 북은 통나무 그대로를 가지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쓰이는 가를 모르겠습니다.

 

관성묘에서 운장주를 생각해 봅니다.
天下英雄關雲長 依幕處 謹請天地八位諸將
六丁六甲 六丙六乙 所率諸將 一別屛營邪鬼
唵唵喼喼 如律令 娑婆訶

무속인들이 관운장이 못된 시귀들을 쫒아내 달라고 하며 음송하던 주문이지요....

 

관왕묘 입구에 있는 나무

오래된듯하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이름을 모르니 특성을 모르고

특성을 모르니 얼마나 되었는가를 짐작하기가 어렵네요.
혹시 누군가 판근을 쓴다고 베어내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나라 정부나 지자체나 어떤 사업을 할때 공통된 특징이 

이 시설이 주변과 조화되는가 아닌가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고

 던져진 설계에 의한 일률적인 형식의 구조물이 덩그렇게 지어진다는 것이지요.

 

시나브로길을 만든다고 예산을 받아서 엉뚱한곳에

주차장 및 휴게공간 만든다고 예산을 쓰고 있습니다.

 

길이 있어 갔는데...
길이 아닌듯 하여 빠꾸합니다.

 

제길을 중장비가 막고 있어서 길을 못보았군요.
중장비 뒤로 돌아서 산길을 올라갑니다. 

 

쌓여진 돌. 아니 쌓을 돌

석벽을 헤치고 모은 돌인지...석벽을 쌓을 돌인지 하여간 쌓여 있습니다.

 

 왼쪽으로는 아까 올라갔던 북장대로 가고 오른쪽으로는 천경대로 갈 수 있는 성벽의 동쪽끝 부분입니다.
앞으로 주욱 가면 원당마을로 갑니다
그런 기록은 없지만 위치상으로는 이자리가 동문자리가 되겠지요.

 

성벽위 도로를 걸어 천경대쪽으로 갑니다.

 

 

 

고덕산 정상이 이 방향으로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성밖으로 나가서 성을 오른쪽으로 하여 따라 돕니다. 

 

 

 

 

 

 

천경대로 가건 고덕산으로 가건...

 이길 뿐이 길이 없는데 출입금지라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요?

 

웃긴다 그러면서 노란줄을 넘어오니 시나브로 길 표지판이 반깁니다.

 

고덕산 가는 길입니다.

 

고덕산을 가면 좋겠는데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쉬움 남겨두고 천경대방향으로 갑니다.

 

이 부근이 아마 동포루대일겁니다만 그냥 지나 갑니다.

 

 

조망이 없는 숲길이 제법 깁니다.

 

얼마전 까지 군인들 초소였던 듯 합니다. 

 

 

동암문지가 이부근에 있었는데...

 

 

 

오다보니 동암문지를 인식도 못하고 그냥 지나왔습니다.

그렇게 천경대에 와서 시가지를 봅니다. 

 

위치도를 보니 남암문지도 모르고 지나왔네요.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현장부근 길에는 표식이 없고 지나고 나서야 그림으로 알려주나요?
이게 공무원들의 서비스방식입니다.


전주시가지를 보며 전 시민들 들으라고 툴툴거립니다. 

 

고덕산을 마지막으로 돌아보고..

 

성벽을 따라 삼경사로 내려갑니다.

 

 

 

 

 

 

 

 

 

 

 

 

 

 

 

 

 

성벽을 다 내려와서 뒤돌아봅니다.

 

현위치 확인

 

산성천의 시작점입니다. 

 

약수터로 갑니다.

 

물한잔 마시고....

 

묵로 이용우선생묘로 갑니다.

 

어이구 아까 천경루에서 묵로 선생 묘로 바로 내려올 것을...
그곳에선 그 생각을 못하고 성벽만을 생각하다가...
여기와서 가려고 하니 완전히 오늘 발걸음은 지그자그입니다.

 

10여분 길을 따라오다 공동묘지에서 산쪽으로 몸을 틀면 묵로선생이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강암 송성용선생이 쓴 묘비석 뒷면에는

1952년에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신 선생의 비석을 만들기 위해

당시 일대의 문화인들이 동참했다는 사실이 조병희선생의 글로 쓰여져 있습니다.

 

서울출생으로 1.4후퇴때 전주로 피난왔다가 교동에서 사망하신 이용우선생은

당시 한국화의 대표적 화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1911년에 9세의 나이로 서화미술회 1기생으로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으로부터 전통화법을 배웠으며,

1918년 민족사회의 서화가들이 근대적인 의식의 첫 미술가 단체로서 서화협회를 창립하자

16세의 최연소로 정회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묵로선생은 관념적인 중국화풍에서 벋어나고자

한국산수화에 일찌기 볼 수 없는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선생의 그림 한장 보시지요.

 

공동묘지 어느 빈터에 독야청청하는 소나무 한그루 보고 

 

숲길로 되돌아왔습니다.

 

절집 후원을 지나 삼경사로 갑니다.

  

양하를 전라도에서도 자주 만납니다.

 

 

 

 

 

 

  

 

제단의 용쟁호투가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돌무더기이구나 하고 지나갑니다.

 

 

산성천 물줄기를따라 내려갑니다.

 

  

산성마을

 

행운상회

행운이라는 말...참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말입니다.
행운이라는 글자를 본 그자체가 행운인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져 옵니다.

 

빌라 

 

또 담위로 사진기를 들어올리고

그것 만으로 않되니 까치발까지...

에이 참 나..웃음만 나오고...

 

골목으로 들어가 백학야학으로 갑니다.

 

1983년부터 배움의 등불을 밝혀온 곳입니다만...
지금은 야학은 없다고 합니다.

