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순례길 2구간 4. 독쪽골제에서 고산천따라 어우리까지
독쪽골제를 한바퀴 돌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독쪽골
이이름이 무엇을 이야기 할까요?
경기도 여주 어딘가에도 독쪽골이라고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그곳에서 황순원의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독짓는 늙은이가 살았다고 하여 독짓는 골이라고 하던 곳이
독쪽골로 바뀌었다고 하던데...
여기도 그럴까?
옆에 계봉산이 잇으니 닭하고 한번 연관해서 제주도식으로 해석해 볼까요...
제주어로 닭을 독으로 발음하니까
닭이 쪼는 곳...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안수사 창건 설화도 계봉산의 닭이 지네형상의 전주를 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집을 새웠다하고
닭이 항상 배가 부르도록 보시를 하고 저녁에도 촛불을 켜고 공양을 드리던 풍습이 아직까지 이어져 내려온다 하니
어딘가 쪼을 자리는 있어야 할 것 아닐까요?
그래서 안수사 바로 밑 이부근을 독쪽골이라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쓰다보니 생각나는게 안수사 대웅전앞에 꽤 오래된 팽나무가 두그루(?)있는데
팽나무는 제주도에는 지천이지만 이곳에서 보기는 그리 쉽지 않지요.
어.. 그러고 보니 여주 독쪽골 인근에도 계명현(鷄鳴峴)이라고 닭에 관한 지명이 있는데...
그래 이렇게서 엉뚱한 말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웃고마세요.
문득 안수사를 가보고 싶어집니다.
삭도엔진에서 바로 올라가면 2~30분 걸릴텐데...
안수사 대웅전에 걸려 있는 고종때 만들어 졌다는 칠성탱과 독성탱을 보고
새끼거북을 업은 어마거북이 산을 향해 오르는 바위앞에 있는 안수다헌에서
공짜차 한잔 먹으며 멀리 서해바다를 보고 싶어 집니다만...
이길도 힘든데...무슨 소리를...
쉰다고 하면서 엉뚱한 생각만 하는 군요.
다시 한번 빙돌아 보고
제방둑을 뒤돌아 보며 앞으로 앞으로..
단풍의 향연
저 단풍든 소나무
리기다인줄로 알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리기다라고 이야기 했다가 면박을 받은 후로는...
면박준 사람도 나무 이름을 모르고 당시 주변사람들도 이름은 모르지만 리기다는 아니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모르고 지나오는 나무입니다만..
오늘은 더 유난히 멋있어 보이네요..
미안하다..멋지게 서 있는데 너의 이름을 불러줄수 없어서...
민망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가
고개를 숙인채 갈림길을 지나갑니다.
저기 계봉산 봉우리
왼쪽 고지 그 8부능선쯤에 만수사가 보이나요?
현장에선 보이는데
그리고 축소하지 않은 사진에도 보이는데
포스팅한 사진에는 않보이네요.
그래도 한번 찾아보세요.
계단식 수로
제비실길이라는 방향표지가 있습니다.
그 방향으로 가면 각구실다리라고 있는 것은 압니다만 제비실은 처음 들어요.
뭔가 재미있는 사연이 있을 듯한데 알재주가 없지요.
그건 그렇고 구명산 기슭을 깍으면서 꽤나 넓은 도로공사를 합니다.
제방길을 걸으면서 고개가 반대쪽으로만 돌아갑니다.
계봉산을 보고 또 보고
뒤로 빙 돌아보고
다시 보고
구명산
언제 정자를 세웠을까?
예전에도 있었나?
아닌데...
저기 꼭대기에 있는 것은 기억에 없고
남봉교를 건너 제방 인근 오래된 버드나무 있는 곳에 만사 구극창이 지은 망북대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만사 구극창이란 인물은 학문이 높았으나 향촌에만 묻혀살았고
그를 높이 산 우암 송시열이 망북대 현판을 썼다는 말이 있어서 잠깐 관심을 가졌었지만
아무런 실체가 없었는데 지금은 산마루에 정자하나가 보입니다.
누구는 이 산이 살쾡이형상이라 하네요.
그래서 계봉산 닭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저 산 기슭 망북대 있던 곳 앞 남봉보에서
삼월 삼짓날에는 안수사주관으로 용왕제를 지내고
정월 대보름 전 길한 날을 받아 남봉리 부녀자들만이 모여 산신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독쪽골다리 너머로 고산면 읍내리가 보입니다.
십자가가 세개가 보이네요.
맨 오른쪽이 고산성당이고 가운데가 읍내교회이고 왼쪽은 모르겠네요.
성당부근으로 초등학교 뒤에 향교가 있을 거고...
