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대정현 지역 방어유적

하늘타리. 2012. 7. 9. 21:08

 

( 답사회 222차 역사기행으로 대정현 지역에 위치한 방어유적을 답사하였습니다.
오늘은 고영철선생님이 자료를 종합하고 현장을 안내하였습니다.
받은 자료를 그대로 올리고 당일 찍은 사진만을 첨부합니다.

(..)속에 끄적인 것만이 개인의 단상을 추가한 것입니다.)

 

 

 

차례

1. 용수리 우두연대터

2. 고산리 당산망터

3. 고산리 차귀진터(생략)

4. 일과2리 환해장성

5. 일과1리 환해장성1구역

6. 일과1리 환해장성2구역

7. 일과리 서림연대

8. 하모리 모슬진터

9. 하모리 무수연대터

10. 상모리 모슬망터

11. 상모리 저별망

12. 보성리 대정현성(생략)

13. 사계리 산방연대

14. 감산리 호산망(이두어시망)

15. 하예동 당포연대

16. 색달동 별로천연대터(답사불가)

17. 대포동 대포연대

18. 강정동 환해장성1구역(생략)

19. 강정동 환해장성2구역(생략)

20. 강정동 마희천연대터(생략)

21. 강정동 변수연대터(생략)

22. 서호동 연동연대

23. 하원동 구산망

 

 

 

※ 개요

제주도는 북쪽으로는 한반도를 비롯해서 서쪽으로 중국, 동쪽으로 일본, 남쪽으로는 유구열도로 둘러싸인 동중국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침입을 빈번하게 받았다. 특히 왜구들이 땔감과 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왜구(倭寇)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왜구들은 고려 말부터 제주에 빈번히 침입하여 방화, 약탈, 인명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는 등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수없이 제주에 침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제주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자의․타의적인 방어시설을 갖추게 되었는데, 왜구 침입에 대비한 본격적인 제주 방어체제는 고려 말부터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방어시설은 성곽․봉수․연대이다. 고려 충렬왕28년(1302)에 봉수 설치가 시작됐고, 조선시대에는 세종19년(1437)에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韓承舜) 목사의 건의에 의하여 방어체제를 정비하여 방호소(防護所) 12개소와 수전소(水戰所) 10개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제주에는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3개소의 읍성만이 축성되어 있었고, 봉수시설도 22개에 불과했었다. 조선조 제주도의 방어체제로 알려진 ‘3성 9진 25봉수 38연대는 그 이후에 차례차례로 정비되어 완성된 것이다. 대정현 소속 봉수연대의 응소 관계는 다음 표와 같다.

관할

봉수대

응소

연대

봉수명

소재

연대명

소재

직할

저별망

송악산

(동)호산

(서)모슬

당포연대

하예동

산방연대

사계리

호산망

월라봉

(동)구산

(서)저별

별로천연대

색달동

대포연대

대포동

구산망

구산봉

(동)삼매양

(서)호산

마희천연대

강정동

변수연대

강정동

모슬진

모슬망

보슬봉

(남)저별

(북)당산

무수연대

하모리

서림연대

일과리

차귀진

당산망

당산봉

(남)모슬

(동)만조

우두연대

용수리

 

제주의 방어유적에 대한 옛 기록으로는 世宗實錄地理誌(1454), 東國輿地勝覽(1481), 新增東國輿地勝覽(1530), 耽羅誌(1653), 耽羅防營總覽(1760-1770), 濟州兵制烽臺總錄(正祖年間), 濟州邑誌(正祖年間), 濟州大靜旌義邑誌(1793), 耽羅誌草本(1842-1843), 旌義郡邑誌(1899) 濟州兵制烽臺摠錄 등이 있는데 여기에는 방어시설의 위치와 크기, 거리 등에 대한 설명이 들어 있다.

 

1. 용수리 우두연대터(牛頭煙臺址)

위치 ; 한경면 용수리 4210번지. 용수리 일주도로에서 해안쪽으로 1.4㎞ 정도 떨어진 '쇠머리동산'이라 불리는 곳. 현재 전투경찰초소 북쪽으로 조금 가면 동쪽으로 난 소로가 있는데 여기로 들어가면 20여m 정도 되는 곳 밭 하나 건너에 있다.

 

 

 

 

 

 

 

 

 

 

현재 연대는 거의 허물어져 상부 6.3m, 하부 6.5m, 높이 1.1m 크기의 연대 정면 일부만 남아 있다.(제주의 방어유적) 그 위에는 현대에 전투경찰 초소로 이용되었던 건물이 남아 있다. 연대의 북쪽으로는 용당리 해안, 남쪽으로는 당산봉과 차귀도가 보인다. 2012년 연대 터 옆에 해녀그림이 그려진 물탱크가 설치되어 위치를 멀리서도 잘 찾을 수 있다.

우두연대는 차귀진 소속이었다. 남쪽으로는 일과리 서림연대(11.9㎞), 동쪽으로는 두모리 두모연대(3.7㎞)와 교신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서림연대와는 직접 보이지 않는 위치이다. 따라서 중간에 있는 고산리 당산망(2.1㎞)이 중간 역할을 했을 것이다.

 

2. 고산1리 당산망(堂山望)터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산 43. 당산봉의 북서쪽 가장 높은 곳.

