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300리를 걷다. 9차-2(완). 조강리 들판에서 보구곶리
11월 23일
조강리 들판입니다.
두시반이 되어서야 점심을 먹고 세시반 다시 조강리 들판에 서있습니다.
7시 50분경 걷기를 시작해서 석탄배수펌프장을 11시에 통과했고
두시가 넘어서 애기봉아래에 도착했습니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철조망만을 따라왔는데
빨리 밥먹으러 가야한다고 대다수의 회원들을 애기봉 전망대에도 올라가지 못하게 하고
버스를 태워 다시 통진으로 나갑니다.
그러고 다시 애기봉 입구까지 차로 와서
애기봉 중대 앞 삼거리 좌측 길을 통해 조강리 들판으로 갑니다.
군사구역이라고 이곳 이전에서는 사진도 못찍게 하고
조강리 포구 유허비쪽으로도 가지 못하게 합니다.
오전은 그렇다 치고
점심먹고서 차량으로 개곡리쪽에서 이 들판으로 접근하면
시간도 훨씬 절약하고 유허비도 갈 수 있고 철조망과 북녁이 보이는 평화누리길에 올 수 있는 것을
왜 시간은 더걸리고 사람들 고생만 시키고 볼것은 못보고 않봐도 될 것만 보여주고
애꿎은 군부대 협조타령을 하나 모르겠습니다.
사전답사를 않했으니 시간계산과 코스선정에 착오가 생긴 것이지요.
그것을 인정하면 될텐데 애꿎은 군부대 협조타령만 하니 그것이 섭섭한 것입니다.
예전 사진으로 조강포 유허비사진 올립니다.
조강포는 고려와 조선시대 조강을 건너기 위한 사람들과 장사꾼들이 모이는 곳이도 했으며
세곡을 실은 조곡선이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가기 위해
물때를 기다리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개성서 내려온 사람들은 개풍군 조강포에서 배를 탄 후 김포 조강포에서 내렸고
통진을 지나 양촌서 배를 탄후 양화진서 하선후 숭례문으로 들어갔습니다.
포구는 무척 번성하여 구한말에는 약 4백여가구의 집이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전 직후 조강을 따라 DMZ가 설치되면서
1953년 11월 조강리 마을주민에게 소개명령을 내리며 조강포는 폐쇄되었습니다.
조강포가 폐쇄되니 당연히 통진도 찬바람부는 거리로 변합니다.
津으로 通한다는 通津지명에서 알수 있듯이 '津'은 김포반도 끝 조강포를 말합니다.
그런데 조강포가 죽으니 한때 도호부가 있던 통진도 따라 죽은 것이지요
본 사람들도 모르고 근무하는 병사도 모르겠지만
애기봉 중대앞 산중턱 삼거리길로 내려오다 바라다 본 오른편에 자리한 초소의 우측이 당산이었습니다.
조강포의 동쪽에 해당하며,
나루를 무사히 건너다니게 해 달라는 기원과 풍농. 풍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던 곳이지요.
이곳은 토정 이지함선생이 족적을 물씬 남긴 곳이기도 합니다.
조강리저수지 입니다.
조강포로 흐르는 물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었고
옛 조강포마을은 모두 밀어 논으로 만들었습니다.
울안니낚시터라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울안니”라는 지명이름은 右乙內里가 울안이->울안니로 바뀌었다고 하는 설도 있고,
아주 아주 옛날 한양의 부자집 삼형제가 기와집을 짓고 큰 울타리를 쳤는데
울타리가 없어진 지금도 울타리 안이라 하여 울안니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설도 있습니다.
편한 쪽으로 생각하시지요.
마을을 지납니다.
낡은 집 문가에 기대계시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공연히 지나는 이의 가슴이 아려옵니다.
왼쪽으로 가면 개곡리를 지나 애기봉입구로 가는 길
직진은 고막리 또는 용강리로 가는 길
옛 정미소
이 나무는 사진을 왜찍었을까?
마을을 나와 조강리 버스정류장입니다.
