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김성수 생가, 손화중 피체지
미당 문학관을 나오는 길가에서 본 송덕비
수당김연수선생송덕비라고 적혀 있네요.
김성수 선생의 동생이자 개인적으로도 이름이 있는 분이지요.
돈 버는 면에서도, 친일행각으로도, 재산의 세습 면에서도 모두 뛰어난 분입니다.
그래도 자기 고향이라고 무언가 좋은 일을 하신 것 같습니다.
무어라 쓰여 있는지 읽어 봅니다.
"바닷물이 넘쳐서 산골로 밀려들어 바다의 고기들을 우리에게 주듯이
수당님의 어지심이여 이 땅에 그득 하사 이 두메 길마재에 까지 닿도다.
하늘이 열린 뒤 처음으로 선왕산에 차 다니는 길을 내주시고
우리 아이들의 학비를 이어 대시어 이 마을의 미래를 단단케 해 주셨나니
이 마을에서 태어난 사람 누구나 길이길이 그 덕을 칭송하여 끝이 없을 지로다...
누가 쓴 글인가 했더니 미당 서정주선생 글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래서 욕을 먹는 구나.
미당선생은 시적으로는 뛰어 날지 모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젬병이었습니다 .
일제 때 친일 행적은 일제강압에 의한 협조라고 백번 좋게 생각한다하더라도
80년 광주항쟁과 전두환 정권 수립 와중에서 TV 방송에 출연,
군부 지지를 공개 선언함으로써 씻기 힘든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 비의 주인공 김연수는
학교경영과 언론사 운영 등으로 사회 활동에 나선 김성수를 대신하여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을 맡은 이후 조선총독부와 가까이 지내면서 오랫동안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헌신적으로 꼬붕일을 했기 때문에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경성방직 사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수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1939년 경성부 주재 만주국 명예총영사, 194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직을 받기도 했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경성방직을 기반으로 군수 산업에 뛰어들고자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는 등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1944년 전쟁 지원을 위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 부의 족벌세습에도 김성수와 함께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서
그가 1924년 ‘삼수사(三水社)'라는 이름으로 설립한 삼양그룹은
3남인 김상홍과 5남 김상하의 공동 경영 체제를 거쳐 손자 김윤이 회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재판부에서도
수당 김연수가 운영한 "경성방직은 일제에 협조해 일제 식민지였던 만주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전시상황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며
"일제 강압에 의한 협조라기 보다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한 자발적 협조로 보인다."고 판시했을까요.
이 글도 언제 쓴 것인지는 모르지만 미당선생의 평판을 깍은 또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지요.
김연수와 그의 형 김성수의 생가를 가보려고 합니다.
인촌길이라고 이름한 도로를 지납니다.
김성수의 호를 따서 인촌길이라 지었을 수도 있지만
김성수의 호가 고향마을의 원이름인 인촌마을에서 따온 것입니다.
오른쪽 마을, 안현마을인데 최근에는 돝움볕마을이라고 하던데...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벽화로 장식돼 있습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소재로 ‘누님’의 얼굴과 노란 국화, 형형색색의 꽃과 나비를 벽돌담과 슬레이트 지붕에 그려놓았고
벽화 속 인물은 모두 이 마을 주민들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마을뒷산 등성이에 미당의 묘소가 있습니다.
오늘은 패쓰합니다
인촌 김성수선생 생가가 있는 인촌마을 초입의 고목, 정자 그리고 비석
좋은 말만 쓰여 있을 비석을 지나 인촌생가 앞에 와 있습니다.
이 건물은 김성수와 김연수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
낮은 담을 경계로 북쪽에는 큰 집을, 남쪽에는 작은 집을 세웠는데,
하나의 대지 안에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두집을 함께 지은 점이 특이하다고 쓰여 있습니다.
풍수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이 집이 명당이라고 하고
땅기운이 뭉쳐 솟구친 호남 제일가는 양택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북향집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이집은 큰댁의 대문은 서향이고 작은댁의 대문은 북향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전체적으로 좋은 방위의 주택이라고 쓴 글을 읽은 적 있습니다...만..
