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관터
영천관터에 찾기가 시작된 것은 2002년에 당시 제주문화예술재단 학예연구사 김일우님이 쓴 글에서
"영천관은 서귀포지역에서 제일먼저 세워진 관아이고
그 위치는 상효교 서쪽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0미터 정도 내려간 곳에 영천 오름 주변 서쪽언덕에 자리 잡았고
그 건너편이 영천사가 있던 곳이다. 혹은 서로 위치가 반대다.
하여간 영천관터가 거기 있었던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영천관터의 문화재 지정이 시급하다"라고
2002년 5월 서귀포문화원 세미나에서 발표하고 동년 7월 삶과 문화 제3호 게재하고 난 다음부터입니다.
그런데 별 반응이 없었나 봅니다.
같은 세미나에서 발표된 무오법정사 정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각계에서 호응하여
2003년 11월인가에 그 발상지를 제주도 기념물로 선정하고 공허한 건물이지만 관리사를 짓고
그 위에 의열사를 짓고 해나가는데
영천관터는 맞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탐라지초본에 관나암觀儺巖이라는 마애가 있는 곳이라고 나온다. 말도 않된다..
예기소도 여기다. 저기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등 등..
중종 20년에 김흥조가 올린 상소에 정의현청을 영천관으로 옮기자고 나옵니다 ...
조정에서 제주목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지만...
(그 당시 516도로처럼 남북횡단도로가 없어서 한라산을 빙둘러다녔으니까요...여기서도 516도로의 중요성이 나옵니다)
그 상소에 보면
“주변상황으로 영천관 동쪽에는 깊고 험한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고 북남으로는 절벽이 있으며
높은 산들이 동남쪽을 막아주어 적들이 쉽게 넘겨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민과 토지들이 동남쪽에 있어 농사짓기도 편하다”라고 나옵니다.
다른 말은 모르겠고 북남으로 절벽이 있어 적들이 쉽게 넘겨보지 못한다는 말은 절벽 밑에 있다는 말의 정반대입니다.
절벽위에 있어야 적이 접근하기 어렵지 절벽 밑에 있으면 돌만 굴려도 끝이 납니다.
우리가 온 곳은 절벽밑 개울가입니다.
이건 집도 못짔고 밭으로도 못써요. 큰물 한번 터지면 끝장입니다.
관나암이라는 마애도 그래요..
觀儺岩... 역귀쫓을나자를 썼으니까 역귀 쫒는 것을 보는 바위 ...무슨소리에요??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歲暮에 疫鬼를 쫓는 행위를 하는 것을 몰구 역귀쫓을나를 써서 驅儺라고 하긴 합니다만 절에서도 이 儺자는 않써요.
제가 보기에는 나만큼 지식이 어중간한 사람이 계곡에 이는 큰 여울을 본다라는 뜻에서 여울 탄을 써서 觀灘岩이라고 쓴다는 게
물수변을 사람인변으로 잘못알아 觀儺岩이 된 것 같네요
이건 일제 시대정도에 나만큼 어설픈 사람이 판 글자인것 같아요(끌이나 정으로 새긴게 아니고 판겁니다...)
그럼 어디냐고요 나도 모르죠.
계곡을 따라 예기소라고 추정하는자리로 가보았습니다.
꽤 머네요....한 400미터...
요건 자료사진 (예기소 상류)
영천관터는
그곳일는지....이 부근일른지...
그사람이나 나나 피차 뜬금없는 사람이 말하는 데로 지금 교량 공사하는 부근 좌우(지금은 양쪽 다 농장)일는지도 모르죠.
그 사람이 말하는 근거를 옮겨보면...
" 한라산 계곡들을 보면 알겠지만 제주에 계곡과 나란히 길이 있는 경우가 잘 없다.
그리고 지금 영천관터라고 주장하는 곳으로 내려 가는 길은 상효교 놓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었다.
지금 다리공사하는 그 지점(그 당시는 다리공사 시작 않했을 때임) 까지는 예전부터 우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라고 하더라구요.
영천오름에서 질러내려온다고 내려와 대략 지금교량공사지점을 계곡따라 가다가 커피한잔에 땀식히며 한 이야기들일 뿐입니다.
참고로 서귀포신문 서귀포비경탐방24회에 영천관터 사진은 이렇습니다.
걸어나오면서 한라산을 본 사진입니다
한라산신도 묻지마라시며 구름으로 얼굴을 기리셨네요.
그런 쓸데없는 것 묻지말고 아까 선돌오름에서 느꼈던 것처럼 보이고 느끼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어떻겠니?하고 되려 물으시네요.
감사합니다.
Tchaikovsky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35
Pierre Amoyal, violin
London Philharmonia Orchestra
Charles Dutoit, co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