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1300리를 걷다. 6차. 1-1. 제주공항에서 여주 신륵사
8월 23일
제주공항입니다.
물속에 가라앉은 아트란티스.
신전의 기둥사이로 사람도 지나가고 거북이가 다가옵니다.
한장 찍고 첵킹하고 들어갑니다.
이곳 저곳 기웃거리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다 된듯하여 게이트로 다가 갑니다만...
오늘 비행기는 전부 다 약속을 어깁니다.
멍하니 기다리다가
드디어 탑승. 자리에 앉습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립니다.
비행기가 몸통을 들어 하늘로 오르니 비를 뿌리던 구름이 지나갔는지 아래동네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호매립지와 백캐포구가 보이네요
이호바당 원담에서부터 외도, 하귀, 애월까지 차례로 나타납니다.
비둘기호 비행기인가?
정거장을 하나씩 지나듯 아래동네의 모습을 찬찬히 보여줍니다.
구름속을 해치다가 가오리한마리를 보여줍니다.
다시 구름위에 자리잡았습니다.
서울땅으로 내려갑니다.
나는 내리고 너는 떠나고...
그렇게 ...
서울에 도착합니다.
여긴 어디?
양재로 가서 회원들과 합류하고
전주에서 올라온 버스를 기다려 그 차에 타서
밤 열시 반에 도착한
여주 신륵사 템플스테이용 대방입니다.
남자회원들 짐을 푸는 사이, 나도 한구석 자리잡아 짐을 내리고....
부산함을 피해 방을 나섭니다.
조포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남한강 건너 여주읍 연양리를 연결하던 큰 나루로
마포나루, 광나루, 이포나루와 함께 한강 4대 나루터라고 불라우던 곳입니다.
이곳 조포나루는 남한강을 건너는 나룻터역할 자체도 중요했지만
조선시대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운반하던 조운선들의 정박지역할로 인해
부근에 보제원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1960년대까지도 나룻배가 운행되어 많은 사람과 물자가 동행하였다가 1
964년 여주대교가 개통되면서 그 역할을 마감합니다.
조포나루임을 알려주는 비석옆에 세워진 또 하나의 비석은
여주대교개통 1년전인 1963년,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과 학부모 49명이 도선침몰로 익사한 것을 달래는 위령비입니다.
깜깜한 강변길을 따라가며 강건너편을 봅니다.
어디에나 들어선 러브호텔들
남녀함께 팔짱끼고 들어가는 곳이니 누가 누구를 나무랄수 없는 것이고...
세태가 그러련해야지요.
강월헌앞 바위까지 왔습니다.
어둠속에 멍하니 서있다가...
빠꾸!
자러갑니다.
새벽 네시
예불시간에 맞추어 눈을 떴습니다.
극락보전으로 갑니다.
참여는 하지 않고 문밖에서 지켜볼 뿐입니다.
인근 절집에서 예불염송을 하러오신 비구니스님의 뒷모습에 아무 이유없이 코끝이 찡해집니다.
관음전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우리나라 불자들과 가장 가까이 호흡하는 보살은 아마도 관음보살일겝니다.
그래서 3대 관음사찰, 33관음성지 등을 내세우는 것일겁니다.
관음보살은 고통에 허덕이는 중생이 일심으로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즉시 그 음성을 관하고 중생의 근기에 맞는 모습으로 나타내 대자비심을 베푼다는 보살이지요.
부처지만 부처의 자리를 버리고 보살이 되어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
그래서 불러봅니다.
관세음보살
원력은 시방세계 가득찬 자비광명
합장하는 이 정성에 당신 이미 함께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지장전
봉송각
삼성각을 둘러보고
다시 극락보전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문밖에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몸을 돌려 강가로 갑니다.
석탑을 지나고
구룡루를 지나고
강월헌으로 가서
나옹선사를 다비한 자리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삼층석탑
강거너편을 봅니다.
아직 건너편이 보이지 않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돌아갑니다.
어젯밤에 들렀던 조포나루까지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가다가
다시 절집으로 돌아갑니다.
