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한강 1300리를 걷다 1차. 첫날 오전.

하늘타리. 2013. 3. 22. 19:45

3월 16일

 

흐르는 강물 따라 이틀을 걸었습니다.

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었지요.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나오듯이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 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강변을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황지우의 글에서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자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고 한 것처럼

각자 자기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한강의 기록을 꺼내고자 합니다.

마종기가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라고 말 했듯이

강변을 따라 걸은 일이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을 테니까요.

 

 

어두운 창밖을 보고 여기가 어디?

그리고 이 부근에 내가 갔다 온 곳은 어디?

아직 못 가보았거나 다시 찾아가야 할 곳은 어디?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는 내가 예상했던 검룡소부근 태백시 소재가 아닌

삼척시 하장면에 있는 장전삼거리에 도착합니다.

 

길목민박

여기가 우리가 이틀을 머무를 곳이랍니다.

우리 땅 걷기 도반들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도로안내표지판 옆 나란히 서있는 장승부부와 인사를 나눕니다.

큰 입 벌려 격하게 환영하네요.

 

다음날 아침 민박집을 나서는데 장승부부가 부릅니다.

잘 잤니?

응, 잘 잤어.

불편한 것은 없고?

민박집이 이정도면 고맙지 뭐…….

아침 든든히 먹고 운영자들 속 썩이지 말고 잘 따라다녀라.

그래 알았어. 

 

태백시 방향.

검룡소를 가려면 저 길을 거슬러 가야지요.

준비운동 삼아 조금 걸어 봅니다.

 

버스정류장에 들어가 버스 운행시간표를 보며 대중교통망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가를 봅니다.

 

 

천변을 지키고 있는 적송

 한때는 말 그대로 길목을 지켰을 텐데 하폭이 넓어지고 길이 새로 나면서 천변에 위태하게 서 있습니다.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검룡소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이 뻘건 다리는 뭐?

2~3년 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수아밭령으로 가는 길을 정비해 놓은 것 같습니다.

수아밭령은 원래 백두대간 피재에서 두문동재구간의 중간 경유장소지요.

수아밭령에서 동쪽으로 가면 비단봉, 매봉산을 거쳐 피재라고도 하는 삼수령으로 갈 수 가 있고,

더 계속가면 구봉산, 건의령을 거쳐 구부시령에서 우리가 강따라 내려갈 예수원옆 하사미동 무사마을로 내려올 수 있을 것이고,

수아밭령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금대봉을 지나 두문동재로 가게 됩니다.

아, 두문동재 아래 마고할미탑에 다시 가보고 싶다.

 

금대봉에서 검룡소로 다시 내려와도 되지만

이 구간은 야생화식생보호구역이라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할 겁니다.

5월에 이 길을 지나면 내딛는 걸음이 나비의 날갯짓이 됩니다.

바로 이곳이 천상의 화원입니다.

 

그런데 다리색깔을 뭐 이렇게 벌겋게 해놨냐.

색감하고는 참…….

툴툴거리며 매표소로 갑니다.  

 

저 봉우리.

 

아마 수아밭령과 금대봉사이 쉼터가 있는 1256고지일겁니다.

저곳에서 금대봉방향으로 가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낙동강의 또 다른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이첨지샘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금대봉 정상에 가면 양강의 발원지라는 표지목이 있습니다.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안내판  

 

그림에 의하면 검룡소에서 솟아난 물이 임계, 정선, 영월, 단양, 충주, 여주, 양평, 서울, 김포를 거쳐 강화만에서 바다로 나갑니다.

우측구석 사진이 손대기 전의 검룡소의 모습입니다.

 

검룡소표석을 지납니다.

 

멀리 산에 우점하고 있는 잎갈나무를 피해서 길가로 내려온 피나무, 수유나무, 생강나무 등이 길옆에서 우리를 환영합니다.

  

 

 

금대봉 올라가는 길의 안내판

 갈림길 사진을 않찍었네요. 

빨래줄로 막아 놨기에 A, C 또 막았어하며 안내판만 꾹하고 올라 왔거든요.

내려가면서 안내소 직원한테 출입금지구간도 아니데 왜 막았냐고 한 소리 했더니

막은 것은 아니고 출입이 가능하답니다.

검룡소 간다는 사람들이 그리 잘못 올라가서 아는 사람만 가라고 빨래줄을 친거라거라고 하네요.

하여간 이 길을 올라가면 한때 그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이 분주히 다녔다는 분주령을 거쳐

고목나무 샘을 보고

또 의지가 있는 사람은 제당금샘도 보고 금대봉을 오를 수 있습니다.

 

오늘은 검룡소를 가기위해 하천을 건넙니다.

 

대박산천

 

아주 옛날에는 이 하천이름이 대박산천이었습니다.

지금의 금대봉이 조선시대까지는 대박산이었거든요.

그래서 대박산에서 흘러나온다하여 대박산천이었다가

산이름이 금대봉으로 바뀌고 아래 계곡으로 산죽마을(창죽마을)이 들어서면서 창죽천으로 이름이 바뀌더니

지금은 골지천까지 흘러 들어가는 그냥 시냇물이 되었습니다.

골지천은 우리가 걷는 우측 대덕산 넘어있는 원동 마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가는 검룡소는 1983년부터 오대산 우통수와 서로 한강의 발원지라는 다툼을 시작했지요.

1987년 국립지리원에서 황병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송천까지 포함하여 세 곳을 위성을 이용 실측한 후

검룡소손을 들어주어 한강의 발원지로 공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검룡소에서 흘러내려온 물과 오대산 우통수에서 내려온 물이 만나는 정선군 나전리를 기준으로 길이를 도상 실측했더니

우통수가 약 53㎞, 창죽천이 약 85㎞에 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답니다.

