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고산리 유적 발굴 중간 보고회

하늘타리. 2012. 7. 26. 15:52

 1987년의 어느날

고산리 주민들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타제석창과 긁개 등을 발견합니다.


그 전에도 비슷한 것이 계속 나왔습니다만 별관심이 없었는데

주민 좌정인씨가 이것을 제주대학교박물관으로 가져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당시 고고학을 가르키던 이청규교수(현 영남대 교수)가

학부 4학년생인 강창화학생 등에게 현지에 가서 다른 것이 더 있는가를 확인해오라 시킵니다.


주변을 조사하던 강창화학생이 토기편등을 가지고 옵니다.
그것이 융기문토기의 일부임이 밝혀지자

이를 계기로 1991년과 1992년 지표조사를 통해

자구내 포구 하천변을 따라 수월봉에 이르는 신석기시대 유물산포지를 확인하고

융기문토기와 찌르개·타제석기·석촉 등을 수거했습니다.
이후 1994년 ‘신창-무릉’간 해안도로 건설 과정에서 일부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1997년과 1998년 다시 고산리유물산포지 1지구에서 집중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습니다.
1991년 지표조사에서 1998년 시·발굴 조사에 이르기까지

석기 9만9000여점, 토기조각 1000여점 등 10만여 점이 발굴되었는데

특히 원시형 적갈색 섬유질 토기조각은 독특한 토기형태로 고산리식 토기라고 불리웁니다.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유물 조합을 통해 후기 구석기 말엽의 수렵채집 집단이 석기 전통을 계승하며,

초보적인 형태의 토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여

구석기 후기 문화에서 신석기 전기 문화로 옮겨가는 과정을 알 수 있고,

시베리아, 만주, 일본, 한반도 지역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의

신석기 전기 문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것이다 하여

일대 10여만평을

1998년 12월 23일, 사적 제412호로 지정해서 보호관리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고산리 유적지는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지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학술적. 교육적. 역사문화관광적 자원으로 전혀 활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유물들 모두 박물관등지로 옮겨져 있고 시·발굴현장은 복토되어 초지로 바뀌어 있어

광활한 면적에 덩그러니 안내현판하나만 설치되어 있습니다.

 

2010년 3월 당산봉에서 내려본 고산리유적지


많은 사람들이 고산리 유적지가 어떤 곳인가를 궁금해하여 찾아왔다가

빈 초지만을 보고 매우 허탈해 하며 돌아가는 허무시리즈 제 1탄이 되는 곳입니다.

 

제주문화유산연구원에서 제주시가 추진 중인 고산리 선사유적 종합기본계획에 따라

이곳을 정비복원할 기초 자료 확보 차원에서 지난 봄부터 조사하고 있다는 기사를 어딘가에서 읽었습니다만...
언제한번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다가

문외한이 옆에서 걸리적 거리다 돌아올 것은 지청구뿐이 없을 것이고...
제주시에서 고산이라는 거리가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니기 때문에 미루고 있었는데

오늘 답사회회장이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긴급. 고산리유적발굴 중간보고회 갈 사람 모집"


황망중에 쭐레쭐레 따라나섭니다.

 

어제(25일 오후 2시)

고산리 유적지 시굴 및 발굴조사와 중간보고 및 현장설명회가  열린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소재 고산문화의집 2층의 모습입니다.

 

 

 

 자료집 배부는 전문가들만을 대상으로 극히 한정되게 배포하여

프리젠테이션에만 의존하여 설명을 듣습니다만

마이크는 웅웅거려 알아듣기 힘듭니다.
사실 전문가는 자료집없어도 되는 거고 비전문가가 자료집을 봐야지요.
그리고 자료집과 PP가 똑같으니 자료집있는 사람들은 설명이 웅웅거려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일반참가자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주변에 설치된 보조 판넬속에서 내용을 찾습니다.

