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석빙고, 술정리 동삼층석탑, 유리 고인돌
창녕 석빙고입니다.
안내판의 글을 옮깁니다.
"석빙고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겨울에 채집해 두었던 얼음을
봄, 여름, 가을까지 녹지 않게 효과적으로 보관하는 지금의 냉장고 역할을 하는 인공적 구조물이다.
외견상 고분과 같은 형태를 띠는데,
빙실이라는 공간이 주변 지반과 비교하여 절반은 지하에 있고
나머지 절반은 지상에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바깥 면은 보온을 위하여 흙으로 두껍게 덮여있기 때문이다.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지는데,
창녕석빙고 역시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으로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 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는 틀어 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 중간에 두었다.
각 띠 사이에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요철을 가진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가 드나드는 것을 조절하여 냉기가 오래 가게끔 만들었다
창녕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서申曙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부분의 양식 또한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가까이 다가갑니다.
현감 신서 석빙고비
입구가 철문으로 막혀 있습니다.
철문사이로 본 내문
문위에 온도기가 달려 있습니다.
들어가지 못하니 사진으로라도 내부 모습을 확인하랍니다.
내부에서 본 천정
가운데가 환기구인듯 합니다.
석빙고 표석
표석의 글
"경주,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석벽, 아아취, 공기공등이 완전히 남아있으며 영조 18년에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확한 시대는 알수없다."
석빙고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지증왕 6년(505) ‘시명소사장빙(始命所司藏氷, 해당부서에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하였다)’이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만
현재 남아있는 6곳의 석빙고(경주, 안동, 영산, 창녕 , 청도, 현풍)는 모두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서울에 가면 서빙고동이 있지요.
태조 5년(1396년)에 둔지산 밑에 서빙고를 세우고 두모포에 동빙고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둔지산 밑이 지금도 서빙고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이곳에 8동의 석빙고가 모여 있었답니다.
두모포는 지금의 옥수동언저리 중랑천이 한강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만
지금의 동빙고동은 그곳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빙고의 동쪽이라서 동빙고동이라 불리웁니다.
예전에도 두모포빙고는 자그마한 한동이었다 하네요.
이 양빙고는 궁궐의 얼음수요를 담당하여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하였답니다.
그래서 얼음의 보관과 반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필요시 고위관료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성종시대기록에 얼음이 녹아 물이 창고븎으로 나왔다하여 관리부실로 칭죄, 관원전원을 파직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영조이후에야 전국각지에 석빙고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지방것은 다 없어졌는데 어떻게 경상도 지역에는 여섯곳이나 남아있는지 의문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인지, 불쌍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울시사편찬위원회의 이상협이라는 분이 쓴 글에 빙고제도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옮겨보면...
"성종 때 얼음을 대신들에게 나눠주는 빙고제도는 대신들에게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양반 관료 중에는 청렴한 사람이 많아 대신이라고 해도 집안이 가난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얼음을 나눠주는 것은 좋았지만 서빙고까지 가서 얼음을 집으로 운반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당시 얼음을 지급할 때는 패(牌)를 나눠주어 이것을 갖고 서빙고에 가면 얼음을 주었는데
하인이 없는 대신들은 얼음을 수령하는 패를 묵힐 수밖에 없었다.
이때 눈치 빠른 사람들이 가난한 대신들 집에 가서 묵혀둔 얼음 수령패를 얻어다 얼음을 수령 받은 후
도성 내에 비싸게 팔고 그 중 얼마를 가져다 주었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해석은 각각 하시면 됩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탐을 가기위해 창녕시장거리를 지납니다.
할인행사 수구레국밥 5000원
수구레국밥 5000원이면 적당하지 그게 무슨 할인행사?
아 한우등심을 싸게 판다는 것이구나..
수구레국밥
수구레는 경상도 사람들 발음으로는 수구리처럼 들리는데..
소의 가죽과 그 밑의 근육 사이에 존재하는 아교질과 피하 지방층 등 여러 조직을 뜻한다고 합니다.
소고기국밥에 소고기 건더기 대신에 수구레가 들어간 것이라고 하면 될까?
