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전주 이흥발정려, 전주박물관 야외, 장개남정려각, 능안마을

하늘타리. 2012. 11. 26. 17:23

8월 16일의 기록입니다.


몇일전 전주인근의 아름다운 순례길 9개코스중 2개코스를 사흘에 걸쳐 걷고나서 그 사진을 올리려다가

8월달에 전주, 거제, 창령, 고창, 군산, 무주를 주마간산으로 돌고

다시 전주로 와서 돌아본 기록중 전주에서의 기록을 올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먼저 찍은 사진부터 올립니다.

 

첫 방문지로 목은 이색 영당뒤에 있는

김상헌 등을 따라 척화를 주장한 이흥발의 정려를 가보기로 합니다.

사실 명분은 척화가 그럴듯 하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느냐?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분명히 그럴만한 능력이 않되는 걸 알면서 척화를 주장하던 이들이

청과의 전쟁뒤 엄청난 피해를 당한 이 민족과 강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병자호란과 그 이후를 한번 생각해 봅니다.
청과의 관계를 말하려면 그 이전 명과의 관계를 이야기해야 겠지요.
명나라가 임진왜란시 조선을 도와주어

왜군이 물러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명나라의 도움을 받으며 7년간의 전쟁은 끝났지만

조선과 명나라 모두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선은 국토가 황폐하고 사회가 문란해져

경제,사회 부분 전반에 파탄이 생깁니다.
명나라도 많은 병사들의 지원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경제가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를 이용하여 후금이 명나라를 침략합니다.
1619년 명나라는 후금을 치기 위해 만주로 출병하며 조선에 파병을 요청 하였고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은혜를 생각 하여 병력을 출병 시켰지만

조선군은 패전 하고 말았습니다.
1623년 후금의 능력을 인지한 광해군은 명과 후금의 양다리 외교정책을 펼치며 국방에 힘썼으나

‘명의 은혜를 저버린 임금’으로 치부되어 서인과 남인의 반대 세력들이 생겨납니다.
광해군은 반대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임해군, 영창대군, 능창군, 인목대비 등을 숙청하였으나

이것이 더욱 반대세력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실각합니다.
인조가 왕에 즉위하자  명나라에 새로운 임금이 인조임을 통보하며

항명배금(向明排金)의 정책을 확연히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후금을 결정적으로 자극하지요.
후금은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과 한택을 앞장세운 3만의 군사로

 조선을 침입 합니다.
1624년 1월16일 의주를 돌파한 후금의 군사는 1월 24일 개성을 함락하였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상대의 약만 올리던 인조와 조선의 대신들은  아뜨거워라 놀라며

1월 25일 강화도로 피신하였습니다.
후금도 강화에 도착하여 화의를 제의합니다.
결국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고

명나라와 적대한다는 조건으로 3월 3일 화의가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계속 후금을 얕잡아 멸시하며

명나라를 사대합니다.


그러나 후금은 명나라와 전투 에서 연전연승을 하며

1625년 수도를 심양으로 이전합니다.
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 원승환의 저항으로 누루하치가 사망하기도 했습니다만

명나라는 이자성의 난 등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나 국가 통제력을 읽어가고 있었습니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더욱 세력을 굳건히 하면서 조선에 군신관계를 종용하며

명나라와 가까이 한 것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왕자를 인질로 보내라 합니다.
10년 넘는 세월 큰소리만 쳤지 아무런 대비도 못해놓은 조선이

이번에도 큰 소리를 칩니다.
청나라사신이 와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습니다.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의 기운으로 기울어졌으며,

도리어 8도에 선전교서를 내립니다.
이에 청나라에서 1636년 12월,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입합니다.
이 전쟁이 병자호란입니다.


홍타이지가 이끄는 약 10만의 청군이 12월 2일 압록감을 도하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한성에 알려진 것은 12월 12일이었는데,

이 때 청군은 이미 개성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청군의 침입 소식을 듣고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청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지요.
또한 조선군은 애초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산성으로 퇴각한 것이었으므로

성 내부로 퇴각한 1만 2천의 군사와 수만의 백성들을 지탱할 수 있는 비축물자가 없었습니다.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으므로 더 이상의 보급을 기대할 수 없어서

조선군의 사기는 점점 저하되어 갔고

겨울철의 혹심한 추위로 인한 동사자가 다수 발생했으며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왕인 인조조차 죽 한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고,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아사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싸우다 죽는게 아니고 굶어 죽고 얼어죽는 군사들을 보면서도

척화파에 둘러쌓인 인조는 여전히 항복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청군과의 협상을 시작은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김상헌을 필두로 한 주전파와

최명길의 주화파가 여전히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적 포탄이 하루 종일 날아와 성첩이 파괴되고 있는 중에

최명길이 항복하는 내용의 국서의 초안을 쓰면

 김상헌은 그것을 찢으며 적진으로 가서 자결하겠다고 소리지릅니다.
결국 성내의 군사들이 척화파를 모두 묶어 내보내라고 시위 벌이는 와중인 1월 22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피난했던 강화도가 청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1월 25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조선군의 항전 의지는 이것으로써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지요.