저 왼쪽으로 보이는 산이 운암산인가?
한 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올 수 없이 험준하다고 저승바위라고 이름 붙은 곳이 있는데...
그 꼭대기 넘어 다음 고지로 봉수터흔적 찾는다고 갔다가
눈아래 보이는 대아댐 매력에 푹 빠졌던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그런데....
여기 독쪽골 다리 넘으려는 지점
여기 왼쪽으로 4대종교의 화합을 상징하는 모세의 지팡이를 닮은 아름다운 순례길 표지목이 서 있다고 하던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를 않네요.
圓과 卍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표지목이라고 해서 어떻게 새웠나 궁금했는데 볼 수 가 없습니다.
짧은 생각입니다만 종교간 화합이라는 게 말이 영 그렇습니다.
그럼 또 다른 절대자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하기가 어려워요.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내가 믿는 절대자가 참으로 선하신 유일한 분이지만
미쳐 그 분을 모르고 다른 이를 절대자로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
종교가 화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불교에 대해 조금 알고 있고 우호적인 편이지만
내 신앙이 불교가 아니니 다른 믿음이 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할 뿐이지 화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좌우로 고개를 둘레둘레...
4년동안 가설하고 있는 다리
교각 하나 세워놓고 1년, 상판한줄 놓고 1년.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다리입니다.
보기싫어서 고개를 외로 꼬고 지나갑니다
목이 아파서 고개를 좌좌우우로...
다리를 건너서
고산면 읍내리와 마주 하고 있습니다.
표지판이 고산면 소재지를 바이패스하랍니다.
뭔소리래?
여기까지 와서 고산을 안들르고 천변길만 따라가라니....
지금 바로 보이는 십자가중 맨 우측에 보이는게 고산성당 십자가일 것이고
그 동북쪽에 고산향교가 있는데...
고산이 한때 현청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향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명색이 순례길인데 고산천주교회 100주년 기념성당은 보고 가야 하는 것 아닐까?
고산성당은 1893년 설립된 되재본당의 후신입니다.
고산지방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791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지역일대 골짜기는 오지에다 척박한 땅이지만
박해를 피해 때 피난 온 신자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기에는 천혜의 땅이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로는 전국에서 신도들이 이 지역을 피난처로 삼아 모여드는 관문의 역할을 한 곳이 고산 지방이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후로는 전국에서 이주해온 신자들로 일대에 많은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1894년 하강 이남에선 최초로 고산 성당의 전신인 되재성당이 건축되었습니다.
되재 본당은 1896년 11월에 축성된 성당으로
서울 약현성당에 이어 두번째 세워진 성당일뿐만 아니라 한옥성당으로는 우리나라 첫 번째 성당이었습니다.
불행히 1950년 6.25로 전소되고 1954년에 공소강당을 지었고 2009년 10월에 복원되었지요.
이곳 고산성당은 1958년 4월에 축성되어 관내의 기존 또는 폐쇄된 본당들을 공소로 소속시킨후 일대의 신앙의 중심지가 됩니다.
그후 고산성당이 가진 역사를 배경으로 고산 본당 설립 1백주년 기념사업으로 1994년 기념비적인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바이패스 하라니....
올레길, 둘레길,그리고 순례길 등이 생기고 이정표가 세워집니다.
참으로 반가운 표시이지요.
길이 좀 험하다해도, 전혀 낮선길이라 해도 안내판을 만나면 많이 반갑고
안내판이 장시간 보이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길이라도 불안하고
길섶의 모든 풍경에 눈길한번 주지 못하고 안내판만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꼭 저표시를 따라가야만 된다는 강박감.
그 표시에서 조금만 벋어나도 반칙인 것 같은 거북함..
그래! 가라는데로 가자.
천변길을 걷습니다.
남봉보
남봉교앞을 가로질러
고산교 다리밑을 지나 해지는 서쪽을 마주하며
만경강변 고산천 제방길을 터벅터벅 걷습니다.
사진까지 찍어 놓고
그림판독을 잘못하여
길을 지나쳐 왔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마냥 갑니다.
차라리 천호성지가기에는 더 빠르겠습니다만
순례길코스가 아닙니다.
어우동에게 혹했다면 황홀하기나 할텐데
와우가 어우로 바뀐마을에서 햇갈리고 있습니다.
어우 바보!
한참을 더 가다가 다시 빠꾸
희안한 곳에 붙어 있는..
차라리 빠꾸로 돌아와야 더 눈에 뜨이는 느바기를 만납니다
Alexsander Grechaninov
Symphony No. 5 in G minor, Op. 152
I. Maestoso
Conducted by Valery Polyansky
Russian State Symphony Orchest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