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산동-주천구간 3.19번 국도변에서 주천면 외평마을까지
점심을 먹고 하르방을 만난 그자리로 다시 왔습니다.
고향 떠나 객지에서 고생하는 돌하르방은
이자리를 오고가는 많은 여행자들이 지치고 힘들때라도
이들을 보고 즐거웠던 또 다른 여행을 생각하게 해줄겁니다.
이 자리를 떠나며
떠나온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만큼 새로 만날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걷는동안 항상 용기를 주렴!
하고 당부해 봅니다.
또 다른 굴다리를 지나 산길로 접어듭니다.
밤재터널
일방통행이지요.
이쪽은 구례쪽에서 주천방향으로 나오는 출구입니다.
1988년도에 만들때는 그냥 왕복2차선이었는데
1998년도엔가 굴하나를 더 뚫어
하나는 상행선 하나는 하행선으로 운용합니다.
나는 상행선 너는 하행선 우리는 갈 길이 달랐다.
뽕짝 한소절...
세상 이치가 각자 마주한 방향이 다르면 나아가는 방향도 다를 수 밖에...
이 길에서도 텅빈 도로는 도시로 뻗어가고 나는 산을 오릅니다.
초입의 자그마한 언덕과 몇개의 실개천을 건너면
성과 같은 돌담이 나오는데...
이 지역에 성을 쌓았다는 역사기록을 확인하지 못했으니
그냥 돌담이라고 봐야지요.
그래도 미련이 남아 설화를 떠올려 봅니다.
이곳 용궁리 옆에 구기리라고하는 같은 주천면 마을이 있습니다.
그 권역 지리산 마루에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정령치가 있지요.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령치에 쌓았다는 산성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 있어
옛날 전설을 전해주고 있는데
그 한자락이 이쪽으로 뻗은 것은 아닐까?
그러기엔 좀 멀죠?
그냥 걷기 심심하니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펼쳐 보았습니다.
마을의 영산 영제봉에서 비폭골쪽으로 흐르는 물이
중간 중간 옆으로 작은 내를 만들어 흘러내려옵니다.
용궁마을
길을 허락해 주신 마을 주민께 감사드립니다.
다른곳에서라면 심드렁하게 보아넘겼을 글인데 이곳에서는 각별히 마음속에 다가옵니다.
둘레길로 계획했던 숙성치에서 내려오는 길은
사유지라고 주인이 길을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돌아오는데
이길도 주민들의 상수원보호로 막는다고 하면
그냥 포장도로따라 걸어야 하지요.
거듭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궁마을 숲길을 걸어 갑니다.
길이 넓어지고
작은 보를 만들어 놓은 작은 다리를 건넙니다.
다시 한번 작은 고개를 넘고 ...
전형적인 산간마을의 외곽을 지납니다.
해발 300미터 정도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간마을을 용궁마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궁금해
남원시홈피를 찾아봤더니
신라 진성여왕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대로 옮기면
"신라 진성여왕때(서기 890년경) 이 마을 동쪽,
해발 1050m의 높은 산 영제봉(英帝峰)에 부흥사(富興寺)라는 큰 절이 세워졌다.
그 절은 고승과 선사들이 자주 드나들면서 휴양한 곳으로 지상낙원이며
마치 바닷 속의 용궁(龍宮)과 같아 땅위의 용궁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마을 이름이 용궁으로 되었다고 한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부흥사는 어느 시절 파근사로 바뀌었다하고
그 절도 정유재란 당시 불타 없어 졌다고 합니다.
영제봉에서 비폭골쪽으로 가다보면
파근사지라고 일컫는 공터에
우물터도 있고
깨어지고 흩어졌지만 꽤 크게 만들어 졌던 부도의 조각 등
절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그 영향 탓인지 마을 윗쪽과 아래에 윗 당산과 아랫 당산이 보존되고 있으며
윗 당산과 아랫 당산의 중간지점에 수구막이로 3기의 누석단이 쌓여져 있습니다.
윗 당산은(용궁윗당산: 둘레 560㎝)은 남신(男神)을,
아랫 당산은 여신(女神)을 상징하는 것으로 삼았고
마을 주변 토지 이름에도 명대사(明大師), 조리배미, 왕답(王沓), 장구배미 등
승려의 이름이나 그 밖의 특유한 사물을 대상으로 호칭되는 논이 있는데
이러한 전답을 통틀어 산신제답(山神祭沓)이라 칭하며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마을 공동소유의 것으로 하여
그 수입을 가지고 양쪽 당산제를 지내왔다고 합니다.