 

 

 

 

 

발표의 주요내용은

발굴조사지역 (8필지(26,642㎡)중 시굴조사(23,098㎡)에서는

지형에 따라 23개소의 트렌치(조사를 위해 파는 구덩이라고 해석하면 될겁니다)를 설치․조사하여

수혈유구, 야외노지, 석기제작장 등 80여기의 유구를 확인했으며

고산리식토기와 함께 다양한 타제석기가 확인하였고....

발굴조사(3,544㎡)는 10×10m Grid를 설치해 조사중인데

원형 집터 10여개 동과 수혈유구(竪穴遺構. 구덩이) 80여기,

돌을 쌓은 흔적으로 불땐 자리로 생각되는 집석유구(集石遺構) 10여기, 그리고...

고산리식토기, 융기문토기, 무문양토기 등 토기류 및

화살촉, 찌르개, 밀개 등 성형석기와 돌날, 박편, 석재, 망치돌 등 석기류가 출토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발굴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다양한 유구와 함께

동시기 유물조합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며,

특히 고산리식토기와 함께 타제석기가 동반 출토되는 주거지가 처음으로 확인된 점은

한반도 최고 신석기시대 주민집단인 고산리유적의 정주취락을 논의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자료로 평가된다는 이야기지요.

 

현장으로 가기전에 보고장 뒷편에 전시한 시·발굴중 출토한 유물들을 봅니다.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좀 찍으려는데

테레비젼 카메라기자 들이 어찌나 눈치를 주는지....

 그래 봤자 몇초도 않나올것을 이카메라, 저카메라 전부 삼발이설치하고 주변접근을 못하게 합니다.

짜증 가득 담아 사진을 찍습니다. 

 

 

 

 

 

 

 

 

 

 

 

 

 

 

이중  이번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둥근 귀고리(결상이식) 1점에 대해서는

현장답사간 이런 저런 말들이 꽤 많았습니다.
옥이다. 아니다. 대리석이다. 어쨋든 제주에 없는 돌로 만들어진 것이다. 등 등... 
오늘 설명을 맡은 제주문화유산연구원 방문배 조사연구부장은

결상이식 뿐 아니라 화살촉도 대개 남해안과 추자도 등지에서 발견되는 류의 돌”이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그당시 제주와 육지 어딘가와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앞서 발굴된 고산리식 토기의 경우는

태토에 식물 줄기를 섞어 만든,

식물성 섬유질 토기로  ‘고산리식’이라고 이름 붙여진 데에서 알 수 있 듯,

한반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양식이라

그 때도 제주는 육지와 고립되어 있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는데

이 귀고리에서 교류의 증거가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결상이식은 신석기시대 귀고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한문으로는 玦狀耳飾이라고 쓸겁니다.
결상이식은 기존에는 그 형태로 인해 석환(石環),

또는 중국의 玦, 즉 패옥을 닮았다는 의미로 결양석제품(玦樣石製品-패옥 모양의 석제품)이라고 불렀으나

정작 그 용도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명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17년 오사카부 코우[國府] 유적에서 죠몽시대 전기의 인골이 발굴되었고,

그때 두개골 양쪽 귀부분에 한 쌍의 결상이식이 발견됨으로써

드디어 이것이 귀고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에서는 6점의 결상이식이 주로 영동에서 영남에 걸친 동해안을 따라 출토되었으며,

고성 문암리에서 2점 1쌍의 완형 결상이식,

청도 사촌리의 결상이식 박편 1점,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결상이식 파편 1점,

사천 선진리 유적 하층의 완형 결상이식 1점,

여수 안도 패총 최하층의 완형 결상이식 1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기별로 분류하면

선진리, 안도 패총, 문암리 유적 등이 고식 형태이며 그 뒤로 동삼동 패총이 이어지고,

사촌리 유적의 것이 가장 뒷시기로 편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번 고산리에서 발견된 것도 연대측정을 위한 분석(AMS, OSL, 무기질․유기질분석)을 실시,

편년을 규명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참고) 강원도 고성 문암리 결상이식

 

 

(참고)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결상이식

 

시·발굴 현장입니다. 

