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전주 경기전, 오목대

하늘타리. 2012. 9. 4. 21:28

 경기전을 갑니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문화재로써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기 위해 태종 10년에 세운곳입니다.

 
태조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건물은 원래 개성, 영흥, 전주, 경주, 평양 다섯곳에 있었는데

경기전 정전을 제외한 네곳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에 타버렸답니다.

경기전 정전도 정유재란 때 불에 탓으나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표를 끊고 입장합니다.

그동안 무료로 개방하다가 두어달 전부터 입장료를 받는데 차라리 예전처럼 혼잡하지 않아서 좋다고 합니다.

 

벽사를 위해 세운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으로 갑니다.

 

 외삼문

 

외삼문 앞 왼쪽으로 부속채로 가는 쪽문이 보입니다. 

 

 당연히 부속채는 나중에 가기로 하고
내삼문을 들어섭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그 북쪽에 내·외삼문과 남북축을 맞추어 정전이 놓이고

그 동·서 양측에 익사 또는 행각이 연결되어 꺾이어 남향하다가 끊기고 그 나머지 부분은 담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1578호인 정전입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입니다.
능침의 정자각과 같은 형상으로 지대석과 면석 및 갑석을 갖춘 기단 위에 세운 다포계형식의 맞배집입니다.

그 전면 가운데에는 1칸 규모의 기단을 돌출시켜 쌓고 그 위에 첨각을 세워 배례청을 만들었습니다.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입니다.

 
경주 평양등지에 모셨던 이성계의 초상화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버리고

경기전의 것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 등 전화를 피해 아산과 묘향산, 적상산 등으로 옮겨 다니다가

1614년 경기전이 중건되어 다시 돌아왔으며,

동학혁명 때는 위봉산성으로 피난시켜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만

여기 안내판에 의하면 이곳의 초상화는 고종 9년(1872)에 낡은 초상화를 태워 묻은 후

서울 영희전에 있던 태조의 초상화를 본떠 새로 그린 것이라 쓰여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가로 150㎝, 세로 218㎝라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작지만 아름다운 대숲사이로 난 문을 지나갑니다.

 
조선왕조실록보전기념비가 있습니다.

 
전주사고(全州史庫)는 한양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그리고 성주사고와 함께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세종 때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춘추관, 충주사고, 성주사고와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내장산으로 옮겨져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주사고는 그 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다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실록각의 2층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아래층은 통풍을 고려해 기둥만 세워 습기를 방지한 것입니다.

 

 

 

 

 

예종대왕태실입니다.

태실은 대개 산의 봉우리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고 하는데

이 태실 및 비는, 일반 평지에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구이초등학교 뒷산 정상부근에 있었다 합니다.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예종대왕의 태실은 선조 11년인 1578년에 태실을 만들었고,

영조 10년인 1734년에 고쳐지었다고 합니다만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정책을 편 일제가 숱한 우리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태실에 보관 중이던 태항아리도 가져갔다 합니다.

 태항아리를 잃고 폐허가 되어있던 곳에 남아 있던 예종대왕의 태실 및 비를

1970년에 경기전 안으로 옮겨 복원하고,

전북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예종대왕의 태실은 팔각형의 돌난간을 두르고,

그 안에 기단석을 놓은 후. 그리고 배가 불룩한 둥근 중동석을 놓고 지붕돌을 덮은 형태입니다.

태실 한편에는 비가 서 있는데 이 비에는 예종대왕의 태실이라 적혀있으며,

뒷면에는 선조 11년(1578)인 만력 6년 10월 초 2일’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는 받침석을 거북이로 했는데 특별한 조각을 하지 않았고 비의 덮개석에는 뿔이 없는 용을 새겨 넣었습니다.

 

경기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 조경묘입니다.

 

이곳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시조의 부인인 경주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입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판을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고 합니다.