아니구나...
선지국밥에 수구레가 들어간것..
그래서 말않하면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선지국밥 이렇게 말해야 하나요?
말해 놓고 나니 앞과 뒤가 바뀌었지요.
소 살코기가 부족하니 수구레를 넣게 되었고
그것도 부족하자 양을 늘리고 맛을 맞추려고 값싼 선지를 넣게 된 것인데
지금은 선지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도 이날 누가 수구레국밥이 뭐냐고 물어보길래
선지국밥에 수구레를 넣은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옆에 경상도분이 수구레가 메인이다라고 말을 해줘도...
내 먹은 기억속에 수구레국밥은 선지국에 수구레 약간 넣은 것일 뿐입니다.
선지국을 좋아하니 맛은 있습니다만 사실 맛은 현풍장에서 먹어본 수구레국밥이 훨씬 더 맛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고 보니 창녕장 수구레국밥이나 현풍장 수구레국밥 모두 먹어본지가 벌써 3~4년 지났습니다.
오늘도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장이 서지 않은 오일시장통을 지나며 언듯 눈에 들어온 시장이전기념비
그냥 앞부분만 꾹하고 뒷면을 읽지 않고 지나와 갑지기 궁금해 집니다.
창녕객사가 1924년 12월에 시장 창고건물로 쓰려고 당시 군수가 술정리 창녕공설시장으로 옮겼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때쯤 이곳 시장이 어디선가 이곳으로 이전개설되었다는 이야기일까요?
이건 쓸데없는 호기심이겠지요.
국보 제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입니다.
안내판을 읽습니다.
"이 탑은 이중 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크기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될 만한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위풍이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
1965년에 해체 수리 과정 중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용기가 발견되었다.
현재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탑이 크고 짜임새가 장중하며 훤칠해 기품 있게 보인다.
이탑의 명칭에 동자를 붙인것은 한 절터에 2개의 탑이 세워져 있어서가 아니고,
술정리에 두 개의 탑이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의 높이는 5.75m이다. "
이 탑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은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펴낸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8세기 중엽은 우리나라 석탑사의 고전기라고 할 만하다.
석탑의 발생기부터 줄곧 지녀왔던 목탑적인 요소는 모두 털어버리거나 깨끗히 번안하여
바야흐로 석탑의 전형을 완성한 시기인 것이다.
9층, 5층, 목탑, 전탑, 모전석탑 등 다양한 양식 실험이 이루어지는 긴 모색기를 거쳐 이때에 삼층석탑 형식이 정착되고,
그것은 다시 과도기를 거치면서 아름답게 정제되어 절정기를 맞는다.
그리고 그 정점에 불국사 삼층석탑, 곧 석가탑이 있다.
그 석가탑을 감히 넘보며 수려한 용모를 뽐내는 석탑이 있으니, 바로 술정리 동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의 시원을 이루는 고선사터 삼층석탑,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기단부나 탑신부에 구별 없이 많은 부재들을 짜맞추었다.
그러나 석가탑을 만들어낸 시기에 이르게 되면 세부의 모습이 한결 명료해진다.
기단부는 상.하층의 면석과 덮개돌(갑석)이 모두 돌 넉 장을 배치하는 것으로 정연하게 정리되고,
탑신부의 지붕돌과 몸돌은 각각 돌 하나로 구성되는 단순화 작업이 이루어진다.
초기 삼층석탑의 기단부에서는 버팀 기둥이 하층에 셋, 상층에 둘이었다가
완성기 석탑에서는 그것이 하층 둘, 상층 둘로 줄어들면서 한결 명료해진다.
지붕돌의 처마받침(층급받침)은 전통적인 5단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런가 하면 크기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초기의 삼층석탑은 상륜부를 제외한 높이가 9m이상으로 장대한 크기를 자랑하지만,
이때의 탑들은 5~7m를 오르내리는 적절한 크기를 견지한다.
