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고창군 미당 서정주 생가, 미당 문학관

하늘타리. 2012. 10. 12. 17:08

푸른 나무그늘의 네거름길우에서
내가 볽으스럼한 얼굴을하고
앞을볼때는 앞을볼때는

내 나체(裸體)의 에레미야서(書)
비노봉상(毘盧峰上)의 강간사건(强姦事件)들.

미친하눌에서는
미친 오픠이리아의 노래소리 들리고

원수여. 너를 찾어 가는길의
쬐그만 이휴식(休息).

나의 미열(微熱)을 가리우는 구름이있어
새파라니 새파라니 흘어가다가
해와함께 저므러서 네집에 들리리라.

 

미당의 화사집에 실려있는 시 중 도화도화(桃化桃化) 입니다.

 

아마도 까닭없이 일어나는 대책없는 춘정(春情)을 떠올리며 쓴 시인듯 합니다.
초기의 미당은 원색적인 시풍으로 문단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토속적인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 그의 작품 경향은

한국시사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었지요.

그후 시집 '귀촉도'에서는 심화된 정서와 세련된 시풍으로

민족적 정조와 선율을 읊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었습니다.

어느날 그 모든 영광을 잃고

그의 추천으로 시단에 등장한 고은 등 거의 모든 이들이 등을  돌리자

쓸쓸이 여생을 보내다 

부인 방옥숙(方玉淑)씨가 2000년 10월 별세하시자

모든 곡기를 끊고 맥주로만 허기진 배를 달래며 살다가

두달 후 크리스마스 이브에 85세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또 다른 그의 시 '다섯살 때'


그때부터 고독한 자의 맛에 깃들더니 결국 말년에도 고독속에 가셨습니다.

 

내가 고독한 자의 맛에 깃든 건 다섯 살 때부터다.
부모가 웬일인지 나만 혼자 집에 떼놓고 온 종일을 없던 날,
마루에 걸터앉아 두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가 다듬잇돌을 베고 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것은 맨 처음으로 어느 빠지기 싫은 바닷물에 나를 끄집어들이듯 이끌고 갔다.
그 바닷속에서는, 쑥국새라든가 - 어머니한테서 이름만 들은 형체도 모를 새가
안으로 안으로 안으로 초파일 연등밤의 초록등불 수효를 눌애가듯 울음보를 눌애 가면서,
침몰해가는 내 주위와 밑바닥에서 이것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뛰어내려서는 나는 사립문 밖 개울 물가에 와 섰다.
아까 빠져 있던 가위눌림이 얄따라이 흑흑 소리를 내며,
애뀌풀 밑 물거울에 비쳐 잔잔해지면서,
거기 떠 가는 얇은 솜구름이 또 정월 열나흗날 밤
어머니가 해 입히는 종이적삼 모양으로 등짝에 가슴패기에 선선하게 닿아 오기 비롯했다.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왜 다른 많은 친일행적자들중에서 이 분에게 유독 그리 독하고 모질게 대하는가를 ...
그리고...행적은 지탄하여도

그의 시세계 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생가터에 왔습니다.

 무너지지 않게 보수만 하고 손대지 않았으면 했는데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어 생경합니다만

그래도 시인을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켠이 편해집니다.

 

 

 

 

 

다시 한번...

빙글빙글 돌아 봅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
미당이 사시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 사당초등학교 맞은편에

시인이 곰이 쑥(蓬)과 마늘(蒜)을 먹고 웅녀가 됐다는 단군신화에서 따온

봉산산방(蓬蒜山房)이라고 이름한 집이 있습니다.

이집에서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살면서

'질마재 신화', '떠돌이의 시', '팔할이 바람', '산시'등

여러 시집들을 엮어내었습니다만...
미당사후 10년 넘게 폐가로 되어 있다가

관악구청에서 예산을 책정하여 이 집을 구입하고

시인의 일부 유품을 정리하여

전시 공간으로 만들어

작년 3월에 개관하여 시인의 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집을 구청에서 구입 및 정비 할때 그때도 반대한 사람들이 많았지요.
그래도 지금은 그곳에서도 시인의 숨결과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미당선생의 시 '곶감이야기' 속에 나오던

 도깨비까지 찾아와 함께 살고 있는

질마재길의 어느부분을 돌아

미당의 외할머니집이었던 정미소 앞을 지나

미당 문학관으로 갑니다.

 

 

 

 

 

 

 

 

 

 

 

 

 

 

미당은 어쩌면 현대사의 질곡속에서의 자기 운명을 예견 했는지도 모릅니다.


본인의 첫시집, 첫머리에 자화상을 그립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이는 내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 일부
 

미당 서정주의 생가에서 이곳 미당시문학관까지 오는 길에

서정주의 자화상이 귓가에 윙윙거립니다. 

 

문학관에 대한 공식설명입니다.
"미당시문학관은

미당 서정주 시인의 고향이자 영면지인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 마을에 세워진 기념관이다.

그의 사후 다음 해인 2001년 가을,

이호종 전 고창군수의 적극적인 도움에 힘입어 개관하였다.

개관일은 11월 3일인데

이는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 시위 사건(1929년, 1930년 2회)을 기념하기 위해서 정해졌다.

이 기념관은 고향의 생가와 묘역 근처에 있어서 더욱 뜻 깊은 공간이며,

폐교된 선운초등학교 봉암분교를 새롭게 단장하여 지었으므로

친환경과 배움의 건축미학을 지향하고 있다"

 

 

오는 날이 장날
휴관일이랍니다

 

멍하니 건물을 바라보다가 

 

마당 왼쪽 끝에 세워진 스테인레스로 만든 커다란 자전거로 다가 갑니다.

 

미당이 죽어 거인이 되어 이 자전거를 타고 계시나하면서...


미당의 '자화상' 시와 함께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적혀 있는

자전거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자전거는 '바람의 자전거' 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를 조형화했다.

두 바퀴는 8자를 표현하고, 또한 영원히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바람의 역동성을 꿈꾸며,

질마재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듯

세상의 소중한 비밀을 알고자 힘써 노력하는 모든 문학 소년들의 꿈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바람의 자전거' 를 타고 달리는 시인의 모습을

여기 오는 이들과 함께 바라보기 위해

시인의 생가 옆 옛 학교 자리에 이 조형물을 세운다."

 

 


자료실과 전망대로 쓰는 사각의 탑을 도리어 전망하고

까닭모를 섭섭함을 안고 몸을 돌려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