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통영 앞 바다 5. 비진도

하늘타리. 2013. 2. 12. 16:47

출렁이는 물결 위...

계속 모습을 바꿔 나타나고 사라지는 섬들

왼쪽으로 소지도, 외부지도, 내부지도, 연대도, 오곡도.

오른쪽으로 가오도, 대덕도, 장사도, 죽도봅니다. 

  

   

 

 

 

  

 

 

 비진도로 다가가며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라고만 중얼 거립니다.

 

내 기억속의 비진도는...

 

일명 선유도 또는 외섬이라고 하는 떨어져 나와 있는 남쪽 섬의 산을 올라

그  첫 번째 전망대에서 바라보이는 망부석이 되어버린 여인의 얼굴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덟팔자 모양으로 남북으로 사주에 의해 이어진 섬이라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겠습니다만

내 기억은 돌이 되어버린 여인의 슬픔에서 부터입니다.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비진도 바깥섬을 돌아

방향을 바꾼 배가

 안섬을 보며 외항마을 선착장으로 들어갑니다.

 

배에서 내리기전 내섬과 외섬을 연결하는 사주위로 연결된 도로를 봅니다.

 

 

춘복도와 범여의 환영을 받으며 비진도 외항에 내렸습니다 

 

타고 온 배 뒤로 안섬을 봅니다.

 

저 산 이름이 대동산이고 그 북쪽의 산이 또 하나 있는데 

그곳은 천둥산,

마을사람들은 건너얍닥몬당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을사람이 밧섬산이라고 하는 선유봉만 갈 터이니

저곳은 눈에 미리 넣어놔야 할 듯싶습니다.

 

모습을 바꾼 춘복도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부두 방파제에 뜬부두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내린 판자로 만들어진 플랫폼을 말하는 겁니다.

 

통상 콘크리트로 축성된 원부두와 연결된 계단이 설치된 판자 밑에

드럼통 또는 어떤 부유물을 달아

물이 빠질 때 내려가고 물이 들면 올라와서

조수의 높이에 관계없이 배에서 사람이 쉽게 내릴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요새 도서지방 선착장은 대다수 그 형태라 새로울 것이 없는데

이곳에서는 안내판을 크게 설치했습니다.

 

아 그래요 하고 큰 감탄한번 해주며 배가 떠난 뜬부두를 다시 한번 보아 줍니다.

비진도 산호빛 해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외항 승선장 미니 대합실 

 

한려해상 국립공원 동부사무소에서 비진도 산호길 종합안내판을 세웠습니다.

 

안내판의 비진도 소개 글에 의하면

'통영항에서 13km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비진도는 미인도라고도 하며

안섬과 바깥섬, 내항과 외항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비진도는 '보배(珍)에 비(比)할 만한 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섬을 옆으로 눞힌

종합안내판의 요도를 옮깁니다.

 

선착장을 다시 보고 발길을 옮깁니다. 

 

바깥섬에서 바라본 안섬과 연결된 도로입니다 

 

포장된 아랫부분은 큰 돌로 축대를 쌓았는데 성글게 쌓아 물이 오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외항마을 선착장은 이쪽 바깥섬에 있지만

외항마을은 안섬의 끝부분인 바라보이는 저곳에 있습니다.

외항마을뒤로 보이는 산길을 넘어가면 본섬마을인 내항마을이 있습니다.

 

선유봉입니다.

앞에 보이는 봉우리 선유봉정상은 313미터이고 그 옆 봉우리인 망부석전망대는 286미터입니다.

 

왼쪽으로 진행하면 먼저 망부석전망대를 오르고 선유봉으로 가도록 등반로가 되어있고

높은 산은 아닌데 좁은 섬속에 있다 보니 경사도가 조금 높게 느껴질 겁니다.

 

왼쪽 길 게이트를 지나 산을 오릅니다.

 

맨 뒤를 따라가는데 회원 몇 명이 한명 두 명씩 뒤로 처집니다.

적당한 경사를 걷다 이 정도를 만나면 그리 힘이 들지 않을 텐데

산 초입부터 경사도가 있어서 힘이 드실 겁니다.

같이 보조를 맞춰줍니다.

 

'얼마나 가야해요?',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거에요?'

질문이 아니고 대상없는 투덜거림이 들립니다.

'다왔어요. 조기 조 등성이만 넘으면 되요.

조금만 참고 올라가면 신선을 만날 수 있데요..'

 

반응을 보여주니 반응이 나옵니다.

'에이 다 늙은 신선 만나서 뭐 하려고...'

그래요 맞긴 맞아요.

평생을 수도생활로 보내고 이제 다 늙어서 허연 수염 쓰다듬으며 바둑이나 두고 있을

신선 만나서 아무 할 일이 없지요.

 

그래서 말을 바꿉니다.

'이 섬이 미인도라고도 하고요. 젖가리개 섬이라고도 해요. 그러면 굉장히 큰 젖가리개이겠지요?'

누군가가 웃을지 알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썰렁한 것을 넘어서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봅니다.

 

뻘줌해져서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여인바위를 찍습니다.

아직 여인의 모습을 나타내기 전이지만

그냥 뒤에서 가려고 사진 찍으며 그 자리에 멈춘 겁니다.

 

그래요. 사실 말이 않되는 이름이지요.

미인도도 그렇고요.

보배에 비한다고 해서 비진도라는 것도 그렇고요.