제가 보고 들은 것으로 보아선 어떻게 지었건, 어디에 지었건
그 집에 살던 사람이 돈과 명예를 얻었으면 그 집은 명당이 되는 것이더군요.
그런데 생각해 볼 것은 과연 이곳에서 태어난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돈과 명예를 얻었을까요?
한때는 돈과 명예를 얻었고 그 자손들 대대로 떵떵거릴만한 돈과 조직을 만들어 주었으니 그만하면 되었습니다만
지금 누가 인촌과 수당
그리고 이집 어느 방에서 태어났다는 광우병사태때의 농수산부장관 인촌의 외가집 사람 정운천을 명예로운 인물이라고 하겠습니까?
고택에는 들어가기도 전에 이런 저런 생각이 드는 것은
개인적으로 중앙중학교를 다녀서 최근 밝혀지는 사실들에 더 가슴이 아픈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건물로 들어가 봅니다.
건축에 대해서는 아는바 없으니 주욱 들어갔다가 주욱 돌아 나오겠습니다.
주욱 들어갔다 주욱 나왔습니다.
두 번을 왔었으니 오늘까지 세 번째로 들어가 보는 건데
항상 느끼는 게 '참 큰집이구나'하는 생각뿐입니다.
"큰댁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작은댁 안채는 두 분의 조부인 김요협이 세웠고,
큰댁 사랑채의 문간채는 고종 30년(1893) 인촌 선생의 양부인 김기중이 지었고
작은댁 사랑채는 1903년 두 분의 아버지 김경중이 지은 것이다.
1907년 봄, 그 당시 이 고장을 휩쓸던 화적떼의 행패로 현 부안군 줄포면 줄포리로 이사한 뒤
이 건물을 마을 사람들에게 위탁하여 보존해 오다가
1977년 8월 수당 선생이 자비를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하여 복원하고
노폭 5m의 진입로를 만들었다."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습니다.
인촌의 조부가 언제부터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을까?
디자인하우스 (2010년 11월호) 에 나온 글을 옮깁니다.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의 터줏대감은 연일 延日 정씨 정계량 鄭季良이었다.
정씨 집안은 만석꾼으로 큰 부자였다. 만석꾼 정계량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는데,
이 외동딸에게 데릴사위로 장가를 온 인물이 바로 인촌의 조부인 낙재 樂齎 김요협 金堯莢이었다.
당시 김요협은 고창군과 이웃한 전남 장성군에 살았는데,
장가를 들면서 처가 동네인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부잣집 데릴사위로 오면서 재산은 얼마나 받았을까.
당시 쌀 8백 석 이었다는데,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80억 원 정도 될까.
인촌의 조부인 김요협은 이재에 능해 8백 석을 종잣돈으로 재산을 불렸는데,
어느 정도 기반이 잡히자 처갓집 옆 터에 새로 집을 지은 것이다.
인촌 집안은 대대로 풍수에 많은 투자를 하였고,
인근에 이름난 지관이 있으면 이들에게 아주 후한 대접을 해온 것으로 소문나 있다.
요즘 돈으로 치면 지관이 자리 하나를 잡아주면 몇 억 원씩 안겨주었다.
어떤 지관은 아예 인촌 집안에 방을 하나 차지하고 상주하였다.
그 이후 호남의 소문난 명당은 인촌 집안 차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줄포만 일대의 고깃배가 출어를 하려면 식량과 어구를 마련할 목돈이 필요했는데,
이 목돈을 빌릴 때 일대의 선주 대부분이 인촌 집안에서 돈을 빌렸다고 전해진다.
집터 자체가 돈이 모이는 명당이고, 기가 센 만큼 그 돈도 재수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김요협의 두 아들인 김기중과 김경중이 윗집, 아랫집으로 살았다.
기중, 경중 대에 와서 재산이 3만 석으로 불었다는데, 혹자는 10만 석이라고도 한다.
동학혁명 무렵에 일본 쌀 장사치들이 호남평야의 쌀을 대량으로 매입한 다음
당시 메이지유신으로 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에 내다 팔았는데,
서너 배의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일본 상인들이 이렇게 쌀장사를 해서 큰돈을 버는 것을 보고 인촌의 생부인 김경중과 양아버지인 김기중도 쌀장사에 뛰어들었다.