 

 

 

 

( 위 사진 초소안으로 들어가야 봉수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고 봉수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들어갈 때 사진기를 놓고 가라고 해서 내부가 아닌 그곳에서 보이는 외부의 모습조차 찍을 수 없을 것 같아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고 나혼자 건너편으로 오릅니다.

오르는 길에 비양도를 보고

거북바위까지 올라가

고산들의 모습을 찍고 다시 내려가면서 차귀도일대를 찍습니다)

 

 

 

 

 

 

 

당산망은 차귀진에 소속된 봉수대로 한경면 고산1리 북서쪽 끝 바닷가에 접한 해발 148m의 당산봉 서쪽 봉우리에 있었다. 봉수대 동쪽으로는 판포오름, 남동쪽으로는 가시악, 그 너머로 모슬봉이 보인다. 북동쪽으로 만조망(느지리오름, 직선 거리 10.9㎞), 남동쪽으로는 모슬봉수(직선 거리 14.5㎞)와 교신하였다. 봉수대 터에서 보면 모슬봉이 보이기는 하나 육안으로 연기를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봉수대 자리에는 현재 전투경찰 해안초소가 자리잡고 있어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3. 고산1리 차귀진(遮歸鎭)(답사 생략)

위치 ; 한경면 고산1리 2228 (고산리사무소 서쪽 100여m 지점)

차귀진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인 목호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효종3년(1652) 봄에 이원진 목사가 앞에 차귀도가 있으므로 이를 의지하여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진을 설치할 것을 아뢰어 설치하였다. 여수(旅帥, 약 125명의 병력)를 두었는데, 병력은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132명으로 총 135명이었다. 숙종1년(1675)에 여수를 파하고 조방장(助防將)을 두었다. 숙종32년(1706)에 송정규(宋廷奎) 목사는 이를 만호로 승격시켰으나, 숙종42년(1716) 황구하(黃龜河) 어사가 형편을 살펴보고 만호를 파하고 다시 조방장을 환원하였다.

전체적인 지형은 동고서저형으로, 마을의 동쪽은 청수리, 서쪽은 해안과 인접한 봉수대가 설치된 당산봉이 있다. 성의 둘레는 1,190척(약 370m)이고, 높이는 10척(3.1m)이다. 동서 190m, 남북 110m(둘레 620m)의 동서 방향으로 장축(長軸)을 갖는 타원형의 성이다. 동서로 초루가 있었고,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무기고 등이 있었다. 차귀진에 소속된 병력은 조방장 1인, 치총(雉摠) 2인, 성정군 (城丁軍) 132명, 봉수연대 별장(別將) 12인, 봉군(烽軍)24명이 있었다.

차귀진은 지형적 입지 조건으로 볼 때 수산성과 함께 진성으로서 평야형의 특징을 갖춘 성이다. 따라서 해안형과 특성을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방어 유적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증은 우포(용수리 해안)를 대정현에서 대강을 붙일 수 있는 여섯 곳의 포구 중 하나라고 하면서 이곳을 관찰하고 비교적 자세하게 그 정황을 적어 놓았다. 이곳은 1675년(숙종 1)에 어사 이선이 순무할 때 차귀진을 옮기려고 했던 곳이라고 하면서, “죽도와 마주하는 곳인데, “우물이 없어 흠이라고 하였다. 죽도는 바로 차귀도이다.

『탐라지』에서는 죽도는 “사면이 모두 석벽이다. 동남쪽에 배가 머무는 곳이 있어 왜구가 여러 번 이곳에 들어왔다고 기록할 만큼 예로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아 신경이 쓰였던 곳이다.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의하면 성문은 동문 서문 2개소가 있었고, 성 안에는 3채의 건물이 있었다. 현재 성의 윤곽은 없어졌고, 고산리 양태수씨의 집 울타리에 축조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100㎝×110㎝, 100㎝×80㎝ 크기의 성석(城石)이 1단 정도만 15m 가량 남아 있다. 굽돌의 형태로 보아 기울기가 일직선으로 된 거친돌 허튼층쌓기로 추정된다.(제주의 방어유적 109∼110쪽)

지금도 고산리 주민들은 이 지역에 대해서 '성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4. 일과2리 환해장성(環海長城)

위치 ; 대정읍 일과리 1419-3 ~ 1897-3번지 일대. 일과2리 어촌계 건물 북서쪽. 해안도로 북쪽 진입로에서 가까운 쪽으로 일과2리 어민의집이 있고 어민의집에 아주 가까운 북서쪽으로 장성이 남아 있다.

환해장성은 삼별초의 입도와 관련하여 축조를 시작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왜구를 막기 위해 조선시대에 수축되었다. 일과2리 해안도로변에 80여m가 남아 있다. 보존 상태는 매우 나쁘다. 온전하게 남은 곳은 전혀 없이 거의 무너져 버렸고 城石이 바다 쪽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다. 큰 돌들만 일부 자리를 지키고 있다.

 

5. 일과1리 환해장성1구역

위치 ; 대정읍 일과1리 서림정수장 왼편 길로 해안까지 가다 보면 길 서쪽에 있다.