완성기의 석탑이
확실히 저 감은사터 삼층석탑이나 고선사터 삼층석탑 등 초기 석탑들이 보여주는 웅장한 힘은 갖추지 못하지만
결코 왜소하거나 나약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제되고 당당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하층기단 덮개돌이 5매로 이루어진 것을 빼면 모든 형식이
완성기 석탑이 갖는 위의 특징에 부합하며 이러한 덕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또 한 가지, 8세기 중반에 이루어지는 고전기, 곧 완성기의 삼층석탑을 보면
선의 사용이 매우 절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곡선 사용에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상륜부를 제외한다면 탑 전체에서 곡선이 들어간 곳은 단 두 곳뿐이다.
하층기단 윗면 굄대의 하나를 둥글게 공글린 것, 처마와 귀마루의 끝을 아주 가볍게 뽑아올린 것이다.
석가탑의 경우에는 이 귀마루마저도 직선이다.
모르긴 해도 처마선마저도 직선을 고집한다면
그때의 삼층석탑은 이제까지의 질서를 일거에 잃고 전혀 낯선 물체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마에 곡선을 채택한 것은 거의 필수적이라 하겠는데,
그것조차도 최소한에 그쳐서 있는 듯 마는 듯 미묘한 곡선으로 처라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직선만으로 하나의 건축이 이룩되었는데
전혀 딱딱하지 않고 도리어 고고한 기품을 발산하는 것이 이 시기 탑들의 면모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역시 절제된 선의 아름다움,
더 꼬집어 말한다면 긴장감 넘치는 직선의 미가 잘 드러나 있다.
그 앞에 서면 덜 채워진 단추는 없나 공연히 매무새를 다시 한번 살피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풀어져 굽었던 척추를 곧추세우게 된다.
단순함과 절제미 그리고 적정한 비례와 균형 또한 고전 에술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삼층석탑의 경우 기단부의 안정감, 탑신부의 알맞은 체감에 따른 상승감,
그리고 상호 모순적인 이 두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모두 비례와 균형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의 이중기단은 땅에 굳건히 뿌리를 박은 듯 편안하고 넉넉하여 탑신부를 받친 모습이 아주 안정되어 있다.
탑신의 1층 몸돌은 훤출하게 솟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그 위로 포개진 2층과 3층 몸돌은 쾌적한 크기로 체감되고 있다.
각 층의 지붕돌 또한 두께는 적절하고 처마 깊이가 알맞아 대단히 세련되고 우아하다.
뿐만 아니라 지붕돌들 역시 몸돌에 상응하는 체감을 보이면서 탑신부의 상승감을 유도하고 있다.
이렇듯 술정리 동삼층석탑이 유발하는 형언키 어려운 미감과 눈맛은
주로 석탑 각 부분의 비례가 빈틈 없이 적절하고
또 그것이 전체의 균형과 조화로 이어져 얻어진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1965년 이 탑을 수리하였을 때 3층 몸돌 윗면에 뚫린 네모진 사라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된 바 있다.
청동으로 만든 잔 모양의 사리용기, 유리로 된 담황색 사리병, 오색 구슬 9개가 그 속에 담겨 있었고,
사리병 안에는 흰빛 사리 일곱 알이 들어 있었다.
그 가운데 사리는 탑을 다시 짜맞출 때 새로운 용기에 넣어서 제자리에 안치시켰다.
사리장치 발견 당시 한 번도 손댄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기품 있는 사람이 있듯이 기품 있는 탑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렵듯 그러한 탑도 동트는 새벽 하늘의 별만큼이나 드물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은 그 드문 예에 꼽히는 기품 있는 탑이다.
그러나 그 기품은 저 감은사터 삼층석탑이나 고선사터 삼층석탑이 보여주는 장중하고 웅혼한 기품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귀족적으로 보일 만큼 세련되고 고귀한 기품, 꺾이지 않는 기상을 안으로 간직한 늠름한 품격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덩이를 다듬어 기품울 창조한 신라인들의 품위에 다름 아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이나 서삼층석탑은 어느 절의 공덕이었는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창녕지방이 일찍이 신라 진흥왕 때부터 정치적으로 무척 중요한 요충지였던 점을 감안해보면
그런 연고로 들어선 절들이며 탑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더 이상 덧 붙일 말이 없는 극찬입니다.
