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척마을에서 밤재로 가는 구 19번 국도를 따라 가는데
둘레길 표시가 산속 오르막으로 꺽입니다.
편백나무 숲길로 인도하는 방향입니다.
약간의 헐떡거림 끝에 만난 정자.
잠시 비를 피하며 휴식을 취하고...
침엽수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의 피톤치드와 페르펜을 내뿜는다는
편백숲 한가운데를 지나는 둘레길을 걷습니다.
구례군에서 조성한 이 숲에는
수령 30년을 헤아리는 수만 그루의 편백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피톤치드와 페르펜은 나무가 병충해나 곰팡이들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뿜어대는 방향성 물질로
수목 자신도 보호할 뿐 아니라
사람의 건강에도 많이 유익한 물질입니다.
좋은 사우나에는 꼭 갖춰져 있다는 히노끼욕조라는 것이 일본편백나무로 만든 것이고
국내에서 자라는 편백나무는 히노끼보다 항균, 항산화작용이 더 좋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밝은 날에나 열심히 내뿜지
비가 오거나 해가 밝지 않을 때는 뿜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눈을 통한 마음과 정신의 힐링.
그 자체만으로 만족해합니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니 맑은 물이 흐르는 시내를 따라 올라갑니다.
계곡 흐르는 물은 신체적·정서적 이완 효과가 있는 음이온을 방출시킵니다.
음이온은 뇌에서 나오는 알파파를 증가시켜 심리를 안정시킨다고 하지요.
연리지로 자라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부가 해로하다 함께 떠난신듯 합니다.
대나무 숲
심리안정 3종 셋트길입니다.
대나무 숲을 지나 예전 축사와 인가가 있던 곳으로 나왔습니다.
지금 이 길이 예전에는 밤재를 넘어가는 19번국도 이었습니다.
지금은 터널이 뚫리고 국도가 새로 깔려 쓸모없이 되었던 길을....
비 내리는 오늘...
배낭을 괴나리봇짐삼아 짊어지고....
신작로를 다시 걷습니다.
괴나리봇짐과 신작로
문득 떠오른 김소희 명창의 노래로 들었던 상주 아리랑..
어렴풋이 흥얼거린 가사를 찾아 올립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버지 어머니 어서 와요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 아리 쓰리 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문전의 옥토는 어찌되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인고!
아리 아리 쓰리 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총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아리 아리 쓰리 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말 꽤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꽤나 허는 놈 공동산 간다.
아리 아리 쓰리 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깨나 낳을 년은 갈보질하고 목도깨나 메는 놈은 부역을 간다.
이씨의 사촌은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무나.
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거장 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일제 강점기 고향을 떠나
백두산을 넘어 북간도를 거치고 머나먼 중앙아시아 땅에 정착한
우리 조상들의 애환과 슬픈 정서가 가사와 음악 속에 녹아있습니다.
시간 나시면 인터넷 검색해서 들어보시면 좋을 듯 하네요.
이정표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합니다.
둘레길표시가 오른쪽으로 되어 계속 가던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뒤 산악회 리본이 메어져 있는 오솔길이 밤재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여기서 한 30분 걸릴까?
이정표가 가르키는데로 가면 8~90분 걸릴 텐데...
그렇지만 나 혼자 가는 길도 아니고 뒤로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는데...
그리고 산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길 자체를 즐기러 온 것이니 가라는 방향으로 가자!
신작로를 걷습니다.
여기는 숙성치로 바로 가는 길...
못본척하고 고고
이 길을 걸어가면 저 건너편에서 노고단이 응원해 주는데..
오늘은 노고단은 않보이고...
빗속에서 점점 더 심해져가는 안개가
Dorothy Moore의 노래 Misty Blue를 흥얼거리게 합니다.
Oh, it's been such a long, long time,
Looks like I get you off my mind,
but I can't, Just the thought of you,
Turns my whole world, misty blue....
그 다음은... 몰라요.
앞부분 쉬운 영어 가사만 생각나네요..
이 신작로는 참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네요.