일과1리 노인회관 맞은편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 끝나는 지점의 왼쪽을 보면 소나무가 몇 그루 있고, 그 사이에 허물어져가는 성이 있다. 이곳이 일과리 환해장성이다. 길이는 불과 50m 정도로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다. 해안을 따라 길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부가 잘려나갔을 가능성이 높다.(서귀포신문 070112) 일부 무너진 곳을 보면 바깥쪽에는 비교적 큰 돌을 쌓고 속은 매우 작은 자갈까지 집어넣어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높은 곳도 2m가 채 되지 않고 폭은 1m 정도이다. 성의 안쪽은 각종 폐자재가 쌓여 있는 사유지이다. 동남쪽 옆에는 갯대추나무자생지 안내판이 있다.

 

(환해장성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워 서림수원지에서 배수되는 물이 모이는 배수지와

부근에서 자라는 갯대추의 모습만 찍었습니다)

 

 

 

6. 일과1리 환해장성2구역

위치 ; 대정읍 일과1리 서림연대 남쪽과 북쪽에 있다.

일과1리 서림연대의 남쪽과 북쪽에 환해장성의 흔적이 있지만 보존상태는 매우 나쁘다. 약 150m 정도 성이 남아 있었으나 해안도로가 건설되면서 일부가 파괴되었다.(남제주의 문화유적 117쪽) 거의 무너져 높이를 재기조차 어렵다. 1구역 환해장성과 이어졌었을 것으로 보이는 곳은 해안도로가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제주도의 서남부 지역에서는 일과리에만 환해장성이 3군데 흔적이 있다. 모두 무너진 채로 남아 있고 다른 곳에는 장성의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7. 일과리 서림연대(西琳烟臺,西林煙臺)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22호

위치 ; 대정읍 일과리 1275-1.

 

 

 

 

 

일과리 서림연대는 대수동 바닷가에 있다. 주변에 높은 곳이 없기 때문에 직접 바닷가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바닷가의 둥글둥글한 돌과 잡석을 이용하여 최근(1995년 전후)에 복원하였다. 올라가는 계단은 안쪽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졌고, 상부에는 돌 한 단 높이로 불을 피우는 곳이 둥글게 만들어졌다.

탐라순력도의 '한라장촉'에는 현 위치가 서림포(西琳浦)라고 기록되어 있다. 탐라방영총람(1760∼1770년刊)과 제주병제봉대총록·제주읍지(정조연간 刊), 제주대정정의읍지(1793년 刊) 탐라지초본(1842∼1843년 刊), 대정군읍지(1899년 刊) 등에 모두 '서림연대'로 표기되어 있다. 이 연대의 위치를 기록한 것을 보면 제주읍성에서 서쪽으로 103리, 대정현성에서는 서쪽으로 7리라고 되어 있다. 응소 연대는 동쪽으로 '무수연대', 서쪽으로는 차귀진 소속의 우두연대이다. 여기서 우두연대는 너무 멀다.

서림연대는 재료를 현지에서 조달했다는 점, 가로×세로×높이가 규격에 맞는 점, 상부에 방호벽을 만들지 않은 점, 계단을 내부로 축조한 점 등을 고려해 볼 때 제주도 연대의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8. 하모리 모슬진(摹瑟鎭)터

위치 ; 대정읍 하모리 770번지 부근 부둣가

모슬진성은 원래 1510년 장림 제주목사가 가래방호소(강정동)에서 동해방호소(회수동)로 이전하여 진성을 축조하였었다. 숙종4년(1678) 윤장형 목사가 동해성(東海城)에 있던 동해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원래 현을 세울 때는 좌우에 2개의 진을 설치하였으니 정의현에는 수산진과 서귀진을 두었고, 대정현에는 동해진과 차귀진을 두었던 것이다.

모슬진성에 대해서는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는 이곳에 모슬진방호소가 있었으며,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모슬포수전소라고 되어 있다. 정조년간에 간행된 제주병제봉대총록에는 '모슬진'(摹瑟鎭), 역시 정조년간의 제주읍지에는 '모슬보'(摹瑟堡), 1842년경의 탐라지초본에는 모슬진, 1899년의 대정군읍지에는 '모슬성'(摹瑟城)이라고 되어 있다.

모슬진은 3면이 바다로 싸여 북쪽만 뭍과 연결되어 거의 섬처럼 된 암반 위에 설치하였다. 문은 북쪽으로 하나만 설치하였다. 성 내부에는 생수가 없고 성 밖에 신영물이 있었다.

남사록에는 성의 둘레가 315척, 높이는 12척으로 나타난다. 나중에 335척으로 넓혔다. 탐라지초본에는 사후선(伺候船) 1척에 書記 7명, 防軍 117명이 근무하는 것으로 기록되었고, 대정군읍지에는 '有東一門城在石島上三面阻海中無泉城外有水'라는 기록이 있다.(남제주문화원, 南濟州 文化遺蹟 130~131쪽)

현재는 성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고 서남쪽으로 바다를 매립하였기 때문에 당시의 모습을 가늠해 보기도 어렵다.

 

9. 하모리 무수(茂首,無水,無首)연대 터

위치 ; 대정읍 하모리 681번지. 무수물 또는 연대왓이라 불리는 곳이다. 대승사와 ‘객주리식당’사이의 경작지이다.

