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르 시절
Blossoming almond branch in a glass with a book
Path through a field with willows
Farmhouse in a wheatfield near Arles
Seascape at Saintes-Maries
Coal Barges
Ploughed field
...2년 뒤 고흐는 도시생활에 싫증이 나고 육체적으로도 기진맥진하여,
'좀더 밝은 하늘 밑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싶은' 갈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사물을 느끼고 그리는 방식'과 '색채의 완전한 효과'에 열중해 있었고,
결국 1888년 2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다.
그후 12개월 동안(첫번째 전성기)에 그린 그림에서 그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뚜렷한 윤곽과 강렬한 색채의 효과를 통하여 주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 대한 그의 관점은 표현주의적인 동시에 상징주의적이었지만 그가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도 본능적인 것이었다.
그는 어떤 효과나 분위기가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동안 그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격렬하게 일했다.
그가 아를에서 다룬 주제들은 꽃이 핀 과일나무, 마을과 그 주변풍경, 자화상,
우편배달부 룰랭과 그의 가족 및 다른 친구들의 초상화, 집의 안팎,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다.
고흐는 그림에 대한 자신의 접근방식이 독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떤 작업은 혼자 해내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점을 깊이 인식했다.
파리 시절 그는 고갱과 툴루즈 로트레크를 비롯하여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여러 화가들과 함께 독자적인 인상파 집단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아를에 와서 그와 함께 '남부 인상파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바라면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란 집' 1채를 빌려 아름답게 장식했다.
1888년 10월 이곳에 온 고갱과 2개월 동안 함께 일하면서 어느정도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하고 성미도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고갱은 떠났고 그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리고 2주일 뒤에 '노란 집'으로 돌아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과
몇 점의 정물화 및 〈아기를 재우는 여인 La Berceuse〉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몇 주일 뒤, 그는 다시 심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정신병원의 정원 Garden of the Asylum〉〈삼나무 Cypresses 〉
〈올리브 나무 Olive Trees〉〈알피유 가족 Les Alpilles〉의사들의 초상화,
렘브란트·들라크루아·밀레의 그림들을 본뜬 모작 등은 모두 이 시기에 그린 것들이다.
이 시기(1889~90)에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일종의 슬픔이다.
오랫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난 여름에 사용했던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선이 색채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생레미 시절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들은 아를르 시절의 작품보다
훨씬 대담하고 환상적이다.
마침내 고흐는 이 시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었다.
네덜란드에 대한 추억을 그리면서 향수에 젖고 고독에 짓눌려 있던 그는,
동생 테오와 북부지방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 1890년 5월 파리에 도착했다.
나흘 뒤, 호메오파시(질병의 원인이 되는 약품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치료방법)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셰와 함께 지내기 위해,
가셰가 사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갔다.
4년 전 뇌넨을 떠난 이후 한번도 보지 못했던 시골마을로 돌아간 그는
처음에는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옥수수밭, 강이 흐르는 골짜기, 농부들의 오두막, 교회, 읍사무소 같은 주제들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가 정신적으로 위안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화풍도 달라졌다.
북부의 햇빛 속에서, 그는 옅으면서도 산뜻한 색조를 택했다.
붓놀림은 더욱 폭넓어지고 한결 풍부한 표현력을 갖게 되었으며,
자연에 대한 시각은 보다 서정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어쩔 수 없이 동생 테오(그는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낳았음)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 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이 시기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6개월 뒤(1891.1.25) 만성신장염으로 형의 뒤를 따랐다.
그림자료 및 글;오용민의 고흐화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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