초입에서는 아리랑을 부르고 밤재에 가까워지니까 팝송을 부르게 하네.
안개의 영향인가???
짙은 안개가 자주 끼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심리적 압박이 심하다던데...
밤재정자 쉼터입니다.
이 파고라속에서 잠시 쉬려 했는데
어떤 사람이 천막을 그 안에 쳐놨습니다.
이해는 가지만 매너가 아니지요.
쉬긴 쉬어야 하는데...어쩌지...
하지만 이 빗속에 비 피할 곳이 없으니
간단히 화장만 고치고 계속 가야할 듯 합니다.
비 내리는 산길을 걸을 때 몸의 열이 떨어지면 않됩니다.
비를 피할 곳이 있더라도 계속 걸어야 하면 잠시 숨만 고르고 가야 하고,
지금처럼 아예 빗방울 막을 곳이 없으면 천천히라도 계속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앞장서서 가면서 이 고민을 하지...
고마워 할 사람도 없을 텐데...
그렇구나! 아까 현천마을에서 앞쪽이 잠시 길을 착각하던 그때
뒤에 있다 앞장서면서 그때부터 비가 내리니 마땅히 쉴 곳이 없어 쭈욱 앞으로 왔구나...
편백나무 쉼터에서 뒷사람들 도착하는 것 보다가
몸이 식어서 또 앞에서 출발했구나...
어떻게 하지? 기다리다 뒤에 갈까?
쉴겸 기다릴겸 전망대로 가는 길 앞에서
이곳 밤재에서 견두산 둔산치 천마산 깃대봉 으로 쭈욱 이어져
구례읍에 이르는 견두산 등산로 그림을 봅니다.
구례군에서 개설한 이 등산로는 아주 좋은 등산로입니다.
등산로 왼쪽은 섬진강이 따라 흐르고
오른쪽은 구례평야와 더불어 지리산의 주능선인 노고단과 반야봉 등이 아주 유장하게 흐릅니다.
총길이가 30km가 채 않된다고 쓰여있지만
정상걸음으로 10시간 정도 걸리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 마을과 연결되어 있어
어디서건 더 가기 싫으면 내려올 수 있으니 언제 한번 다녀오시지요.
이번엔 구례군 관광지도를 조목조목 뜯어봅니다.
79년도 인가? 노고단에 길이 없던 시절..
어느 겨울날
지금도 그 자리라고 생각되는 산동면사무소 옆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는지
버스가 없어서 도락구를 탔는지 하여간 무언가를 타고
천은사를 갑니다.
그곳에서 노고단을 가는데
펑펑 쌓이는 눈이 등산로를 덮어 길을 헤매입니다.
어떻게 하든 어두워지기 전에는 노고단대피소 털보를 만나야 한다고
열심히 열심히 빙빙 돌며 올랐던 날.
그때 걸렸던 오른쪽 새끼손가락 동상이
아주 추운 날 간간히 찌릿찌릿해지면서
지금까지 그 기억을 잊지 못하게 합니다.
전망대 올라가는 목책계단 앞에서... 올라갔다 올까?
그러다 뒷사람들 따라오면?
오지 말고 가던 길 가라고 하고 올라가는 것도 그렇다 그지?
생명평화경
읽고.. 찍었는데 렌즈에 빗물
못 읽어본 사람은 할 수 없지요.
그 옆으로 2012년 5월 12일
지리산 둘레길 전체개통을 축하하며 산림청장이 한 말씀 적어놨습니다.
좀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처음에는 산림청주관으로 시작 했다가
중반이후에는 지자체에 넘겨서 지자체노력으로 마무리 지었지요.
지금 우리가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 구간을 걷고 있다고 하는데
길이 이어지는 마지막 구간은 맞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조성된 둘레길은 당재~목아재 구간입니다.