이 섬은 통영 토박이 어르신 말에 의하면

바다에서 뱃일을 하다보면 다른 섬의 방향과는 달리 삐져나와 있는 것처럼 보여

 삐진, 비진섬이라 하다가

그것을 한문으로 옮길 때 비比와 진珍을 써서 비진도라 하였답니다.

대한민국의 대다수의 섬이 고려후기부터 조선 전기후반까지는 사람이 살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에

육지에서 보이는 또는 뱃사람들이 보는 모습으로 이름을 지은 건데

이름의 훈을 따서 한자로 옮기거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불리던 이름 비슷한 음가의 한자로 옮긴 후

그 한자의 훈으로 다시 스토리가 생긴 곳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이 섬의 또 하나의 이름인 미인도는 일제시대때 부터 생겨난 것이지요.

이 섬을 비진시마라고 부르니 일본인들은 미인도라고 알아들었지요.

美人의 일본발음이 비진びじん이거든요.

絶世美人을 일본어로 쓰면 ぜっせいのびじん이 되지요

그래서 망부석이 된 여인바위와 엮어서 비진도가 미인도가 된 겁니다.

 

젖가리개 섬은 더 황당하지요.

옛날부터 젖가리개 섬이라 불렀다고 한 사람은 아주 무지한...

 단지 이바구만 잘 푸는 그런 사람이었을 겁니다.

젖가리개와 브래지어 구별도 못한 거지요.

브래지어가 서구에서 상품화 된 시기가 1912년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가슴 아래부터 허리까지를 옥죄어

상대적으로 가슴을 보정하는 코르셋을 사용하였지요.

이 크르셋 윗부분에 캡모형을 단게 1900년 경 나타나고

그 후 별도의 브래지어가 탄생한 것이지요.

특히 우리나라에서 브래지어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이고

지금처럼 거의 모든 여성이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30년이 채 않된다고 합니다.

 

50세정도 넘은 분들은 대다수 기억하실 겁니다만

우리 어릴 때 버스나 기차에서 엄마들이 자리에 앉으면

뒤로 업었던 아기 포대기 돌려 앞으로 안으면서 젖을 물리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죠.

그것이 모성의 상징으로 보였고요.

 

한복저고리안에 저고리보다 약간 작은,

겨울에는 무명이고 여름에는 모시나 항라로 된 홑겹으로 바느질한 속점삼을 입었고

시집가기전 처녀들과 출산 전의 새색시들만이

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든 넓은 허리띠인 젖가리개를 하여

가슴을 드러나지 않게 동여맸는데...

 

옛날 누가 펼쳐놓으면 평평한

그리고 두르면 도리어 봉긋함을 가리는 젖가리개를 가지고 산이름을 만들었겠어요.

말도 않되는 소리지요.

그 말도 않되는 소리를 내 입으로 했으니...

이상한 놈 취급받아도 당연한 거지요.

 

참 좋은 산 올라가며 기분이 어째 찜찜합니다.

 

망부석 전망대

바로 앞에 시가 있는 언덕입니다.

 

여인의 얼굴을 담습니다.

이곳에서 보이는 여인의 얼굴이 망부석전망대에서 보는 모습보다 더 얼굴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저는 이 포인트가 더 좋습니다.

 

올라올 때는 여인의 젖가리개 생각을 하더니, 올라와서는 여인의 얼굴만 바라보고...

이따 도인을 만나서 마음수련을 좀 해야 되겠다.

아 그래서 저 여인바위 뒷부분 봉우리에 도인이 계시구나..

 

시를 읽어 봅니다.

 

망부석은 사진으로

박경리 선생의 시는 글로 옮깁니다.

 

그 옆

박경리선생의 시 입니다.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들면

바쁜 듯이 들 안을 왔다 갔다

상처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면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참으로 좋은 시이긴 한데

왜 여기 이 시판이 세워져 있을까?

 

물론 박경리선생이 통영에서 태어나셨고 통영에 묻히신 분이고

미륵산 정상을 올라가다 보면 그 분 묘소를 전망할 수 있는 쉼터도 있습니다만...

어쩌면 이 시가 산다는 것에 대한 어떤 회한이 아니고

이렇게 나마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를 나타낸다보고

그렇게나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돌이 되어버린 여인이 가련해서

그 위로의 마음을 이 시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렵니다.

 

망부석 전망대에서 망부석을 봅니다.

 

그리고 섬을 봅니다.

 

안내도를 첨부합니다.

 

이제는 그리 큰 경사가 아닌 숲길을 걸어 선유봉쪽으로 갑니다.

 

 

 

 

 

 

 

미인도 전망대

 

바다를 보고

 

섬이름을 부르는 대신 섬의 이름이 쓰여진 것을 봅니다.

 

거제도 망산 우측부분을 보고

 

어제 그리고 오늘 우리를 보듬어 주었던 매물도와 소매물도를 각별한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비진도 본섬

 

본섬과 바깥섬을 연결하는 사주.

 

섬과 섬의 연결에서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생각해 봅니다.

 

아까 박경리 선생의 시를 읽어서 일까요?

박경리선생이 다시 떠오릅니다.

그리고 최참판댁 사람들과 평사리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윤씨부인과 최치수, 최서희로 이어지는 최참판댁

그리고 그 연결 고리 속에서 삶을 엮어가는 평사리사람들 특히 김길상, 김환 등..

그리고 그 들의 삶의 영역의 확장, 그 삶의 전이과정이 쓰여 있는 이야기 토지...