100명 가까운 아침공양줄에 서 있느니
조사전과 부도 그리고 보제존자 석종을 보고오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사실 그것 보다는... 해뜨기전 물안개 가득한 강가에서의 느낌을 놓치기 싫어서 입니다.
조포나루에서 뚝 떨어진 조포나루 정자
여주 신륵사 사적비와 아주 거창한 인류화합공생기원비
인류화합공생기원비는2009년 5월 제막된 비입니다.
신륵사사적비 옆에 나란히 세워진 높이 3m의 이 비에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 준 한국에 대한 감사와 인류화합을 염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고
그에 추가하여 일본이 우리 한국민에게 저질렀던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 간에는 불행한 일이 여러 번 있었고,
특히 근세에 있어서는 일본이 한국민에게 다대한 고통을 끼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반성과 참회의 염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죽어간 자의 위령공양과 민생애호의 심정을 바치면서 밝은 내일을 맹서하는 바입니다.”
일본불교계의 제안에 의해 세워진 이 비에 과거사 참회의 내용을 담은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만
참회한다고 과거의 죄악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데 면죄부만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두기의 석비
앞의 비는 대리석으로 만든 신륵사 중수비
조사전
명부전
원구형과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조사전 뒤 계단을 올라가
석종과 석등 그리고 석종비
소나무 숲길이 운치가 있어 보여 소나무 숲길로 들어갑니다.
아! 밥먹으러 가야지
빠꾸!
조사전으로 내려와
다시 절집을 한바퀴 돌고
강가로 다가갔다가
공양간으로 갑니다.
한끼 가볍게 해결하고...
기행을 출발했는데...
다시 신륵사경내입니다.
친절한 신정일선생께서..
신륵사에서 잤는데 이절집을 한바퀴 돌아야 할것 아닌가베 하여 이절 주지스님께 안내를 부탁하셨답니다.
회원들이 주지스님의 안내로 절집을 도는 동안 나도 그냥 발길 닫는데로 걸어봅니다.
조포로 오고가는 건너편 나루에 서있는 황포돗배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천송리의 아담한 봉미산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아스라이 다가드는 강을 굽어보고 있는 이 절집은
예부터 내려온 절집중 유일하게 강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는 이 절집에는
고려 말 고승이었던 나옹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조선초기 억불정책으로 불교가 쇠락해 갈 때 이 곳은
세종대왕능이 여주로 옮겨온 후 그 영능의 원찰이 되어 왕실의 후원아래 더욱 번창했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이절의 이름이 임금의 은혜를 갚는다고 보은사라고 하였습니다.
신륵사라는 이름은 남한강에 용마가 나타났는데 매우 거칠어 아무도 다루지 못하는 것을
이 절집에 주석하던 인당대사가 나타나 고삐를 잡아 용마를 다스렸다하여
신륵사라고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신륵사의 륵자가 말고삐를 잡는다는 뜻입니다.
경내에 다층전탑(보물 제226호),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다층석탑(보물 제225호),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등을 보유하고 있고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등의 도 문화재 자료도 다수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 위치한 전탑은 신륵사를 대표하던 것으로
한때는 이절이 벽돌탑이 있는 절이라고 통용되기도 했습니다.
전각들을 돌아보며 다시 한바퀴돕니다.
이제 강 건너편이 제대로 보이는데 참 생경합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강건너편은
남한강이 한굽이를 돌면서 넓은 모래둑을 만들어 놓았던 곳인데
황포돗배가 서있는 나루도 그렇고 그 주변에도 모래는 보이질 않습니다.
강변을 아름답게 만들던 그 고운 금노래은모래가 깔려있던 모래둑은 모두 어디로 갔나요.
자연에 새겨진 역사를 지우고
자연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는 이들에게
역사와 문화란 한갖 군더더기일뿐인가 봅니다.
기억의 한페이지가 지워집니다.
나옹이 읊었다는 시 한구절 ...
믈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 여수여풍如水如風을 읊어봅니다.
의미가 맞지 않는군요.
차가 출발하기전...
2호차를 새차로 바꾸었답니다.
회원들 모두 축하하며 간단한 고사를 지냅니다.
기사의 얼굴속에 뿌듯함이 넘쳐나네요.
안전운전 하시고
돈 많이 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