이한공은 이 태조의 21대조로 신라사공 벼슬에 올랐다고 하며

시조의 부인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대손 군윤 김은의의 딸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이름의 조경단이라는 곳이 덕진 시민공원 내 건지산 줄기에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이곳 조경묘는 전주이씨 시조부부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고

조경단은 시조 이한의 묘소와 제단이라는 것이 다릅니다만

 둘 다 전주가 왕조 전주 이씨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갖고 있으나 항시 문이 잠겨있어 내부가 궁금하다는 것은 똑같습니다.


어진 박물관으로 들어갑니다.

 

 

태조어진

 

세종어진

 

영조어진

 

그리고 기타 전시물

 

 

 

 

 

 

 

 

 

 

 

어진을 봉안할때 쓴 가마들입니다.

 

 

 

 

 

 

 

 


한쪽구석에서 열리고 있는

대한제국 황실사진전이라고 이름지어진 전시회입니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듯합니다.

 

 

 

 

 

 

 

 

 

 

 

 

 

어진박물관을 나오며 내모습도 하나 남겨야 할 듯해서

유리벽에 대고 한장 찍었습니다.

 

경기전 부속채 건물들을 돌아보겠습니다.


조병청 전사청 용실등 있고 부속채간 중간에 담장이있고 출입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뒤로 모습을 보이는 전동성당이 이상하게 어울리네요.

 

 

 

 

 

 

어정입니다.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물을 긷는 우물을 어정이라 합니다만

경기전처럼 임금에 대한 제사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御井)이라 부릅니다.

 

 

2층건물은 제사를 지낼때 사용하는 그릇따위를 보관하던 제기고입니다.

 

경기전을 지키는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던 경덕헌입니다.


경기전의 제사일을 맡아보는 낮은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살던곳인 수복청에

 

가장 높은 사람만이 앉을수 있는 용상을 가져다 놓고 체험을 하랍니다.

 

마주보아는 전동성당과

 

뒤돌아 보아야 하는 부속채건물들을 한번씩 보고 경기전을 나섭니다.

 

어느골목..

 

그리고 의미가 만들어진 어떤 장승들앞을 지나

 

오목대로 올라갑니다.

 

 

오목대입니다.

 

오목대는 고려 우왕6년 (1380)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이성계가 개선 길에 이곳을 들러 야외 연회를 베푼곳이라 합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00년에 비석을 건립하였는데 고종이 직접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하네요.
외부 펜스때문에 비각가까이 접근이 불가능하여 비석은 찍지 못하고 비각만을 찍습니다.

 

비각과 오목대

 

 

 

오목대 누대에 오릅니다.

 

 현판중 하나

大風起兮雲飛揚威加海內兮歸故鄕安得猛士兮守四方이라 하여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영포의 반란을 진압한 뒤에 고향 풍패에 들러 그 기쁨을 표현한 노래가 적혀 있습니다

이성계가 흥에 겨워 대풍가를 노래합니다.

종사관 정몽주는 이노래를 듣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남고산성 만경대까지 말을 달립니다.
그곳에서 숨을 돌리던 정몽주는 스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생각하며 한숨지으며 시 한수 읊어봅니다.

남고산성 만경대에 있는 바위에 아주 훗날에 새겨진 정몽주의 시입니다.
참고로 자료사진 올립니다.

 

 

다시 현재의 오목대입니다.


오목대 현판

오동나무가 많은 곳이라하여 이곳 누대의 이름을 오목대라 하였답니다.

현판의 글씨는

손가락이 아니라 손 전체로 붓을 쥐고 쓰는 악필로 이름난 석전 황욱(石田 黃旭/1898~1993 전북 고창) 선생의 글씨라고 합니다.

 

육교를 건너 배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었다는 이목대로 넘어갑니다.
비각이 있습니다
비각속의 비석


고종의 친필이라는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안사가 살았던 곳이다라는 이야기지요.
이곳은 시조 이한부터 누대에 걸쳐 살아왔던곳인데

이곳에서 이안사가 나고 자라면서 호랑이와 싸워 이겼다 등등의 설화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주의 유력한 토착세력이었던 이안사는 전주지사·산성별감과 관기(官妓) 문제로 대립하다

170여호의 주민들을 거느리고  삼척현으로 옮겨 약 17년을 살다

1290년 덕흥부(의주)로 이주한 뒤 원에 귀하하였다고 합니다.