제주읍성에서 서쪽으로 112리, 대정현성으로부터는 남쪽으로 5리에 해당하는 위치이다. 모슬진 소속이다.(남제주의 문화유적 130쪽)

모슬포항 서쪽 해안과 인접하여 펼쳐진 넓은 밭을 ‘연디왓’ 또는 ‘연디밋’이라 부른다. 무수연대는 서쪽으로 서림연대, 동쪽으로 산방연대 사이에 있는데 서림연대와의 교신은 가능하지만 산방연대와는 직접 보이지 않아 모슬봉수가 중계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림연대와는 3.2㎞, 모슬망과는 2.1㎞, 산방연대와는 6㎞이다. 현재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제주의 방어유적 247쪽) 무수물은 현재 대승사라는 절 앞에 있었으나 매립해 버렸다.

 

(사진 중간지점이 연디왓내 일부 둔덕입니다.

여기가 연대가 있던 동산을 허물고 밭을 만들때

동산옆에 붙어있던 밭과의 경계를 위해 허물지 않은 곳이라고 하는 어른도 있습니다

뒤 왼쪽으로 대승사가 있습니다.

여기서 부터 대승사앞까지는 바다이었고

대승사앞 빌레에 무수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지금의 건물뒤로 단산과 산방산이 보입니다)

 

(연디왓 부근 잣에 올라 보는 가파도의 모습입니다)

 

 

  10. 상모리 모슬망터

 

위치 ; 대정읍 상모리 3538-2 모슬봉 정상

모슬봉수는 186m의 모슬봉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정현 혹은 모슬진 소속으로 주로 간봉(間烽)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즉, 동쪽의 호산봉수, 남쪽의 저별봉수(직선 거리 5㎞), 서쪽의 당산봉수(14.5㎞)의 사이에서뿐 아니라 동쪽으로 인접하여 대정현성이 위치해 있어서 간봉으로서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오름에는 공군부대와 기지가 들어서 있어서 흔적이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군부대 안에 있어 출입협조가 불가합니다

사실 들어가 보았자 그 자리에 건물뿐이 없습니다.)

 

 

11. 상모리 저별망

위치 ; 상모리 산2번지 송악산 외륜산 북서쪽 부분

송악산은 제주도의 많은 오름들과는 달리 이중분화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번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긴 분화구에서 다시 폭발하여 더 높은 봉우리와 분화구가 생긴 모습이다. 그 외륜산 등성이 서쪽 즉, 높이 107m의 송악산 서쪽 능선 정상에 있었다.

봉수대의 위치는 서쪽 절벽으로부터 약 4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동쪽에서 진입하는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 길을 따라 서쪽 끝까지 가서 동쪽으로 올라가는 길을 30m 정도 간 곳에 있다.

문헌에 의하면 저별망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쪽으로는 산방산과 대평리 해안까지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한눈에 바라보여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저별봉수는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저리별이'(貯里別伊)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고 그 이후 1530년부터 '송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저별(貯別)이란 이름은 1760년대부터 1899년까지 쓰였다. 동쪽으로는 호산(이두어시)봉수(6.8㎞), 북서쪽으로는 모슬봉수(5㎞)와 응신하였다.

오름에 있는 다른 봉수대처럼 가운데 봉덕을 만들고 그 둘레에 2중으로 원형의 둔덕을 만든 것은 약간 남아 있다. 서쪽으로는 잡목이 자라고 있어 확인이 어렵다. 다만 봉덕의 높이가 2m 가량 남아 있는데 그 주변에는 큰 돌 6개가 일직선으로 박혀 있어 흙이 흘러내림을 방지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이형상 목사 순력당시 그려진 탐라순력도 맨첫장에 있는...

목사순력당시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이유는 1702년 가을이던 10월 29일(음력) 시작해 11월 19일까지 21일동안 이라는 말입니다.

탐라순력도는 중종이 이형상의 제주목사직을 파직하라고 명을 내린 1703년 3월 5일에서 부터

두달이 지난 1703년 죽취일(竹醉日·5월 13일)에 만들었다고 돼 있습니다. 

이형상은 자신이 파직됐다는 사실을알고,

후임자가 내려오는 시간을 이용해 화첩 형태의 「탐라순력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순력도에 있는 그림중 한라장촉을 포함해 순력’을 펼치기 이전의 그림이 8점이나 됩니다.

한라장촉은 1702년 4월 작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별망은

지금의 샛알오름 일본군고사포진지가는길 조금 높은곳쯤으로 그려져 있습니다만 ...

 

대다수의 자료가 송악산 외륜산 북서쪽 부분이라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사진과

 

 

그 인근에서 보이는 경관의 사진입니다.)