결국 1월 28일,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고,

1월 30일, 남한산성에서 나옵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三拜九叩頭.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방식으로 항복의 예를 치르게 됩니다.
이로써 전란은 끝나게 되지만

청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당시 세자로 있던 소현과 봉림대군

그리고 많은 백성을 포로로 잡아 갔습니다.

이 후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봉림대군(효종)에 의해 북벌이 계획되는데

효종은 청에 대한 복수를 위하여 군비강화를 추진하여

훈련도감의 군액을 증대시키고,

또 어영군과 금군을 정비 후 개편하였으며 기마병의 확보에도 주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비강화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려 했고,

또한 노비 추쇄(推刷)를 엄격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흉내로 그치고 말지요.
자기의 기득권을 전혀 놓치지 않으려 했던 조정권신들의 이런저런 태클로

제대로 준비돠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요.
대표적으로 송시열은

앞에서는 북벌에 찬성하는 태도를 취하면서도

뒤돌아서는 군비확장을 반대합니다.
그렇게 유야무야된 것이 바로 북벌론입니다.

 

이곳에 정려된 이흥발은 정묘호란 이전인 인조 4년(1626)에 상소를 올려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을 목벨 것을 요청했으며,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에 패하자 관직을 버렸다고 합니다.


인조가 땅에 머리를 꽝꽝 부딪치며

적장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볼때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보다 얼어죽고 굶어죽는 병사들을 보기나 했을까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아녀자를 포함한 많은 백성들이

청나라로 잡혀갈때 그는 고향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공허한 학문을 익히다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 그에게 영조 29년(1753)에 정려가 내려옵니다.


무엇을 기리는 정려일까요?

 

지조를 지켰다고요?

 

지조는 이색선생처럼 지켜야 합니다.

 

이흥발의 정려앞에 영당이 있는
이색선생의 지조를 살펴봅니다.

목은 이색(李穡)은 성리학을 이땅에 소개, 확산시킨 인물로

정몽주, 정도전, 권근, 변계량, 이숭인, 남은, 조준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의 스승이기도 하지요.
그는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면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후 우왕의 사부가 되었으나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폐가 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는 역성 혁명에 대한 부정적입장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자 그의 문인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뉘었고

특히 한 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남은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하여

그에게 악랄한 비판을 가합니다.


정몽주가 피살된후 그도 정몽주일파로 연좌되어

 정도전의 상소로 인하여 장단으로 유배되었습니다.

해배되어 돌아온 뒤에도 계속 이숭인·변안렬·우현보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였고

이씨조선 개국후에는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습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1395년  태조 이성계로 부터 출사(出仕)를 종용받았으나 끝내 고사하다가

1396년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급사하였고

그의 사인은 지금도 의혹을 남기고 있습니다.
후세에 이르러 서애(西厓) 유성룡이 위(魏)의 벼슬을 받지 않았던 후한(後漢) 조의 양표(楊彪)에 비겨서

그 절개를 특별히 특필하는등 숭상받게 되어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습니다.

 

목은은 공민왕의 신하로

실질적인 개혁을 위해 온 힘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그 개혁의 효과가 나타나기 전에

고려왕조를 엎으려 하는 세력에게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합니다.
그들로 부터 수없는 박해와 고난을 받았어도 참고 견뎌왔으며,

이씨조선개국이후 출사하면 후하게 대우하겠다는 유혹도 과감히 뿌리칩니다.

 

이색선생의 영당입니다.

 

대문은 잠겨있고 어느 전화번호로 연락하라는 데

이 아침에 개인의 자격으로 전화한다는 것은 말이 않되겠지요.


담장너머로 영당을 봅니다.

서울 수송동 목은선생영당에 봉안된 영정(보물 제1215호)의 모사본이

모셔져 있다 합니다.

 

들어가보지 못하는게 아쉽기는 하지만

지난번 서천에 다녀온 것으로 갈음하기로 합니다.