그뒤 이안사의 후손은 이성계의 아버지가 고려에 귀부할 때까지 함흥일대를 다스렸지요.

 

이안사가 여기 살았었다는게 고종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고종이 목조 이안사가 17년을 살았던 삼척에도 이목대와 똑 같은 비를 세운 것을 보면,
1900년의 조선은 나라임금이 자기 조상이 살았던 자리, 그들이 술먹고 호기를 부리던 자리에 까지 관심을 가질만큼 태평성대였나 봅니다.

 

이런저런 생각하며 다시 오목대로 와서 한옥마을을 조감해 봅니다.

 

 

오목대를 빙그르르 돌아 당산나무앞으로 갑니다.

 

500년동안 교동과 풍남동일대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온 당산나무입니다.

 

이곳에서는 음력 1월 15일에 주민의 무병과 평온무사를 기원하는 당산제가 매년 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당산나무 앞은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 중 하나라고도 합니다.

가족, 친구, 연인의 건강과 사랑을 기원하고 인증샷도 한 커트 촬영하고...

그렇게 사람과 어울려 그들을 보듬어주며 오래오래 이자리에 계시길 기원해 봅니다.

 

나뭇잎사이 숨어 있는 장승옆을 지나갑니다.

 

 최명희문학관에 왔습니다.

최명희문학관 홈페이를 옮겨보면

"...에는 한민족의 삶과 우리말에 깃들인 얼의 무늬를 소설 『혼불』에 그려낸 소설가 최명희(1947-1998)의 생가터와

그의 문학 혼이 올곧게 녹아 있는 최명희문학관이 있다.

그리고 "최명희길"도 있다.

동학혁명기념관에서 경기전 뒷담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의 한 중간에 있는 생가터와,

그곳에서 최명희문학관을 잇는 "ㄴ"자 형 골목이 "최명희길"이다.

생가터 표지석을 모서리에 두고, 위로 난 길의 끝에 동학혁명기념관이 있고,

옆으로 난 길의 끝에 최명희문학관이 있는 셈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길을 따라 문학관에 왔는데 조금 시간이 늦었네요.
문이 잠겨져 있습니다

 

문앞마당에 있는 귀여운 석상과 마주 앉아 "너 혼불 읽어봤니? 그 내용은 아니?
너 그 책은 1930년대 말, 전라도의 한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며 몸을 일으키려는 3대와,

천하고 남루한 상민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애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소설인데

말그대로 이 고을 사람들 모두의 애환을 이고 장말로 절절이 풀어낸것이란다." 등등

주절거리다가 대답없는 석상에 서운해 하며 돌아섭니다.

 

최명희 문학관앞 전주부채문화관입니다.

 

전주는 조선시대 가장 질 좋은 부채를 생산하였던 부채의 고장이었습니다.
전주에서 최고의 부채가 생산되었던 것은

질 좋은 한지가 이곳에서 생산된 데에 요인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인지 그 옛날 전주감영내에는 단오날 임금에게 진상할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扇子廳) 4채가 매우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일제 강점기를 겪으면서 선자청에서 부채를 만들던 ‘경공장’과 납품을 하던 ‘외공장’의 장인들이 전주 외곽 지역에 공방촌을 형성했고

현재 조충익(태극선), 김동식(합죽선), 방화선(단선) 선자장이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주부채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할수도, 체험할수도, 구입할수도 있는곳인데
여기도 들어가는 순간 "7시가 넘어 지금 문을 닫으려 합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잠깐만 들러볼게요"
그렇게 해서 한장 꾹 하고 나옵니다.

 

여섯시간을 쉬지않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남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서있는지 모르지만 이 남자는 여기에 얼마나 서있었고 얼마나 더 서있어야 할까요?

그렇게 하루를 마칩니다.
내일은 거제에서 만나요....

Pyotr Il'ich Tchaikovskii   Ouverture Solennelle'1812', O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