즉 금대봉 기슭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한강발원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오대산 우통수를 계속 한강의 발원지라고도 생각하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오대산에는 서대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강의 근원이다.

서쪽으로 수백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로 흘러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물이 복판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은…아니고….

내 유년의 추억, 지금은 아주 먼 곳에서 살고 있지만 서울 5대토박이로

인왕산앞 안산줄기 시냇물에서 가재를 잡던 시기에

한강 강심으로는 다른 물보다 무거운 우통수가 흐른다하여 신기해하던 기억을 잃고 싶지 않기때문일겁니다.

 

우통수가 어디있냐고요?

오대산 상원사에서 염불암 가는 길가에서 열심히 솟구치고 있습니다.

 

그냥 해보는 소리지요. 공인된 것은 따라야지요.

 

물을 건너 바로 만나는 그네의자

누군가 옆에 앉는다면 같이 다리를 굴러볼수도 있을 텐데…….

프라고나르의 그림 '그네'가 생각납니다.

그 그림속의 그네에는 분홍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타고 있고 그녀의 남편인 듯 한 이가 여인을 밀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그네 바로 앞 꽃밭 속에는 하늘로 치솟아 펄럭거리는 여인의 치마 속을 훔쳐보며 여인과 눈빛을 주고받는 또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여인의 신발이 벗겨져 날아갑니다.

그런데 그 방향에는 큐피트닮은 조각상이 입에 손을 대며 쉿~하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바라만 보고 지나갑니다.

 

잔설이 덮인 길을 지나다가 하천으로 내려섭니다. 

 

 

 

 

거슬러 오르면서 퇴계의 글을 생각합니다.

'달빛 어린 물 위는 희부옇고 밤기운 맑은데 바람이 쪽배 불어 달빛 환한 강물 거슬러 오른다. 

표주박에 담긴 백주는 은잔을 기울여 마시고달빛 어린 물결에 노 저어 별빛을 끌고 가노라…….'

 

작은 폭포에 막혀 다시 길 위로 올라섭니다. 

 

 

 

그래서 아주 당연한 말이 시경에 있군요.

'구불구불 굽이쳐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길이 막히고도 험하도다.'

 

다시 잔잔한 천변으로 걸어갑니다.

  

 

길로 올라왔다 다시 내려서고 

 

 

 

 

 

 

 

 

 

또 올라왔다가 

 

내려가고 

 

 

 

그렇게 검룡소 안내판앞에 왔습니다.

 

 

검룡소 안내판 읽어 보시고요.

 

 

그런데 검룡소 이름 언제 생긴 건지 아세요?

1984년에 생겼어요.

이곳 금대봉 기슭 석회암반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한강의 발원지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당시 태백문화원을 창립한 분이지요.

무슨 이름이 있었겠지요.

이 물의 원류인 금대봉 기슭의 제당굼샘, 고목나무샘, 물구녕, 예터굼의 굴물처럼 어떤 이름이 있었을 겁니다만

조금 촌스럽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메워져 있었으니 이름이 없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러니 우통수와 다투려면 그 정도의 격이 있는 이름이 있어야 했을 겁니다.

1984년에는 금대봉 기슭이라는 점에서 금金을 따고 용의 설화를 담기 위해 용龍을 써서

금용소金龍沼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금용소를 인근 마을주민에 알려나가는 과정에서 억양상 ‘금’의 발음이 ‘검’으로 읽히자 

'금'자 대신 ‘검’자로 변경키로 하고 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王儉의 ‘검儉’을 인용해 검용소儉龍沼로 이름을 바꿉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법상 ‘용龍을 ‘룡’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지적에 따라 

현재의 검룡소儉龍沼라는 이름이 확정된 것이지요.

 

금대봉 기슭의 제당굼샘, 고목나무샘, 물구녕, 예터굼의 굴물에서 솟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이곳에서 다시 솟아나와 514km의 한강 발원지가 되는 검룡소입니다.

그런데 용은 용이되 탐욕의 용입니다.

언젠가 이 전설도 바뀌겠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 이곳에는 용이 있던 것이 아니고 용이 못된 이무기가 있던 곳이었지요.

이무기가 용이 되려면 선한 일을 해서 적덕을 해야 하는데

마을사람들의 유일한 재산이자 농기구대용인 소를 잡아먹는 등 못된 일만 하다가

뻔뻔스럽게도 하늘로 올라가려고 몸부림치던 흔적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땅치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 언젠가부터 이 못은 크고 작은 돌들로 메워져 있었습니다.

안내판에는 86년, 다른 기록에는 84년에 메워져 있던 것을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했다 하더군요.

최초 복원 때의 모습이 검룡소주차장 낡은 안내판의 우측구석사진입니다.

 

고목나무샘에서 부터 이어져 왔을 또 다른 물줄기를 보고

 

 

그들이 합치는 지점을 보고

 

 

이무기가 몸부림쳐 암반에 파여 형성된 와폭을 봅니다.

 

 

 

 

공덕을 쌓아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데, 그저 지상에서 욕망으로만 몸부림친 흔적입니다. 

 

 

그래서 한강은 탐욕의 강입니다.

그래서 한강은 한 서린 강입니다.

그래서 그 주변에 사는 이들은 탐욕적이 되고,

그 주변에 사는 이들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상처로 한을 품습니다.

물결을 따라 욕망이 흐르고 그 욕망의 비릿내가 주변을 덥습니다.

 

우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고 지금은 세계 14위 경제대국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에 가장 기여한 이들인 노동자들이

최장 노동시간 1위, 저임금 노동자 1위, 산업재해 사망률 1위. 자살률 1위, 사교육비 지출 1위 등에 시달립니다.  