 

안내판에 의하면

이 영당은 한산이씨 전주화수회에서

2000년 종회로 부터 2억 8천만원을 지원받아

2002년에 준공하였답니다.

 

재실옆을 지납니다.

 

이흥발의 묘역이 보입니다.

비문의 내용이 궁금해

가볼까 하다가 이 빗속에 풀밭을 지나기도 그렇고 해서 바로 정려각으로 갑니다.

전형적인 모습의 정려각이 있습니다.

 

 

비석이 없는 비각을 이런 저런 생각속에 찬찬히 둘러보고 돌아 나옵니다

 

 

전주박물관으로 갑니다.

 

보물  제1325호로 지정되어 있는 낙수정 출토 고려시대 동종이

전주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고 해서 갔습니다.

이 동종에 대한 설명을 옮기면
"이 범종은 일본인 다까하라 히미꼬 여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소장해 오던 중

1999년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통해 기증·반환한 것으로,

종을 매다는 용뉴 부분의 훼손이 있기는 하나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종의 윗면은 수평에 가까우며,

어깨부분인 상대와 맨아래 부분인 하대에는 띠를 돌리고

그 안쪽으로 반원무늬와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상대와 연결된 사다리꼴 모양의 유곽 테두리에도 덩굴무늬를 얕게 조각하였으며,

유곽 안에는 작은 꽃받침을 갖춘 유두가 돌출되어 있다.
종의 약간 아래쪽 2곳에 배치되어 있는 당좌는 종을 치는 부분으로,

이중원의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덩굴무늬를 장식하였다.

당좌를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며 배치된 4개의 비천상은

구름 위에 꿇어앉고 두손을 모아 합장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비천상은 다른 문양들보다 도드라지게 조각되어 있다.
종에 새겨진 기록이 없어 종의 제작년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형태와 문양 및 성분비율 등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계승하여 고려 초에 제작된 범종으로 생각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볼까 했는데 인연이 아직 이른지

박물관이 문을 열 시간이 아직 아닙니다.

 

야외 전시장을 둘러보며 문열리기를 기다리자 생각하고

야외전시장좀 둘러 보겠습니다 하며 체인이 내려진 박물관 정문을 지나가자

경비가 뒤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소리를 같이 지릅니다.
전시장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야밤도 아니고,

야외 전시장을 둘러 보겠다는데 왜 그리 요란을 떠냐고요.


어디다 전화를 하려는지 씩씩거리면서 경비실 안으로 들어갑니다.
나와서 가라고 하면 나도 욕한마디 해주고 가려고 마음 먹습니다.

 

그래도 속으로 움찔하면서 가라고 하기 전에 하나라도 보자하며

완주 이서면에서 발견되었다 하는 한쌍의 문인석이 있는 곳을 잰걸음으로 지나

 

몇곳의 고분군을 옮겨놓은 곳과 옮겨 복원 한 것을 둘러 봅니다.

 

안내문은 읽지 않고 우선 사진부터 찍습니다.

 

 

 

 

 

 

 

 

 

 

 

본관 전시실을 흘깃보고 반대쪽으로 갑니다.

 

남근석

 

이 남근석은 순창군 팔덕면에 있는 것을 본따 만들었다 합니다.

 

군산조촌동 양안마을 우물

 

그 우물을 옮겨온것인지

본따 만든 것인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우물뒤에 솟대가 서 있습니다.

 

부안읍 서외리 서문안 장승을 본따만든 장승

 

조금 떨어진 우물뒤에

긴 석주 위에 오리 한마리를 앉힌 서문안 당산의 돌솟대가 있고 ,
남장승이라는 상원주장군,

여장승이라는 하원당장군이 있습니다.

 

지리산 실상사에 상원주장군과 상주 남장사에 하원당장군이 짝을 잃고 혼자씩 있는데 반해

부안 두 석장승은 쌍으로 있어 보기가 좋습니다.
아참! 나주 어딘가 불회사라는 절집에도 측백나무 숲길사이에 두분이 계십니다.

주, 당의 표기가 어떠한 이유가 있는 건지,

단순한 모화사상 때문인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唐이 堂을 뜻하고 周는 꼬불꼬불한 길을 뜻한다네요.

불교교리를 많이 아는 또 다른 누군가는

절에서 지장전 양옆에 신장 역할을 하는 존재로 인왕상의 형태로 표현하고

오도전륜대왕의 부하인 중원갈장군과 함께 지옥의 3원장군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확인해줄 사람이 주변에 없습니다.


여기서는 식당인가, 까페인가를 지키고 있습니다.

