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조경단, 박동화상, 3연대창설비, 혼불문학공원
건지산(乾止山) 줄기 울창한 소나무숲옆에 있는 조경단으로 갑니다.
이곳은 한말에 고종이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이라 명명한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21대조라고 하는
전주이씨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의 묘와 단이 있는 곳입니다.
애초 건지산에 단을 건립하려고 한 것은 전주 이씨 시조묘의 묘역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답니다.
조상 제사에서 제단은 세대가 올라가 더 이상 제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조상을 임시로 제사지낼 때 사용되거나
세월이 흘러 망실된 조상의 묘소를 대신하여 만들어집니다.
조경단의 건립 역시 실전된 시조 묘소를 대신하여 설립한 것이었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 가묘假墓를 세우는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정자각을 두어 제장으로 삼는 일반적인 능원의 형식과는 달리
무덤 앞에 제단이 있는 독특한 형식이 되었고
나중에는 이곳이 진짜 시조묘가 되어 버린 곳입니다.
완산지(完山誌)의 건지산조(乾止山條)에는
"신라 사공공(司空公)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언전(言傳)에 따라 영조는 땅을 파서 그 묘역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얻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고종은 1899년(광무 3년) 건지산에 단을 쌓게 한 뒤
친필 비문을 내려 `대한조경단비'를 세우게 합니다.
肇는 비롯할 조, 꾀할 조라고 읽으니까
바로 이곳에서 부터 경사로운 일이 시작된 곳,
새왕조가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 경사로운 일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 염려되고
제발 오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비석을 새로 세우는 저물어 가는 이씨왕조 수장의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조경단은 구전에 근거해 쌓았을 뿐
`동국여지승람'이나 `진남루기'등 조선조 전기의 문헌에는 사공공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의문으로 남는다고
1970년대 전주시사(全州市史)에는 씌어져 있었읍니다.
그런데 두명의 전주이씨, 이환의(李桓儀)가 전북도지사로 있고, 이해권(李海權)이 부지사로 있을 때인 1970년에
당시 대통령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1972년 묘역과 재실 주변에 돌담을 샇고 지금과 같이 정화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화된 시설이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후로 전주이씨 어느 한종파에서 지내던 제가
대동종약원주관으로 바뀌어 해마다 봄철에 대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조경단이 전주를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 되었지요.
본 시설보다 기세 당당한 하마비를 지나 궁궐급 대문앞으로 왔습니다.
당연히 문이 잠겨있습니다.
조경단 안내판을 읽고 ...
담위로 사진기를 높이 올려 묘와 단과 비각을 사진기에 담습니다.
안내판 읽으려 온 셈이 되었습니다.
소리문화전당 옆쪽에 이곳과 연관된 제각이 있다는데 그곳은 생략합니다.
체련공원에 인접해 있는 박동화선생 동상으로 왔습니다.
"내 목숨이 부지하는 한 난 연극을 할거야.
다른 사람들은 공부에 미치고 정치에 미치고 돈에 미쳤는데,
나는 그만 연극에 미치고 말았어.
왜 하필 배고픈 연극에 미친 줄 아나?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인생의 멋을 봉사할 줄 아는 연극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하지만 그 자랑스러움을 느낄 사이도 없이
조그만 시민 아파트에서 초등학교 교사인 부인과 함께 어렵게 생활하며
작, 연출한「등잔불」공연의 개막을 앞두고
병마에 시달리다 등잔불처럼 꺼져 가신 분입니다.
작품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로 1961년에 국립극단 장막극 현상 모집에서 당선되어
중앙무대에 진출할 기회도 있었으나
전주에서 창작극회를 창단하고 극작과 연출에 전념하며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전북 현대연극의 역사라고 하여
이분의 연극정신을 기리기 위해 박동화 연극상이 제정됐으며
매년 선생의 기일(6월22일)을 즈음해
이 동상앞에서 수여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국악인 권삼득, 시인 서정주. 신석정. 이병기, 서예가 송성용, 이삼만, 황욱, 소설가 최명희씨 등과 함께
전주를 빛낸 문화계 인물 9명에 선정되어 있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 옆에 비에 흠뻑 젖어있는 국군제3연대창설 6.25한국전참전 기념비
창군초창기 국군에 자원입대하여 국군제3연대를 창설함으로서 국군의 기초를 다지고
6.25전쟁 발발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우거나 전사하신 유공자분들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1998년에 건립된 조형물입니다.
1946년 2월 16일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의 3연대가
향토청년들의 지원에 의해 향토부대로 창설되었습니다.
당시 3연대의 연대본부는 이곳에 있었고
군산, 남원,이리에 각 1개 대대씩 위치하였습니다.
자원입대한 청년들은 후에 국군으로 개편되어 한국전 각전선에서 산화합니다.
이 비는 2003년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전후세대들의 호국안보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고취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만
통치권자를 잘못만나 잘못된 행위에 동원된 이력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우국충정과 국가를 지켜낸 희생보다 그 몇가지 잘못을 침소봉대하는 세력들 때문에
공은 사라지고 과만 남아
현충이라는 말이 흘러간 옛사랑의 이야기로 변해 버린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old fashioned love song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고...