 

이제는 한강을 지배하는 권력과 재벌들로 부터 형성된 탐욕의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검룡소

 

 

검룡소용에게 부탁합니다.

 

오늘 정말 우리 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서

한강의 결을 따라 천 삼백리를 걷고자 하니

이제부터는 가치와 생명이 흐르는 강으로 자리매김하여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물길옆을 따라 내려갑니다.

 

 

 

흐르는 물결 위로 봄이 따라 옵니다.

 

아직 천변에는 눈이 덮여 있지만 물위에 버티고 있던 얼음들은 다 밀려 나고 있습니다.

 

 

검룡소표석을 다시 한 번 보고 창죽마을로 갑니다.

 

오른 쪽으로 매봉산 풍력발전단지가 보입니다.

이 오른쪽 기슭 소로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비단봉으로 가서 용연동굴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용연동굴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해발 920m에 자리한 천연 동굴입니다.

생성시기는 약 1억5천만 년 전에서 3억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동굴 안에는 각종 석순, 종유석, 석주, 동굴산호 등이 즐비합니다.

1994년부터 관광지로 개발되어 동굴 중앙내부에 대형광장과 리듬분수는 자연 생성물들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경관을 연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단이 좀 많은 게 흠이지요.

 

임진왜란 때는 사람들이 동굴 속으로 피난을 왔다고 하는데,

암벽에 붓글씨로 피난하게 된 내력을 적어 놓은 것이 있습니다.

 

동굴입구에서 가는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낙동강의 또 다른 발원지라 하는 용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용소는 원래 암용소와 숫용소로 되어 있어서

암용소의 굴에서는 물이 나오고 숫용소의 굴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으나

태백시에서 수원지로 개발하면서 용소 앞에 콘크리트 구조물을 설치하여 물을 가두어 지금은 커다란 연못이 되어

물 밑에 두 개의 굴이 잠겨버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또 국도를 넘으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있는 기차역인 추전역杻田驛아 있고

그 위쪽 골짜기에 싸리밭골이 있습니다.

지금은 마을은 없어졌지만 팔뚝 굵기 만한 싸리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습니다.

옛날 이 골짜기안쪽에 큰 싸리나무 가 있었는데 홍수에 떠내려가서 구문소의 석벽을 강타하며 구문소의 구멍을 뚫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왼쪽으로 자작나무 숲속에 꿀벌들의 집

 

여기저기 꿀벌통은 많이 남아 있지만 꿀벌들은 다 죽고 없습니다.

이곳뿐이 아니지요.

전 세계적으로 꿀벌들의 수는 급격히 줄고 있습니다.

대량 폐사의 원인을 아직까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제각각입니다.

일부는 바이러스 또는 곰팡이가 번져 폐사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전자파를 핵심 원인으로 꼽는 학자도 있습니다.

벌들이 휴대전화 전자파로 신경계통에 이상을 일으켜 죽었을 것이라고 독일 란다우대 연구팀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난해 심했던 가뭄을 이유로 내세웁니다.

즉 먹잇감이 부족해지면서 제대로 먹지 못해 꿀벌들의 저항력이 떨어진 결과라는 것이지요.

꿀벌 폐사의 원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결코 자연을 지배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인간도 결국 평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걱정이 듭니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진다면 인류는 4년 안에 멸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수선재에서 펴낸 지구와 인류를 살리려는 동물들의 '다잉메시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실린 꿀벌들의 목소리를 옮겨 봅니다.

'아시다시피 식물들은 혼자서 수분이 불가능합니다.

누군가가 수분이 되도록 촉매 역할을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저희의 역할입니다.

대신 우리는 꿀을 섭취하며 영양분을 공급받아 살아갑니다.

인간은 벌의 출현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은 꽃의 수분을 80% 정도, 과일은 거의 90% 정도를 우리가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문이나 방송에 나온 대로 꿀벌은 이미 90~95% 정도가 폐사되었습니다.

그동안 꿀벌이 담당했던 꽃의 수분이 되지 않아 많은 과실과 곡식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몇몇 과실은 인간들이 곤충 대신에 붓으로 수분을 하고 있지만

곤충, 특히 꿀벌의 역할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가 사라진다면 많은 과실과 곡식이 줄어듦과 동시에 식물의 종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열매와 식물 종의 감소는 또한 동물 종의 감소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의 식량도 줄어들게 될 테니까요.

당연히 인간도 더 이상의 풍요로움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땅과 비슷한 높이의 납작한 집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인듯 합니다만

방과 마루, 외양간까지 한 지붕 밑에 외벽으로 감싸져 있어

겨울의 추위를 덜고 산짐승의 피해를 방지하는 강원도 가옥의 형태가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너와 대신 그 당시 구하기 쉬웠던 스레트를 쓴 것이 차이이겠네요.

 

양어장 뒤로 서낭당이 보입니다.

 

예전에는 뒷부분인가가 무너져 있었는데 다시 깨끗하게 정비를 한 듯싶습니다.

양어장앞을 지나 빙둘러서 다가가 봅니다.

 

서낭당은 지금도 이곳저곳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눈에 않보일뿐이지요.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나 당집

그리고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서낭나무로 이루어져 있으나

누석단이라하는 돌무더기나 서낭나무 또는 입석만으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처럼 돌을 정성들여 쌓아올려 제단을 만든곳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모습으로 만나니 더욱 반갑네요.