 

 

 

 

 

 

 

 

 

 

12. 보성리 대정현성(답사생략)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12호

위치 ; 대정읍 보성, 안성, 인성리 일원

대정성은 태종16년(1416) 한라산 남부에 정의, 대정 양현을 설치한 후 왜구 침입 방지를 위하여 태종18년(1418) 초대 대정현감 유신(兪信)이 축조하였다. 당시 제주 판관 하담은 대정성의 축성 전말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술년(1418) 여름 일이 있어 이 현에 왔더니 현감 유신이 술을 내어 놓고 위로하여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현을 설치한 유래를 아십니까? 오식 공이 안무사로 제주에 와서 생각하기를 …… 마땅히 현을 나누어서 수령을 두어야겠습니다고 아뢰니 임금님과 조정에서 그렇다고 생각하여 곧 부절(符節)을 명하셨으므로 비로소 제가 오게 된 것입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임시로 묵은 지 몇 달만에 오식 안무사는 소환되고 이간 공이 부임하고는 통첩하여 말하기를 ‘성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으므로, 이에 한두 사람 부로(父老)와 더불어 지방을 두루 돌아보고 위치를 정하여 땅을 재니 주민과 장정들이 스스로 공사에 나왔으므로 한 달도 채 못 되어 성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말을 듣고 술잔을 들어 사방을 돌아보니 성지(城池)는 다 되었고, 관부(官府)는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있고, 관원들은 예의가 있었다.》

장축인 동서방향이 거의 정확하게 동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성의 주위는 4890척 높이 17척4촌이고 동·서·남 3문이 있었는데 문 위에는 문루가 있었다. 성문은 동, 서, 남, 북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오래지 않아 폐쇄된 것으로 보인다. 동,서,남문으로는 현재도 길이 남아 있으나 북문터로는 통하는 길이 없다. 또한 선조 연간에는 옹성과 포대를 가축(加築)했고 성 안에는 우물 하나와 3문 앞에 옹중석을 각 4기씩 설치했다.

1986~2001년까지 성곽 703m를 보수했고, 1994~1999년에 북동, 남동, 남서 모퉁이에 치성 3개소가 재현되었다. 북서쪽에는 있었으나 복원되지 않았다. 치성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에 유리한 시설이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도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인용하여 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효용성을 말하였다.

“만약 성에 곡성․옹성이 없다면 비록 사람마다 한 살받이터를 수비하고 사받이터 사이에 방패를 세우고 외면에서 오는 화살과 돌을 가려 막더라도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으면 이를 보고서도 막을 수가 없다. 『기효신서』에 의거하면 50타마다 1치를 두어 밖으로 2~3장(丈)이나 나오게 했는데 두 개의 치 사이의 거리는 50타이며 1치가 각각 25타를 점령하게 된다. 따라서 화살이 나가는 힘이 한창 강하고 좌우로 돌아보면서 쏘기가 편리하므로, 적군이 성 밑에 와서 붙을 수 없게 된다.”

북성(北城)의 가운데에 북문이 있고 2002년 옹성을 복원했다. 복원된 옹성은 내부가 너무 좁다. 옹성은 1990년대말까지 둘레 40여m, 높이 2m 정도가 남아 있었다. 옹성 주위에 쌓아진 낮은 돌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원래 있었던 것인지 경작하는 과정에서 나중에 만들어진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옹성 위에는 1975년 전후에 만든 것이라고 하는 물탱크가 설치되어 1995년까지 있었다. 서정길씨의 증언에 따르면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는 자리는 원래 5m 정도 깊이의 호가 있었고 호의 서남쪽 구석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고 한다.

동문은 정종 을묘년 현감 고한록이 중수하고, 순조 정해년 현감 박상률은 동문과 서문을 개건했으며, 철종 경오년 현감 신성흠이 중건했다. 남문루는 일명 해안루(海晏樓)라고도 하며 현감 이관이 중건했다. 성 안에는 객사, 동헌, 위사(衛舍), 향사당 등 현의 정치를 위한 관아가 있었다.(제주도, 제주의 문화재, 1982. 138쪽) 동헌은 지금의 보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982. 147쪽)

동쪽과 남쪽 성은 멸실된 것을 복원했고 북성은 복원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매우 높아서 약 5m 정도가 되었다. 2005년 전후에 낮아진 부분을 모두 보수했다. 남문은 1990년대에, 북쪽 옹성은 2002년에 복원하였다.

성 위에는 주먹만한 크기의 바닷돌을 수없이 깔아 놓았었고 두께 10cm 정도의 작은 방석만한 넓적한 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보성리 출생 인성리 거주 여 75세 정임춘 할머니. 1998년 5월 31일) 넓적한 돌들은 아마 미석(眉石)이 아닌가 생각된다. 관청 건물에 썼던 주춧돌과 기와들이 민가(인성리 洪學士씨 댁)에서 더러 발견된다. 바닷돌은 전투시 투석용(投石用)이다.

"한 사름이 멫 가멩이씩 지여 오라 허연 허난 그 때엔 자동차가 시카 몬 등짐으로 지어단 성 우티 가득 깔앙 놔 뒀당 적이 오민 대가리라도 맞쳥 죽이자 헌 거주."("한 사람이 몇 가마니씩 지여 오라 하니 그 때엔 자동차가 있을까 모두 등짐으로 지어다가 성 위에 가득 깔아 놔 뒀다가 적이 오면 대가리라도 맞쳐서 죽이자 한 거주)(옹성 바로 남쪽 집에 거주하는 79세 허정길 할아버지. 1998년 5월 31일)

 

