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청원(江山淸遠)
강정만조(江亭晩眺)
강진고사(江津孤舍)
건려방매(騫驢訪梅)
고사관폭(高士觀瀑)
고산상매(孤山賞梅)
관폭도(觀瀑圖)
기려심매(騎驢尋梅)
노백도(老栢圖)
노송대설(老松戴雪)
독서여가(讀書餘暇)
동정추월(洞庭秋月)
무송관산(撫松觀山)
문암(問岩)
빙천부신(氷遷負薪)
사문탈사(寺門脫蓑)
산시청람(山市晴嵐)
설평기려(雪坪騎驢)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악후월(小岳候月)
송암복호(松岩伏虎)
수하관폭도(樹下觀瀑圖)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어초문답(漁樵問答)
연사모종(烟寺某鐘)
운송정금(雲松停琴)
인곡유거(仁谷幽居)
임천고암(林川鼓岩)
창명낭박(滄溟浪拍)
척재제시(?齋題詩)
행주일도(?洲一棹)
정선(鄭敾/1676∼1759) |
정선은 본관 광주(光州). 자 원백(元伯). 호 겸재(謙齋)·난곡(蘭谷)으로 숙종 2년(1676)년 1월 3일 아버지 時翊(1638-1689)과 어머니 밀양 박씨(1644-1735)의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정선의 5대조인 應奎는 무과에 급제하여 水軍節制使, 慶源府使를 지냈으며, 고조부인 演은 음서로 同知中樞府事를 거쳐 戶曹判書에, 증조인 昌門은 司僕寺正에, 조부인 綸이 좌승지에 올랐고, 아버지 時翊은 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나 나이 40에 가까워 정선을 낳아 정선의 입신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정선은 사대부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이웃에 살던 고관 金昌集의 도움으로 그림에 대한 재능을 살려 궁중의 繪事를 맡으면서 贈戶曹參判이었던 아버지나 贈左承旨였던 할아버지를 빌어 음서로 종6품인 衛率에 초사되었다. 1733년에 淸河縣監을 지내는데 이때 영남 일대 58곳의 명승고적을 담은 화첩인 嶠南名勝帖이 그려졌을 것이며, 1734년에는 金剛全圖를 그렸다.
1740년에 양천현령으로 부임하여 京外名勝帖을 제작하였고 이때 가장 왕성한 회화활동을 하였다. 1754년(79세)에는 司도寺(궁중의 미곡과 장을 공급하는 기관)의 종4품 僉正이 되었다.
이때 賤技로 이름을 얻어 승급함은 부당하다는 간언을 받기도 하나 영조의 배려로 다음해인 1755년에는 정3품 僉知中樞府事로 81세 되던 1756년에는 종2품인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로 승직되었다. 그리고 1759년(영조 35년) 3월에 84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