 

제단 위에 패를 세웠는데 성황城隍신위라고 써야 하는데

皇자앞에 흙토 또는 구슬옥변을 붙인, 없는 글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성황이라 할 때 해자垓字. 성城 밖에 둘러 판 마른 못을 의미하는 隍을 쓰는 이유는

성황신앙은 성읍의 둘레에 못을 파놓고 그 못에 깃든 신神이 성읍을 지켜준다고 믿는 중국 송대宋代이후 보편화된 풍습이

천신, 지신, 토신을 숭상하는 한국전래 풍습인 서낭신앙과 결합하여

한문으로 표기하는 습속과 물려 한자로 성황당이라고 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든 저러든 과거 서낭당은 마을 공동체에 중심에 있었습니다.

산신이건, 토신이건, 창질을 뿌리는 뢰癘신이건, 성황신이건

그들을 모심으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액厄, 질병疾病, 재해災害 등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지방마다 마을마다 제를 올리는 시기가 다릅니다만

통상 태백인근지방에서는 입춘 무렵과 단오 그리고 음력 7월말 무렵에 제를 지냅니다.

이제는 당에 다니는 사람이 마을에 두세 명뿐이 않될테니 어느 정해진 날이 아닌 개인의 생기맞는날 찾아오겠지요.

그런데 이당은 2010년 2월 달에도 당제를 올렸습니다.

몇 년을 않지내다가 당시 통장이 기획하여 마을 안녕과 무병장수 풍년을 기원하는 당제를 2월25일(음1월12일)에 올렸다 합니다.

 

그 때의 자료사진입니다.

 

태백 인근지역에서 7월말에 제를 지내는 것은 이곳에 갈풀썰이라는 민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풀썰이를 하기 위해서는 마을 성황당에 모여 마을의 안녕과 마을 사람들의 무병장수 등을 비는 제사를 지낸 후

그 자리에서 날을 받아 언제부터 풀을 하되 누구네 집부터 돌아가며 한다고 결정을 봅니다.

아, 갈풀썰이가 뭐냐고요?

태백은 깊은 산중으로 예부터 화전민이 많이 옮겨와 살던 곳이지요.

세월이 지나면서 화전농경에서 정착농경으로 바뀌어 가는데

이 일대는 흙에서 돌이 자란다고 할 만큼 땅이 척박하여

퇴비를 해야만 그 다음해에도 무언가를 심어 기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음력 7월경에 내년 농사를 위해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품앗이 형식으로

집집마다 돌아가며 퇴비를 장만하는 것으로

무성하게 자란 2~3년생 초목을 베어 와서 작두로 썰어 큰 풀가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레형식으로 하다 보니 역할 분담에 따른 사설들로 노동요가 탄생하였습니다.

갈풀하는 날은 마을축제가 되어 풀밥이라 하여 여느 때보다 푸짐하게 음식을 만들어 마을 사람이 모여 함께 마시고 먹습니다.

힘든 갈풀썰이가 끝나면 마당에 썬 풀을 깔고 힘센 장정들이 아직도 힘이 남아 있음을 과시하듯 서로 힘자랑 씨름을 합니다.

이때 마을사람 전체가 징이나 꽹과리, 장고, 북 등을 가져나와 흥을 돋우며 응원하다가

이긴 사람을 지게로 만든 가마에 태우고 하루 종일 애쓴 노고를 치하하기도 하였습니다. 만…….

지금도 이것을 재현하는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많은 민속이 무속과 혼합되어 있다가

유교가 들어오며 천대받고 또 기독교가 들어오며 타기의 대상이 됩니다.

이제는 마을에 당집이 있다하여도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어떤 마을은 민속복원이란 차원에서 당집을 복원해 둡니다.

이것도 오버지요.

억지로 없엘것도, 없어진 것을 억지로 만들 것도 아닌

누군가가 다니면 유지될 것이고 다니는 이 없으면 스러져 갈 것입니다.

 

내려와 뒤돌아 보고

'서낭당'이라는 노래하나 읊조리며 발길을 옮깁니다. 

'저 달님 울어 지쳐 내 곁에 쓰려지면

서낭나무 향하여 드리는 맘 끝이 없고

고요한 고목도 말이 없네.

천만리 우리낭군 바람결에 오시려나?

무명고름 애태워 말없이 여미는 밤에

가신님 기다리다 넘어서는 꽃돌막

정한수 한 사발에 우리 님 담아 달라

한스런 긴 밤을 기다리고 기다리오.

어지신 신령이시여 이 눈물 굽어보소서!

가르는 바람소리에 아스라이 드리우는

하얀 우리 님을 밀어 예는 밤에

돌담 넘어 기다리다 넘어서는 꽃돌막'

여기도 빈집 

대청마루 벽면에 아마 10여 년 전 유행하던 스킬자수로 만든 태극기만 외롭습니다.

도안위로 자수를 뜨던 그 여학생과

그렇게 뜨여진 태극기를 보고 흐뭇하게 벽면 상단에 걸어 놓으신 아버지는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할까요?

 

물가가 아닌 길가에 왕버드나무를 찍었는데...

 

전깃줄이 보기 싫어 카메라를 옆으로 돌리니 잎갈나무 숲이 펼쳐집니다.

 

봄에 황갈색 꽃이 피며, 가을에 노랗게 물들며 떨어져 낙엽송,

봄에 밝은 초록빛이던 잎이 가을에 노랗게 물들며 떨어져 잎을 간다하여 잎갈나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공식 명칭은 이깔나무라고 하네요)

주로 추운 곳에서 자라는 잎갈나무는 백두산일대가 자생지이고

북한에서 총 산림자원 중에 그 면적과 축적에서는 두 번째를 차지하며

목재 생산량에서는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잎갈나무는 빨리 자라는데다가 목재의 재질이 좋아 쓸모가 많으며,

또한 목재는 굳고 단단하여 여러 부문에 쓰이고 있다고 하데요.