13. 사계리 산방연대

위치 ; 안덕면 사계리 산 33-2.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이다. 산방산 앞에서 용머리 해안으로 능선이 이어지는 일주도로와 인접한 해안 쪽에 '연디동산'이라 부르는 주위보다 지형이 높은 언덕에 연대가 있다. 동쪽으로는 월라봉 앞 해안, 서쪽으로는 송악산까지 시야가 트여 있다. 동쪽으로는 당포연대(唐浦煙臺, 서귀포시 하예동. 직선 거리 5.7㎞), 서쪽으로는 무수연대(茂首煙臺, 하모리. 직선 거리 6㎞)와 교신하였다.(1996, 제주의 방어유적 238쪽)

1950년 경에 유실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대가 있었던 자리에 맨 밑에 놓였던 석재들(높이32×가로90×세로80㎝, 40×45×48㎝, 38×45×67㎝)만 지면에 흩어져 있었으나 2000년 12월 사업비 1억원을 투입하여 복원하였다.(제주일보 2000년 12월 26일)

옛 사진을 보면 연대 상부에 방호벽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복원한 연대는 방호벽이 있는 형태이고 가운데에는 커다란 사각형 모양의 봉덕을 설치하였으며 남쪽으로 계단이 있다. 최근 복원하는 연대마다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어서 원래의 모습이 이런 형태인지는 의문이다.

 

 

 

 

 

 

 

 

 

(연대에 올라가 본 주변의 모습)

 

 

 

 

 

14. 감산리 호산망(이두어시망)

위치 ; 안덕면 감산리 1048번지 서쪽. 이두어시마을 서쪽 대흥사 남서쪽. 지리적 위치는 동경 126°22', 북위 33°15'에 해당한다. 올레길 옆에 있다.

대정현에 소속된 봉수이다. 감산리 월라봉(일명 伊斗峰 또는 래오름, 표고 201m, 비고 101m) 남쪽 해안 절벽 위에 있다. 박수기정이라 부르는 절벽의 서쪽 위에 해당한다. 이 오름의 남쪽으로부터 동남쪽의 완만한 사면에 넓은 평탄지가 있고 조그만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사람들은 이 지역을 '이두어시’(伊斗於時)라고 부른다. 오름 서쪽 사면 대흥사 남쪽(감산리 849번지)에는 망꾼들이 길어다 먹었다는 샘 '망한물(망한이물)이 있다.

봉수대 동쪽으로는 별로천연대와 군산, 남서쪽으로 형제도와 송악산, 서쪽으로는 산방산과 산방연대가 있다. 남서쪽으로 저별봉수(6.8㎞), 동쪽으로는 구산봉수(10.7㎞)와 교신하였다.

봉수대는 일반적으로 오름 정상부에 흙을 쌓아 주위 지형보다 높게 만드는데 이 봉수대는 월라봉 정상에 설치하지 않고 해안 절벽 가까운 곳에 설치했다. 정상에 설치하면 군산 때문에 구산봉수와의 교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해안에 가까이 있어서 해안감시가 쉽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반경 9.5m의 둥근 평면에 돌을 쌓아 만들었었다. 흙으로 쌓은 다른 봉수대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다. 사용한 돌은 자연석으로 구멍이 없고 판상으로 깨어지는 조면암 종류로 보이며, 크기는 가로×세로×높이(㎝)가 37×86×63, 45×158×63, 39×91×56 등이다. 잔돌끼움을 한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축조되었었으며 높이는 외벽 1.9m, 내벽 1.1m이고 폭은 2.1m 정도이다.(1996 제주의 방어유적 174~175쪽) 지금은 봉수대 안쪽까지 잡목에 덮여 있긴 하나 모양을 대체로 확인할 수는 있는 정도이다. 가운데 부분이 움푹 내려앉았다.

(한밭마을 들판을 가로 지른 후 올레길을 걸어 봉수대로 갑니다.

 

 

 

 

 

 

 

가까이에 있는 번네마을(지금의 화순 바닷가 마을) 유반석으로 왔습니다.

 

마주 보이는 사간다리(사근다리)위에 있는 무반석과 얽힌 스토리가 있습니다만

생략합니다)

 

(돌위에 참나리꽃이 피었는데 않보이시지요? 아쉽습니다)

 

 

 

 

15. 하예동 당포연대

위치 ; 서귀포시 하예동 1729번지 연디왓. 하예포구 동쪽 동

대정현 직할 연대였다. 연대 서쪽으로는 마라도, 가파도, 산방산, 송악산 등이 훤히 보이고 동쪽으로는 별로천연대 및 대포연대와 그 해안 일대를 조망할 수 있어서 연대로서는 매우 적절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연대의 크기는 8.6m×9.1m×4m이며, 서쪽으로는 산방연대(5.7km), 동쪽으로는 별로천연대(2.3km)와 교신하였다.

제주삼읍봉수연대급장졸총록(濟州三邑烽燧煙臺及將卒摠錄)에 보면 '唐浦煙臺 東應別老川 西應山房 別將六人 直軍十二名'(당포연대는 동쪽으로는 별노천연대와 교신하고 서쪽으로는 산방연대와 교신하였으며, 별장 6인과 직군 12명이 근무하였다.)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연대미상의 규장각 소장본인 제주도읍지에는 '唐浦煙臺在縣東二十里東應別老西應山房'(당포연대는 대정현 동쪽 20리에 있으며 동으로 별로천 서로는 산방)이라고 되어 있다.