시대 흐름을 간파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거부가 된 기중과 경중의 재산을 인촌 김성수가 상당수 물려받았다.
인촌은 경중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큰아버지인 기중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가 결국 두 집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은 셈이었다.
물론 인촌의 동생인 김연수도 형 못지않은 재력가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최대의 회사로 꼽힌 경성방직이 두 형제의 작품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다시 한번 돌아보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깁니다.
다시 길을 돌아서 신기부락입구로 왔습니다.
동학농민운동지도자 손화중 피체지를 가보려 합니다.
동학농민혁명지도자 손화중 피체지라고 쓰인 안내판.
개인 생각인데 동학농민운동지도자 손화중 붙잡힌 곳이라고 쓰면 더 좋지 않을까?
손화중(孫化中:1861-1895)은 동학의 대접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핵심 지도자로 활약하였습니다.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곳의 어느 집안의 재실로 피신하였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 처형당하였습니다.
그 누군가의 이름은 재실지기였던 이봉우라고 하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그가 개인의 사욕으로 고발하였다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더 이상의 희망이 없어진 손화중이 이봉우에게 나를 고발하라 그리고 포상금으로 행복하게 살아라라고 하였다고도 합니다만
뒤 이야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요.
체포된 손화중은 1895년 3월에 36세의 나이로 전봉준, 최경선, 김덕명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손화중이 숨어들었고 잡혀가던 길을 따라 갑니다.
어느 집안의 재실
혹시 주변에 누군가 계실까 싶어 소리 높여 사람을 불러도 대답하는 이 없습니다.
문은 다 열려 있는데 최근의 관리 흔적은 없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침향이 만들어 지는 신화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인지 이 재실 편액에도 침자가 들어가 있습니다.
모든 문이 열려 있는 빈집을 기웃거립니다.
돌아 나오면서 보니 이곳까지 미당문학관에서 걸어서 오는 길이 연결되어 있다고 이정표가 있습니다만...
이 길을 다니는 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큰길로 나가려고 몸을 돌립니다.
부안군 변산반도가 보입니다.
고창군 부안면에서 부안군을 봅니다.
이 앞쪽 해변이 줄포만
저 줄포만을 보며 김성수일가는 들어올 돈을 생각했을 것이고
이곳에 숨어 있던 손화중은 목숨을 생각했을 겁니다.
생각을 돌리려고 도수관을 보다가
이것도 농민의 생명줄
동학운동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동학운동은 국정의 문란, 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근대문물수용으로 인한 사상적인 혼란, 경제적 수탈대상인 농민층의 불만 등이 쌓여 있던 차에
이곳 고부일대 농민들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참다못해
1894년에 고창, 부안, 정읍이 중심축이 되어 결국 무력봉기를 일으킵니다.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지요.
이 운동은 결국 청일전쟁, 러일전쟁으로 이어져 우리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봉준이 주도한 고부민란이 압제 속에 살던 민초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농민들이 적극 가세하였던 것이지만
동학의 포교활동,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등 종교적 동기를 포함하여
근대적인 개화보다 개화이전의 조선으로 돌아가자 하고
흥선대원군의 복귀 등의 요구사항으로 보아서는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농민군이 집강소(執綱所)를 통해“폐정개혁 12개안”을 시행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1894년에 공포된 모든 동학농민운동 자료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문건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지영이 만들어 낸 상상속의 산물입니다.
그래서 오지영은 1938년 자기 책을 출판할 때 제목을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던 것이지요.
이 분야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사료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역사소설 동학사가 1차 사료로서 가치가 없음은 분명합니다.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 운동을 더욱 값지게 하는 것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려봅니다.
다시 줄포만을 봅니다.
석양이 내립니다.
어딘가 한군데를 더 가볼 수 있을까?
고인돌 마을이라고 하는 고창에 왔으니 고인돌 한군데는 보아야 겠지요.