이곳 강원도에서도 예전 너와집은 거의 잎갈나무를 이용 지어졌었습니다.

 

이런 집의 측면 판자도 거의 잎갈나무로 만들어 진 것이지요.

 

저 건너 빈집의 벽면도 잎갈나무로 만든 것이겠지요.

 

용어를 정확히 써야지요.

빈집이라면 사람이 잠시 비워둔 것일 수도 있으니 폐가.

 

한때는, 아니 지금도 나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를 만나면 항상 기웃거려 봅니다.

혹여 문이 잠겨있지 않으면 들어가 사진을 찍지요.

사람은 떠났어도 삶의 흔적들은 남아 있습니다.

떠나지 못한 흔적들이 어떨 때는 너무 난해 합니다.

왜 없어서, 살 수 없어서 떠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삶의 흔적들을 놔두고 갈까?

부잣집 이사 갈 때 보면 떠난 자리에 쓸 만한 것이 남겨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 못살아 떠나는 사람은 장독이며 이불이며 살림살이 등이 그냥 남겨두고 갈까요?

 

마경덕의 폐가입니다.

'부스스 머리를 풀어헤친

집이 운다.

빗물 고인 장독을 들여다보고

앞마당 잡초 더미

봉숭아 한 그루 붉게 터졌다

조랑조랑 꽃을 달고

어리둥절 서 있다

바람 한 점에

퍽, 바지랑대 쓰러지고

놀란 집이 퍼뜩

한쪽 발을 쳐든다.

사타구니 뵈는 집

더는 숨길 게 없다고 주머니를 뒤집어 탈탈 턴다.

누가 알맹이를 빼먹고 껍질만 남겼을까?'

 

한쪽에는 이렇게 찾아올 손님을 기다리며 민박집이 만들어 집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매봉산 풍력발전기가 다시 모습을 보입니다.

해발700고지에서 고냉지 배추,무우등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에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섰지요.

태백 매봉산 고냉지 배추밭은 그 규모가 43만평,

보이는 산 과 산 넘어가 모두 배추밭입니다

풍력 발전기와 넓게 펼쳐진 초록 배추밭 그리고 파란 하늘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가보실거면 고냉지 배추는 5월부터 심어서 8월초부터 출하가 되기에 7월말에는 가야 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저 풍력발전기.

저 곳에 8기가 있는데 기종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정확한 길이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스레이드 하나의 길이가 약 40미터 내외, 기둥이 80 또는 90미터랍니다.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는데 꽤나 크지요.

모르겠습니다.

무공해, 무한정의 바람을 이용한 환경 친화적 에너지라고 이야기 하지만

바람이 약하면 않돌고 너무 세면 기계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멈추어야 하고

그래서 24시간 발전이 않되니 각 기둥 밑에서 별도의 발전기를 갖추어야 하고 등 등

무늬만 녹색성장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래도 효과는 있는지 대한민국 곳곳에 풍력발전단지가 늘어납니다.

 

길가에 돌절구가 하나 버려져 있습니다.

아무쓸모 없는 옛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보는 내 마음이 왜 먹먹해질까요?

김열규는 이야기합니다.

'그리움은 아쉬움이고 소망이다. 놓쳐버린 것, 잃어버린 것에 부치는 간절한 소망.'

그래서 다시 못 올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기억이 서러움으로 밀려오나 봅니다.

 

 

잎갈나무버섯을 기르는 곳이 있어 들어가 봅니다.

 

잎갈나무버섯이라 하여 꼭 잎갈나무에서만 자라는 버섯은 아닙니다.

잎갈나무와 같은 침엽수 그루터기에서 자란다는 이야기지요.

여름과 가을에 걸쳐서 그루터기에서 무리로 자라는 이 버섯은 한 반뼘보다 크면 먹을 수 있는데요.

삶아서 익혀서 먹으면 그 풍미가 기가 막히지만 생식을 하면 큰 배탈이 난다고 합니다.

보다 자세한 것을 물어 보려고 계십니까? 하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냥 사진 한 장 더 찍고 돌아 나옵니다.

 

시냇물은 소리내어 흐르고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졸고 있는 너와지붕을 한 정자가 있습니다.

 

강원도에 집형태로 너와집, 돌집, 굴피 집, 저릅집, 귀틀집 등을 이야기 하는데...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잎갈나무, 소나무 등을 쪼갠 판재로 지붕을 엮으면 너와집

참나무의 껍질로 지붕을 엮으면 굴피집

삼베를 만드는 대마의 속으로 만들면 저릅집

얇게 쪼갠 돌판으로 지붕을 덮으면 돌집

귀틀집은 설명하기 힘들어서 생략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정선 아라리촌 민속마을로 놀러 가세요.

 

안창죽마을과 밧창죽마을 사이 검룡소다리 옆으로 듬벙돌탑이 세워져 잇습니다.

물론 옛날부터 있던 것은 아닐 게고 관광의 목적으로 최근 만들었겠지요.

듬벙돌탑은 장승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장승은 지역 간의 경계표 구실, 이정표 구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길가나 마을 경계에 있는 장승에는 그것을 기점으로 한 사방의 주요 고을 및 거리를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듬벙 돌탑은 이정표구실은 않하지만 마을의 경계를 나타내기도 하고

방사탑이라 하여 마을로 들어오려는 삿된 기운을 막아주고 허한 것을 보완 해 주는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함께 합니다.

 

두개의 검룡소 다리중 제 2교를 건넙니다.

 

 

교각아래를 보고

 

생각없이 머리를 드니 오른쪽으로 천의봉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보입니다.

 

길을 따라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다가

 

 

공연히 뻘줌해져 뒤로 돌아 있는 상태에서 흘러내려오는 냇물을 찍습니다.