이 연대 위치의 소유는 '마을회'로 등기되어 있다.(서귀포신문 970404) 기단부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에 복원하였다. 제주도내 연대 중에서 기초석이 가장 크며, 밑에 굽돌이 놓여져 있는 특징이 있다. 연대 위로 오르는 계단을 왼쪽에 치우쳐 바깥으로 길게 축조하였으며 상부에는 방호벽을 설치하였다.

당포연대의 서쪽에 당집이 새로 생겼다. 이 당은 일뤠당으로 난드르당밧할망당에 다니던 하예리 마을 단골들이 바다문제로 다툼이 생기면서 가지 갈라져 나와 당집을 마련했다고 한다.

 

 

 

 

 

 

 

 

 

 

(예래동을 벋어 나면서 진황등대를 멀리서 한 컷찍고

 

예래동을 벋어나며 진황등대를 찍고

용문덕을 두번 찍습니다.

진황등대와 용문덕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써서 생략합니다)

 

 

 

16. 색달동 별로천연대(답사불가)

위치 ; 색달동 1795번지. 성천포 서쪽 연디동산 또는 연디루. 중문관광단지 안 골프장 음식점 자리. 갯깍 주상절리의 위쯤으로 보인다.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이다. 성천포 서쪽 ‘연디동산’ 또는 ‘연디루’라고 부르는 곳에 연대가 있다. 연대의 동쪽으로는 강정동 앞 해안, 서쪽으로는 대평리 앞 해안까지 바라볼 수 있어 입지 조건이 매우 좋다. 동쪽으로는 대포연대(2.6㎞), 서쪽으로는 당포연대(2.3㎞)와 교신했다.

지금은 중문관광단지 안에 중문골프클럽이 조성되면서 연대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육모정’이라는 음식점이 들어서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7. 대포동 대포연대

위치 ; 서귀포시 대포동 2506번지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이다. 대포연대는 주위보다 밖으로 돌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해안과 접한 높이 25m의 벼랑 위에 축조되어 있어서 강정동 앞 해안에서 대평리 앞 해안까지 시야를 가릴 것이 없어 연대의 위치로는 매우 적합한 곳이다.

연대 동쪽으로는 4.5km에 있는 마희천연대(亇希川煙臺) 서쪽으로 2.6km 떨어진 별로천연대(別老川煙臺)와 교신했다. 바다쪽의 한쪽 면만 높이 1.5m, 길이 7m 정도 남아 있었으나 1999년 복원하였다. 남아 있던 돌의 크기는 57×57×105, 40×90×107, 36×44×50(높이×폭×깊이, 단위 cm)로 길이로 쌓지 않고 모로 쌓아서 구조적으로 안전하도록 고려하였다.(제주방어유적 242쪽) 대포연대는 올라가는 계단이 오른쪽에 치우여 있으며, 위에 올라가 보면 직사각형이 아니라 비뚜름하게 마름모꼴처럼 되어 있다.

 

 

 

 

 

 

 

 

 

 

 

18. 강정동 환해장성①(답사생략)

위치 ; 서귀포시 강정동 썩은섬을 바라보는 바닷가. 너븐물 해안

강정동 환해장성은 바닷가 올레길 옆으로 50m 정도 남아 있다. 바깥쪽으로는 심하게 무너져 성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겉은 큰 돌로 쌓고 그 안에 작은 돌들을 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작은 자갈들이 많이 드러나 있다. 안쪽으로는 거의 수직벽을 이루고 있으나 높이는 1m를 조금 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19. 강정동 환해장성②(답사생략)

위치 ; 서귀포시 강정동 강정포구 앞

강정동 강정포구 앞에 약간의 성이 남아 있다. 많이 변형되었기 때문에 환해장성이라고 강력히 주장하기 어려울 정도이나, 강정동 도대불 관련하여 환해장성의 끝부분에 도대불이 있었다는 증언을 역으로 생각하면 이곳이 환해장성이라고 추정해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성을 쌓은 돌은 바다에서 닳은 둥글둥글한 돌들이 많이 섞여 있다. 폭은 1.2m 정도이며 높이는 1.5m 정도, 길이는 중간에 끊긴 부분까지 합치면 약 50m 정도이다.

 

20. 강정동 마희천연대터(답사생략)

위치 ; 서귀포시 강정동 4695번지 말질로282.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로 일명 색수(塞水烟臺)라고도 한다. 해안과 인접하여 '새별'포구가 있고, 이곳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연대가 있다. 주변보다 지형이 높아 동쪽으로 삼매봉(三梅峰), 서쪽으로 대포동 앞 해안까지를 바라볼 수 있다. 마희천연대는 동쪽으로 변수연대(邊水烟臺 1.8㎞), 서쪽으로는 대포연대(大浦烟臺 4.5㎞)와 교신하였다. 지금은 연대의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며 주택이 들어서 있다.