그런데 당재~목아재구간은 하동읍~서당구간과 함께 사이드 구간이라 하여
지리산 둘레길 274km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2008년 남원시 산내면에서 경남 함양군으로 이어지는 구간이 개설된 지 4년 만에
지리산 한 바퀴를 도는 구간을 모두 연결했고
그 파생구간인 당재~목아재구간도 조성되어
금년 5월 25일에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 경계인 이곳 밤재에서
지리산 둘레길 통합개통식을 개최했답니다.
그때의 설치물들입니다.
둘레길 표시판
숙성치방향을 가리키는 데...
그리 가면 않됩니다.
최초 남원시에서는 이곳 밤재에서 숙성치를 경유 그 아래 용궁마을로 둘레길을 개설하려 했습니다만
숙성치와 용궁마을사이의 임야가 개인에게 넘어가서 사람의 출입을 막는 답니다.
그래서 옛 임도를 이용 19번 국도변 터널 하행선변 지리산 유스호스텔로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코스로 둘레길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도로 안내판은 숙성치방향으로 손을 뻗고 있습니다.
그쪽으로 걸어가시는 선생님을 소리 질러 부릅니다.
사실 저도 그길로 가고 싶습니다.
숙성치를 넘어 만복대-고리봉-노고단을 걸어가고 싶습니다.
숙성치
별이 잠드는...아니면 별과 함께 잠드는 산마루
참으로 운치 있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름만큼 슬픈 일도 많았지요.
이 오래된 고갯길은 정유재란 때 의병들이 왜군에 맞서 격렬하게 싸웠던 곳입니다.
사체가 산이 되고 피가 내가 되어 흐르던 곳입니다.
뒷사람들도 웬만큼 온 것 같고
몸도 많이 식어서 더 이상 이대로 있으면 추워질 것 같아
오던데로 앞에서 움직이려 합니다.
표시판 뒤 풀밭을 훌쩍 건너면 임도가 이어집니다.
산동을 떠나면서 산동애가를 부릅니다.
김부해작곡으로 지화자가 61년도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잘 있거라 산동아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까마귀 우는 곳을 멍든 다리 절며 절며
다린 머리 쓸어안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산 골짝에서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살기 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은데
산수유 열매 따서 부모 효성 다 못하고
열아홉 살 꽃봉오리 피기도 전에
까마귀 우는 곳을 나는야 간다.
꽃이 지면 다시 피고 세월 가면
봄은 오건만 이내 몸 인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 거나
노고산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아! 너만은 영원히 울어다오
잘 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어보지 못한 채로
회오리 찬바람에 엄마 아빠 묶여가는
발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화엄사 종소리에 영원토록 울어다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주인공 백부전은
산동면 상관 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열아홉 살 되던 해
여순사건 때 국군에 의해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부전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었고,
호적상의 이름은 백순례(白順禮)였다고 합니다.
2001년 한겨레신문기사인지 어딘지 에서 발췌했던 기사를 얼추 기록해봅니다.
"1948년 여순사건 당시 구례군 산동면을 비롯하여
황전·토지면 일대는 좌익 군인들의 무대였다.
여수에서 반기를 든 좌익 군인들이 이곳까지 이르렀기 때문.
특히 산동면은 군경과 좌익이 대치하며 피를 흘렸던 비극의 현장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온 나라가 좌, 우로 갈렸었다.
구례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여순사건 중 산동에선 이른 바 '좌익 명단'이 큰 회오리를 일으켰다.
어떤 식으로든 좌익단체에 그 이름이 오른 사람들은 혐의를 벗어나기도,
결백을 주장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뿐 아니라 '밤손님들'(좌익군인)에게 협조했다는 구실로도
죽임을 당한 것은 부지기수였다.
백순례 의 조카의 말에 의하면.
그가 할머니로부터 들었다는 사연은 이렇다.
"당시 미혼이었던 아버지가 군인에게 끌려갈 처지였다고 합니다.
끌려가면 바로 죽음이었으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고모가 나서서 '제가 갈 테니 오빠만이라도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집안의 대를 잇는 대신 자신을 희생한 것이죠.
고모가 아니었다면 제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사실이라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대살에 희생된 것이지요.
백순례가 끌려가면 스스로 지어서 불렀다는 이 산동애가.