남한 지역에서 가장 전형적인 탁자식 고인돌이라는 도산리 고인돌로 갑니다.
도산리 고인돌로 가는 길에 보이는 소요산둘레를 지나는 질마재길의 또 다른 입출구
소요산 자락을 넘는 야트막한 고개가 바로 '질마재'입니다.
질마는 말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라고 하네요. 말안장을 닮은 야트막한 고개가 바로 질마재입니다.
자동차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이곳 마을 사람들이 읍내 장터에 가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었는데
새 길이 생기 후 인적이 뚝 끊어져 있던 곳에
다시 길을 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질마재를 넘나드는 사람들은 미당이 노래한 신화 속의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오산저수지를 지나면서 소요산 정상을 봅니다.
'질마재신화'의 배경인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서해 바다와 이어지는 변산반도가 발아래 펼쳐집니다.
그 언젠가 정읍으로 해서 선운사를 찾은 날, 선운산을 올라가지 않은 아쉬움에
전망이 아주 좋고 높이도 높지 않다 하여(444m) 잠시면 다녀오겠지 하고 올랐다가
급경사가 초입부터 시작되는 바람에 아주 혼이 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들머리로 잡은 곳은 선운사 입구 연기교라는 다리 건너 마을에서부터 시작을 했는데
그 고생을 하고 올라가다 중간에 소요사에서 경내를 둘러보던 중
그곳까지 차를 타고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허탈해 한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오르막에서 짜증 지대로다라고 소리친 기억도 있고요.
정상부에 무슨 상호신용금고에서 세운 길다란 표지봉이 있는데
햇볕에 어찌나 번쩍 거리던지... 그것 조차도 짜증스러웠는데...
그런데 그만 선운산 배멘바위쪽 풍광과
이에 질세라 시샘하는 변산쪽 바다 풍광에 넋을 놓았었지요.
마을 구전에 따르면 소요산 자락에는 무려 8만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정상 바로 아래의 바위틈에 위태롭게 들어선 백제 위덕왕때 창건되었다 하는
아주 소박한 소요사(소요암?)뿐이었습니다.
다시 가보고 싶은데 오늘은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기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니는거라고 알곤 뒤도 안돌아보곤 나가버렸습니다
문 돌쩌기에 걸린 옷이 찢어진채로 오줌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난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신부네 집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하여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 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이 앉아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서정주의 시 '질마재 신화' 중 신부에서...
도산리고인돌입니다.
도산리 고인돌은 동서로 뻗은 나지막한 구릉 능선에 위치한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입니다.
넓은 판석으로 된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형식으로
판석 4매로 짜 맞춘 무덤방 위에 납작한 덮개돌이 올려져 있습니다.
책상처럼 생겨서 탁자식(卓子式)이라고 하고
주로 한강 이북부터 중국 요령지방까지 집중 분포되어 북방식(北方式)으로도 불리웁니다.
원래는 4면에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뚜껑돌을 얹은 것이었지만 앞뒤쪽의 것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뚜껑돌의 길이는 3.5m, 폭은 3.1m 받침돌의 높이는 1.8m라고 합니다.
어두운 저녁에 고인돌을 보니 월하의 공동묘지라는 영화제목이 생각나네요.
군산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갑니다.
멀리 보이는 고창현성의 불빛
그리고 아쉬움
8시 15분에 빙글빙글 돌아 군산까지 갈 마지막 버스에 오릅니다.
굿바이 고창! 내 빠른 시간 안에 질마재길을 걸으러 다시오마. 다시 보자.
흥덕을 지나고 줄포를 지났습니다.
부안군의 부안읍시가지를 지나며 오늘의 일정을 마칩니다.
하루 종일 함께 해주신 류재훈선생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기가자 저기가자 보채는 중늙은 어린이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Brahms
Pieces (8) for Piano, Op. 76
No.1 - Capriccio in F sharp major
No.2 - Capriccio in B minor
No.3 - Intermezzo in A flat major
No.4 - Intermezzo in B flat major
No.5 - Capriccio in C sharp major
No.6 - Intermezzo in A major
No.7 - Intermezzo in A minor
No.8 - Capriccio in C maj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