지금도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당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숙성치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지역부근, 정문뜸이라는 곳입니다.
정려각과 재실이 보입니다.
효자 동부녹사유익경지려
효자가 되기 위한 필수요건은 다음중 하나가 들어가야 합니다.
왕상(王祥)의 효, 맹종(孟宗)의 효, 시묘(侍墓)의 효, 할고(割股)의 효, 단지(斷指)의 효, 상분(嘗糞)의 효 등등.
이중에 약을 쓰면서 병세를 짐작하기 위해 부모의 똥을 찍어서 맛보는 상분을 한
고려후기의 효자 유익경에 대해 조선 중기에 정려를 내리면서 동부녹사에 제수했습니다.
그 비각과 그 비각을 관리하기 위한 서산 유씨 재실 감모재입니다.
비각에서 보이는 단풍에 혹해서 숲길로 들어섭니다.
저수지 한곁이 보입니다..
장안저수지
이 저수지를 만들던 1943년까지 이곳은 장안리에 속해 있었나 봅니다.
용궁저수지는 이 것보다 조금 작은데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야하는 외용궁마을부근에 있습니다.
다시 길로 나갑니다.
저수지자락을 따라 걸어갑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원천천을 넘어 바로 육모정앞이 나오는 데
둘레길은 우리를 장안리 외평마을쪽으로 인도합니다.
어디로 인도하던 관계는 없습니다만
이 용궁마을에 있는 우리가 지나온 계척마을 시목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산수유.
진성여왕시기 설촌되면서 심었다는 산수유가 있고
그 주변으로 정말 정말 아름다운 산수유군락지가 있는데
그 모습을 보지 못하는게 아쉬운 것이지요.
진성여왕때 부터 있었다면 지금 나이 1100살은 넘었다는 이야기입니다만
어느 오지랖넓은 사람이 실제 수령을 측정해 보니 400년 가량 되었답니다.
사실 시목도 수령을 측정하면 애매해 집니다.
설화는 설화로 놓아 두어야지
거기다 과학의 잣대를 들여대는 오만인지 바보짓인지..
400년된 나무에서 피는 노란 산수유,
그리고 지금 달려 있을 빨간 홍진주를
보지 못함이 아쉽습니다.
다시 저수지에 필이 꽂힙니다.
걷다보니 주변 산마루들이 어떻게 저수지에만 필이 꽂혀서
산마루는 전혀 않보냐며 나무랍니다.
기죽어서 음메...
장안저수지 수문앞을 지납니다.
굳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 그나마 옛길을 찾아내고...
눈으로 걸으며 행복해 합니다.
길가에서 조금 떨어져 아무도 관심을 갖지않는 비석이 있습니다.
면장양공용조 기념비
뒷면을 봅니다
수십갈래의 작은 물줄기가 있어도 큰물을 만들지 못해 고생하다가
위의 길을 직접 방문후 힘써주셔 바다와 같이 물을 막았네
그 이후로 가뭄의 피해가 없고 등등..
이곳 장안리 외평마을은 600년전부터 마을을 이루었으나
농업용수가 마땅치 않아 정말 고생고생하던 마을이었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인 면장이 주관하여 상급기관에서 예산지원을 받고 사람을 동원하여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만든후에
식수 및 농업용수가 해결되어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정말 마을사람들에게는 고마운 분이었을텐데 그냥 비석만 덩그러이 서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비석은 해방후에나 만든것 같습니다.
단기 4276년이라고 썼는데
그러면 1943년..
아직 강점기인데 독립투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단기연도를 쓸수 있었을까요?
비석의 형태로 보아서도 그리 멀지 않은 예전에 개비한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효자비
그리고 그 옆 그 부인의 열행비.
조공대부 동몽교관 누구누구
소학의 도로써 제생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분인듯 합니다.
조공대부는 종 4품 하품계이지만
조공대부를 하고 돌아가셔서 효자로 정려를 받으셨다면 더 상품계로 증직이 되었을 테니
그 품계와 직위를 적었을 것인데
증자없는 품계를 적은 것을 보니
조정으로 부터 효자정려를 받은 게 아니라 후손에 의해 세워진 비석인듯 합니다.
그리고 그 옆 그 부인의 열행비.
이분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산이 생각납니다.
다산은 마을마다 서 있는 효자비와 열녀문을 보며
이것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라고 통박했습니다.