 

다시 나의 발밑에 있을 망부석이 된 여인이 생각납니다.

아까 이 여인이 보이는 곳에 있던 그 시,

박경리의 산다는 것.

박경리의 어머니 때문에 망부석이 보이는 자리에 박경리의 시를 놓은 것 아닐까요?

 

박경리는 그 스스로 말하길

'나의 출생은 불합리했다.

이 허무한 세상에 왜 내가 태어났나 하는 것이 아니고

부모의 관계에서 온 나의 견해이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박경리의 초기 단편 주인공의 대부분은

남편을 잃은 여성이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딸이 등장합니다.

물론 박경리의 어머니가 홀어머니로 박경리를 키운 것은 아닙니다만

박경리에 글에 의하면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어머니에 대하여 타인이라기보다 오히려 적의에 찬 감정으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그에게 사랑을 구걸한 어머니를 경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초기 글에서 아버지를 지워버린 것 아니었을까요?

 

박경리의 아버지는 원부인을 버리고 네 살 연상의 여인과 다시 결혼하여 박경리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여기저기 유랑을 하며 이곳저곳에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박경리의 어머니는 망부석처럼 기다리고만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가 있으나 홀어머니아래서 어렵게 성장한 작가는 아예 아버지를 지워버린겁니다.

 

결국 望婦石이 없는 세상의 望夫石은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의 강요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앞바다의 섬을 보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흔들바위

흔들어 보라고 해서 흔들었습니다.

흔드는 나는 못 느꼈는데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고 합니다.

 

다시 흔들어 봅니다.

내 감각에는 미동도 없이 느껴지네요.

누구 글인지는 생각이 않나는 한 구절

'흔들바위, 흔들리면서 흔들리지 않는 눈부신 화두'

 

예전 유머 하나

설악산 관광온 미국인 몇 명이 문화재법 위반혐의로 붙잡혔데요.

이유인즉슨 설악산 일출을 보고 내려오던 덩치 큰 미국인 여섯 명인가가

바위를 힘껏 흔들어 바위를 벼랑 아래로 떨어트려 버렸답니다.

그래서 잡혀왔는데

이들은 '가이드가 이 바위는 아무리 밀어도 흔들리기만 할 뿐 넘어지지 않는다해서

흔들어 보았을 뿐이다'라고

고의성을 완강히 부인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당시 주변에 있던 사람을 데리고 와서 증언을 듣는데

증인이 말하길

'자초지종은 모르고 하여간 이 미국인 관광객들이 흔들바위를 밀자마자

엄청난 굉음을 내고 추락했다'고 합니다.

그래 어떤 소리가 났는가를 물었더니

 "뻥이요!"하는 굉음이 났다고 하네요.

 

역시 올드패션...

 

안내판

아랫부분흔들바위의 전설이 쓰여 있습니다.

'하늘로 올라간 선녀가 홀로 남은 어머니의 식사가 걱정이 되어

밑으로 내려 보낸 것이 밥공기모양의 비진도 흔들바위입니다.'

밥을 다 드셨으면 빈 그릇은 가지고 가고 새로 밥을 담은 그릇을 또 내려보내줘야죠.

홀어머니가 떠나셨나 봅니다.

 

경사를 내려와 경사를 다시 올라갑니다.

 

 

 

 

여기서 정상으로 올라가지 말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메밀잣밤나무 군락을 만날 수 있는데

그곳에서 정상으로 접근할 수 없으니 그냥 길 따라 갑니다.

 

이 부근 어디에 선유도인이 수도하던 곳이 있다는데...꼭 찾아야 하는데...

 

이 바위위 같기도 한데 선유도인도 맨날 신선놀음하다가 재미가 없어 졌는지 자리에 없습니다.

 

 

 

 

선유봉정상입니다.

 

매물도, 소매물도.

짧은 인연이었지만 오랫동안 우리를 지켜봐 줍니다.

고맙습니다.

 

소지도와 국도

소지도는 치마 입은 여인이 바로 누워 무릎을 구부린 모습이라고 합니다.

국도는 어느 종교단체가 점유하여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부터 가왕도, 대소병대도, 장사도, 거제망산

 

그리고 죽도, 그 뒤는 거제 가라산.

 

숲길을 걷습니다.

 

소사나무가 많이 보이고

그 속에서 봄에는 때죽나무가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자귀나무가 꽃을 피우는 곳입니다만

오늘은 마른가지만을 흔들어 환영해 줍니다.

 

뭐 그래도 고맙지요.

 

 

 

참식나무를 만납니다.

제주도외에서는 울릉도, 그리고 보길도에서 만난 적 있는데

이렇게 통영앞바다 섬에도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군락까지는 아니라도 제법 많이 있네요.

 

열매는 빨갛게 익고 향기가 좋아 향수재료로 사용되고

잎이 아토피, 관절염 등 염증성 질환 억제에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해서

이 나무에서 추출한 오일을 화장품 소재 및 입욕제 등으로 산업화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만약... 정말...이 자리가 이 아이의 생육조건에 맞아 번성한다면

원래 이곳에 있던 아이들은 다 쫓겨나게 됩니다.

이 아이들은 겨울에도 잎을 달고 있는 상록성식물인데다 키까지 쑥쑥 자라서

그 밑에 나오는 다른 식물들이 햇빛을 못 받게 해요.

결국 다른 아이들은 광합성에 문제가 생겨 시름시름 앓다가 다 떠나버립니다.

