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타리. 2012. 9. 28. 15:55

 무장읍성을 갑니다.
무장읍성은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있습니다.

 
이성은 해발 60m의 사두봉을 중심으로

구릉성 야산을 장방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평지성입니다.

둘레는 1417m, 면적은 144,948㎡의 규모로

1417년(태종1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진을 삼을 때

읍치의 중심으로 쌓은 것으로 길이는 약 1.2Km로,

무장읍지에는 "병마사 김저래(김노(金蘆)라고 하는 기록도 있습니다)가

도내의 승려와 백성 이만여 명을 동원하여 3개월에 걸쳐 축성하였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최근까지 초등학교로 사용되었습니다.
고창군은 2001년부터 무장현 관아와 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해 계획을 수립,

지난 2004년 이곳에 있던 초등학교를 이전하고

2009년에는 무장읍성 내 연지 터를 발굴했으며

현재는 문화재청의 검토를 받아 성곽 및 관아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장지역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전봉준, 김개남과 더불어 농민전쟁을 이끌었던 손화중의 거점으로,

1892년 손화중 휘하의 도인들이

선운산 도솔암 마애석불의 배꼽에 감추어져 있다는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퍼지자

새 세상을 염원했던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무장으로 몰려 들면서

무장 접주 손화중의 포(包)는 호남에서 가장 큰 규모를 형성하였고,

호남 최대의 포를 이끌고 있던 손화중이 전봉준과 협력함으로써

고부 민란으로 시작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호남 일대를 휩쓸고

전국적인 봉기로 번질 수 있었읍니다.

1894년 3월 20일(음) 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당산마을에서

손화중은 기포(起包)를 명령하고

당시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고부에서 무장으로 피신해 왔던 전봉준과 함께

무장, 고창, 흥덕, 부안, 고부 등으로 진출하면서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본격화되기에 이릅니다.


여기 안내판 기록에는

정읍 황토현 싸움에서 전라감영군을 무찌른 동학농민군이 고창으로 진주하여

동헌과 아사를 부수고

그 다음날 무장읍내로 들어와 옥중의 동학교인 44명을 석방한 후

3일간의 휴식을 취하고

경군의 추격에 대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장읍성의 성곽은 남아 있지 않고

무장읍성의 남문인 진무루(鎭茂樓), 무장객사, 무장동헌 정도가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곽이 보이니 재구축한 것 같습니다.

 

복원한 옹성을 지나 진무루로 갑니다.

 

 진무루는 읍성의 남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이층누문입니다.
광해군 4년(1612)에 개건(改建)되어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친 후,

1984년에 크게 중창되었다고 합니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입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고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습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높이 7척(약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638m)이고 문는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무루에 올라 옹성과 주변 성곽을 둘러 봅니다.

 

 

 

 

현판은 명필 이삼만의 글씨라고 전하고  있으며

누각내에는 신숙주 , 김종직, 이석형, 박이서 등이 무장읍성을 방문 유숙하며 읊은 제영시가

이곳 누각 현판에 새겨져 있는데

당시에도 있었는지

후일 누군가가 이곳과 관계있는 것을 다시 쓴 후에 제액하여 부착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객사로 갑니다.
송사지관이라 쓰인 현판이 보입니다.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고을이름은 무장진이라 하고

객사의 이름은 송사지관이라한 배려가 마음에 쏙 듭니다.

 

 객사는 세 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중앙부는 방이 없는 마루입니다.

중앙부에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왕실을 향해 지방관아의 관헌들이 인사를 드리고

출장을 온 중앙관료들이 왕명의 수행중임을 잊지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지요.