 

 

 

안내자는 힘주어 이야기 합니다

"1990년대 초기 발굴 당시에도 타제석기와 고산리토기는 확인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고산리 신석기주민들이 생활터전인 주거지와 수혈유구 시설물 등 유구들이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런 유구들이 당시 유물들과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확인됐다는 점이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하면서

현장을 안내합니다.

 

 

 

 

 

 

 

 

   

우리나라 선사유적지 중 구석기 유적지는 대략 일곱곳이 있지요.

한탄강변에 있는 전곡리 유적지
공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금강가에 있는 공주 석장리 유적지
연천 전곡리 유적과 이어지는 한탄강-임진강 유역의 파주 가월리 및 주월리 유적지
남한강가 충적대지에 자리하고 있는 단양 수양개 유적지
조계산 남쪽 끝자락 구릉지에 송광천, 외서천이 감싸고 흐르는 천변 퇴적층에 있는 순천 월평 유적지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구석기시대의 동굴유적이라는 제천 점말동굴 유적지
2003년-2004년 사이 7개월간의 발굴조사 결과 3만여 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장흥 신북 유적지를 들수 있습니다.

 

제주 고산리유적은 구석기유적은 아니지만 한반도 신석기 유적지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판정,

이미 역사학계에서는 충분히 의의가 있는 곳이었지요.

 

그러나 발견 유물이 화살촉이나 토기·박편 등에 한정돼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지는 못 했는데...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집 터와 집석유구(음식을 굽기 위해 불을 뗀 자리)가 발견되었으니

앞으로의 추가발굴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 함 일겁니다.

 

 

 

 

 

 

 

 

 

이번에 발굴된 원형주거지는

직경이 4.5m 가량으로 육지부 신석기 주거지(직경 5~6m)보다 크기가 다소 작고 깊이가 더 얕다고 하고

육지부의 경우 주거지 중앙에 화덕구멍이 자리하는데

현재까지의 조사에서는 주거지 내부에서 화덕 구멍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음식을 굽기 위해 불을 뗐다는 자리에는 돌들이 밀집해있습니다.

 이 같은 집석유구에서는 자갈과 깨어진 돌, 구멍난 현무암이 혼재해있었고

현무암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유난히 붉은 색을 띄었습니다.
안내자는 “불 온도로 돌이 깨지면서 자갈이 되거나 모난 형태를 띄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붉은 색도 불 온도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기타 등등은 설명을 잘 않들어서...

방향을 바꿔 다시 한번 찍을 테니

그냥 사진으로 보시지요.

 

 

 

 

 

  

 

 

 

 

 

 

이날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1990년대 고산리 선사유적 최초 발굴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이청규교수는 

"고산리 선사유적이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후에도 일부 형질변경이 이뤄진 곳이 있어서 걱정을 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원시적이나마 가옥구조를 만들고 집단 정착생활을 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이 조사가 더욱 확대된다면

당시 1만년전 제주 최고 원주민의 마을모습을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추가 발굴의 필요성을 언급합니다.

 

돌아오는 길..

문득 떠오른 어느 장면하나...
현장보고회가 끝나갈 무렵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강창화박사에게 이청규박사가 다가가 이야기를 나눕니다.
어느 기자, 두 사제간의 담소를 사진으로 찍은 뒤

강창화박사에게 묻습니다.

이곳 고산리 유적 발굴에 대한 감회가 새로울 텐데 소감이 어떠십니까?
강창화박사 당황하며 ..

제 현장도 아니고 언급할 게 없습니다.
부랴부랴 자리를 떠나는 모습...
다시 복토되어 황량해질 고산들의 모습과 겹쳐집니다.

 

그렇게 뙤약볕속에서의 몇시간이 지나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