 

 

어쩌면 수종이 바뀔지도 모르는 숲길을 지나니 저 앞으로 설핑이치가 보입니다.

여기서는 슬팽이치, 또는 슬픈치라고 합니다.

 

 

 

내려오던 길 옆으로 전망대 한곳이 있는데 사람이 많은 듯 하여 그냥 지나치다 돌아봅니다.

그 전망대로 다시 올라갑니다.

 

노루여전망대입니다.

 

멀리 바다를 봅니다.

 

왼쪽부터 연화도, 우도, 욕지도, 외부지도, 그리고 두미도.

 

다시 외부지도, 두미도, 내부지도, 내부지도왼쪽 희미하고 뾰족한 곳이 남해, 추도, 설핑이치 우측으로 연대도, 오곡도

 

다시 바다를 한눈에 보고 안내판을 봅니다.

안내판 밑에 노루여와 설핑이치이름에 대한 설왕설래가 쓰여 있습니다.

답은 없네요 .

 

전망대에서 내려와 전망대를 다시 올려다 보고

 

설핑이치 건너 봉우리를 봅니다.

 

그 아래 해식동굴을 당겨봅니다.

저 부분을 구멍강정 또는 굴강정이라고 합니다.

저 아래로 내려가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부질없는 생각은 떨궈버리고...

 

고개를 돌려 노루여 전망대 단애 아래쪽에 붙은 바위를 봅니다.

저게 노루강정인가?

예전에는 이전망대를 노루강정전망대라고 했는데...

 

일단 섬하고 여를 구분해 볼까요.

'섬'은 생략하고 '여'는 썰물일 때 바다에 드러나고 밀물일 때는 잠기는 바위를 말합니다.

꼭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대개 그래요.

그러면 물 위에 드러나 있는 바위섬은 무어라 할까요?

맞히면 상품주는 것도 아니니 내가 정답을 말하지요.

'염'이라고 합니다.

염은 순수 우리말인데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작은 것은 여에, 큰 것은 섬에 흡수된 듯합니다.

 

강정은?

이건 순수 지방어인데

남해 일부지방에서는 높다란 해안단애에 붙어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바위,

그 사이 갈라진 틈을 강정이라고 하거든요.

이곳도 그런 식으로 쓴다면 저기가 노루강정이고

이런 강정이 있는 곳에는 물살이 세니까 당연히 노루탄이 되는 거지요

灘은 여울 탄이라고 읽으면서 통상 강이나 바다에서 폭이 좁아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을 이야기 하는데

물이 얕고 빠르며 돌이 많은 물가도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요...

국립지리원 지도에는 노루여가 선유봉정상에서 서쪽인 이곳이 아니고

 선유봉 정남쪽 해변에 안노루여, 바깥노루여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 한 장 보여주고 패스!!

 

해식동굴로 더 다가가 봅니다.

내가 간게 아니고 렌즈로 부른 겁니다.

방향이 틀려서 그 속은 볼수가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바다를 봅니다.

 

단애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보았는데 소지도가 눈부시게 나타납니다.

소지도. 한번 다녀오세요.

정기여객선이 없어 산양읍 수류마을에서 낚싯배를 빌러 가야 하지만

정말 아름다운 하얀 무인등대와 그 등대를 지키는 거북이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섬 전체를 지키는 거북이도요...

그리고 언제적까지인지 모르지만 사람이 살다 떠난 흔적을 보고

엄태웅이 걸었던 초지도 한번 걸어보시면

바람보다 먼저 내 귀에 와 닿는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비진도에서 소지도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니 공연히 비진도에게 미안해집니다.

하지만 산양읍 출신인 박경리의 시판도 세워져 있는 비진도 이니까

같은 한산면 비진리인 소지도 이야기정도는 이해하겠지요.

 

나만의 전망대를 만들고 그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고깃배의 회전을 봅니다.

 

참 이상합니다.

편하게 주변을 보라고 만들어 놓은 전망대에서는 마음이 급해져

 이리 저리 주변 사람 밀쳐가며 사진 몇 장 찍고 후다닥 옮겨가지만

이렇게 정비되지 않은 한 곳 지점 어딘가에서

나름의 전망을 보며 마음 편해 합니다.

나만 그런가요??

 

그 배가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 무슨 무슨 강정을 다시 한 번 돌아봅니다.

 

설핑이치 갈림길입니다.

 

조금 전 전망대에는 설핑이치라고 써놨더니 똑같은 기관에서 만든 이곳 안내판은 슬핑이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갈치바위 또는 슬핑이치가 아니고

갈치와 슬핑이치입니다.

 

갈치는 봉우리를, 슬핑이치는 언덕을 말하는 것입니다.

峙는 통상 언덕, 재 등을 의미하지만 봉우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갈치

갈치가 바람에 날려올라와 소나무 가지에 널렸다해서 갈치바위랍니다.

그냥 웃지요.

 

갈치는 연안에 나타나기도 하고 낚시에 걸려들기도 하지만

대부분 깊은 바다속 물깊이 평균 140미터까지 내려가 삽니다.

특히 난해성 어류로 찬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풍랑이 많이 부는 겨울에는 바다 밑 70미터지점 위로는 거의 올라오질 않습니다.

한겨울 풍랑에 날려 하늘로 떠올랐다가 소나무가지에 떨어질 고기가 아닙니다.

이따가 갈치가 걸려 있는 곳을 보여드릴게요.

 

갈치바위가 아니고 봉우리 이름이 갈치葛峙입니다.