산동의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따며 내포된 의미도 모르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산수유열매를 따는 처녀도 없으니 그냥 그렇게 슬어져 갈 노래입니다.
아니 슬어져 가야하는 노래입니다.
바로 뒤로 따라오시는 교장선생님
이 날씨에도 함박 웃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갈잎의 융단이 깔린 이 길도 참으로 운치 있습니다.
앞에 걸어가니 이런 게 좋군요.
행렬중간에 있으면 앞으로 찍으면 앞사람 뒤꽁무니만 찍게 되지요.
그래서 주변만을 찍거나
아주 뚝 떨어져서 한 장 찍고 뛰어오고 한 장 찍고 뛰어오고 해야 하는데
앞에서는 그냥 걸어가며 누르니 그림이 됩니다.
석분이 깔린 길이 나옵니다.
둘레길조성하며 신경 썼나 봅니다.
어쩌면 그냥 황토를 밟게 하는 게 더 좋을 듯 싶기도 합니다.
볼라벤이었던가요.
지난 태풍으로 길이 많이 폐였습니다.
주변 흙이 마사토이다보니 물 빠짐도 좋고 해서 테니스장이나 건설현장에는 비싼 값으로 팔려나가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응집력이 없어서 메스로 있을 때는 쓸려나갑니다.
참 요새 테니스장은 마사토가 없어서 다 우레탄코트로 바꿉니다만...
하여간 조심해 걸어야지요.
비가 그쳤습니다.
남원시가지가 뿌옇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계속 갈잎의 향연을 즐기며 걷습니다.
뒷사람들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고개를 둘레둘레 돌리며 천천히 걷는데
뒤에서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눈보라 몰아치는 저 산하에
떨리는 비명소리는 누구의 원한이랴
죽음의 저 산
내 사랑아
피 끓는 정열을 묻고
못다 부른 참 세상은 누구의 원한이랴
침묵의 저 산
지리산
일어서는 저 산
지리산
지리산
반란의 고향 푸르른 저 능선 저 깊은 골에
찢겨진 세월의 자욱 무엇을 주저하랴
부활의 저 산
솟구치는 대지의 거친 숨소리
눈부신 조국의 하늘 무엇을 주저하랴
투쟁의 저 산
지리산 다가오는 저 산
지리산
지리산 반란의 고향
지리산 살아오는 저 산
지리산
지리산 반란의 고향
신정일선생님 아니 선생이라고말고 도반이라고 부르라고 했지요..
신정일도반이 안치환의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를 소리 높여 부르며 오십니다.
신정일도반은 안치환과의 따뜻한 인연을 상당히 고마워하지요.
내가 여기서 안치환의 지리산 노래를 부른다면 아마...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부르지 않을까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려면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시라
연화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 하면 자살을 꿈꾸는 임아
반성하러 오시라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그런데 이노래는 내노래가 아닙니다.
의식의 공유 정도가 교집합 또는 부분집합이라
듣기는 하지만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늘은 이 밤재를 넘으며 꽤 많은 노래를 떠올리고, 부르고, 듣습니다.
참 좋은 길이지요.
오늘 제 모습을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리산 봉우리들의 환송을 받으며 길을 걸으니 마음이 아주 좋네요.
신정일 도반 대답하시길
나중에는 이 길을 거꾸로 걸으며 지리산 영봉들의 환영을 받으시겠답니다.
나는 아직 메달려 있는 단풍을 찍고
신정일도반은 떨어져 낙옆이 된 것을 찍습니다.
금식기도원 지나 시멘트길입니다.
여기 굴다리를 지나면 버스가 기다릴 겁니다.
버스가 서있는 뒤편 예전 주유소가 있던 곳에 무슨 공사를 하나 봅니다.
공사판을 지키는 것인지 돌하르방 한 쌍이 서있습니다.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다. 그지!!
12시 22분.
그린비선생이 너무 일찍 왔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오전 산행을 마칩니다.
'如是我見 寫而不作 > 우리강 우리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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