 

또 빈집

 

하천 한 가운데로 버드나무숲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뭔가 작품을 만들려고 찍었는데 역광대비를 않하여 그냥 꺼멓습니다.

 

목재다리 너머 정자

검용정입니다.

 

원래 검용정은 1986년 오늘 우리가 고유제를 지낸 곳에 세워 졌습니다.

그런데 큰비에 무너져서 복원을 한다고 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큰길에서 검용소로 들어가는 이곳에 짓는 것도 관광랜드마크로 의미가 있겠다하여 이곳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만

 이 길을 걸어가는 이도 없으려니와

설령 걸어가는 이가 있다하여도 접근하기가 애매하여 바라만보고 지나갈 뿐 사용하는 이는 없습니다.

게다가 부근에 사람도 살지 않으니 그렇게 바람에 삭아갈 뿐입니다.

 

큰 길옆 슈퍼

장사가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집에 사람이 산다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문 왼쪽에 나와 앉아 우리 팀들을 바라봅니다.

 

큰길변 삼수령에서 흘러오는 물길

차로 5분만 가면 피재라고도 하는 매봉산 기슭 고갯길 삼수령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아빠, 엄마 그리고 아들 세식구의 빗방울이 내려옵니다.

다른 곳에 내리면 옹기종기 모여서 웃으며 어딘가로 흘러갈 텐데

이곳 삼수령에 내리면 일가가 흩어집니다.

동북서로 가면 한강을 따라 서해바다로 흐르고,

남으로 가면 낙동강을 따라 남해바다로 흐르며,

동으로 가면 오십천을 따라 동해로 흘러갑니다.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하거나 태평양어디에선가 다시 만나겠지요.

지금 매봉산 기슭에 정답게 모여 있는 눈들도 날씨가 따뜻해지면 각기 어딘가로 뿔뿔이 헤어질 겁니다.

山自分水嶺

'산줄기는 물을 건너지 않고, 산이 곧 물을 나눈다.

이 땅의 모든 산을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엮어 나가는 그 기본 법칙이 바로 산자분수령입니다.

 

금대봉 곰취밭골

표지판을 여기다 세워 여러 사람 헷갈립니다.

어디냐고…….

금대봉 우측에 있는 곰취밭굼과 금대봉 좌측에 있는 곰취밭목 표시를 왜 여기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버스정류장

가뭄에 콩나듯 다니는 버스, 그러니 더욱 타고 내리는 사람이 없지요.

 

그러니 버스 정류장앞 농특산물 판매장과 먹을거리 쉼터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강의 아침, 창죽마을표석

한강의 아침, 참 분위기 있는 이름이지요.

태백시에서는 창죽마을을 2009년 한강의 아침 마을이라고 명명하고

검룡소, 삼수령, 금대산, 매봉산 트레킹객을 대상으로 숙박 및 체험프로그램 실시를 계획했습니다.

이 일환으로 폐교된 창죽분교를 민박집으로 바꾸었고

아까 우리가 지나온 민박 등도 개설하였으나

찾는 이가 없어 2010년 이후 진행되는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그래도 태백시에서는 이 한강의 아침프로그램으로 농가소득을 엄청 증대하였다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자작나무숲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도 온통 자작나무다'

 

백석의 '산중음'에 나오는 글입니다.

 

순백의 속살로 유혹하는 자작나무는 백두산 인근에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토종 수종입니다.

백두산 일대를 비롯해 개마고원과 강원도 북쪽 산간에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는 자작나무는

불을 때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이름이 자작나무입니다.

수액은 고로쇠(骨利水)로 마시고 껍질은 씹어서 약으로 썼습니다.

목재의 질도 좋아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목판으로도 쓰였습니다.

강원도 지역에 있는 현재의 자작나무 숲은 대부분이 사람의 손에 의해 조림된 것입니다.

강원도에서는 자작나무가 잎갈나무의 동반목이었습니다.

그 자체의 필요에 의해 심어지는 게 아니라

숲의 주종을 이루는 나무와 같이 자라면서 그 나무가 자라는 것을 돕게 하기 위해서 심어 진 것이지요.

소나무 숲의 참나무 종류를 예로 들면 될까요.

그래서 잎갈나무 숲에 자작나무를 심었는데

강원도일대에 자라던 원래 백두산일대가 자생지였던 잎갈나무는 너와집 등의 목재로 무분별하게 도채 되는 바람에 다 없어져 버렸고

1900년대 초기부터 일본 잎갈나무들이 들어오면서 자작나무와 잎갈나무가 병행 조림 된 것이지요.

어떤 이유에서든 겨울의 귀족 자작나무는 그 오묘한 색감이 널리 알려져 일대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원동마을입구로 왔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으로 초등학교와 교회가 보입니다.

원동마을인데 학교와 교회이름은 미동입니다.

 

학교 앞으로 가봅니다.

학교가 참 예쁩니다.

2009년에 교실과 교문을 다시 만들었습니다.

아, 학교는 1940년에 만들어진 학교인데 그때는 하장초등학교 미동간이학교로 출발했지요.

44년도에 초등학교가 되고

우리가 걸어갈 하사미마을에 있는 하사미분교와 오후 늦게 지나갈 조탄에 있는 도릉분교가 이 학교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만

99년에 도릉분교가 09년에 하사미분교가 폐교되었습니다.

이 학교도 단식 4개 반 복식1개 반 그리고 유치원이 있지만

지금 학생전체가 25명뿐이 않되는데

교사 7명을 포함한 15명이 근무하니 언젠가는 분교로 다운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길옆으로 따라 내려오는 골지천의 물줄기를 보고 원동으로 올라가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만..