한문그대로 칡이 많았거나 갈나무 또는 갈참나무가 많았던 봉우리라는 거지요.

峙는 언덕, 재 등을 통상 나타내지만 봉우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없느니만 못한 안내판이 나의 걸음을 방해합니다.

그래요, 스쳐가는 관광객에게는 말이 않되도 없는 것 보다는 있는게 낫지요.

하지만 두세번 온 사람에게 올 때마다 달라지는

그리고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안내판은 없느니만 못한 겁니다.

 

한때는 용머리라고도 한 봉우리 정상으로 갑니다.

3월이면 이 기슭에 하얀, 분홍 노루귀가 지천으로 피는데...

그리고 그 사이에 산자고와 괴불주머니가 폼을 잡는 곳인데...

조금 일찍 왔구나...

 

가다가 숨 돌릴 겸 뒤돌아봅니다.

 

고개를 오른쪽 뒤로...

 

왼쪽 뒤로 ...

 

선유봉 정상이 보여

그 정상에서 해변으로 떨어지는 능선을 쓰다듬어 봅니다

 

갈치 정상입니다.

마주보는 외부지도와 눈싸움한판을 벌립니다.

 

선유봉 기슭을 따라 주욱 내려오다 바닷가에 드러난 암벽을 봅니다.

갈치를 보여드릴 곳입니다.

단애로 내려갑니다.

 

전망 좋은 곳에서 오곡도, 학림도, 미륵도를 봅니다.

오곡도는 까마귀오,

학림도는 두루미학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했는데

이곳은 어울려 노닙니다.

 

특히 오곡도는 온통 절벽 투성이고 그 절벽 위에 두 개의 마을이 있고 마을로 가는 길은 가파릅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절을 열두 번 해야 마을에 이를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도 주민들이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그 섬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위장병에 약효가 있다는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래서 위가 별로 좋지 않던 일행이 그 찬물을 쭈욱마시던 생각이 납니다.

그 물은 지금도 마르지 않고 나오는지, 

그 물을 마신 그 사람,

위는 좋아졌는지,

잘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평소에는 어딘가 숨어 있다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으면 다시 떠오르는 기억들.

바위위에 퍼져 앉아 '나얼의 바람기억'을 부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가스펠같은 곡인데 조용히 부르니 완전 CCM이 되었습니다.

 

'바람 불어와 내 맘 흔들면

지나간 세월에

두 눈을 감아본다

 

나를 스치는 고요한 떨림

그 작은 소리에

난 귀를 기울여 본다

 

내 안에 숨쉬는

커버린 삶의 조각들이

날 부딪혀 지날 때

그 곳을 바라보리라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그 영원한 약속들을

나 추억한다면 힘차게 걸으리라

 

우리의 만남 우리의 이별

그 바래진 기억에

나 사랑했다면 미소를 띄우리라

 

내 안에 있는

모자란 삶의 기억들이

날 부딪혀 지날 때

그 곳을 바라보리라

 

우리의 믿음 우리의 사랑

그 영원한 약속들을

나 추억한다면 힘차게 걸으리라

 

우리의 만남 우리의 이별

그 바래진 기억에

나 사랑했다면 미소를 띄우리라'

 

엉덩이 털고 일어나 널린 갈치 찾으러 갑니다.

 

한 마리뿐이 못 보여드립니다.

 

예전에 찾아 왔을 때는 이 암벽에 수없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한마리만 그래도 비슷한 모습으로 걸려 있습니다.

서북풍 찬바람에 크게 쳐 오른 파도가 암벽에서 다시 흘러내려오면서 얼어 버려

넙적한 갈치모양의 고드름이 생기는 겁니다.

어느 봉우리 정상 소나무에 바다 생물 갈치가 걸린 게 아니고요.

 

기슭을 타고 올라가 오솔길을 걷습니다.

 

수포마을로 가는 길입니다.

 

 

 

 

수포마을은 이 바깥섬 유일한 마을이었지요.

미인도 전망대와 선유봉을 잇는 계곡에서 물이 내려오고

해안에 샘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수포라고 했습니다.

 

본섬도 새밋골 또는 샘골이라 하던 계곡주변에 지금의 내항마을이 형성되었지요.

그 만큼 물이 귀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이 발달하고 장비가 좋아지자

1980년대부터 심정을 파기 시작하여 4곳의 심정을 개발한 후 물의 소중함은 많이 줄어듭니다.

2006년부터는 한산도, 연대도, 용초도와 함께 해저 관로를 이용한 광역상수도망이 깔려

남강댐 물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해수욕온 사람들도 마음껏 샤워를 할 수 있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불편한곳, 배를 델 선착장도 없는 곳에 살 필요를 느끼지 않지요.

그렇게 마을은 없어지고 암자하나만 남아 있습니다.

 

버려진 밭에 잡초만 무성합니다.

 

슬픈치와 거미끝치 표시.

슬픈치라는 글자아래 화살표는 보려면 볼 수 있는데

거미끝치글자에는 화살표가 없습니다.

우리가 온길 쪽으로 되짚어 가면 설핑이치, 슬핑이치, 그리고 슬픈치라고 부르는 고개가 나오고

가던 방향으로 조금만 더 가면

검은 색깔을 띤 바위로 형성된 해안 모퉁이 고개인 거미끝치라고도 부르는 거무끝치가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돌담 뒤로 비진암 요사채가 보입니다.