주입식으로 머리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그렇단다. 다시 보자. 빙빙 돌아봅니다.
석탑을 자세히 보면 이중기단 아래 주춧돌 부분이 떨어져 나간게 보입니다.
어쩌면 그 일부일수도 있는 것들이 석탑주위에 놓여 있습니다.
주변 콘테이너 벽면에 붙어 있는 출토사리장엄구의 사진을 보고
가까이에 있는 하씨초가로 발길을 돌립니다.
하씨초가
가옥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일행이 가니 따라왔을 뿐이지만 그래도 좀 알아보려고 안내판으로 다가왔지만 눈 좋은 사람만 보랍니다.
이집은 사랑채 뒤편으로 일자형 홑집으로 구성된 초가 안채가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안채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를 돌아갑니다.
대쪽으로 지붕틀을 만들고 그 위에 억새풀을 얹었습니다.
안채는 오른쪽의 첫 칸이 부엌이며 다음 칸이 안방이고 이어서 대청, 그리고 건넛방으로 구성된 4칸 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가라고 하며
조선 세종 때 입향조 하자연(河自淵)이 지은 집이라 합니다.
안채 뒤로 계단식 화단이 조성되어 있고
담 너머 당나무가 있습니다.
집이 당산터에 기대고 있습니다.
아마 이 곳이 조선 중기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이 이곳에 들렀다가
술정기(述亭記)라는 글을 남긴 그 정자가 있던 곳 아닐까 합니다.
그 술정기가 지명이 되어 이곳을 술정리라 하는 것입니다.
건물을 잘 모르니 집안에 심어진 나무와 꽃만 눈에 들어옵니다만
일자형 홑집으로 된 안채가 500년 되었다 하고 못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칡넝쿨 등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든든한 배경인 당산터에 기대고 있으니 나무와 억새로 못없이 지어진 집이 500년동안 버틸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몇장의 의미없는 사진을 찍고 인근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라탑니다.
움직이는 버스속에서 화왕산을 꾹
유리 고인돌입니다.
안내판을 먼저 읽어봅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탁자식과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는데
이고인돌은 바둑판식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원래 7기의 고인돌이 북두칠성모양으로 무리지어 있었는데 지금은 2기만 남아있답니다.
이 고인돌은 구릉밑이나 평지에 있는 다른지역의 고인돌과 달리 구릉의 정상부에 있어
이고인돌이 지닌 학술적가치는 입지조건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1기뿐이 없습니다. 나를 피해서 어딘가로 숨었나 봅니다.
통상 이야기하기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이 고인돌이랍니다.
최초의 인류라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이 250만 년 전이고
이들은 그 무서운 맹수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돌로 무기를 만들기 시작하여 문명을 엽니다.
일반적인 역사연표에 의하면 구석기 BC50만년,
신석기 BC1만년~5000년,
청동기시대는 대략 그 연대가 BC5000년~1000년이랍니다.
그럼 이 고인돌이 최소한 3000년전에 이 곳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3000년을 버텨온 고인돌이 채 백년도 않되는 시기에 무수히 없어집니다.
다른 나라에 있었다면 더 오래 버티고 있었을 텐데....
우째 이 한반도땅에 전세계 고인돌 10만여기 중 6~70%가 모여서
이리 저리 박대를 받는지 미안할 따름입니다.
공연히 미안한 마음에 찍고 찍고 또 찍습니다.
그리고 지석묘를 내려다 보고 있는 화왕산을 바라보며 물어 봅니다.
남은 한기가 더 있다는데 그것은 어디 숨었니?
그리고 다섯기가 어떻게 파괴되고 사라졌는지 너는 보았니? 라고요.
당연히 대답이 없습니다.
부곡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벽에 걸었던 길을 저녘 어스름속에 잠시 걸어봅니다.
내일 아침 낙동강변에서 만나요!!
Johannes Brahms
Symphony No.3 in F major Op.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