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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이 짓고 성봉 한호(1543~1605)가 쓴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褸上樑文). 1605년. 판본. 28.6×19.8cm |
요즘 문화의 복고현상이 뚜렷하다. 그 중 하나는 고대사까지 영역을 넓히는 사극이다. 역사를 통해 정체성을 찾겠다는 것은 좋지만 사극의 인문학적 상상력 이전에 최소한의 사실 고증도 필수다. 글씨만 보면 시대상황과 별개로 노는데, 조선은 물론 고대사 무대에 요즈음 유행하는 글씨가 내걸리는 것은 극의 상상력이나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송도삼절 ‘황진이’가 영화와 드라마로 재해석되면서 주연 경쟁이 대단하다. 그녀의 팜므파탈을 앞세운 노출 수위가 차별성 확보의 관건처럼 비치지만 조선 풍류의 대명사 ‘황진이’이야말로 시·서·화가 메인으로 추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유는 여타 사극에서 글씨는 배경이지만 조선풍류의 주인공이 문인·묵객·가객들이고, 이 중 최고수만 상대했던 그녀 또한 이 분야 최고였기 때문이다. 서화담의 농막, 지족선사의 암자, 벽계수의 만월대, 소세양과의 동방 풍류 장면의 글씨가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그러면 동시대 송도 선비들의 놀음놀이는 어떤 것일까.
# 두 말 먹의 붓을 휘두르는 풍류
1604년 10월, 송도 인근 수안군수가 된 허균이 서울에서 못 다한 회포를 풀고자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1605)에게 초청편지를 보냈다. 이때는 마침 말년의 석봉이 흡곡현령을 그만두고 송도 우봉촌사에서 쉴 때다. 글의 요지는 ‘고을관아에서 명주 베 펼쳐 놓고 두어 말(斗)쯤 먹을 갈아서 흥이 나는 대로 붓을 휘두르자’는 것이다. 해를 넘겨도 석봉이 오지 않자 허균은 1605년 4월 편지에서 수수술, 잉어회, 죽순나물, 자라탕 등을 장만할 것을 약속하고 수레까지 보내 만남이 성사된다. 둘은 충천각(沖天閣)에서 시를 읊으며 술과 필묵으로 두 달간 왕희지 부럽지 않은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여기서 석봉은 금니(金泥) ‘반야심경’과 허균의 누이 난설헌이 여덟 살 때 신선세계를 읊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쓴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석봉의 절필(絶筆)이 되었지만 불교와 도교를 넘나드는 허균과의 풍류 단면을 통해 사자관(寫字官)으로서 판박이 글씨만 쓴 석봉에 대한 기억을 수정하게 된다. 석봉은 사실 과묵한 성격에다 글씨에 대한 상찬과 비난에 초연하였고, 이백의 장쾌한 시풍과 장욱의 호방한 초서의 풍격을 심하게 좋아했다고 전한다.
# 재주를 천히 보는 이 나라 습속
그러나 우리에게 비쳐진 석봉은 떡장수 어머니와의 일화, 천자문, 사자관, 선조의 지극한 사랑으로 인해 교과서적으로만 인식되어온 감이 없지 않다. 더욱이 정법(正法)이 모든 글씨의 토대임에도 유독 석봉의 성취만은 사자관이라는 이유로 문인 사대부들의 부정적 평가의 빌미가 된 것은 억울한 감마저 든다. 이 중 석봉에 대한 선조의 사랑에서는 사헌부의 시기와 질투마저 간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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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가 천자문을 초서로 쓴 ‘초천자’(草千字). 1597년. 판본. 24.3×19.5cm. 개인 소장. |
허균의 ‘성소부부고’에 따르면 석봉은 과중한 필사업무에서 벗어나 글씨예술에만 잠심하도록 선조의 특명으로 가평군수 흡곡현령으로 제수된다. 그러나 공신도감·교서·녹권·옥책 작성의 태만과 오서(誤書)사건으로 인해 수차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그러나 선조 임금은 ‘석봉이 그럴 리 없다’며 파직을 허락지 않고 추고(推考)만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뒷날 이광사는 석봉을 이용·김구·양사언과 함께 조선 전기 4대가로 칭송했지만,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지금도 한석봉체가 항간에 유행하나 사대부 중에는 그 체를 학습하는 이가 적다. 비록 조그마한 기예이지만 성명(盛名)은 민멸될 수 없는 것이며, 세대가 멀지도 않은데 까마득하게 어쩐 줄을 모르고 있으니, 역시 이 나라 습속이 재주를 천히 보는 한 가지 증거이기도 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사자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 석봉에 대한 온전한 평가의 결과는 아니다.
# 목마른 말이 냇물로 달려가는 형세
이런 판단은 정유길·이이·이정구 등의 다섯 차례 주청과 원접 사행에 동참하면서 대명외교문서를 도맡아 썼던 석봉 글씨가 중국에서 더욱 유명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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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가 쓴 당나라 고적(高適)의 시 ‘제야작’(除夜作)의 일부. ‘여관의 차가운 등불 아래 홀로 잠 못 이루니/ 나그네 마음 무슨 일인지 더욱 처연해진다’ 라는 뜻이다. |
1601년(선조 34년) 3월17일, 선조가 경연 자리에서 “한호의 글씨를 왕세정이 보았는가? 그의 평가가 어떻던가?”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목마른 천리마가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치는 형세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중국 사람들이 천하제일 문장으로 치는 왕세정의 평가라 더욱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또 주지번이 ‘석봉 글씨는 마땅히 왕희지·안진경과 우열을 다툴 만하다’고 격찬을 한 것을 비롯해 이여송·마귀·등계달·양찬 등이 석봉의 필적을 앞다투어 구해 가서 중국 온 천하에 두루 퍼졌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등계달은 ‘석봉선생에게 보내는 시’에서 ‘한강의 많은 연꽃 중 그대가 그 꽃부리를 머금었다’면서 ‘용과 뱀이 밀치듯 한 붓질/사방 벽을 울리는 비바람소리’라고 격찬하고 있다.
# 이백에 빠진 시인
그러나 사자관 이상의 석봉 진면목은 당대 최고 문장가만을 상대한 그의 교유관계에서 짐작된다. 박순·고경명·최립·허균·차천로·이정귀·이안눌 등이 그들이다. 세상에서는 특히 최립의 문장, 차천로의 시, 석봉의 글씨를 송도삼절이라 하지만 석봉은 시작(詩作)도 뛰어났다. 그가 지은 ‘구룡연’ 일부를 보면 ‘봄날의 이슬 기운 연지(硯池) 위를 적시고/ 햇살과 안개 빛이 붓끝을 감아 돈다/황정경(黃庭經) 쓰는 사이 (신룡의) 도움 감지되니/산음 우객을 언젠가는 만나리’라고 하면서 석봉 글씨의 궁극적 이상을 산음 우객 왕희지에 두고 있다. 이에 대해 최립은 “사람들은 석봉의 글씨는 알지만 그의 시는 모른다. 석봉은 평생 이백 시를 애송하여 말하는 사이에도 술술 흘러나와 사람 심정에 들어맞는다. ‘구룡연’의 특출함은 말할 필요가 없지만 사람들이 글씨마저 흠을 잡는데 하물며 시에 대해서야!”고 말했다. 요컨대 석봉처럼 글씨 하나로 유사 이래 이렇게 출세한 인물도 없었지만, 글씨 때문에 이렇게 견제와 시기, 질투로 평가절하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