 배움의 기회를 놓쳐 일상 생활에 불편을 겪고 있는 성인들을 위한 문해교육을 하긴 합니다만

행정기관 계획에 따른 비정기적인 행사라고 합니다.
시대가 달라진다고 공부할 사람, 공부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방향성을 찾기가 무척 어려운것 같습니다.

 

야학앞을 지나 산길을 올라갑니다.

 

대승사 방향으로 가다 억경대에서 내려오는 4거리를 만나면

좁은목 약수터방향으로 방향을 틀려고 합니다.

 

 

도로표식을 만났습니다만 내가 온 길은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삼거리 표시입니다. 

 내가 온길을 바로 가면 대승사
오른쪽으로 가면 억경대
왼쪽으로 가면 좁은목 약수터입니다.

 

좁은목 약수터로 갑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라는 표지 

 

견훤은 900년 정개正開라는 연호와 함께 후백제를 세우고 완산주(전주)에 첫 도읍지를 정했습니다.

하지만 후백제는 936년 고려 왕건의 공격으로 받아 멸망하여 그 역사가 빛을 잃었습니다.

 견훤성이라고도 하는 남고산을 다 내려와서 견훤을 다시 생각합니다.

 

 

여기도 양하

 

좁은목 약수터표식을 따라갑니다.

 

 

 

탱자울타리

 

 

 

 

좁은 목입니다. 

그 길목 약수에서 목을 축입니다.

 

남고산 등성이 한 가닥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와 승암산僧岩山 기슭과 맞대 있는 곳으로

나뭇짐을 지고 오가는 사람이 간신히 비껴 갈 정도로 좁은 길목이어 좁은 목이라고 합니다. 

큰길을 내어 이제는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고 안내표석에 쓰여있지도 않으나

목조의 소년 시절 호운석虎隕石의 이야기가 전하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남하한 길목이자,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서울로 압송된 길목이기도 합니다. 

 

승암교

 

예전 승암교 

 

옛 승암교를 넘어갑니다. 

 절에 가는 아낙과 성소가는 할머니가 함께 넘어가던 다리입니다.

 

그 오래전에는 중바우절 미륵이 영험하다고 해 아이를 얻고 싶은 전주의 아낙네들은

버선을 벗고 치마를 들치고서 건너가던 자리에 놓인 다리입니다.
 다리가 놓인 후 치명자산성지를 찾는 할머니들이 함께 넘었습니다

.

한벽루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을 보니 문득 최명희의 ‘혼불’ 중에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찾아 옮겨 적습니다.


"전주 부성 동쪽머리 만마관 골짜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전주천 물살은 좁은목을 지나,

강모가 내내 하숙하고 있던 청수정의 한벽당에 부딪치며,

각시바우에서 한바탕 물굽이를 이루다가

남천교, 미전교, 서천교, 염전교를 차례차례 더터서 흘러내리며 사마교를 지난다.

그렇게 모래밭을 누비고 흘러오던 물결이,

긴 띠를 풀어 이곳 다가봉의 암벽 아래 오면 급기야 천만으로 몸을 부수며 물안개를 자욱하게 일으킨다."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낚시를 주제로 한 영화의 포스터를 떠오르게 하는 한사람

 

승암교에서 한벽당까지 구간에 멸종위기종 1급인 퉁사리와 1급수 지표종인 수달과 쉬리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쉬리를 잡는 것일까?

 

오목대 숨길 돌아가는 길 

 

전주자연생태박물관 앞입니다.

그 부근 꽃사진 몇장 찍습니다.

 

 

   

 

  

   

  

   

 

흘러오는 전주천

 

안내판을 봅니다.

 

전주천은 임실군 관촌면과 신덕면의 경계를 이루는 슬치 아랫녘(230m),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 부근 박이뫼산(해발 315.8m 삼각점 미표시지역)자락의 슬치(瑟峙)리 동편계곡에서 발원합니다. 


 폭 약 50cm, 깊이 20cm도 안되는 작은 물웅덩이에서 시작하며

슬치마을 뒤편을 돌아 점차 천의 폭과 함께 계곡의 폭이 넓어지면서 산정마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천의 모습을 갖춥니다.  


 마을과 마을을 지나 북서쪽으로 흘러가며 남관의 동쪽을 지나 신리에서 우측의 지류인 대흥천과 만나고,

고덕산 자락에서 발원하는 객사천, 원당천이 왼쪽에서 들어와 합하게 됩니다.


 한벽당 아래 바위에 부딪쳐 서쪽으로 휘돌아 남천(南川)이 되고, 왼쪽에서 들어온 산성천과 합한 뒤

싸전다리에서 공수내와 합류해 완산교, 매곡교를 지나 서천(西川)이 됩니다.

 

전주의 도심을 지나쳐 백제교상류에서 건산천을 만나고,

추천대 부근에서 모악산 배재에서 발원한 삼천(三川)과 합류해 추천(湫川)이 되어 만경강으로 흘러

서해로 흘러들어갑니다.

 

환벽굴앞을 지나고

 

 

 

 

 

한벽당 옆을 지납니다.

  

 

 

전주천이 흘러가는 남천교를 봅니다.

 

오모가리탕집이 모여있는 곳 

 오모가리탕을 표준말로 이야기하면 뚝배기에 담긴 민물생선모듬찌개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한벽당 오모가리탕은 민물고기와 채소, 된장을 적당히 섞은 구수하고 얼큰한 맛이 일품입니다.

 

전주천 동로 둑방길

 

전주천 표석을 보고 

 

천변으로 내려갑니다.

천변을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