다산은 감히 효자야말로 부모의 죽음을 빙자하여 이름을 도둑질하고
부역을 피하는 간사한 도둑이라고 말합니다.
효는 자식된 자의 마땅한 도리일 뿐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고 덩달아 칭찬하는 일을 국가가 조장하니,
마침내는 본래의 의미까지 퇴색하고야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소학과 더블어 널리 가르쳐진 "삼강행실도"'열녀'편을 보면
열녀 110명 중에서 죽음으로 열녀가 된 사람이 80명이라고 합니다.
죽지 않은 열녀 30명은 고귀한 신분들이었지요.
연암이 "烈女咸陽朴氏傳"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젊은 과부로 살아 이웃의 이러쿵저러쿵하는 험한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식구들에게 누가 될까 봐 목을 매단 열녀도 손으로 꼽을 수 없는 정도였다 하고
아들이 죽었는데 며느리가 따라 죽지 않으면
온 식구가 작당해서 죽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내몰았다고 합니다.
효(孝)와 열(烈)이 없으니 효자와 열녀가 강조됩니다.
충신을 표창하는 세상은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위징이 당태종에게 충신보다 양신이 되고 싶다 했듯이
충신이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아 자신은 후대에 길이 이름을 남기지만 왕을 욕되게 하는 사람이고
양신이란 왕의 뜻을 잘 받들어 왕 뿐만아니라 자신까지도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렇듯 평온한 세상에는 충신이 필요없습니다.
오직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왜곡된 현상일 뿐입니다.
조금 늦게 나타나는 외평마을 표지
외평마을은 주천면소재지로 각 기관이 모여있습니다
아주 옛날 통일신라 때부터 일대의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조선조까지 우리가 출발한 구례군 남원면 원촌마을까지 걸어서는 한나절,
말로 가면 반나절 걸리기 때문에
여기서 사람도 쉬고 말도 쉬는 원천원(元川院 )이 있었습니다.
옛사람이 정한바와 같이
이제 또 다른 교통과 소통의 중심지로 거듭납니다.
고가도로 같은 도수관로가 보입니다.
지금도 쓰이나 궁금합니다만
다가가지는 않고 멀리 사진만 찍어 둡니다.
원천초등학교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설립되어
53년에 첫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59번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습니다.
지금은 각학년에 한개반씩이 있으며 한반에 10명을 넘지 않으나
다행인 것은 유치원 학생이 15~6명이 되어
점점 학생이 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전참봉 최병현시혜비
이 분에 대한 시혜비는 운봉가는길 가장마을에도 있습니다.
아직도 쓰임이 반가운 물고랑.
개망초
원래 군락으로 피는 두해살이 풀이지요.
강변에 모여 피어나는 개망초는
메밀꽃밭보다 아름다울때도 있습니다.
그 어렵던 시기
주린 배 졸라매고 부황든 어머니들
왜풀떼기 나물이라고 불리우던 이꽃을 삶아 먹고 쪄먹고 살았읍니다만
하필 그 당시 나라가 망하여
애꿎고 힘없는 꽃에다가 망초라고,
아예 개망초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래도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버텨갑니다만
그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도 이제는 기력이 쇠했는지
군락보다는 개체로만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개망초꽃 한송이를 손에 들고 가만히 들여다 보시면
흰색과 노란색이 조화를 잘 이룬 속에
꽃 크기마저 앙증스러운 것이 정말 정말 아름다운 꽃입니다.
난이 아무데서나 살아간다면 난을 난이라 할까요?
백합이 논두럭에 집단으로 피어 난다면 그리 귀한 취급을 받을까요?
잘 살아준다고 잘 자라준다고 천대받는 아름다움
개망초
그래도 이아이들은 화해라는 꽃말로 우리를 용서합니다.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나호열의 흘러가는 것을 위하여...
드디어 드디어 지리산 둘레길 종점이자
또 다른 시작점인 주천면 장안리 원터거리에 왔습니다.
감격을 하고 싶은데...
억지로 라도 하려고 했는데...
공연히 뻘줌합니다.
전구간을 다 걸은 게 아니기 때문일겁니다.
순서에 관계없이라도 전구간을 다 걸었다면
이 순간
알게모르게 가슴이 벅찼을텐데...
군데 군데 몇곳
그것도 정해진 구간이 아니라
가다가 엉뚱한 곳으로 오르고 내린날이 많아서 일겁니다.
도착지점에서 공연히 미안했던
지리산 둘레길 마지막구간의 기록을 마칩니다.
Ottorino Respighi
symphonic poem, P. 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