그곳에 갔다 오면 일행을 따라갈 수 없으니 생각으로만 다녀옵니다.

원동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하셨겠지만

이 마을에는 고려시대부터 관아에서 운영하는 숙소인 원이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 있던 원이름은 죽현원竹峴院이라 하였고 삼척에서 정선으로 가려면 꼭 이 길을 지나가야만 했던 곳이지요.

하지만 지금 이 길은 해발 600에서 700정도 되는 구불구불 구절양장이 그대로 이고

더 빠른 도로가 다른 곳으로 개설되어

마을은 오지중의 오지가 되어 주민수 100명이 채 않될 겁니다.

그래도 한 때 마을입구에 철광광산이 성업중일 때는

미동초등학교에 200명이 넘는 학생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과거에는 삼척에 속해 있었으나 인근마을들과 함께 1980년대에 태백으로 편입되었습니다.

마을 뒷산에 월둔동굴이라는 약 5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석회동굴이 있습니다.

보호동굴로 지정되어 미개방되어 있어 세로로 땅속 깊이 뻗은 원통 모양을 하고 있는 입구만 보고 온 적이 있습니다만

마지막 공간에는 깊이 4m 정도의 물웅덩이가 있고, 가운데에는 높이 8m의 대형 석순이 있다고 합니다.

 

찾아가는 대신 관광안내도를 보고

 

마을 버스정류장을 보는데

그래도 학교가 있는 마을이라고 아이들이 버스를 기다립니다.

얼마나 반갑던지…….

 

무슨 아쉬움이 그리 많이 남았는지 도로표시판을 한 번 더 뒤돌아봅니다.

도로표시판 밑으로 참나물, 곰취, 유리대, 으너리를 사려면 어디로 전화하라는 안내판이 있네요.

 

유리대는 누룩취를 말하는 거지요.

나는 아린맛과 누린향 때문에 못 먹겠던데 강원도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산채로 꼽히더군요.

뭐라더라…….

기름기 있는 음식 먹고 체했을 때 먹으면 소화가 잘되고 산모가 먹으면 젖이 잘 나온다고 하던가…….

하여간 복통치료에도 쓰이고 콜레스테롤 저하기능도 뛰어나다고

몇 년 전 설악산 부근 식당아줌마가 얼마나 열심히 설명을 하던지…….

 

으너리는 꺼칠꺼칠하게 보이는 털 때문에 삼베나물이라고도 불리지요.

통상 어수리라고 합니다.

어린잎을 나물 해서 준걸 먹으니 향과 맛이 좋더군요.

주로 데쳐서 쌈을 싸먹는답니다.

꽃이 피었을 때 언듯보면 미나리 비슷하게 생겨서

웬 산에 미나리가 있지 하는 생각을 잠깐 하게 합니다.

 

길 오른쪽으로 당이 한곳 보입니다.

 

내 믿음이 중요하니 남의 믿음도 중요하지요.

 

옆 동네 큰 어른한테 인사하듯 공손히 인사하고 문을 열어 봅니다.

누군가 한두 명이 얼마 전 초를 피워 자기의 바램을 빌었던 흔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비원을 이야기 했을까요?

당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이 많은데....

 그 어둡고 엄혹한 시기

마을 여인네들에게는 카타르시스를 해소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척박한 자연환경, 어려운 살림살이, 고된 시집살이, 완고한 남편, 그리고 속 썩이는 아이들…….

주변을 둘러 봐도 자기 말을 들어줄 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에 찾아와서 간소하나마 정성껏 준비한 제물을 진설하고 촛불을 피우고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신이라는 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집안이 잘되면 이 육신도 보다 편안하니 집안 잘되게 해달라고 빌고

속 썩이는 아이들이지만 내속에서 나은 놈들이니 이놈들 건강하게 해달라고 빌고.

멀리 계신 부모님 평안하게 해달라고 빌고…….

빌고…….

빌고…….

또 빕니다.

그러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거지요.

그렇게 눈물로 정화하고 무언가, 누군가는 모르지만 나를 보듬어주고

내 속의 이야기를 들어준 이에게 감사하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또 험한 시절을 보냅니다만 기분 때문인지 어떤 가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힘을 내어 살아갑니다.

 

앞으로 보이는 자작나무 숲

 

옆으로 보이는 잎갈나무 숲

문득 떠오른 시하나 .

김종해 시인의 '나도 한 그루 이깔나무로 서서'

 

'삼지연에서 백두산 가는 길은

가도가도 황톳길

칠월의 뙤약볕 아래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서서

바람이 불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깔나무 숲속에서

나도 한 그루 이깔나무로 서서

조선 인민들이 걸어온 황톳길을 역주행한다

서로가 서로를 가리기 때문에

이깔나무 숲속은 어둡다

어둠은 행복하다

보이지 마라, 네 참모습을

황토 흙먼지 뒤집어쓴 채

백두밀영으로 행군하는

이깔나무 숲의 이깔나무들

조선 인민들이 모두 행복하다 말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삶의 길은 단 하나

안위를 묻기 전에 먼저 경배하라

저 높은 곳의 정일봉을 향해! '

 

북한을 주마간산으로 여행하며 쓴 시라는데

그래서인지 참으로 처연하게 느겨집니다.

 

공식명칭이 이깔나무인 이유가 아마도 백두산 일대가 자생지라서 북한식 언어 같은데

처음 이 나무를 학습할 때 잎을 가는 낙엽송이라서 잎갈나무라고 배웠기 때문에 자꾸 헷갈립니다.

 

그리고 나름 멋있어 보이는 소나무

 

너무 강한 햇빛 때문에 그냥 꺼멓습니다.

