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부 관방시설 1
2011년 4월 10일 문화유산답사회 제 207차 정기답사간 찍은 사진
당일 안내자 고영철님 자료에 사진만 추가함.
제주도는 북쪽으로는 한반도를 비롯해서
서쪽으로 중국, 동쪽으로 일본, 남쪽으로는 유구열도로 둘러싸인 동중국 해상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주변 여러 나라로부터 침입을 빈번하게 받았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들이 땔감과 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제주 해안 방어의 중요한 목적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는 데 있었다.
고려 충렬왕28년(1302)에 봉수 설치가 시작됐고,
조선시대에는 세종19년(1437)에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韓承舜) 목사의 건의에 의하여
방어체제를 정비하여 방호소(防護所) 12개소와 수전소(水戰所) 10개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제주에는 제주성․정의성․대정성 3성만이 축성되어 있었고,
봉수시설도 22개에 불과했었다.
조선조 제주도의 방어체제로 알려진 ‘3성 9진 25봉수 38연대’는 그 이후에 차례차례로 정비되어 완성된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방어시설은 성곽․봉수․연대이다.
이도1동 제주성남문(濟州城南門)터
정원루 표지석.
〈이곳은 제주성 남문이 있었던 터다.
1512년 중종 7년 목사 김석철이 성을 개축하면서 이곳에 문루를 세워 정원루라고 하였다.
1705년(숙종31년) 1780년(정조4) 등 여러 차례 중수되어 3대 성문 가운데 가장 오래 남아 있었으나
1918년에 이르러 헐리었다.〉
건입동 제주성동문(濟州城東門)터
동문의 문루를 제중루(濟衆樓) 나중에는 연상루(延祥樓)라 하였다.
『증보탐라지』에 의하면 “연상루의 옛 이름은 제중루니 읍성의 동성문이다.
1666년 병오 현종 7년에 목사 홍우량(洪宇亮)이 증수하였고,
1808년 무진 순조 8년 목사 한정운(韓鼎運)이 증수하였다.
1856년 병진 철종 7년에 목사 채동건(蔡東健)이 다시 증수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집필자 황경수)
동문로9길 입구에 돌할으방이 세워져 있던 자리가 남아 있다.
1963년에 이루어진 현용준의 조사에 의하면,
원 위치인 구 제주성 동문 앞의 돌하르방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현용준의 조사에 따라 당시의 위치를 보면 성문이 있었던 자리 바깥으로 길이 S자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고부라진 두 개의 굽이에 각각 2조씩 8기가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성벽은 남쪽으로는 동문파출소 쪽으로 북쪽으로는 기상청 쪽으로 연결되었었다.
북성은 기상대에서 내려오는 계단 바깥 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녕리 입산망(笠山望)
별방진에 소속된 봉수이다.
입산봉 동쪽으로는 왕가봉수와 지미망, 서쪽으로는 묘산봉과 서우봉이 있다.
주위 지형은 동쪽으로 낮은 지대가 펼쳐져 있어 멀리 떨어진 다른 봉수대와 교신하기에 좋은 위치이다.
왕가봉수와 7.1Km, 서산봉수와 8.1Km의 직선거리를 두고 있다.(제주의 방어유적 162쪽)
지금은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에 묘가 들어서 있어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한동리 왕가망(往可望)
왕개망(왕가망,往可望)은 봉수대를 뜻한다.
往可熢遂의 흔적은 지금은 뚜렷하지는 않으나 일부가 남아 있다.
지형적인 특성상 다른 봉수대와는 형태가 다르다.
즉 다른 봉수대는 오름의 정상에 봉덕을 만들고 이중둑을 쌓는 형태인데 비하여,
往可望은 오름 위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 모래로 이루어진 동산 위에 설치하였고
모래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둘레에 돌을 쌓은 것이다.
하부직경 11m, 상부직경 3m, 높이 3.5m이다.
이런 형태의 봉수대 축조 방식은 이곳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봉수대 동쪽으로는 지미봉, 서쪽으로는 입산봉이 있다.
지형이 너무 낮아 봉수대를 축조하기에는 부적당한 입지 조건이지만,
입산봉수와 지미봉수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중간 역할을 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제주의 방어유적 164쪽)
2011년 3월 주변 경작지를 평탄하게 하는 작업에 의해서 봉수대 주변이 깎여 버렸고
표석이 엎어진 채 방치되어 있다.
하도리 환해장성(環海長城)
하도리 환해장성은 하도리 토끼섬 서쪽 해안도로가 세화리 쪽으로 연결되기 시작하는 지점에 있다.
길이는 100여m로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고,
형태면에서도 전형적인 장성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밭담을 조금 높고 두껍게 쌓은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여기저기 무너진 곳이 있어서 높낮이도 일정치 않다.
하도리 별방진성(別防鎭城)
중종5년(1510) 목사 장림이 쌓았다.
왜선의 정박지가 우도였기 때문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김녕의 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별방이라 하였다.
성은 하도리 마을을 동서(東西)로 길게 타원형으로 둘러싸는 모양으로 되어 있다.
둘레 960m의 성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남고북저(南高北底)가 되고 있다.
둘레 2890자, 높이 7자, 동 서 남 세 곳에 문(초루)이 있었다.
지금도 ‘동문’, ‘서문’이라는 명칭이 남아 있다.
성 안에는 샘이 2곳 있었으나 해변이므로 물맛이 짜다.
지금은 성의 북동쪽 바깥에 ‘드렁물’이 남아 있다.
북동쪽 성벽은 성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 축조되었다.
다른 진보다 병력이 갑절이나 되었다.
진의 크기도 명월진 다음으로 컸다.
성안에 민가가 있는 읍성의 구실을 겸하도록 되어 있었고
무기와 식량 등도 많이 저장하였기 때문에 서쪽의 명월진을 서창(西倉),
이곳을 동창(東倉)이라 불렀다고 한다.
옹성터
성의 보존 상태를 보면 동문지는 흔적이 없으나 옹성터로 추정되는 밭이 남아 있고,
서문지는 길이 되었고 옹성 터는 마을 스피커와 공덕비 등이 세워진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문지에는 옹성만이 훼손이 심한 상태로 남아 있고 문루는 남아 있지 않다
남문지의 동쪽은 1995년, 2007년 2차례에 걸쳐 일부를 복원하였는데
2단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낮은 단은 회곽도이다.
그러나 회곽도가 너무 낮아 회곽도에서 밖을 볼 수 없게 복원되어 있다.
남문 서쪽에서 서문까지는 복원하지 않은 성벽이 무너져가는 채로 남아 있다.
성벽의 남쪽 바깥은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 모양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해자(垓字)를 설치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별방진의 북쪽 치성 위에는 1969년 설치한 도대불이 있었으나,
지금은 멸실되었고 도대불이 있었던 위치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해안 도로가 개설되며 포구가 완전히 매립되어 사라지고,
별방진의 모습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으며,
하도리 도대불은 별방진 복원 당시 해체시켜 완전히 사라졌다.
차이코프스키 / 우울한 세레나데 B minor, Op.26 - 오프라 하노이