오른쪽과 왼쪽에 방이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은 문관이, 왼쪽은 무관이 유숙하였다 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객사까지의 접근로가 없습니다.
공사중 사람출입이 없어서 인지 잡초가 수북히 지라있어

이 빗속에 다가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각종 선정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갑니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너무 아쉽네요...
객사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이런 저런 문양들을 보지 못하고 왔기 때문입니다...
객사 정면으로 오르내리는  계단 마구리 옆에

태극 무늬, 꽃을 담은 화병, 구름무늬 등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당시 굉장히 황홀하게 보았는데

나중에는 또 불쌍하게 여겨지더라고요.
왜? 그 돌들이 객사석축의 계단용도로 제작된 것이 아니고

부근의 고찰내에서 자재로 쓸만한 석물을 전부 가져와서 쌓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숭유억불정책이 심했다지만 스님뿐만이 아니고

사찰의 석물까지 동원하여 기단석, 축대 그리고 계단을 다 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늬들이 일관성이 없습니다.


자료사진으로 올립니다.)

 

이런저런 공덕비가 모여 있는 곳으로 왔습니다.
지역내 각처에서 모아온 것들이지요.

 

 

 

이 곳 비석의 받침대 머리가 비뚤어 진것들이 있습니다.

 
이 지역일대에서는 오래 전부터

‘고창은 성(城)자랑’, ‘흥덕은 양반 자랑’, ‘무장은 아전 자랑’한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아전들의 기세가 그만큼 드샜다는 이야기인데....


공덕비에 거사비라고 쓰여 있는 것은 가고 난 후에 세워지는 것이 통례이지만

통상 무슨무슨불망비라고 쓰여 있는 것은

요사이 공직자들이 떠날때 기념패하나 만들어 주듯이

그 사람이 가기전에 세워집니다.
관례이다보니 않세울수는 없는 것이고 해서

세우긴 세우는데

아전들에게 미움받던 수령들의 공덕비아래

받침돌의 얼굴을 일그려뜨리고 비틀어 버립니다.
수령들은 그것도 모르고

그래 내 공덕비가 세워졌구나하면서 흐믓한 얼굴로 떠납니다.
과연 그 사람들이 정사를 잘 못했을까요?
왕조시대에 지방백성들의 고난에는

지방수령보다 더한 아전과 토호들의 탐색이 더 극심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어쩌면 올곧은 정사를 하느라고 아전들을 엄히 다스려서

미운털 박힌 것 아닐까요?


그리고 과연 잘나가는 사람들한테도 그랬을까요?


차라리 세우질 말지 훼예포폄이 너무 심합니다.

 

 

 

면종복배의 인성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합니다.
게다가 저 철비는

이지역 출신으로 참판을 지낸 김영곤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멀리 건물이 한 채 보이는데 동헌입니다.
취백당(翠白堂)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푸를 취에 흰백으로 청백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조선 명종20년(1565년)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때 초등학교의 교실로 사용되던 것을

1983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하고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4칸이고 처마는 겹처마양식입니다.

내부를 둘러보고

우물터로 갑니다..

 
토성이 길게 연해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초 축성시는 석성이었으나

그 후 계속 보수하면서 흙을 덧씌웠다고 합니다.
연못속에 피어나는 연꽃은

기존 학교 운동장의 흙을 걷어내고 연못을 복원하니

100여년 동안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던 씨앗에 생명이 움트면서

자생적으로 피어올라와 지금은 연못을 덮었다 합니다.

 

100년을 지낸 씨앗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동헌에서부터 이 연못까지를 한번에 담아봅니다.

 

무장읍성을 나와 동편으로 돌아 읍취루앞으로 왔습니다.
김응선 송광사 도편수의 제자라 하는 이창배 도편수에 의해 작년에 복원되었습니다.

큰 규모의 누각이며 주변에 민가20여호와 치안센터가 있지만 과거는 이곳도 읍성 내부 였답니다.

 

무장읍성을 떠나면서....

 어쩌면 여기에 학교가 그냥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100년이 된 무장초등학교의 역사로 보았을때

이것도 그 자체로 역사인데

학교가 있을 당시 남아있던 그대로의 상태에서

시설만 보수정비하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 보았습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어릴적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았던 운동장을

지금도 마음 속에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Edvard Grieg  

Two Nordic Melodies op. 63 (2개의 노르웨이 선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