오른쪽으로 카메라 높이 들고 찍어야 될게 많은데 아마 그냥 지나치게 될 겁니다.

 

아래 사진 오른쪽에 도로표지판 보이지요.

 

오른쪽으로 가면 도계로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가다 터널 앞에서 산길로 들어가서 산을 넘어가면

건의령巾衣嶺이라는 표지가 나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삼척 육백산 기슭 마을의 궁터에 유배와 있을 때

고려의 충신들이 왕을 배알하고 돌아가면서

이 고갯마루에 이르러 복건과 도포를 벗어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였기에

그들이 입던 복건과 관복을 벗어 건 고개라 하여 건의령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 곳이지요.

지금의 공식 지명은 한의령입니다.

 

가지도 않고 보지도 않을 고개 이야기는 그만하고

권춘섭집앞이라고 쓰여 있는 버스정류장을 봅니다.

벽면에 그려진 그림은 꿈이겠지요.

강원도 어디에 이렇게 너른 들이 있고 한가로이 소잔등에 기대어 풀피리불수 있겠습니까?

꿈이라도 그려야지요.

이 버스정류장이름이 어느 개인의 이름인 이유는 일대에 집이 딱 이분집뿐이 없어서라고 합니다.

 몇 년 전까지는 권상철집앞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이름이 대물림되었다 합니다.

 

소나무를  베어낸 자리에 자작나무를 심었습니다.

 

오른쪽에도 자작나무

눈이 하얗게 내린 날 이 길을 다시 한 번 와 보세요.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처럼 눈의 평원은 아니지만

하얀 몸피 그대로 하얀 눈을 밟고 서있는 나무들이

사랑한 죄로 벌을 받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줄겁니다.

 

'길가에 벌罰처럼 선 자작나무

저 속에서는 무엇이 터졌길래

저리 흰빛이 배어나오는 걸까…….'

정끝별 '자작나무 내인생'

 

창말입니다.

예전에 서창이 있던 곳이라 창倉이 있는 마을이라해서 창말입니다.

사미창이라 하여 장생리 전체(지금의 태백시 일대와 삼척 하장면 일대)에서 걷은 세곡을 보관하던 곳입니다.

사미창은 구한말에 폐지되었다 하고 지금은 마을 이름만 남아있지 그 자리가 어딘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사미창이 있던 것에 연유하여 이일대가 사미리이었다가

1842년(헌종8년)에 상사미, 하사미로 나뉘어 진 것이지요.

 

사미란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허묵의 '척주지'에 이 지역 이름이 삼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변해 사미라고 했고 이것이 한자로 士美라고 기록된데 서 기인했다고 합니다.

지역향토사학가들은 蔘이라고 했던 지역명에서 유추하여

이곳이 삼공 즉 산삼을 공출했던 곳이라 하는데 그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대에서 삼이라고 하는 것은 대마를 의미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조금 지나면 나올 주민회관과 보건소 못 미쳐 오른쪽 깊은 골을 삼밭골이라 하는데

그 곳이 아주 예전부터 대마를 기르던 곳입니다.

사미라고 하는데는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을 고직재 밑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 나오기에 샘말이라고 하던 것이 사미로 부르게 되었고

역시 한자표기로 士美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선택하세요.

 

또 다시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에는 이상하게 가지가 별로 없지요.

이 나무는 우듬치 즉 높은 가지가 나오면 그 아래 가지는 자기 스스로 떨궈냅니다.

그래서 그 아픔이 상처로 남지요.

그 상처 자욱이 하얀 몸피에 그대로 들러나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더 애잔하게 만들 겁니다.

 

노장골입구 녹색자전거

노란 꽃 한 다발을 앞가슴에 가득 담았습니다.

MB가 몇 년 전 방송에서 '안녕하십니까, 대통령입니다 자전거는 녹색성장의 동반자입니다. 우야고 저야고...' 한 다음에

갑자기 행정기관 자전거에 녹색 칠을 다 해 놓고 녹색 자전거 봉사단이 생기고 할 때 그 때의 산물인가?

 

참 불행이죠.

위정자의 말이 우스개가 되는 세상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무게를 짊어짐으로써 평생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계속 반복되어 나오는 나라

앞으로만은 그렇지 않기를 바래볼 뿐입니다.

그럼 이 노란꽃다발을 드릴게요.

 

아 그러고 보니 이 자전거가 기대어져 있는 나무가 들메나무네요.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데…….

갑자기 동계올림픽 스키장이 들어선다는 가리왕산에 있는

세 사람이 둘러싸도 다 못 감는 들메나무가 생각납니다.

그 일대 다른 거목들과 마찬가지로 스키슬로프를 만든다고 베어낼것이라고 노란띄를 둘렀던데…….

한번 치루고 말 올림픽에 목을 메는 것도 그렇고

동계올림픽은 그 특성상 거의 전부를 산지에 건설해야 하는데

그 일대 산들은 말 그대로 아작 날겁니다.

 

언젠가 누군가는 그 죗값을 받을 겁니다.

후손들아 그때 우리의 방관한 죄를 절대 용서하지 말아라.

 

옛사조동사무소가 있던 자리에 개축된 사조보건지소가 보입니다.

차가 와있고 사람들이 모입니다.

시간을 보니 11시 58분

오전 기행의 종점인 듯 합니다.

 

차가 서있는 자리옆 공터에 '감성이 넘치는 상사미 마을’이란 주제로 조성한

드럼, 기타, 오르간 등으로 구성된 밴드조형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을의 아름다운 감성을 강원도내 18개 시․군으로 그려간다는 의미로

색연필 18개를 세워 놨습니다.

12시, 오전기행을 마칩니다.

점심식사 장소를 향하여 차가 출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