 

21. 강정동 변수연대터(답사생략)

위치 ;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대정.정의읍지에는【변수연대는 정의현 동쪽 50리 지점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정의현 연동연대와 교신을 하였고, 서쪽으로는 마희연대와 교신을 하였다.】또한 제주삼읍봉수연대급장졸총록(濟州三邑烽燧烟臺及將卒摠錄)에 보면 【변수연대는 동쪽으로는 정의현의 연동연대와 서쪽으로는 대정현 마희천연대와 교신을 하였으며, 별장(別將) 6명과 직군(直軍) 12명이 근무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보면 지난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새수촌(塞水村)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이 '새수'라는 의미 또한 '변수'와 마찬가지로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변(邊)과 새(塞)는 지역의 한쪽을 가리키는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이곳 지명은 처음에는 '새수'라 표기하다가 후일 '변수'로 표기를 달리하지 않았나 싶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새수'라 표기되어 있으나, 1600년대부터는 대부분 자료에 '변수'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물'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물연대'가 있는 동쪽 지경을 '물'이라 하며, 길 북쪽은 '웃물', 길 아래쪽을 '알물'이라 한다.(큐비여행)

대정현에 소속된 연대이다. 해안과는 300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지형이 주위보다 높고 주변에 비해 돌출된 곳이라 동쪽으로 법환동 앞 해안, 서쪽으로는 강정동 앞 해안까지 볼 수 있다. 지금은 연대 흔적은 없고 주위에서 공사를 하면서 운반해 온 석재들이 연대 터에 놓여 있다.(제주의 방어유적)

 

22. 서호동 연동연대

위치 ; 서귀포시 서호동 73번지.

서귀포시에서 서쪽으로 가다가 법환동으로 가는 길목에 곧 들어서면 화이트캐슬 옆에서 바다 쪽으로 난 좁은 농로가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바닷가 언덕 위에 외딴 별장 같은 집이 있고 그 동쪽에 연대가 있다. 길이 매우 좁아 운전할 때 조심해야 한다. 바다에서 100m 떨어진 ‘망밧’이라 불리우는 감귤원 내에 있다.

연동연대는 정의현 서귀진 소속이었으며, 별장 6명과 봉군 12명이 교대로 근무하였다. 동쪽으로는 삼매양망(봉수대, 직선거리 2.1Km), 서쪽으로는 변수연대(직선거리l 2.9Km)와 교신하였다. 2001년 2월 17일 복원하였는데 가로 840cm, 세로 840cm, 높이 360cm이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이나 제주도 마을홈페이지의 기록을 보면 하부 직경 950cm, 상부 직경 630cm, 높이 240cm의 원형에 가까운 평면 형태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복원된 연동연대는 모서리의 각이 너무 반듯하여 옛 연대의 모습을 닮지는 않았다.

(자귀꽃에 홀려 들뜬 마음

생각없이 연대에 올라 사방을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윗부분 한구석이 파손되어 있고

윗부분을 두른 방호벽도 꽤 많이 벌어져 곧 떨어질 듯 합니다.

내려와 차분히 둘러보니....

 네귀퉁이 아래부분의 큰돌을 누군가가 빠루 등을 이용하여 일부러 빼어냈습니다.)

 

 

 

 

 

 

 

 

 

 

 

 

 

 

 

 

 

 

 

 

 

(황망한 마음 달래려 주변을 보고 내려와서

 

 

 

서천꽃밭 마음다스림꽃을 보고 진정을 얻습니다.)

 

 

 

 

23. 하원동 구산망

위치 ; 서귀포시 월평동 해안에서 북쪽으로 1.9㎞ 떨어진 해발 170m의 구산봉(개오름) 정상

 대정현에 소속된 봉수대이다. 지리적 위치는 동경 126°27′ 북위 34°15′에 해당한다. 봉수대 동쪽으로는 삼매봉, 남동쪽으로는 범섬과 문섬 그리고 서쪽으로는 성천봉과 군산이 있다. 또한 북쪽 800m 덜어진 곳에는 고려시대에 지었던 법화사지가 있다.

구산망은 동쪽의 삼매양망(8.9㎞)과 서쪽의 호산망(10.7㎞) 사이에 위치한다. 구산망은 중심부에서 반경 4.7m 크기의 토석혼축으로 바다쪽을 향하여 반(半) 정도만 돌아가면서 둥글게 둑을 쌓고, 한 단을 높게 하여 반경 2.7m(둘레 8.5m), 높이 1.8m의 작은 봉우리 모양이 되게 둔덕을 만들어 토축했다. 둔덕과 둔덕 사이에는 0.8m 정도 깊이로 파인 고랑이 있으며 여기에 잔돌들이 깔려 있다. 가시덤불과 잡목이 우거져 이런 상황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동쪽에는 SK텔레콤 기지국이 들어서 있다. 가뭄이 심할 때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제주의 방어유적 176쪽, 서귀포시 문화유적분포지도 126쪽)

(오름정상이긴 합니다만

통신중개시설이 가로 막아 접근이 어렵습니다.

안내자가 개척한 나무숲통로를 이용

옛 시설에 가봅니다만

잡풀에 뒤덮인 해발고도표지판 아래로

아랫부분에 쌓여졌을 기단의 흔적 만이 보입니다.)

 

 

 

 

 

 

 

 

 

 

 

 

 

(여기가 개오름이라는데

저멀리 범이 보이니

쫄아서 어디 기한번 펴보겠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위축되고 제 기능을 못하는구나하는 ..

엉뚱한 생각을 하며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에서 내려옵니다.)

 

(오늘의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