왼쪽 방향은 고막리. 오른쪽은 용강리입니다.
왼쪽으로 약 2km, 삼십분정도만 천천이 걸으면 고막리 조각공원이 나옵니다만
앞에간 사람들이 용강리 쪽으로 갔습니다.
조강이 끝나는 머무르섬, 유도를 보려면 당연히 보구곶리로 가야하고
보구곶리로 걸어 가려면 이쪽이 빠르겠습니다만
지금 시간이 오후 네시반인데 더이상 가지를 못할 겁니다.
이곳 용강리는 주민들도 신분을 밝혀야만 출입이 가능한 지역이고
출입협조를 했더라도 주간에 해당되는 것이지 일몰이후에 군사구역통과를 협조한 것은 아닐겁니다.
그리고 통과가 되더라도 보수곶리에 도착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일텐데..
이쯤에서 버스가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보수곶리로 바로 가는지 알았습니다만 아닌가 봅니다.
오른쪽으로 “잉글랜드 타운”이라는 간판과 함께 예쁘장한 전원마을이 있습니다.
서낭당고개를 지나면서 문수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숲길을 슬쩍 봅니다.
이 숲길을 이용 문수산 정상을 가고 문수산 북문방향으로 서느재를 지나 동막골로 가거나
서느재를 경유하여 한남정맥의 끝봉 당재에서 보구곶리의 김포시 학생수련원으로 하산할 수도 있습니다.
용강교회예배당앞을 지납니다.
이 예배당은 1980년 6월 설립된 교회입니다.
당시 사과밭이던 현 교회 부지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교회의 잉여 건축 자재들을 재활용하여 목사부부가 맨손으로 건축을 하였습니다.
1987년 준공된 교회와 사택은 건축미와 실용성이 절묘하게 조화된 아름다운 건물입니다.
한때는 마을이 텅텅비어 신자가 세가구뿐이 없었다는 데 이제는 마을이 커졌으니 신자도 늘었을 겁니다.
조금 더가서 왼쪽으로는 김포생명의 숲타운.
또 그 앞으로 예지원이 차례로 나타나며
전원마을의 여유로움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일행들이 주춤해 하기 시작합니다.
시계를 보니 다섯시입니다.
아마도 전방 검문소에서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을 겁니다.
결국 한동안의 멈춤끝에 버스가 왔습니다.
버스에 타고 고막리를 지나고 문수산성앞을 지나
보수곶리 마을버스 정류장앞까지 왔습니다.
어두워지는 강변에는 접근을 못하니 땅거미지는 마을과 논둑만을 바라봅니다.
강화도에 마련된 숙소로 갑니다
이번 기행간 꼭 용강리를 지나고 싶었습니다.
용이 승천한 天賜寶淵 용못과 매화마름자생지를 지나며
기녀 이계월을 생각하고
그녀로 대표되는 옛 강령포의 영화를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구슬픈 구슬프니고개를 지나 보구곶리로 들어서며
조강이 강으로의 생명을 다하는 머무르섬, 유도를 보고
섬의 어딘가에 있다는 동굴속에 산다는 이무기를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찾아오는 어둠으로 인해 모든 기대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허전한 마음에 잠 못이루고 숙소벽에 붙어있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유도를 하염없이 봅니다.
다음날 오후
강화도 마니산 청소년 수련원에서 하루를 보낸 후
강화도 일대를 돌아보고 서울로 돌아가면서 다시 찾은 보구곶리입니다.
유도가 보이는 강가로 나가질 않고
비어있는 들에서 마지막 행사를 합니다..
"한강 1300리를 걷다"라는 현수막이 "한강 1300리를 걸었다"로 바뀌어 있습니다.
날짜는 내일이네요.
전구간 완보하신분들 축하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은 사람들을 보지않고 주변을 군무하는 철새를 쫒아갑니다.
마지막이 좋았어야 하는데 마지막이 마음에 걸려서...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다니는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저 무리져 가는 철새들이 알려줍니다.
한강 1300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