 

경비실로 들어간 경비는 나오질 않고

출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한두명 보입니다.
지금 시간 8시 40분.

개장시간까지 기다리기가 싫어집니다.
박물관을 나옵니다.


나오면서 경비가 한마디 하면 두마디를 해주려고 전투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쳐다도 보질 않네요.

 

전주박물관을 나와 길을 지나는데 정려비각이 있습니다.

 

효자장개남지려

부친이 중병을 얻어 사경을 헤메이며 기러기가 먹고 싶다하시는데

그것을 구할 길 없어 울며 하늘에 빌었더니

논에 기러기한마리가 떨어져 이를 부친께 먹였더니 병이 나았답니다.
인조 5년(1627년)에 전라감영에서 이사실을 조정에 상신했고

이에 정려가 내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그 후 이곳을 효자리라 하였고

지금의 효자동이 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전주시자료를 보니 효자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효자동은 "본래 전주군 우림면의 지역으로서 효자가 살았다고 해서 효자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호암, 후곡, 구동, 초전, 한절리와

신평, 봉강, 신주, 용산, 함대리의 각 일부와 이동면의 호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효자리라 하였음.
1935년 1월 30일 우전면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11월 6일 전주시에 편입되고,

같은 해 12월 12일 전주시 조례 제 108호에 의하여 완주군 우전면의 송정리를 편입하여

효자동1가로 효자리를 효자동 2가로 흥산리를 효자동 2가로 하였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1, 2, 3가를 합하여 효자동이 됨.
그 후 1990년 7월 1일 전주시 조례 제 1681호에 의하여 효자동이 효자1동과 효자2동으로 분동 되었고,

1997년 10월 4일 전주시 조례 제 2136호에 의거 동간 경계조정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옛 비석을 용도폐기되었다하여 없에지 않고 한곁에 세워두었습니다.

 

능안마을로 갑니다.
능안마을에서 천장봉쪽으로 가면 장개남의 아버지 응두의 묘가 있고

비문에 그 아들에게 효자 정려가 내려 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해서

한 번 볼겸 왔는데

엄청큰 비석과 봉분이 눈에 띄여

누구의 묘인가 궁금하여 다가가 봅니다.

 

묘지로 가는 길에 최근에 세운듯한 커다란 신도비가 앞에 두개

그리고 오랜시간이 흐른 듯한 보통크기의 비석이 뒤에 세개 있습니다.

울타리가 둘러 있고 출입문이 잠겨있어

건립 연대 등 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전면 글자에 의하면 좌측은 탐진 안씨의 시조인 문열공 안원린(安元璘)의 신도비이고 

우측것은 문열공 안원린의 장남으로 알려져 있는 문충공 안우(安祐)의 신도비입니다.
문충공 안우는 공민왕(恭愍王) 때 군부판서(軍簿判書)와 상호군(上護軍),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거쳐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전공을 세워 무명(武名)을 떨친 문무겸전의 구국충신으로

1794년(정조18년)에 탐진 안씨 후손이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에 조곡서원을 세워

용비어천가를 지을때 많은 역할을 담당한 고은 안지선생과 함께 배향하였습니다.

 

그 앞쪽 꽤 큰 묘역은 안지의 아버지 안사종의 묘역입니다.

 

 

돌아나오다 보니 봉건비라 하여

1977년에 두 신도비를 세운 내역이 있습니다.

 

아마 탐진 안씨의 재실이겠지요.

 

 

이길이 전주삼천마실길에 포함 된 한구간인것 같습니다.

당연하죠

삼천동을 한바퀴 도는 마실길이니

고려말에는 300호가 넘게 살았다는 삼천동내 큰마을을 안들를수 없겠지요.


능안마을의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안내판의 설명에 추가하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지금 완산고 교무실이 들어선 자리가 능이 있던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고

일부는 쑥고개길 쪽에 있는 이흥발의 묘가 너무 거창하여

그곳을 능이라하여 능내라 하였다고도 합니다.

 

장개남의 아버지 응두의 묘도 가보고 싶고...

또 마을 서쪽에 말을 대규모로 키워 마골이라고 불리우는 골짜기가 있다하고...

그 마골옆으로 시신의 육탈을 돕기 위해 거적 등을 덮어 둔

초분의 흔적이 남아있는 채빈골도 있다하니...

가보고 싶습니다만

기록자체가 정확하지 않아 마을분들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보이는 분도 없고 이 아침부터 무덤이니 초분이니 그런 것을 물으면

돌아올 것은 짜증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 어딘가로 발길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