 

길을 벗어나 바다 쪽으로 내려가 샘의 흔적을 찾아봅니다.

 

샘이 있습니다.

정성껏 만든 계단 옆에 대나무 발로 덮여 있고 그 위에 물바가지 하나 엎어져 있습니다.

발을 들어 볼까하다가 그럴 필요는 없는 듯 하여 바다로 내려가 봅니다.

 

흘러내려온 샘물이 검은 색깔을 띈 해안바위위를 지나 바다로 들어갑니다.

 

길로 돌아옵니다.

 

다시 비진암 요사채

 

밖에서 잠긴 문 위로 안을 봅니다.

지금 정진중입니다..가 아니고

문옆 못에 걸려있는 목탁이 스님이 않계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을은 스러져 갔지만 한때는 이 절집은 뒤에 법당을 별도로 세울 만큼 중흥한 적이 있었지요.

 

법당을 봅니다.

아마 문이 잠겨있을 겁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고시생들 등이

섬에 찾아오는 관광객과 반비례하여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이 길이 한려해상백리길이라하여 관광루트가 되었으니 

기도 빨이 센 곳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로 불자를 불러야 될 듯 합니다.

 

비진암 부근 허물어져 가는 집들 중 하나

이렇게 폭삭 내려 앉아 잡초에 덮여 흔적도 없어질 겁니다.

 

이 집은 튼튼하게 쌓은 울타리만 남겠네요.

 

거무끝치를 넘어 갑니다.

 

오른쪽 축대를 쌓아 일구었던 땅두릅을 심었던 밭들은 비어있고

왼쪽 바다 쪽으로 대나무 숲이 울창합니다.

섬지방에서는 통상 집을 지으면 집주위에 대나무를 심습니다.

바닷바람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꼭 필요하거든요.

광주리도 만들고 선반도 해달고 부엌 찬장도 만들고...

그래서 마을이 폐허가 되면 대나무 숲만 남아 번져 갑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을 운치 있다고 좋아하며 걸어갑니다.

 

암자를 지나 바로 허물어 진 집과 대나무 숲을 만나니

어느 대나무 숲 언덕 외딴집에서의 하룻밤의 사랑이 원망이 되어

그 원망을 달래기 위해 세운 암자가 생각납니다.

궁금하세요?

고흥 운암산의 수도암 이야기입니다.

다음 기행이 고흥반도라니 그곳에 가시면 한번 들러보세요.

 

'내 귓속의 장대나무 숲'

뒤 따라 올라온 생각의 꼬리

최정례의 시집이름이지요.

 

따라오는 시...

'숲'

그 시집 속에 있는 것은 아닌데...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

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니?

마침내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도 하니?

 

한 나무의 아름다움은

다른 나무의 아름다움에 너무 비슷해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푸른 흔들림

너는 잠시

누구의 그림자니? '

 

메밀 잣밤나무가 몇 그루 늘어선 길을 걷습니다.

옆 동네 욕지도에는 메밀잣밤나무 군락지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요.

메밀잣밤나무는 추위에 약해서 내륙에서는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곳이 한계선이라는 거지요.

그럼 매물도의 메밀은 식량으로의 메밀이 아니고 이 메밀잣밤나무를 말하는 것 아닐까?

섬에 메밀잣밤나무가 많아서 매물도 이었다가

어느 날 섬 전체를 덮은 찬 기운에 그만 사라져 버린 것 아닐까?

메밀잣밤나무를 구실잣밤나무와 비교하면

나무껍질이 조금 더 밋밋하고 잎이 얇으면서 끝이 조금 더 뾰족한 듯합니다.

구실잣밤나무가 째밤이라고도 부르는 잣처럼 생긴 밤맛 나는 열매를 매다는데

이 메밀잣밤나무는 메밀 비슷한 별 맛도 없는 열매를 매달고 있습니다.

하지만 밤나무와 구실잣밤나무가 꽃이 필 때 암꽃과 수꽃이 기다란 미상꽃차례에 무리지어 피면서 수줍은 향기를 풍기는데 비해

메밀잣밤나무는 메밀꽃 비슷한 꽃을 피우며 아무 향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가 맛이 없나봅니다.

 

몇 그루 만 보이더니

이제는 사스레피 나무가 이어집니다.

 

외부지도와 내부지도

외부지도는 뽈락 하고 전갱이가 많이 잡힌다고 하고 

내부지도는 참돔이 많이 잡힌다고 해서 낚시꾼들은 내부지도를 많이 가지요.

알려지지 않은 섬이란 부지도不知島라는 이름이 어느 날 夫支島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어느 누가 남편하고 갈라서서 그 섬에 들어가 살았는지도 모르지요.

 

그 북서쪽에는 맨날 만져달라는 만지도가 있는데...

비교적 사람들이 늦게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땅이라 해서 晩地島랍니다.

 

오곡도

까마귀 골짜기

연대도와 학림도 앞에 딱 버티고 있습니다.

 

다시 내,외부지도쪽으로 보이는 가두리양식장

무엇을 기를까요?

광어 등을 기르겠지요.

 

이름모르는 코지가 불쑥 나타나 엎드려 있습니다.

 

이어지는 숲길을 걸어갑니다.

 

 

 

 

 

분명 바닷가 옆 임에도 깊은 산길을 걸어가는 기분입니다.

 

간간히 커튼을 걷어 바다도 보여 줍니다. 

춘복도와 범여가 보이는군요.

범여에 낚시꾼 2명이 있습니다.