그 가사속 한구절...
No need in bringing 'em back 'cause they've never really gone. 그 노래는 진짜 사라진 적도 없기 때문에 되돌릴 필요도 없다...
그럴까요?
기대해도 될까요?
덕진공원주변을 빙둘러 최명희묘소로 가는 길에 만난 진주강씨의 제각.
이곳이 진주강씨 참판공파의 파조 강안복의 3남으로
별좌공파의 파조 어모장군 이성(利誠)의 묘역이 있는 곳입니다.
이 신도비각속에는 그 집안 인물의 신도비가 있겠지요.
이자리로 지나온 이유는 사실...
오래전에 이앞을 지날때..
이 부근일대에 골프장을 만든다고 누군가가 흥분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다행히 필드가 들어서지는 않았네요.
전주천년고도옛길 중 건지길입구표시와 혼불문학공원(혼불의 작가 최명희묘소) 입구표시
건지산길 입구로 들어갑니다.
비가 내려 질척이며 미끄러운 길을 따라 들어가자 혼불문학공원이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하단부에 이곳에 관한 설명과 최명희 문학관,
그리고 최명희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이 공원에 대한 설명을 옮기면
이공원은 2000년에 전주시가 전북대학교와 함께 조성했다고 합니다.
선생의 문학청년시절의 모습을 형상화한 부조상이 있고
그 아래로 반원형의 10개의 안내석이 있는데
후배작가들이 혼불과 선생의 어록에서 가려 뽑은 것이라 합니다.
찬찬히 돌면서 하나씩 살펴봅니다
열개의 안내석 중 가장 좋아하는 글이 아예 안나왔네요
살아있는 사람들 한테는 누구나 혼불이 있다고 합니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감성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르키는 말이지요.
강연록 '나의 혼, 나의 문학'중에 있는 글입니다.
1980년 부터 1996년까지 심혈을 기울여 혼불을 집필한 작가는
1998년 세상을 떠납니다.
마치 혼불을 쓰기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혼불을 마치고는 그렇게 떠나버렸습니다.
갑자기 혼불의 무대를 가보고 싶어 집니다.
남원시 사매면 노봉마을
삭녕최씨가 터를 잡고 있는 곳
30년대 그 암흑기를 배경으로
남원 지방의 무너져 가는 종가를 지키는 며느리 3대의 삶을 통해,
대대로 전승되어 온 풍속의 세계가 그려진 곳..
그곳이 보고싶어 집니다.
이제는 볼수 없는 어느 한 장소
소설의 주인공인 효원이 마지막까지 살았던 종가집 본채.
2007년도엔가 불에 타 없어졌다는 그곳도 다시 보고싶습니다.
누구는 남원에도 문학관이 있고 전주에도 문학관이 있다고
낭비니 중복투자니 툴툴거리지만
문화에서는 낭비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곳은 상호보완이 되는 곳입니다.
여기 안내석에는 없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최명희의 글 한조각을 떠올립니다.
"눈멀고 귀먹어 민둥하니
낯바닥 봉창이 된 달걀껍데기 한 겹,
그까짓 것 어느 귀퉁이 모서리에 톡 때리면
그만 좌르르 속이 쏟아져 버리는 알 하나.
그것이 바위를 부수겠다 온몸을 던져 치면 세상이 웃을 것이다.
하지만 바위는 아무리 강해도 죽은 것이요
달걀은 아무리 약해도 산 것이니,
바위는 부서져 모래가 되지만
달걀은 깨어나 바위를 넘는다."
오른쪽 길, 정비된 길로 내려갈까 하다가
올라온 길로 내려갑니다.
갑자기 눈에 띄는 작은 봉분
봉분의 크기가 삶의 크기는 아닙니다만
비석도 없는 모습에 갑자기 우울해 집니다.
한참을 누군가의 봉분 그옆에 머믈다가 내려갑니다
또 다시 확 깨는 예비군 초소
올라갈 때는 혼불의 스토리를 생각하며 가다보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인데
이제는 이리도 선명하게 보입니다.
홍련과 백련을 만나러 덕진공원으로 갑니다.
취향정에서 향기에 취하고
풍월정에서 풍월을 읊어 볼까 했는데
비는 계속 내리고 화무십일홍이라
아무리 예쁜 꽃도 시간의 흐름 앞에선 무기력합니다.
그나마 백련은 모두 떠나 버렸습니다.
이미 절정을 지나버린 스타의 모습을 한 붉은 연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뒷북치는 내 모습도 아름답지 않을 듯 하여
목필균의 '붉은 연꽃'한 번 읊으며 공원을 나섭니다.
살아온 길이 아무리 험한들
어찌 알 수 있을까
꼭 다문 붉은 입술만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네 발자국
만나는 사람마다
환한 미소 보일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보시라고
진흙 뻘에 발 묻고도
붉은 꽃등으로 켜지는 너
또 어딘가로 발길을 옮깁니다.
Domenico Scarlatti
Complete Keyboard Works - Vol1
Scott Ross, Harpsich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