많이 잡으셨어요?

공연히 궁금합니다.

 

잡초만 우거진 밭을 보고 오다가 파랗게 물든 밭을 만납니다.

섬초가 사람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겨울시금치라는 이야기지요.

시금치는 원래 이른 봄이 되어야 먹을 수 있던 채소입니다.

가을에 순이 돋아 어렵게 월동한 후

땅이 녹기 시작한 후 자란 놈을 삶아먹고 데쳐먹고 하였지요.

재배법이 발달하여 시설재배, 고냉지 재배 등으로 사철 먹을 수 있었는데

이게 시금치의 특징인 단맛을 살리지 못해 풀맛만 나니까 인기가 시들해졌죠.

그러다 주목을 받게 된 것이 겨울 시금치인 섬초입니다.

섬초는 생김새가 여느 시금치와는 조금 다릅니다.

마치 질경이처럼 낮게 옆으로 퍼져 자랍니다.

그리고 잎이 두꺼워 꿇는 물에 데쳐도 퍼지지 않고 원래모양을 그대로 유지하여 씹는 맛도 있고

바닷바람이 키워서 인지 맛이 아주 좋다고 합니다.

포항지역에서 가장 먼저 포항초란 이름으로 상품화해서 성공을 이루었고

그 후 신안, 남해 등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습니다.

그 후 남해안 웬만한 섬지방에서는 섬초를 기릅니다.

이곳 통영앞바다 섬에서 한산도는 조금 대규모로 한다는데

이곳 비진도나 부근 용초도는 대부분 생계용 밭에서 시금치를 키웁니다.

오전에는 시금치를 거두고 오후에는 이를 다듬어 단을 묶어 어느 한 시설에서 거두어서 배로 통영으로 내보내면

중간상이 값을 쳐 보내주지요.

1,2월 섬초는 제법 값이 나가기 때문에 꽤 짭짤한 소득이 된다고 합니다.

 

다시 짧은 숲길을 걸어갑니다.

 

 게이트를 지나 뒤돌아 봅니다.

 

비진도 문지기인 충복도와 범여를 다시 만나고 ...

 

산을 오르기전 회원들의 큰 짐을 모아두었던 장소로 돌아옵니다.

 

그 옆 공터에 있는 가슴가리개모양의 비진도라는 안내판을 이제야 봅니다.

아까 그 회원님들도 이 안내판을 미리 보았다면

그런 불쾌해 하는 눈빛을 나에게 보내지 않았을 텐데...

하여간 어느 분이신지 나름 어머니의 품까지 들먹이며 말 만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또 다른 안내판

 

바깥섬에서 본섬으로 이어지는 시멘트길을 이용 내항마을로 넘어가려 합니다.

아니 우선 외항마을로 가야 하는구나.

지금 바라보이는 저 본섬 끝 마을이 외항마을입니다.

내항, 외항할 때 항은 항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항마을은 본섬 가운데 대동산과 천둥산이 연결된 목을 내항이라고 하고

본섬의 남쪽이 바깥섬과 이어진 곳을 외항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외항마을이 바깥섬이 아니고 본섬 맨 남쪽에 있는 것이지요.

 

섬사이 사취가 성장하여 두개의 섬을 연결하게 된 사주위 길을 따라 갑니다.

좌우에 몰이 널려 있습니다.

말이라고도 하는 못 먹는 모자반입니다.

이름이 검둥모자반이라나 큰잎모자반이라나...

 여름에 주로 뜨는 것은 괭생이모자반인데 겨울에 떠오르는 것은 이름을 잘 모르겠네요.

모자반은 갈조류로 우리나라 남해안 및 일본 전 연안에 흔히 서식하는 해조류입니다.

바다 밑 바위에 붙어사는데 부실한 놈들이 떨어져 나와 바다를 떠돌다 해변으로 밀려듭니다.

이놈들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자마자 푹퍼져서 아무짝에 쓸모없이 됩니다.

진도와 제주도에서는 참모자반이라는 먹을 수 있는 모자반을 채취할 수 있어 돈이 됩니다.

특히 제주에서는 몸이라고 하는데 모자반에 돼지고기를 뼈째 넣어 끓인 것이 몸국이지요.

못 먹고 못살던 시절 잔치를 하려면 고기가 있어야 되니까 집에서 기르던 돼지를 잡아 잔치음식을 만듭니다.

돼지의 잡냄새를 없엘겸 해서 모자반을 집어넣고 끓인 다음

삶겨진 돼지는 꺼내 수육으로 잘라내어 접시에 담아내고

그 남은 살점과 뼈는 다시 끓이면서 메밀가루로 국물을 걸쭉하게 만들어 국을 해서 먹었죠.

계속 모자반만 넣으며 물만 더 부으면 손님이 몇 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절 탄생한 음식인데

지금은 콜라겐이 많아서 피부미용에 좋다고, 전통음식이라고 제법 비싼 값에 팔리고 있습니다.

진도에서는 모자반을 주로 된장국에 넣거나 무침으로 하더군요.

그곳에서는 고혈압과 중풍에 아주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여기에 널려있는 못 먹는 모자반은 무엇에 쓸까요.

자연바람과 내리는 비로 염분이 어느 정도 제거되면 밭위에 깔아 자연비료로 씁니다.

그러면 섬초가 더 맛있어 진다고 하더군요.

 

남해바닷속을 잠수해서 들어가 보면 산호초는 거의 없고 이 모자반 종류들이 해중림을 이룹니다.

우리나라 연안고기들은 거의 다 고향이 모자반 숲속입니다.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몽돌해변입니다.

 

어, 매물도가 보인다.

 

왼쪽은 모래해변

왼쪽 파도가 더 세서 몽돌이 부셔져 모래가 된 것이 아니고

들고 나는 조수가 연안에서 끌고 내려온 모래가 계속 쌓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을 오른쪽 몽돌 둔덕이 버텨주고 있습니다.

 

다시 오른쪽 바다를 봅니다.

 

그 중에서 대,소매물도만 따로 떼어낼게요.

그래도 조금 전에 다녀온 곳이라고 많이 각별합니다.

 

다른 섬들도 섭섭해할까봐 한 번 더...

 

한번도 대,소 매물도

 

외항마을 표지

 

오른쪽 몽돌해변 끝 코지를 한번 바라보고

 

마을길로 들어갑니다.

 

마을회관과 보건소를 지나니

소나무숲 공원이 보입니다.

그 앞 슈퍼로 다 들어가네요.

 

여기가 오늘 우리의 종점이랍니다.

예? 내항마을로 안 넘어 가고요?

한시 반 배인데 오늘 바람이 세서 배가 일찍 올 수도 있답니다.

한시 경까지 이 부근에 있다가 다시 외항마을포구로 넘어가겠답니다.

하~ 이 섬은 올 때마다 나에게 아쉬움남기고 가게 만드는 구나.

 

혼자 파고라로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고 들어서인지 바람이 점점 세지는 것 같습니다.

공연히 소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원망합니다.

다른 때 같으면 바다바람에 실려 오는 소나무향이 너무 좋다 그랬을 텐데요.

 

까구막고개를 올라와서 선유봉쪽을 봅니다.

 

다시 내려와 섬 서쪽 모래사장을 왔다 갔다 합니다.

 

 

 

 

 

슈퍼 앞으로 돌아와서 회원들을 따라 갑니다.

 

회원 한 분이 섬초를 삽니다.

 

그런데 마을 아저씨 저울을 가지고 나오셨네요.

아까 들어 갈 때는 그냥 눈대중, 손대중으로 팔았는데

꽤나 많은 회원들이 섬초를 사셨나 봅니다.

 

그래요. 정확한 게 좋은 것이겠지요.

하지만 많이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현지에서 분위기에 사는 건데 왠지 각박해 보입니다.

 

외항마을부두로 가는 길에 본 앞바다의 모습.

 

떠날 때가 되어서 그런가?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섬은 나를 가지 말라하고 바람은 빨리 나가라 하고...

바람이 허락하는 날

다시 올게요.

 

바람을 피해 숨어 있는 사이 배가 들어 왔습니다.

 

무언가 아쉬움에 안내판과 마을표지를 다시 한 번 보고...

 

 

배를 탑니다.

 

비진도 외항마을포구를 출발하여 내항마을포구를 들러 나왔습니다.

 

계속 모습을 바꾸며 떠다니는 섬을 봅니다.

 

 

 

 

 

 

'오늘도

유랑의 길 떠다니는 섬

지나간 바람의 자락을

잊었다 할지라도

그대

빈자리를 말하진 않으리

비가 울고 파도가 우는 날

치마자락에 아버지 손은 떨리고

먼 바다로 떠난 뒤 오지를 않았다

 

행여 그것이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던가

섬은 밤 새 떠돌면서

바람을 안고 소용돌이 치면서

 

떠나야 하리

돛대를 올리고 물길을 잡으며

밀려드는 조류를 타고

허옇게 드러난 강바닥을 향해

잠시 날개를 접고 잠을 재운다

 

떠나는 그대의 하나의 숨결

지나간 시간들이 가슴 설레어도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으리

아픈 가슴의 상처 메만지면서

그리고 잠들어야 할 것인가

물 위에 뜬 그림자 하나로

 

바라보면 멀리도 와 있는 수평선 위에

떠도는 것을 멈춘 그대는 섬이련가

아니면 한 잎의 나뭇잎새다

 

허락받은 표류를 돌려 보내며

세월속을 둥둥둥 떠다니는 섬

하나, 둘, 셋

검은 수염으로 돌아온 그대는

밤이되어도 늙은 아버지

욕망의 돛은 내려진지 오래거늘

이 외딴 점 하나

밤을 새워 물결을 타고

자꾸만 자꾸만 떠서 다니리

 

얘기하라

먼 당신의 아쉬웠던 시간을

누구의 손길도 와닿지 않은

그대만의 전설을 이 밤에 말하라.'

 

신상일의 '떠다니는 섬'입니다.

80년대의 어느 날 여기서 내 닉네임을 따왔지요.

 

갈매기가 따라 옵니다.

오지마라. 이 흔들리는 갑판위에는 나뿐이 없단다.

너희에게 줄 새우깡하나 준비 못했음을 멀리서 나무라렴.

 

 

 

아쉬움 가득 남기고 비진도를 나와 떠다니는 섬들 사이를 지나며
비진도 닮은 숫자 8자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모차르트 - 피아노 소나타 No. 8
베토벤 - 바이올린 소나타 No. 8
브루흐 - 클라리넷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곡 Op. 88
멘델스존 - 현악 8중주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No. 8 '비창'
코다이 - 무반주 첼로 소나타 No. 8
브람스 - 현악 5중주 Op. 88 '봄'
슈베르트 - 교향곡 No. 8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